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좌동마을의 역사]
구석기 유적 출토· 탄약창 폭발사고 겪기도
좌동마을은 2만년 전에 구석기인이 살았다. 해운대신시가지 개발에 따라 1992년 지표조사를 하였는데 좌1동 993번지 일대에서 구석기유적을 발굴하였다. 그 터에 1997년 <해운대 구석기유적기념비>를 세웠다. 이곳에서 후기 구석기 유물인 긁개(그릇뚜껑)와 홈날, 몸돌, 대석 등이 출토되었다. 부산의 역사를 구석기시대로 소급한 유적인 셈이다. 서기79년(신라, 탈해왕 23)에 장산국이 토벌되어 거칠산군(居漆山郡)으로 합병되자 장자터(대림2차아파트 일대)에 장자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이곳에 10여 호가 살았던 터에 오랜 돌담이 있었고 논에서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구석기유적기념비
좌동고분 유적은 1992년 부산시립박물에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발굴을 하였다. 유적의 위치는 신시가지에서 송정으로 넘어가는 왼쪽 ‘부인곡(좌4동 산 82번지, 149번지)’ 일대이다. 삼국시대를 지나 조선시대까지의 분묘 등이 혼재해 있는 복합유적으로 좌동을 비롯한 동남해안 지역의 선사~근대에 걸친 문화연구에 귀한 단서를 제공한다.
좌동마을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농촌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탄약고가 설치되어 군사시설 보호구역이 되었다. 좌동 주민들은 검문소에서 통행증을 제시하는, 출입이 부자유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1952년 6월 16일 오전 11시에 장산의 탄약고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주민 1명이 사망하고 주택소실이 2채다. 이 사고로 해운대 중·우동 주민이 피난을 갔고 동해남부선 기차와 버스운행은 동래 수영에서 중단되었다. 그 다음날 중동 온천장거리는 전쟁이 지나간 상흔을 나타내기도 했다.
1986년~1991년까지 좌동 지역이 택지개발 전 지구로 지정되어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이 시작되어 1992년 단지조성공사에 들어갔다. 이때 좌동마을은 일부가 아파트 부지로 선정되었는데 현재 롯데캐슬 마스터Ⅰ이 있는 곳이다. 마을의 아래쪽 30가구가 제척지로 남아 있었는데, 아파트 재건축 부지로 매입되어 현재 스위첸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
좌동마을 기점으로 장자벌은 택지개발 사업인 아파트단지로 확정이 되었다. 그 후 좌동마을은 아파트단지 문화에 밀려 전통마을 모습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