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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유래.
서울은 보통 서라벌에서 유래하였다고 알고 있다.
서라벌>셔블>서울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통일주체가 고려인데 신라의 수도 금성 이전의 서라벌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된다.
국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셔블은 고려시대부터 있었고 조선시대 용비어천가 제18장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셔블(서울)에서 ㅂ은 순경음 비읍[ㅸ]이며, 언문 창제 초기 순경음 비읍[ㅸ]은
ㅎ(여린히읏),ㆆ(여린이응)에 가까운 비읍이었다.
그래서 서울은 언문 창제 초기에 셔을(흘)을 셔블로 썼던 것이다.
정상적인 언어 진화 과정이라면 셔블ㅅ>셔흘>셔을>서을>서울로 진화했어야만 하였다.
반도백제 초기 한성백제는 개성이다.
고구려 고국원왕 사유가 황해도 안악을 점령하고 안악궁을 건설하며 남평양이라 칭한다.
백제가 한강유역으로 밀려나고 동성왕 때 웅진 공주백제로 수도를 옮겼다.
개성 한성파의 시기와 질투는 극에 달하여 결국 동성왕이 실크로드 문물의 최종 도착지인 하서시랑이자,
대륙 백제 진평 2군 (산서성 진성시, 고평시)에 매진하며 고구려와 싸워 물리치고
양나라 황제 무제로부터 백제 제군사 호동이 교위 진동대장군 칭호를 받는다.
그후 반도를 살피러 들어왔다가 온조계 한성파 백가의 난으로 제거되고 만다.
백제, 고구려 멸망 후 남평양의 고구려인들이 해주, 안악에서 개성으로 남하하여 살게 된다.
왕건은 개성 송도에서 상인으로 성장한 부친 왕융과 함께 고려를 개창한다.
개성은 궁예때 송악에서 왕건에 이르러 송도로 개정되고, 정종 때 송도에서 개경으로 변경된다.
감숙성 평양시 고원지방과 고구원 지방에 개마고원[蓋馬高原]이 있었고,
개마고원에서 나는 금을 "개금"이라 하였다.
실크로드를 상실하자 개마고원이 평안도, 함경도 개마고원 지방으로 이주해오며,
이들이 고국원왕 때 남하하여 해주, 안악에 살다가,고구려 멸망 후 경기 개성[開城]으로 남하하고
같은 곳을 피하기 위해 개[蓋]를 버리고 새로운 개[開]를 취하여 개성[開城]으로 불리운다.
[개[蓋/덮을개]를 전혀 다른 한자를 취해 새로운 개[開/고칠개]로 취했다는 것은
자주 옮겨다니는 일이 지쳐서 더이상 다시는 옮겨다니지 않고 무슨일이 있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붙박이로 살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는 뜻임].
현재의 서울은 고려시대에 남경으로 불리웠다.
경주는 동경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 내내 동경 유수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원래 유수란 의미는 죄인들을 관리하는 지역에 유수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곳을 말한다.
신라가 고려에 항거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의미가 있었다.
신라파는 고려 인종 때 공예왕후(장흥임씨)의 등장으로 김부식 등이 출사하며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후백제의 견훤(상주)은 고려로 귀부하여 왕건과 함께 광주의 신검군대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았다.
고(구)려 광개토 때 요녕성 조양, 심양 낙랑국을 점령하고 하북성 북경 동부지방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백잔, 이잔, 가야, 왜를 동만주, 한반도로 추격하면서
한반도 평양에 진을 설치하는데, 속민으로 들어왔던 낙랑인, 전연 망인, 북경의 계나라 망인,
동예인, 말갈인, 동부여인, 갈사부여인, 남옥저인 등을 남겨놓고 하북성 동부지방을 관할하는
유주자사를 유수로 파견하여 치도한다.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평양에 진을 설치하여 그곳의 책임자로
하북성의 유주자사를 한반도 평양으로 보내 속민으로 들어온 죄인들을 관리하는 유수(幽囚)로
유주자사를 파견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유수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도 고구려의 진출과 팽창방향을 확증하여 정확히 입증하고
끄집어 낼 수가 있다.
[집안시 통구현 압록강 전투에서 백잔, 이잔, 가야, 왜군에 의해 광개토가 전사하여
실크로드 물류 거래 및 소비민족의 이동에 따라 동만주와 한반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다.
