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호-누구를 위한 비유인가? 1.어떤 보복
바닷가에 서서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본다. 먼 태고적 숨결을 지닌 채 지칠줄 모르고 지평선으로부터 밀려와, 늘 그 자리를 그렇게 맴돌다가 돌아가는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렇게 서성거리다간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슬픈 노래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바위처럼 굳어져버린 인간의 마음을 감싸안으며 지칠줄 모르고 조수처럼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타락한 인간을 향해 끝없이 밀려오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인간은 늘 “받고” 싶어한다. 사랑 “받고” 싶어 하고, 위로 “받고” 싶어 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고” 싶어 하신다. 사랑을 “주고” 싶어 하시고, 위로해 “주고” 싶어 하시고, 항상 관심을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그렇게 늘 “주고” 싶어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인 우리가 남에게 “해 주기” 를 원하시는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보복”(?)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 “보복”이 아닌 아주 멋진 “보복”을... 그 보복은 다름이 아닌 “사랑의 보복”이다. “사랑의 보복!... 그것은 굉장히 어렵기도 하고 한편으론 굉장히 쉽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기를 바라시는 그 “사랑의 보복”에 대하여 로마서 12장 20절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얼마나 멋진 보복인가! 나를 괴롭히는 그렇게도 얄미운 원수의 머리 위에 뜨겁게 핀 숯불을 놓을 수 있다니!...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원수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렇게 큰 원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어떤 사람은 평생 가슴에 상처를 남긴, 자신에게 큰 해를 끼친 원수를 가지고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큰 원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원수는 큰 원수가 아니라 작은 원수, 곧 우리의 가까이에서 우리를 어렵게 하는 우리의 이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어려움과 상처를 당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남편, 아내, 자녀, 아니면 친구, 교우들일런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 속에 상처를 주는 사람, 가슴이 미어지도록 우리를 섭섭하게 하는 사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철저히 실망시키는 사람,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짓밟는 사람,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괴롭히는 사람, 우리의 희망을 비틀어 꺼버린 사람... 그런 사람들은 바로 아주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 있는 우리의 이웃들, 곧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도 섭섭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작은 원수들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슬프거나 섭섭해질 때가 있다. 더우기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했을 때는 더욱 슬퍼진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거나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너무 당황하게 되고 충격과 슬픔에 싸이게 된다. 또 비록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누군가가 자꾸 우리의 마음을 자근 자근 짓밟으며 상하게 하면 무척 속상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가까이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어려움과 괴로움이기 때문에 그 상처가 더 크고 아프며, 더 쓰라릴 수 있다. 사랑의 보복
이렇게 우리에게 많은 상처들이 생길 때, 그리고 너무나 부당하게 받은 대우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 그리고 우리의 꿈과 희망을 비틀어버린 사람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그리고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씩이나 자존심을 짓밟은 사람 때문에 마음이 끓어 오를 때... 그 때, 우리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받은 그대로 상대방에게 보응해 주고 싶은 유혹을... 그가 한만큼 나도 갚아주리라는 유혹을... 그리고 내가 받은 만큼의 상처를 그대로 주고 싶은 유혹을... 비록 그것이 그렇게 큰 보복이 아닐지라도, 또 그렇게 나쁘거나 심한 대응 방법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아주 작은 대응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무의식 중에 자신이 받은 만큼의 상처를 그대로 남에게 보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랑의 보복”! 그것은 이런 투쟁과 갈등으로 우리의 마음 속이 산란할 때, 넘쳐나는 울분으로 마음이 끓어 오를 때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아주 좋은 보복의 방법이다. “네 원수가 주릴 때 마시우고 먹이라”. 그러면 그것이 너를 괴롭힌 원수의 머리 위에 “뜨거운 숯불”을 놓는 것이 되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성경에 한번 나오지 않는다. 잠언 25장 21~22절에, 그리고 마 5장 44절에, 아니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이 사랑의 메세지는 전달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그 보복을 과연 우리는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사랑의 숯불을 우리를 슬프고 괴롭게 한 원수의 머리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을까? 