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의 연구
남태평양 칼라파토스 군도의 19개 섬을 7년 동안 돌아 다니면서
관찰하고
동물들의 생존 경쟁을 보았다.
치열하다. (생존 질서 연구)
1, 약육 강식
강자가 살기 위해 약자가 죽어야 한다.
무서운 생존 싸움이다.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
2, 적자생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어야 산다.
생존 경쟁의 질서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였다.
생존경쟁의 법칙이 예외 아니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
남을 이겨야 내가 산다.
종의 기원 - 여기서 나온 것이 유물사관의 기본철학이다.
공산주의 교리가 유물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강자 약자 없다. 쓰러뜨려야 한다.
남의 죽음, 아픔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남의 상처를 오히려 더 후벼 판다.
내가 서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적자생존이고 약육강식 때문에 서로 높은 곳에 서려고 한다.
자기들의 이권 때문에 찬송을 막는다.
그러면 이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높아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과 한 일이 있습니다.
1. 누구나 다 죽는다. - 몸부림 치지만 죽는다.
2. 약육강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 (힘의 원리가 아니다.)
남을 살려서 내가 사는 것이다.
예) 생명이 태어날 때의 고통 (사랑이다.)
펭귄 자신의 발등에 알을 올려놓고 보호한다.
새들이 젖이 없다. 부지런히 먹인다.(토해서 몸부림치면서)
생존경쟁이 아니라 사랑의 원리로 세상이 존재한다.
내가 죽여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으로 모두가 산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3, 생명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영적 생명이 있다는 사실
진리가 있고 도덕적 의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두 갈래의 모습
1. 찬송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모습
예루살렘 입성을 할 때에 일어난 일
호산나 –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 하옵소서
왕이여 우리를 구하옵소서.
그것에 대해서 제지한다.
그것은 반란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멈추게 하십시오, - 호의적 충고인 듯하나, 협박과 위협이다.
누가복음 19;40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마태 21; 15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을 통해
2. 야고보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갈릴리에서 살다가 수도에 왔다.
사람들이 원했던 일이다.
갈릴리에서 이런 표적을 보이지 말고 중앙으로 가라
사람 많은 곳으로 가라
대단한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하는 마음에는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욕심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찬송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모습은
결국 십자가에 이르러 간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외침은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것이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의 기도 보다 더 큰 구원을 이루어가게 되었다.
야고보 어머니의 청탁으로 인하여
제자들의 마음이 갈라졌다.
엉뚱한 행동들이 나타났다.
네가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네게 마실 수 있겠느냐?
보이는 것을 원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1절이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
눈에 보이는 요청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예) 정치의 목적 – 내가 사는 것인가? 백성을 살리는 것인가?
내 방식대로 하여야 하나? 아니면 하늘의 방식을 따라야?
내가 이익을 취할, 보상을 받을 무언가를 구했다.
발 씻음의 의미를 모른다.
4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식사를 하시다가 중단 하셨다.
예) 이들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도 못한다.
율법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는 내 욕심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연합한 교제가 있을 때 비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욕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한다.
내가 정한 규율
내가 정욕으로 구하는 것
내가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지나친 경건의 열정
나의 발은 씻기실 수 없습니다.
몸까지 씻어 주옵소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발만 씻을 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합니다.
“발을 씻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
그리고 그들의 발을 씻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밤의 사건이 왜 중요할까요?
군중들도 이것을 막으려는 사람들도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호산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내가 구원받고
나를 통해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해 관심이 없다.
모르고 당하면 실패이지만 알고 당하면 승리다.
주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고스란히 당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최후의 승리를 얻었고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 하셨다.
고난당할 때 사랑을 느껴야 한다.
병들 때에 사랑을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