유주자사는 하북성 서남부 북평지방에서 북위가 내세운 후연, 북연, 서연에 의해 침략당해
하북성 서부지방과 북평지방의 유주를 북위의 속국에 빼앗기자, 고구려는 전략을 바꿔
발해만 낙랑국을 점령하고 후일 북발해만 요녕성 조양, 심양으로 옮겨간 낙랑국(후동진국)을 다시 차지하며
발해만의 낙랑국을 기반으로 하북성 동부지역과 북경 동부지방까지 차지하여 북경을 북위와 동서로
양분하며, 실크로드 물류 거래 및 소비민족 이동에 따라 한반도로 진출한다.
고구려 속민으로 들어온 각 제국인을 관리하는 지역에 진(鎭)을 설치하고 평양으로 명명하며
유수(幽囚)로 유주자사(幽州刺使)를 파견했던 것이다.
유수(幽囚)가 왕건 고려시대 때까지 동경유수 등을 파견하여 죄인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직책으로
사용되다가 고려 중후기 안정화되어가자, 무기한 죄인지역으로 둘수가 없어 유수(留守)로 변하게 되는 것임.
유수(留守)는 그지역에 대한 전권을 주고 왕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때까지 그곳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며
왕의 권한을 대신하여 독점적으로 치도하는 관리를 말한다.].
"셔블"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고려시대 때부터 불리워진 말인데,
왕이 있는 수도를 셔블ㅅ 이라고 일반 백성들이 불렀다.
평안남도 평양은 서경으로 불리웠다.
서경(西京)의 기원은 청해성 서령시(庶寧市)가 최초의 근원지이다.
서령시(庶寧市)는 광개토가 감숙성 평양시에서 초원의 길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청해성 서령시로 천도하면서 서쪽으로 천도해 갔다고 하여 서령시(西寧市)로 바꿔 부르게 된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는 西寧市를 西宁市로 약자로 바꾼다.
西寧市가 원래의 서경[西京]이다.
광개토 비문에 나오는 서령기업[庶寧其業]이란 말은 서령을 고(구)려의 수도(업/業)로 삼았다는 뜻이다.
감숙성 평양시에서 고구려가 멸망하고 평안남도 평양으로 들어온다.
이후 청해성 서령시에서도 평안남도 평양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서경인 서령시의 고구려 인구가 더 많아지자 서경이 되었던 것이다.
감숙성(甘肅省)은 함경도(咸鏡道)로 대체하여 부른다.
같은 지역을 피하기 위해 덜감(甘)이라는 한자를 덜감/다함(께)(咸)으로 고쳐 같은 지역을 피하게 된다.
고려가 건국되고 정종때 서경파 왕식렴 등에 의해 서경천도를 단행하려 한 적이 있었다.
송도 개경에서 고작 추운 지방인 평안남도 평양(서경)으로 천도하여 옮겨가려 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이다.
북방 영토를 넓히려고 서경 천도를 추진했다는 말은 그럴듯한 말이지만,
추운 곳으로 수도를 옮겨 스스로 자멸을 자초하는 짓을 하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
개경이나 평양이나 거리상도 그리멀지 않은 곳으로 개성의 경제적 상업적 요충지를 버리고
일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왕도를 다시 옮겨간다는 것은 상식밖의 결정이라는 이야기이다.
[고려 인종시기 때 묘청 등의 서경천도는 평안남도 평양이 맞음]
서경(西京)천도는 실크로드/초원의 길 중심지인 청해성 서령시((庶寧市>西寧市>西宁市)로 수도를
옮기려하였던 일대 대사건이었다.
쪼잔하게 개성에서 반도 평양으로 천도하려고 하였던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양/서경 북방에서 거란족이 강력하게 위협하고있었는데 죽을 자리로 천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왕건은 남쪽으로 궁예의 후고구려[차현이남 공주강 위에서 강원도 원주, 춘천, 철원, 강릉]와
후백제의 견훤을 견제하기 위해, 나주의 오다련 호족과 개성 인삼, 도기, 소금, 쌀 등 해상무역을 통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남북으로 포위된 국면을 돌파한다.