위로받기보다는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다. 어떤 사람이 선지자에게 와서 물었다. 이 성 안에서 어떻게 하면 메시야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어떻게 메시야를 알아 볼 수 있겠느냐고... 그러자 그 선지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 안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상처만 싸매느라고 바쁠 것이라고,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있을텐데 그 사람은 자신의 상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싸매어 주느라고 바쁠 것이라고...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곧 메시야라고... 인간은 이기적으로 태어 났다. 우리는 늘상, 나의 상처만 아프고, 나만 위로 받아야 하고, 나만 외롭고, 나만 슬프고, 나만 사랑 받아야 할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다 사랑을 베풀려고 해도 자신이 받은 만큼만 주려는 이기적인 속성을 나타낼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부인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이방인보다도 못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자기에게 잘 하는 사람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려고 하니까... 위로받기보다 먼저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 먼저 사랑하고, 관심 받기를 바라기보다 먼저 관심을 베풀어 줄 수는 없는걸까? 아니, 우리를 괴롭게하고 우리의 마음에 잔뜩 상처를 준 작은 원수들에게 사랑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마시우게 할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그래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뜨거운 사랑의 숯불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사랑없이는 할 수 없는 그 멋진 “보복”을 우리는 정말 할 수 있을까?... 마음 속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로마서 5장 5절에는 이런 좋은 말씀이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 말씀에는 우리를 “사랑의 보복”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비결이 나와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면,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남의 동정과 배려를 받으려는 욕망이 사라진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마음 속에 충만히 거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게 되어 이상한 기적, 곧 우리를 아프게 한 작은 원수들에게 멋진 “사랑의 보복” 을 할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원수를 보는 우리의 눈이 사랑의 눈으로 바뀌어 지고, 정죄와 편견의 안경이 사랑의 빛을 잔뜩 지닌 기적의 안경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할 때 인간의 지혜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한때 냉랭하고 벌어졌던 마음들이 세상의 어떤 줄보다 더 튼튼하고 오래 견디는 줄, 곧 어떤 고난이라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랑의 황금줄로 연합되는 기적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으로 원수의 머리 위에 올려 놓는 우리의 숯불이 더 뜨거운 사랑의 숯불이 되기를...
2.권두언
강병국 우리가 어떠한 메세지를 꼭 들어야 할 대상들에게만 전달하기 원할 때에는 암호를 사용합니다.
일상적인 내용들이나 이야기가 담긴 스토리들 같지마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차리게 되지요. 일반적인 내용들 속에서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그 참 뜻을 찾아내기 위한 암호를 알고 있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셨을 때에도 대부분 비유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진저”라는 토를 다시면서 천국의 비밀을 단순하고도 평범한 실물 이야기들 속에 감추어서 말씀해 주시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늘의 것을 찾으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만 알아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난 자들, 하나님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들만이 그 단순한 비유들 속에서 하늘이 우리들에게 들려 주려고 하는 진리들을 이해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복잡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 주위에 가득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식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 합니다. 빛의 광선이 그러하고 공기가 그러하고 바람과 기류가 그러하며 각종 전파들과 파장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종의 기계들을 통하여 그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듣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예수님의 비유들을 읽어 보면서 그 속에 감추어 두신 놀라운 하늘의 진리들과 영적인 원칙들을 식별하는 비결들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번 호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여러 가지 비유들 속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영적인 교훈들과 진리들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천연계나 간단한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들을 귀를 기울여 잘 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 사랑하십니다!
