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물
김누누
파란시선 0071 / B6(128×208) / 174쪽 / 2020년 11월 1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친구야 왜 그런 거야? 왜 있지도 않는 실패를 만들었어?
김누누는 김누누지만 김누누가 아니기도 하다. 김누누는 원래 김보섭이다. 원래 김보섭인 김누누는 김보섭이기도 하지만 시를 쓸 땐 오로지 김누누다. 시를 쓸 땐 오로지 김누누인 김누누는 그래서 오로지 시인이다. 오로지 시인인 김누누가 첫 시집을 냈다. <착각물>이다. 시집을 냈으니까 시인 김누누는 이제 ‘시인’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그렇긴 한데 시인 김누누는 아직 등단하지 않았다. 아직 등단하지 않은 김누누는 앞으로도 영원히 등단하지 않을 예정이다. 요컨대 김누누는 이미 오로지 시인이지만 아직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기도 하다. 시인 김누누는 그렇게 벌써 도래했지만 끝내 미지인 상태로 존재하는 ‘누구누구’다. 시인 김누누가 시를 쓰긴 하지만 ‘시인’들이 써 온 ‘시’를 쓰지 않는 건 따라서 당연하다. 김누누의 시는 SF 같기도 하고 다큐 같기도 하고 피카레스크 소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그저 일기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농담 따먹기보다 더 심심한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고 가끔은 유명한 시인이 쓴 시보다 더 시적이어서 이건 진짜 ‘시’가 아닐까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차라리 시인 김누누의 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좌절하고 실패하는 쪽은 우리다. 우리가 머리를 싸매 쥐고 김누누의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목격하게 되는 것은 희한하게도 이건 시가 아니라고 부정해 온 그 모든 것들이 시가 되는 순간들이다. 다만 놀랍다. 새로운 천사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 추천사
“이름이 누누야?”
“응. 2014년에 이 이름을 만들었대. 그전까진 주민등록증에 적힌 이름을 썼겠지?”
“아, 필명이구나. 이 시집 재밌어?”
“응, 재밌어. 그런데 조심해야 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떤 일들이 생기거든.”
“어떤 일?”
“사소한 거야. 예를 들면, 마트에 진열된 오렌지를 보면 저절로 레몬을 함께 떠올리게 돼. 음, 그리고 새 화장품을 구입하기 전 이 제품이 동물실험을 했는지 살펴보다 말고 ‘지옥풀’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될걸? 아니면 숲에 갔다가 쓰러진 나무를 발견했을 때, 그 나무 밑에 사실은 구해 내야 하는 무언가가 깔려 있다는 것을 너만 알아챌 수 있겠지. 누군가가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야, 쟤는 합제네, 합제.” 이럴 때, 너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서 크게 웃음을 터트릴 거야. 친구와 커다란 미술관에 갔는데 눕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전시실 정중앙에 누워 버릴지도 몰라. 그때 같이 있던 친구가 당황해서 뭐하는 짓이냐고 물으면 너는 누워서 웃으며 대답하겠지. “너는 김누누의 시집을 아직 안 읽었구나?” 이런 일들. 별거 아니지?”
“아, 그렇게 위험한 일들은 아니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망설인다. 여기서 이야기를 마쳐도 될까. 사실은 아직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이걸 미리 알려 주지 않아도 될까? 나는 아주 오래 망설이다가 겨우 용기를 낸다.
“네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
나의 낮은 목소리와 엄숙한 눈빛은 너를 긴장시킨다.
“음, 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생기는 일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그게 시집을 읽어서는 아니고, 음, 그러니까, 시집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기면 그만인데…….”
여기까지 말하자 너는 왜 이렇게 뜸을 들이냐며 나를 타박한다. 나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대답한다.
“그런데 은수야. 너 내가 한 이 말들 진짜 다 믿는 건 아니지?”