청해성 서령시는 감숙성과 함께 실크로드/초원의 길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을
가장 먼저 받을 수가 있는 요충지이다.
실크로드 물건을 사서 중원에 내다파는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득을 보기 위해서
청해성 서경 천도를 단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신강성, 감숙성은 건주여진(훗날의 생여진), 감숙 동부 내몽골 자치기는 거란이 장악하고 있었다가
란주여진 (훗날의 숙여진/금나라)에게 거란이 동만주(내몽골 동부, 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로 밀려나니
고려는 다시 거란을 피해 청해성 서령시 서경으로 천도를 단행하려 하였던 이유였다.
감숙성 돈황시(敦煌市)의 돈환(敦桓)왕은 실크로드 물류가 중원으로 들어가는 하서회랑을 장악하여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평생 7천명의 처녀와 동침하여, 카사노바 5천명의 여자보다도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여자를 품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왕이었다.
신강성, 감숙성 "비단길 루트"는 여진이 먹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해성 청구 루트인 "초원의 길"을 장악하자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 청해성 서령시 서경천도였던 것이다.
청구 루트는 사천성 성도(청두/청구), 중경, 보주로 이어져 귀주성, 호남성, 강서성, 절강성, 복건성,
강소성 등 남조로 순탄하게 초원의 길 물자를 공급하여 중계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한마디로 신강성, 감숙성 비단길 루트는 섬서성, 산서성,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요녕성으로 이어지는
북조 중계무역 중심지이고 초원의 길 루트는 남조를 독점하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초원의 길 루트는 험난해서 물동량이 적었지만 이것을 기회로 남조무역만이라도 독차지하자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서령시의 서경이 광개토 대왕 때 수도 서울이었기 때문에 셔블이라고 불리워진 것이었다.
서령시 울타리 안에 사는 곳이 수도였고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서령시 도성 울타리안으로 들어와 사는 고려인들에게만 실크로드/초원의 길 중계무역으로
얻은 이익을 가지고 경제적 혜택을 주기 위해 부른 이름이 "셔블ㅅ"이었던 것이다.
즉, 서령시 울타리안의 사람들을 가리켜 서울이라고 한말을 조선 용비어천가에서
셔블ㅅ 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청해성 서령시는 개경의 서북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서북"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이때의 의미는 "서토의 북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소수림왕 이전 전진의 부견이 보낸 순도가 불교를 전래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서령시 서경으로 불교가 전래된 곳을 셔블이라고 표기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서토의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가 되었다는 뜻인 셔블>셔불>서불>서울이 수도가 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는 불교 숭배국가였기 때문에 서토의 불교를 상징하는 셔블이 서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 진화과정을 보면 이 보다는 서령시 서경의 울타리안 도성을 뜻하는 말이
더욱 진실에 가깝다.
설마 감숙성, 청해성을 장악하고 있었던 전진의 부견이 보낸 순도가 경제적 기반도 없는
한반도 고구려 깡촌까지 찾아와 불교를 전래하고 갔다는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소설이라는 말이다.
고(구)려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래하고 고구려 동쪽에 있었던 북조의 모든 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동맹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부견은 모든 나라를 멸망시켜버리고
영가의 난을 일으키며 남조를 침공하여 천하통일 대업에 나선다.
전진(前秦)의 부견은 청해성 해서지방 출신으로 청해성 동부를 장악하고 백마저 추장으로 있다가
부건을 죽이고 전진을 세우며 동해왕으로 오르면서 스스로를 해동천왕이라 불렀다.
청해성 동부를 장악하고 서역을 평정하고돌아와 감숙성 평양시, 청해성 서령시에 있었던
고려 (이 당시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임)에 순도를 파견하여 불교를 전래하였던 것이다.