3.간결한 삶
다음의 기사는 가정의 영적인 부흥과 그리스도인 자녀의 참 교육을 위하여 미니스트리를 하고 있는 짐 혼버거 장로의 글을 번역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이 기사는 사단이 자기들의 집회를 열어 그리스도인 가정을 어떻게 파괴시킬지에 대하여 의논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가상적으로 그려 본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의 영적인 부흥과 신앙을 깨뜨리려고 분주한 사단의 계책을 알아차리고 경계함으로 우리의 가정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그들의 총회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열렸던 집회 중 가장 큰 모임이었습니다. 방방곡곡으로부터 대표자들이 참석했는데, 이 집회는 이 세상에서 점점 쇠퇴해 가고있는 그들의 세력을 염려하면서, 어떻게 하면 다시 그들의 영향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묘안을 연구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습니다. 여러 날의 세미나를 통해서도 별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한 그들은 오늘 저녁 기조 연설을 할 자기들의 최고 수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조용히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이는 바로 이 지도자뿐이라고 그들의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수령이 시초부터 그들의 유일한 지도자였으며, 그들 모두가 따르고 모방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지요. 그는 이곳에 모인 모든 대표자들의 애정과 충절의 대상이었으며, 오랜 기간 동안 그들에게 있어서 실상 신적인 존재로 부각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단상으로 나타나자 입추의 여지가 없는 회의장은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 해졌고, 고개를 쳐든 많은 대표자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는 환호를 받는 정치가처럼 관중들의 찬사를 만끽하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큰 갈채의 박수가 가라앉자 드디어 그의 기조 연설은 시작되었습니다. “친애하는 마귀 동지 여러분, 지금부터 하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기 바란다. 그대들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막을 수 없다. 그들은 교회를 뻔질나게 다닐 것이다. 또한 그대들은 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교리를 고수하지 못하게 하거나 기도하지 못하게 막지 못한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들은 계속 그 관습들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우리의 작전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
“마귀 동지들, 우리의 비결은 바로 시간에 있음을 주지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다니고 기도하며 교리들을 고집하게 내버려두면서, 그들의 시간을 통제 관리하기만 하면 된다. 시간이 기본적인 요소인데, 그 이유는 충분한 시간 없이는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구원에 불가결한 ‘예수’와의 구원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면서 사단은 ‘예수’라는 이름에다 아주 경멸적인 억양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시간을 통제 관리하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도록 한다면, 교회에 발을 한번도 들여놓지 못한 사람들처럼 그들도 분명히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간단하다! 그것은 그들로 인생의 부차적인 면들에 치중하면서 바쁘게 살도록 유도하고, 그들의 생각을 점유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어 그는 말하기를 “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것들에 돈을 계속 낭비하도록 만들고 그 지출을 메우기 위해 계속 일하고 또 일하도록 만들라. 눈길을 끄는 아주 매혹적인 상품들로 가득찬 카탈로그로 그들의 우체통을 채우라. 그리고 뒤이어 그러한 상품들을 쉽게 살수 있는 신용 카드 신청서로 또 우체통을 채우라. 화려한 집과 고급 자동차 및 물건들을 소유함으로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도록 가르치고, 그러한 것들을 소유할 목적으로 가정의 남편들이 하루에 8, 10, 12 시간 일주일 내내 일하도록 유도하라. 필요하다면 두 직장을 가지도록 만들고, 그들의 부인들도 일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라. 그들에게 걸맞은 문화적인 생활 양식을 유지하려면 그 외의 다른 방법이 없다고 그들의 감정에 속삭이라. 