―장은정(문학평론가)
■ 저자 소개
김누누
1991년에 태어났다. 2014년까지 김보섭으로 활동하다가, 2014년부터 김누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19년 독립문예지 <베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니블스는 시은의 눈 – 11
4(Feat: 김연덕) - 14
더 스페이스 유니버스 사이클론 코스모스 – 18
우주라이크썸팅투드링크 – 21
이것이 참이라 생각된다면 – 25
미확인 식물 연구소 – 27
아포칼립스 직전 – 30
차라의 숲에서 벌어진 일들은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 33
하이드 온 부시 – 36
합평의 제왕과 모난 돌을 쥔 사람 – 39
합평의 제왕과 교수가 죽은 다음의 술자리 – 42
그레고르 잠자는 숲속의 공주 – 45
직업적 누워 있기 – 49
기쁜 우리 젊은 날 – 52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 55
그림자벌레 – 58
공작새 깃털을 줍는 사람 – 62
혼자 추는 춤 – 65
함께 추는 춤 – 68
나의 가장 낮은 마음 – 70
아포칼립투스 – 74
새크리파이스 – 77
제2부
삐삐 롱스타킹의 죽음 – 83
삐삐 롱스타킹의 안 죽음 – 84
소년 프랭클린의 갑작스런 죽음 – 88
Saturday – 91
도희가 말했다 – 95
이십사시의 사랑 – 97
33년째 팔리지 않는 떡볶이 – 101
바캉스, 죽음(Feat: 정원) - 104
데리러 가 – 106
피식회 – 109
발인이 끝나고 돌아간 그들의 삶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 111
내가 망자일 적에 한 발표회 – 113
파리 대왕 – 116
텔레포트 300초 – 120
지루해하는 관객을 마주한 코미디언의 불안 – 122
리빙 데드가 부르는 소리 – 124
제3부
물고기 행진 – 127
슬픔을 표현하는 네 개의 선 – 130
도희는 들었다 – 133
도희도 있었다 – 134
욘욘슨 – 136
합평에서 살아남기 – 141
저 시 썼는데 한번 봐 주세요 – 144
인코그니토 – 148
내 날개를 타고 – 150
우천 시 취소 특집 – 153
这件事情跟我一点都没有关系 - 156
밤의 손님 – 159
미리 본 결말 – 161
낮의 주인 – 163
金이라고 읽으세요 – 165
jae와 미래의 사랑 – 168
Thanks for comming – 172
■ 시집 속의 시 세 편
더 스페이스 유니버스 사이클론 코스모스
외국어에 능통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읽기도 힘든
외국어 문장을 한국어로 변환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친구에게 이 시를 보낸다
우주가 있었다
없었습니다
있었는데요
아니 왜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그렇게 일을 처리해?
누구한테 물어보면 되죠?
애야? 애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 걸 일일이 다 알려 줘야 돼? 좀 알아서 좀 해 자네는 뭐 아는 게 하나도 없니
Koit![1]
이에 대한 연대책임을 물어
제3우주를 소멸시키겠습니다
판결은 절대적이고 거스를 수 없다
코스믹 사이클론이 삼 일 뒤에 방문할 예정입니다
코스믹 사이클론은 우주 처형 집행자들의 이름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이클론 생명체다
제3우주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제3우주 바로 옆에 있는 제2우주와 제5우주[2]는 사라지지 않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제2우주의 경우 코스믹 사이클론의 규모가 워낙 방대했으므로 제3우주와 함께 휘말려 약 1/4 정도의 우주를 잃고 말았다
제2우주는 이런 사고에 반발해 코스믹 사이클론을 고소할 예정이다
―
친구야 그런데 이런 시는 왜 번역해 달라고 한 거야?
아니 처음부터 외국어로 쓴 것도 아니고 네가 한국어로 쓴 너의 시인데 왜 너의 시라고 하지 않고 내가 외국어로 된 남의 시를 번역해 준 것처럼 말하는 거야?
아니 나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친구잖아 왜 나를 실제로 있는 사람처럼 말한 거야?
아니 친구야 사실 우리는 친구도 아니잖아 친구도 아닌데 왜 친구라고 썼어? 나는 사실 실제로 있지도 않은 친구니까 만날 수 없는 게 당연한데 ‘왜 다시 만날 수 없는 친구에게’ 같은 말을 아련하게 했어?