(감숙성 평양시 고원, 고구원, 청해성 서령시의 고려는 광개토 때 산서성 진성시 동이 구려국을 점령하고
장수왕때 비로서 고구려가 됨)
부견은 불교를 받아들이면 동맹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감숙성 완천(원천)의 서진(西秦),
산서성 진나라[西秦]대나라(훗날의 북위/내몽골 포두시~산서성 대동시),
전연(산서 동부 하북성 북경, 요녕성 서부장악)등 고려를 제외한 북조의 모든 나라를 멸망시키고
산서, 하남성 낙양에 있었던 서진(西晋/晉)의 사마염을 죽였으며, 남조 강소성 남경으로 달아나서
동진[東晉]을 세운 동생 사마예를 침공하였다가
강서성 예장지방의 환온, 환현가문(예장라씨,나주라씨, 금성라씨, 나씨의 선조)과
강소성 남경(난징)서북의 안휘성 사수지방에 살았던
사현, 사안형제[양하사씨/사탁씨/사택씨/사타씨-익산 금마 하한으로 들어옴/일부 여수, 사천 이주]의
8만 기마군에게 100만대군이 패하고 5호20국 시대를 개막시킨다.
신라 진흥왕의 팽창기때 여수, 사천의 사탁부가 신라영토로 들어가고 진지왕이 익산 금마 하한을 침공하자
사탁부계 진평(동진연합군의 후예)이 금성으로 들어가 진지왕(전진연합군의 후예/김춘추의 조부)을
3년만에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름.
-사마예의 후예, 사마혁, 사마덕종, 마지막 사마덕문 황제가문 일본 이주.
(부견이 서역을 평정하고 돌아와 가장 먼저 청해성 서령시 서경의 고(구)려에 순도를 파견한다)
용비어천가 제18장.
(廬山(여산) 役徒(역도)랄 일하샤 지바로 돌아오실ㅎ제
열희 마사말 하날히 달애시니
셔블ㅅ 使者(사자)랄 꺼리샤 바라날 건너실ㅎ제
二百戶(이백호)랄 어느 뉘 청하니.
여산의 일꾼을 잃으시어 집으로 돌아오실 때에
열사람의 마음을 하늘이 달래시니
서울(서경/서령울타리/서북)사자를 꺼리시어 바다를 건너실 때에
이백호를 어느 누가 청하니...(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200가구가 따라나섰다는 말)
부연설명.
여산은 한나라 고조 유방을 말하는 것으로
진시황이 장성과 무덤 축조를 하기 위해 전국 징발령을 내려 무덤 축조에 징발되었는데,
유방도 이때 여산에서 100명을 징발하고 무덤 축조하러 가던 길에 차츰 하나씩 모두 도망가고
마지막에 10명만 남게 되자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나라고 한다.
진시황은 무덤 축조를 하던 인력들은 모두 순장시키거나 죽여 무덤의 위치를 아는 자가 없도록
증거를 없애려 하였기 때문에 모두 도망쳤던 것이었다.
유방곁에 남은 10명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며 의리를 지키고
유방곁에 남아 훗날 항우와 함께 천하를 재편하게 되고 유방은 천하통일을 이루어 한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말을 빗대어서 유방이 모든 일꾼을 잃으시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열사람의 마음을 얻은 것을 하늘이 달랬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셔블ㅅ 使者(사자)랄 꺼리샤 바라날 건너실ㅎ제
二百戶(이백호)랄 어느 뉘 청하니.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목조)가 전주 완산주의 주현에 있던 관기를 두고 고위 관리와 다투다가
셔블(서령/서경울타리/서북/서울)에서 금부도사가 이안사를 잡으러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호족이었던 이안사가 200호를 거느리고 배를 타고 서해를 시작으로 남해, 동해를 돌아
강원 삼척에 정착하였으나, 관기를 두고 다투었던 완산주의 지방관이 삼척으로 발령받아 오자,
다시 함경남도 함주(함흥)로 달아나 이주한다.
이 사실을 모두 빼고 셔블ㅅ에서 이안사(목조)를 잡으러 오니 바다를 건너 달아나는데
200호가 스스로 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따라붙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호족이었기 때문에 가문의 노비들이 모두 따라나서는 상황을
유방에 비유하여 스스로 모두 충성을 바쳐 이안사를 모셨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안사가 명망이 있고 덕망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유방에 비유하고 있다.
원래 이안사가 170여 가구를 이끌고 삼척에 자리잡았다가 함흥[함주]으로 이주한 것인데,
200호라고 용비어천가에서 주장하였고, 관기를 두고 고위 관리와 다투다가 피하는 상황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뺀 것이다. (관기는 국가의 재산이라 탐내면 안되는 일이었음)
과장이 있다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나섰다는 사실과 30여 가구를 더늘려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역사적 사실은 제대로 표현하고 기술하였다.