그리하여 가정의 아내들로 하여금 오래고 고된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게 만들고, 더불어 집안의 가사일로 지치게 하여 하루 일과 후에는 자녀들 및 남편들과 함께 정다운 시간을 보낼 기력조차 없도록 하라.” “또한 그들의 심성을 극도로 자극 흥분시켜 그들의 양심에 속삭이는 예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만들라. 각 가정과 직장 및 상가들에서 계속적으로 들려지는 세속적인 음악들로 그들의 감각을 집중 공략하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매일 좋지 못한 뉴스들을 접하게 만들라. 신문과 잡지, 라디오 및 텔레비전을 24시간 이용하라. 길가에 있는 광고 게시판과 영화, 신문과 잡지의 표지들 및 텔레비전에 관능적인 이미지들을 실어 그들의 결혼 생활과 젊은이들의 도덕적인 기조가 퇴폐되게 하고, 텔레비전의 토크쇼 (talk-show) 를 통하여 세상의 가장 변질된 생활 양식을 가진 사람들을 그들의 가정으로 끌어 들이라.” “또한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자세하게 노출되는 지저분하고 부도덕한 행습들을 탐하고 즐기도록 하여, 결국 이런 사악함들을 단지 보편적인 생활 양식들 중 하나일 뿐인 것으로 여기게 되도록 그들의 판단력을 감퇴시키라. 더불어 세상의 시시하고 하찮은 소문들과 재난의 뉴스에 집착하게 만들고, 뉴스 미디어로 하여금 세상의 부자들과 유명인들의 나쁜 짓들을 자세히 보도하게 만들며, 사람들로 하여금 복권 당첨과 카지노의 도박에서 일확천금의 횡재를 꿈꾸게 하여 인생의 심각한 현실로부터 그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교란시키라. 또한 그들의 선반을 별 필요 없는 책들과 잡지들로 가득 채우도록 부추기라. 이런 것들은 바로 그들의 귀중한 시간의 낭비를 의미하는데, 그들이 이러한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면 할수록 그들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 컴퓨터를 설치하게 하여 우리 마귀들이 거의 모든 출구를 장악하고 있는 인터넷의 전자 대로로 내 보내라. 그들에게 수많은 이메일들을 보내고 온갖 종류의 광고성 스팸 메일들을 보내어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게 하라. 또 휴대용 컴퓨터를 사게 하여 그들이 어디에 있던지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라. 그것 뿐이겠는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휴대용 전화기를 가지게 하여 하루 종일 오고 가는 전화 대화로 조용히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지도록 만들라. 많은 종류의 활동들, 학교와 방과후의 스포츠 프로그램 및 음악 교습은 물론 클럽 활동 및 파티들로 어린이들의 생활을 압도시키라.”
“점점 더 이른 나이에 시작되는 과다한 숙제들로 그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만들라. 부모들로 하여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의 척도에 따라 자녀들의 성공을 비교하게 하며, 그것의 성취를 위해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취학전 교육 프로그램 등에 보내게 하여 일찍부터 이 어린이들을 부모들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할수만 있다면 그들의 부모들과는 상관없는 생활을 이끌어 나가게 유도하라. 그리하여 그들이 십대가 되었을 때 그들의 부모와 가질 수 있는 공감대가 하나도 없게 하고, 이들 십대 청소년들이 제대로 꼴 잡히지 못한 그들의 생활속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게 만들라. 그러면 현실 도피적인 한 방법으로 부정한 성관계와 담배와 술 및 그 외 다른 마약 등을 제시하는 우리들의 충동에 그들이 쉽게 넘어갈 것이다.” “또한 이들 소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여가 선용에서조차 과도하도록 유도하라. 비싼 휴가 여행을 가도록 만들고, 그들이 이러한 여가 선용으로부터 지치고 평온을 잃은 마음 상태로 귀가케 하여, 돌아오는 한 주간을 올바른 심신으로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하게 만들라. 그들의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으로 가지 못하게 막고, 그 대신 각종 오락장 및 유원지와 스포츠 구장과 영화관 같은 곳들로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충동하라.”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들이 우리의 올무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들의 교회를 이용하여 그들을 사로잡으라. 그들에게 여러 가지 교회 직책들과 책임을 지우고, 끊임없는 교회의 문제들로 그들의 시간을 채워서 교회를 위한 ‘훌륭한 사업’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도록 유도하라. 또한 그들이 소위 교우들과의 교제시간을 가질 때, 서로 잡담과 험담으로 시간을 때우게 하여 불편한 양심과 어지러운 마음으로 귀가하게 만들라. 위기에 위기를 그들 회중에게로 보내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정신 없이 바빠서 그들 마음속에 복음의 불꽃이 싹틀 기회가 없도록 조장하라. 