친구야 왜 그런 거야? Koit! 같은 말은 사실 있지도 않은 말이고 네가 그냥 지어낸 말이잖아 왜 없는 나를 지어내고 없는 나한테 번역을 맡기고 번역도 실패하게 만들었어? 왜 있지도 않는 실패를 만들었어?
친구야 말해 봐 친구야 가만히 있지 말고 억울해? 응? 네가 뭐가 억울해?
[1] 역자 주. 마땅한 한국어 표현을 찾을 수 없어서 번역하지 못하였음. 주로 기분이 언짢은데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을 때 하는 대답임. 굳이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네(뻐큐 먹어)’로 표현할 수 있음. ‘코잇’으로 읽는다.
[2] 작가 주. 우주는 제0우주를 시작으로 제1우주, 제2우주, 제3우주, 제5우주, 제6우주, 제7우주…… 이런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제4우주가 없는 까닭은 4는 불길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
합평의 제왕과 모난 돌을 쥔 사람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속담을 만든 사람의 머리통을 그 돌로 찍어 버렸어야 했는데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 실제로 머리통을 찍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속담은 필연적인 존재였고
저는 그때마다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죽었다가 살았다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다섯 번을 찍으니까 그제서야 잠잠해졌습니다
라는 시를 합평 시간에 가져갔는데
교수가 꺄르르 아이처럼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실화인데
교수는 매 합평 시간마다 합평의 제왕이 가져온 시를 칭찬하느라 다른 학생들의 시는 읽는 둥 마는 둥 할 정도였다
합평의 제왕은 이름이 따로 있었으나 같은 과 선배의 ‘얘 완전 합평의 제왕인데?’라는 발언 이후로 이름을 잃어버리고 합평의 제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합평의 제왕이라 부르는 건 너무 길고 불편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합평의 제왕을 줄여 합제라고 부른다
합제는 사실 매 합평 시간마다 시를 써 간 게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을 시인 척하고 가져갔던 것인데
교수는 그것도 모르고 꺄르르 좋아한다
다 늙어 가지고는
합제는 교수를 싫어했다
합제는 교수를 너무 싫어한 나머지 합평 시간에 교수의 형은 교수형이니까 교수의 형의 아내는 교수형의 처이고 교수의 형의 처의 이름이 하라면 그럼 ‘교수형에 처하라’가 된다는 내용의 시를 가져간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교수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심지어 중간부터는 쓸 말이 없어져서 교수가 대머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같은 구절로 대충 채워 넣기까지 했다
물론 교수는 위트가 어쩌고 하면서 또 꺄르르 좋아했고
진짜 눈치도 없이 늙어 가지고 너무 싫어 진짜
합제는 거의 대놓고 말했다
합평의 제왕이라는 별명은 교수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으므로 합제는 본인이 합평의 제왕이라 불리는 것도 싫어했다 친구들이 합제야 합제야 부를 때면 합제는 항상 합제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 달라며 화를 냈다
그러면서 합제가 자기 이름을 말하려 할 때면
합제는 모난 돌을 손에 쥐고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오래된 반복이었다 ***
데리러 가
온종일 물놀이를 신나게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가 잘라 놓은 수박이 있다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와구와구 수박을 먹으면
바닷물과 과즙이 뚝뚝 떨어지고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수박도 안 먹는다
그냥 가만히
수박 먹는 나를 보는데
아까 바닷가에서 어떤 사람이 나한테 인사했다?
라고 말하자
내일부터 바다에 가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할머니는 처음 봤다
이제 그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도시의 여름밤은 찬란하고
아주 덥다
애인과 공원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손을 잡은 채로 그냥 걸었다
서로 얼굴을 보다가
그냥 가만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가지고
하얀 강아지가 너무 귀엽다
애인은 가끔씩
삼색 고양이처럼 웃는다
이제 그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기일이 되어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
다 끝난 일인 것처럼 말하는 게 미워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 버렸다
해변을 지나는 택시
엄마가 많이 슬펐을 거야
저 멀리 손짓하는 누군가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이제 그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