중국은 서울을 수이(首尔)라고 표기하고 있다.
수이(首尔)는 최고의, 제일의, 최초의, 지도자, 우두머리, 수령, "처음으로 시작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국 스스로 한국에 대해 이렇게 환대하는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중국인들의 본심은 한국에 대해 상당한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의미로 붙인 듯하다.
[首尔]라는 말은 이명박 정권 때 서울시에서 지어 중국에 통보하여 쓰여지게 된 것이라고 함]
인조가 명을 지지하지 않고 후금/청을 지지하여 명나라를 청과함께 도모하였다면
현재 한국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었을지를 생각하면 암울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조에 대해 함부로 가장 어리석은 왕이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라는 말의 의미는
환국까지는 아니더라도 왕검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처음으로 문명을 시작한 나라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말이기도 하며,
한국에 대해 상당한 호의를 베풀고 있는 말이 수이(首尔)라는 말이다.
이(利)족(9환족)중에서 최고의 이족이 한국 동이족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尔(너이)는 원래 爾(너이)에서 온 것이고 동이족은 尔(너이)대신 爾를 사용하였다.
麗爾(려이)라고 하면 아주 아름답다는 뜻이며 고려인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爾(너이)라는 한자가 尔(너이)보다 더 오래된 고어(古語)이며 동이족이 사용하는 爾(너이)라는 한자를
중국 화하족들이 훗날 尔(너이)라고 따라보고 배운 한자이며, 어렵기 때문에
약자로 대신하여 쓰게 된 것이다.
수양광이 절강성에 갔다가 탈출한 백제 미녀 아희에게 빠져 우문사급, 우문화급 형제의 배신으로
죽임당하고 수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원래 보기드문 미녀를 보면 갑자기 충성하다가도 180도로 변해 배신을 한다.
그 증거로 우문사급, 화급형제가 자기도 황제가 되려고 수양광을 죽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다가
군 권력을 쥐고있었던 이밀에게 죽고 이세민(당 태종)은 이밀에게 려양(하남성 준현)원정을 보내면서,
그대로 따르는 지를 보고 이밀이 출병하자 후일을 기약한다는 것을 알고 이밀 혼자만 서안으로 불러들이자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거병했다가 도림(복숭아 숲)에서 당의 복병에 죽으면서 수나라가 멸망당한다).
실제로 감숙 동부와 내몽골 자치기 서남부 사이에는 이기산이 있으며, 파단 길림사막 지방으로 이어진다.
이기산에서 배달환국의 방계 제도요당 이기방훈이 섬서성 서안 서쪽 서안평으로 내려가 장경단을 세우고
bc2,350년경 요/당을 건국한다.
서안으로 천도한후 서안 동북 600리지점(산서성 영제시,운성시)으로 분가한 배달환국의 친계 왕검이
산서성 진성시의 마한 달지국을 점령하고 bc2333년에 삼한을 건국한다.
삼한은 훗날 은나라 무정왕의 침공을 물리치고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색불루(욕살 고등의아들)에 의해
bc1,285년 삼조선 체제로 전환되며, 마한 달지국을 차지하고 진조선으로 칭하자,
마한이 하남성 정주시 일대로 밀려났다가 bc366년 한반도로 들어오고 남은 세력이
훗날 한성백제의 기원이 된다.
흉노의 시조 색정(索靖)은 왕검의 아들 가륵(3대)으로부터 훗날의 북흉노가 되는
약수(弱水)흉노지역 (감숙성 돈황시,장액시,천수시지방)으로 보내지게 되는데,
악명이 아주 높아 삼한을 약탈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현재까지도 구전전승되어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 잔악하고 무자비한 오랑캐 흉노를 가리켜
"색정이 같은놈""삭정이 같은놈"이라고 저주해대던 말이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이어져 오고 있다.