복음의 메시지를 그들의 개인적 생활에 실제적으로 먼저 적용하며 성취시키는 대신, 교인의 숫자를 늘이는 선교 방법들에 신경을 쓰며 공부하도록 그들의 생각을 집중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각종 선교 훈련 세미나, 교회 성장 세미나 및 지도자 강습회들에 참석하며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라. 그와 동시에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단순한 복음의 실현을 추구하고 권하는 소수의 경건한 무리들이 경직된 율법주의자로 공격받고 소외되도록 교회 분위기를 조성하라.” “그리고 한가지 더 중요한 묘안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추구하는 명목으로 초 교파적인 큰 집회들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정의 중요성에 관해 입바른 소리로 외치게 하고, 또한 나아가서 크게 부각되는 사회적인 이슈인 낙태문제나 노동쟁의 혹은 반전운동 같은 정치적 활동에 전념하게 만들라. 그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세상과 구분되는 듯한 보수적인 신앙 생활과 가정 생활을 하도록 내 버려두라. 하지만 그대들은 전력을 다하여 이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한 죄인의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과 성경 말씀에 다가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는 완패 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마귀 동지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간이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조력자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시간을 좀더 현명하게 이용하여 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기만 속에서 조금만 더 오래 잠자게 하자! 그렇게 하면 이 세상과 그들의 교회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승리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자! 동지들, 이제 다들 각자의 영토로 돌아가서 우리의 승리를 위해 매진하자! 최후의 승리를 위해! 만세! 만세! 만세!...” 이렇게 하여 마귀들의 분수령을 이룬 집회는 막이 내리고 그들의 우뢰와 같은 함성은 오늘날 마지막 세대를 사는 우리에게 한 메아리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침착하고 치밀하게 실행된 사단의 계획은 지금 크게 성공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책략이 성도님들 개인과 자녀들과 가정에서 현실화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무한한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양심에 성령님의 음성으로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 라고 계속 속삭이시며, 점점 빨리 달려가는 어지러운 이 세상의 열차에서 내려오기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하늘 본향의 정문을 통과하지 못할 우리 생활과 생각의 군더더기들을 하나 둘 정리하면서 간결한 생활 속에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루 매순간의 모든 선택들을 주님께 내어 놓고 그분이 우리 각자의 마음과 뜻을 주관하시게 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애를 이루어 나가지 않으시렵니까? 같은 길을 앞서 가시는 성도님들은 뒤따라오는 후배들을 격려하며 이끌고, 또 뒤에서 신앙의 첫 걸음을 시작하는 성도님들은 낙망하지 말며, 같은 목적지를 가진 동행자로서 사랑으로 서로 감싸주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 (이사야 32:18) 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모두 함께 믿음으로 성취합시다!
4.용서
서정희 용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따뜻한 미소 입니다.
용서는 아무것도 기억지 않는 사랑의 눈망울 입니다. 용서는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세지 않고 그가 잃은 것이 무언인지 헤아리는 마음 입니다. 용서는 나의 상처 돌보지 않고 그의 상처 싸매주는 치료의 손길 입니다. 용서는 회복시켜 주고 싶어 용기 주고 싶어 꼭 안아주는 포근한 가슴입니다. 용서는 내가 받고 있는 것 그래서 내게 있는 것 아주 조금 떼어주는 기쁨의 나눔 입니다. 그러기에 용서 받는 자는 행복하며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는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 입니다.
5.누구를 위한 비유인가?1부-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야기 듣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리와 복음을 전하실 때, 비유를 섞어 아주 쉽고도 재미있게 이야기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이야기는 아주 어린 아이일지라도 다 이해할 수 있었고, 절대 지루하거나 난해하지 않았다.
