음악의 힘
음악이 주는 힘은 위대하다. 우리 생활에 음악이 없다면 이는 마치 지옥과도 같은 환경일 것이다. 음악이 있어야 인생이 즐겁고 희망이 생긴다. 한마디로 음악은 상대방과의 끊임없는 소통과정이다. 원활한 소통이 있는 곳에 이해와 사랑이 살아 움직인다.
그리스어의 「무시케(Mousikē)」는 ‘무사(Mousa)여신의 기술(ikē)’이란 뜻이다. 「무사(Mousa)」는 영어로 「뮤즈(Muse)」를 뜻한다. 이 여신이 우아한 자태로 신비하고 흥겨운 음악과 춤을 어울려 표현한 기술이 바로 뮤직(music)이다.
바로 이 「무시케」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낳았다고 한다. 우리에게 이들 신화의 내용을 문자의 기록으로 전해준 시인들이 스스로 「무사」의 대변인을 자처해 「무사」여신들의 신비로운 언어를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해 준 것이다. 「무사」여신들이 시인에 빙의되어 입을 빌어 노래했는데 이들 시인의 대표자가 바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이다.
당시 문자가 없었던 시절에 이들 시인들은 인간들이 가진 정보를 운율에 따라 노래에 담아냈던 것이다. 이들 정보를 담아내는 구술의 기술이 바로 「무시케」였는데 악기 연주와 노래, 서사시, 서정시, 희극과 비극, 연애 시와 역사와 천문학 등도 「무시케」의 범주에 속했던 것이다. 「제우스」는 신들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나 노래로 남기고 싶어 했다. 문자가 없으니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에 「제우스」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Mnemosyne)」와의 사이에서 아홉 자매를 낳았는데 이들이 바로 「무사」 여신들이다. 맏이 무사인 「클레이오(Kleio)」는 역사 부문을 맡아 영웅시와 서사시를 담당한다. 희극의 무사인 「탈레이아(Thaleia)」, 연애시의 무사인 「에라토(Eratō)」, 「에우테르페(Euterpē)」는 서정시를, 「폴뤼휨니아(Poluhumnia)」는 무용과 판토마임(무언극)을 담당하였다. 「칼리오페(Kalliopē)」는 현악과 서사시의 무사이고, 「테릅시코레(Terpsikhorē)」는 춤과 합창을 주관한다. 천문학을 관장하는 「우라니아(Urania)」, 비극의 여신인 「멜포메네(Melpomenē)」가 그들이다.
그들은 자주 올륌포스 산에 올라가 신들의 잔치에서 시와 음악으로 흥을 돋우었다. 그들은 천상의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아름다운 음악을 베풀었다. 이들 「무사」 여신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들 이었다.
이들 「무사」여신들이 남긴 몇 가지 사례는 익히 잘 알려 진 이야기다.
음악의 신 「아폴론」이 막내인 「칼리오페」를 사랑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천하제일의 명가수라고 불리는 「오르페우스」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그가 사랑한 「에우뤼디케」가 독사에 물려 죽자 지하에 있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심금을 울리는 수금 반주에 맞추어 애간장 저미는 노래로 탄원하여 갖은 어려움을 이기고 그녀를 구한다. 하지만 저승세계의 왕인 「하데스」와 약속한 바 지하세계를 벗어날 때 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어겨 끝내 그녀는 다시 하계로 돌아간다. 이후 그를 사모하는 트라키아의 처녀들에게 눈길조차 주지를 않자 그 처녀들은 「오르페우스」를 죽이고 유령이 된 그는 지하세계로 가서 다시 「에우뤼디케」를 만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기억의 힘에 대한 인정이자 망각이 준 상처였다. 「오르페우스」를 통해 기억은 삶의 동의어가 되었고, 망각은 죽음의 동의어가 된 것이다.
「테릅시코레(Terpsikhorē)」는 강의 신인 「아켈로이오스(Akhelōїos)」와 사이에 「세이렌(Seirēn)」을 낳았다. 「세이렌은 처녀의 얼굴에 반인반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엄마를 닮아 노래를 잘했다. 특히 뱃사람들을 현혹하는 노래를 불러 바다로 뛰어들게 만든 뒤, 잡아먹는 식인조였다. 호기심이 많았던 「오뒷세우스」는 자신을 돛대에 묶도록 하고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커피 전문점인 스타벅스의 상징 로고가 바로 「세이렌」으로 1호점인 시애틀의 매장에는 3명의 문양이 있는데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들 아홉 명의 「무사」여신들이 「아폴론」 신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춤을 춰서 좌중의 흥을 돋우는 그림이 있다. 바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라파엘로(Rafflo Sanzio)」의 『파르나소스』이다. 「라파엘로」는 교황의 「서명의 방」의 4면을 장식하는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성체논의』,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 『신학적 덕』이 그 결과물이다.