(돈황시(敦煌市)의 돈환(敦桓)왕은 실크로드를 장악한 인물로 중원으로 들어가는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카바노바 5천여 명보다도 더 많은 7천명의 처녀들과 평생 잠자리를 하여
지구상 최고의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
한위조, 5호 20국, 위촉오, 5대 10국, 전진, 고구려, 북위, 백제, 북제, 북주, 여진, 거란, 몽골,
서진, 동진 등이 진나라 시대 때부터 이곳을 서로 먹으려고 각축전을 벌이다가
춘추 전국시대, 5호16국 시대, 5대10국 시대를 열게 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등짐지게, 마차를 이용하여 빨리 배달해야 이문이 많았기 때문에 중계무역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배달을 신속히 해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倍達(배달)의 민족이라는 것이 실크로드 중계무역을 빨리하여 독점하기 위해서 나온 말이다.
倍(곱등, 등질등, 더할등), 達(통할달)=등지개를 지고 빨리 배달하는 민족을 뜻하는 말이다.
하서주랑은 험난한 길이 많았기 때문에 마차로 운반하지 못하는 곳을 등지개로 지어날랐기 때문이다.
등지개를 지는 민족은 9환족과 동이족이 주류였으며 짐을 지고 이동하는 시간이 가장 빨랐다.)
索(찾을색, 구할소, 막을(동아줄)삭, 변방새)이다.
훗날 塞(막을색, 변방새)로 분리된다.
그래서 약수흉노(감숙성 흑하)를 소흉노(蘇匈奴)라고도 한다.
蘇(자소, 향할소)의 전신이 索이다.
약수흉노(弱水匈奴)는 소흉노(蘇匈奴)로 분화하여 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 3대 주요 종족을 구성한다.
그래서 훗날 한자로 표기하기를 소련연방(蘇聯聯邦)이라고 표기하였다.
흑하는 훗날 말갈, 거란, 여진 등이 당나라, 몽골, 명나라 등에 쫓겨 흑룡강성으로 달아나 흑룡강이 된다.
흑룡강성의 흑룡강은 용처럼 구비구비 휘돌아가면서 이어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며
물이 검지 않은데 붙은 이름이다.
감숙성 흑하의 물은 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며, 흑룡강성으로 달아나서 이전에 살던 흑하 이름을
용처럼 구불구불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을"은 고을을 뜻하는 말이고 "울"은 울타리, 즉 도성/수도 안에 사는 울타리/산성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고려는 고씨에서 나왔기 때문에 "고을"이라고 하였고,
"마을"은 마한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람이 모여사는 곳을 마을이라 한것이다.
고을이나 마을보다 훨씬 큰 산성이 있고 도성 울타리가 있는 수도는 "을"을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수도는 산성, 도성 울타리를 뜻하는 "울"을 사용한 것이다.
마한>마을>북부여 고(구)려 고을>서을[청해성 서령시 서경]>서울.
안휘성 서화 기자조선에서는 훗날 서국[徐國]이 세워졌다가 신라의 서불한우로국 중
서국[徐國]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국 수도 이름이 서라벌[徐羅伐]이었다.
한반도 서남단의 서국은 서도국[徐都國]으로 분화한 후 중동남단에서 이서국이 된 후,
왜로 들어가 이잔과 융합하여 북구주[기타큐슈]에서 이도국[伊都國]이 된다.
이도국은 대판[오사카]으로 들어가 가야인의 대량유입으로 대화국[야마토]이 되고
중부의 나라현에서 백제인의 대량유입으로 나라(내량/나랑/내랑)백제가 탄생한다.
p/s
[오르도스-서역,동유럽에서 들어오는 실크로드물류가 중원으로 들어가 판매대금과 교환물품을
중원 산서성 진성시 하서시랑에서 교환하여 다시 돈황지구,청해성 서령지구로 올려줬다는 말.
돈황지구(서역 비단길/초승달무역), 서령(청구-동유럽,그리스 초원의길/반달무역)지구를
하서회랑이라고 한다.
서역인, 동유럽인들이 중원으로 들어가는데는 중간 길목마다 위험했기 때문에 중원으로 들어가
직접 판매하지 못하고 대리 판매해주는 중원인들에게 의탁해야 했기 때문에, 하서시랑에서 판매한
실크로드 물품을 돈황지구, 청해지구, 내몽고 서북부 파단 길림사막 시라/사라선맹 번외지구로
다시 올려주었다는 말이 오르도스(하서주랑)이다.
돈황지구 하서회랑에서 하서시랑까지의 구간을 뜻하는 말이 하서주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