또한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청중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고, 그리고 백성들이 있는 그 곳에서 그들을 만나 재미있고 친근한 길로 그들의 생각을 인도하여 그분께서 가르치시려는 진리에 이르게 하였다. 또한 자연계를 창조하셨던 예수께서는 천연계에 대하여 잘 알고 계셨으므로,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예수께서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시청각 재료가 되었다. 진리는 너무나 넓고 원대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것을 설명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주 천연계의 모든 현상을 사용하셨던 것이다. 사실 날마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들은 다 어떤 영적 진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계는 구주의 비유들로 덮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 자연의 사물들을 바라볼 때마다 재미있고 흥미롭게 말씀해 주시던 예수님의 교훈과 이야기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 당시 회당에서 듣던 랍비나 제사장들의 길고 지루하고 영적으로 죽은 설교에 비해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활력있고 영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기있는 말씀이었던가! 비유를 통해 들려 주셨던 귀한 진리의 교훈들은 늘 백성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예수께서 하신 그 흥미진진한 비유는 그 생생한 교훈과 함께 우리에게 귀중한 진리를 전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를 연구해 보면, 주님께서 그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데는 깊은 뜻이 있으며, 그 비유들은 우리 각 개인들에게 아주 심오하고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비유에 적용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모든 비유들은 우리 각 개인의 필요를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번 호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다. 이 흥미로운 비유의 연구가 독자 여러분들의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즐겨 비유를 사용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청중들의 마음을 여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것은 영혼들이 하늘의 진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 되었다. 예수님의 비유는 지혜롭고 유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런 편견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했으며,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을 얻게 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흥미있는 여러가지 비유들을 연구하기 전에 제 1부에서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하여 연구해 보기로 한다. “비유(parable)”의 정의 1. 영어로 비유라는 낱말 “패러블(parable)”은 헬라어 “파라볼레 (parabole)”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 낱말의 의미는 “나란히 놓는 것”, “비교”, “예증”, “비유”, “격언”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었고, 이 말은 “한 물건을 다른 것과 비교하기 위해서 나란히 놓아 본다”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2. 영어의 정의에 의하면 “패러블”이란” 근본적으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 1.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의 대부분은 간결한 것으로, 잠언과 격언 그리고 은유의 핵심을 찌른 것들이다. 복음서에 있는 어떤 비유들은 영적 진리와 비교해 보도록 나란히 놓아 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2. 예수님의 비유는 보통 매일의 생활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청중들에게 친숙한 것들이었고, 어떤 것은 그 당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이었으며, 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셨다. 3. 예수께서 하신 이야기 자체는 간단 명료하였고 따라서 그 결론 역시 매우 분명하여서 불확실한 것이 조금도 없었다. 4. 예수님의 비유는 영적 진리와 나란히 놓여져서 그것을 예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 1. 흥미와 주의 그리고 탐구심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첫째, 주의성 없는 자들을 각성시켜서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새겨 주고자 하심이었다. 비유로 가르치는 일은 그 당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었고, 호평을 받고 관심을 끌었다. 비유의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은 흥미가 일깨워졌으며, 영적 사물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탐구심이 계발되었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실 통로를 찾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실례를 사용하심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같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셨다. 그가 사용한 실례들 모두가 그들이 일상 보고 듣는 현장에서 인용된 것이었기 때문에 청중들의 흥미는 더욱 고조되었다. 2. 편견을 자극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전해야 할 진리를 갖고 계셨다. 그 당시 랍비들의 교훈이나 유전에 얽매어 그릇된 편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주님께서는 어떤 편견을 일으킬만한 말씀을 하시는 대신에 아주 쉬운 비유의 이야기를 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 가셨다. 그리하여 아무리 편견에 붙잡혀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 끌려 들어가게 되어 큰 교훈을 얻곤 하였다. 3. 정탐군들의 올무를 피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를 두른 많은 무리들 중에 제사장과 랍비, 서기관과 장로들, 헤롯당과 관원,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완고한 사람, 야심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죄할 어떤 죄를 찾고자 하고 있었으며, 또 정탐군들은 매일같이 예수님의 뒤를 밟으며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 중에서 그를 정죄할 어떤 구실을 찾아내어 예수님을 침묵시키고자 하였다. 구주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질을 아시고 진리를 전하실 때에 그들이 산헤드린 앞에 고소할 조건을 잡지 못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는 비유로써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외식과 악행을 견책하셨고, 비유의 말씀으로써 골수를 쪼개는 듯한 진리를 싸셨다. 만약 그가 노골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공박하셨더라면,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즉시 그의 전도 사업을 제지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정탐군들이 손을 쓰지 못하게 하시는 한편, 오류가 밝히 드러나도록 진리를 천명(闡明)하셨으므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그의 교훈으로 유익을 받았다. 4. 천연계의 실물을 비유로 사용하심으로 더 인상 깊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당신의 교훈을 주실 때, 일상 생활의 경험을 천연계의 장면들과 연결시킴으로 그들의 주목을 끄시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후에 그들이 그 교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실물들을 보게 될 때에, 거룩한 교사의 말씀을 회상하게 되었다. 성령께 마음문을 열어 놓는 자들에게는 천연계를 비유로 사용하신 구주의 교훈의 깊은 뜻이 더욱 더 공개되었다. 신비하게 여겨지던 것이 분명하게 되고 이해하기 어렵던 것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데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비유는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고, 진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숨겨버리는 일을 하였다. 이제부터 예수께서 말씀하신 귀중한 진리들을 함께 연구해 보자.