『파르나소스』 그림의 중앙에는 비올라를 연주하는 음악의 신 「아폴론」을 아홉 명의 「무사」여신들이 에워싸고 있다. 또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인 그리스의 「호메로스」와 『아이네이스』의 작가인 로마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 『신곡』의 저자인 이탈리아의 시인인 「단테」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왼쪽 하단부에 한 손에는 악기를, 한 손에는 작은 두루마리를 든 한 여성이 앉아 있는데 바로 레스보스의 「사포(Sapphō)」이다. 그리스 최초의 여성 시인으로 영웅 서사시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사포(Sapphō)」는 기원전 7세기에 활약하던 그리스의 여류시인이다. 레스보스 섬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노래했으며, 가장 깊게 천착한 주제는 사랑이다. 「사포」는 구어체를 사용하여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시어를 선택하여 표현함으로써 강력한 호소력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녀는 고전 시대의 위대한 서정시인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일찍이 「플라톤」은 그녀가 열 번째 뮤즈, 시의 여신이라고 찬사를 하였다. 「사포」의 시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대부분 사라졌고 단편적인 구절들만이 전해 오고 있다.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아프로디테 찬가』 뿐이다.
화려한 권좌에 앉으신 불멸의 아프로디테여,
꾀가 많은 제우스의 따님이여, 간청하오니
저의 영혼이 고통과 시련으로 소멸치 않도록
주인이여, 돌보소서. (부분)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사포」에 견줄 수 있는 여류시인이 존재한다. 과거 봉건시절에 여성의 이름은 중시하지 않아 후대에 그 이름을 남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풍파를 이겨내고 시 문학사에 굳건한 여성의 이름을 후대에 전하고 있는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 바로 그 사람이다.
「허균」의 6살 위 누나로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이다. 그녀는 단아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 난초가 가지는 고상하고도 단아한 향취를 좋아했다. 또한 온 천지를 잠시나마 하얗게 덮어 더러운 현실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눈을 좋아하여 난설(蘭雪)이라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 가운에 자와 본명이 알려진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조선 시대 여류 천재 시인이다. 당시에는 여자가 글을 깨우쳐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허엽(許曄, 1517-1580)」은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다. 그녀는 문장가문에서 성장해 어릴 때에 오빠 봉(許篈, 1551-1588)과 동생 균(許筠, 1569-1618) 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12살이 손위인 큰 오빠 「허봉」은 중국에 오가며 구한 책을 여동생에게 주었다. 그리고 서얼 출신으로 당시(唐詩)에 뛰어났던 「손곡(蓀谷), 이달(李達)」로 하여금 여동생을 가르치게 하였다.
15세에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나, 남편은 아내의 학문과 문장력에 열등감을 느껴 가정을 소홀히 하였다.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시를 쓰며 지친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그녀의 시는 불평등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있다. 가난한 서민과 억압받는 여성의 노동 등에 대한 시를 다수 남겼다. 연이어 딸과 아들이 병으로 죽고, 26세에 정신적 지주였던 큰 오빠인 「허봉」마저 객사하자,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시를 쓰고 27세에 사망하면서 모든 자신의 시를 태워달라고 유언하였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묘비에는 아들과 딸을 여의고서 쓴 곡자(哭子)라는 시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있다. 곁에는 조그만 두 자녀의 무덤이 있는데 자식 잃은 엄마의 고통이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 뒷면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다)이 새겨져 있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 찬 달 아래에 ...
「허균」은 "형님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시로 짓고 죽더니 누님도 자신의 꿈을 시로 짓고 죽었다."고 애통해했다. 1590년 그녀의 사망 이듬해에 「허균」이 기억을 되살려 『난설헌집』 필사본을 만들었다. 이후 중국의 사신인 「오명제(吳明濟)」가 중국에서 조선시선(朝鮮詩選)을 발간했고, 「주지번(朱之蕃)」 등이 오면 그녀의 시를 추가로 구해다가 추가하였다. 이래서 자칫 당시 우리 풍토에서는 여성을 비하하고 무시하여 영원히 묻힐 뻔 했던 그녀의 시가 오늘 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이처럼 세계에 내세워도 자랑스러운 여류 시인의 존재는 우리가 문화강국을 지향해도 손색이 없다는 생생한 증거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교육을 시킨 부친의 뒷받침이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타고난 탁월한 자질과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외국의 유명한 예술가를 보면 하나같이 역사와 신화 그리고 성경과 문학에 대한 폭 넓은 이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정의 교육과 함께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문화의 힘을 느낄 수가 있다.
우리 옛 어른들도 소위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족 간에도 음악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은 평소 서로 간에 응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충분한 대화를 하라는 뜻 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났던 선배님으로부터 좋은 소통방법을 배웠다. 두 남매가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대학에 봉직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본인이 읽은 명문장을 따뜻한 마음과 함께 보내면 자녀 역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구구절절하게 답한다. 또한 손자들에게 한글 교육을 위해 끊임없이 메모를 하고 있는데 이미 여러 권을 채웠다고 하였다.
역시 이런 문화의 저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 현재 시점에서 이를 소홀히 하면 후대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문화예술에 대한 대대적인 부흥을 위한 거국적인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특히 가정에서부터 음악적인 소통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아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기억과 망각의 경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을 생각해 볼 일이다.
(2023.10.20.작성/10.23.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