2부-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사람을 위한 비유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는 눈물겨운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있는 주옥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런 비유들을 지면상 다 다룰 수는 없으므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신 몇가지의 아름다운 비유의 이야기들을 2부와 3부에 다루기로 한다.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경험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면 다음의 비유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읽으므로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큰 깨달음이 있기를 바란다. -편집실- 이 비유(2부와 3부)들을 말씀하신 상황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주위에 모였을 때에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랍비들은 불쾌감을 표시하며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고 말했다. 랍비들은 예수에 대하여 실망하였다. 그들은 그처럼 고결한 품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들(랍비)과 섞이지도 않고, 그들이 교훈하는 방법을 따르지도 않으며, 각종 계급의 사람들을 상대로 일을 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참 선지자라면 그들(랍비)과 교우하고 세리와 죄인들에게 마땅히 냉정하게 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결하신 분이 사회에서 버림 받은 자들을 동정하는 것을 보았을 때 랍비들은 성을 내게 되었다. 그들은 그분이 일하시는 방법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교양 있고 세련된 사람으로 생각했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깊은 신앙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본은 그들의 이기심을 노출시켰다. 랍비들을 무시하고 회당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던 자들이 예수의 주위에 모여들어 열심으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 그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순결하신 그분의 앞에서면 양심의 가책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로 이끌려 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예수께 나온 자들은 그분을 대할 때에 저희들에게도 죄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 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자들을 비난하고 조롱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갔지만 결코 잊어버린 바 되지 않은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셨다. 그뿐 아니라 저희의 불행과 죄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동정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수근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한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으셨을 때,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영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그들에게 변명이나 논쟁을 하시는 대신 예수께서는 불후의 이야기거리가 될 만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1. 잃어버린 양의 비유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3~7). 비유에 나타난 상징 * 목자: 예수 그리스도 * 잃은 양: 죄인, 또는 죄로 잃어버린 이 지구 * 잃어버린 양은 자신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을 알지만 혼자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비유의 이야기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이야기하실 때,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그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와 경험을 실례로 들어서 말씀하셨다. 요단 동편의 넓은 고원지대에는 풍부한 목초지가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그 산골짜기와 나무가 무성한 숲속에는 목자들이 찾아서 우리로 데려와야 할 잃어버린 양들이 많이 방황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 가운데는 목자들과 목장 주인들이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이 비유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 백마리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 목자는 그의 양 가운데 한 마리가 행방 불명이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목자는 평안히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양들을 바라보며 “아직도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는 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가는 것은 너무나 많은 고생이 될 거야. 저 혼자 돌아오겠지... 돌아오면 내가 우리의 문을 열어 안으로 들여보낼꺼야!” 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자 목자의 마음은 슬픔과 근심으로 가득 찼다. 그는 양을 세어 보고 또 세어 본다. 그는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흡마리를 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간다. 밤이 어두워질수록 비바람이 심해질수록 목자의 염려는 더욱 커져 더 열심히 찾는다. 그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양의 울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에 그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가파로운 고개를 기어오르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의 가장자리를 지나기도 하면서 소리 나는 그 곳으로 간다. 그가 그렇게 양을 찾아가는 동안 양의 울음 소리가 점점 희미해가는 것을 듣고 그 양이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마침내 목자는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잃었던 양을 찾게 된다!
그 때 목자는 그 양이 자기에게 그처럼 많은 괴로움을 끼쳤다고 해서 그 양을 꾸짖지 않는다. 그는 양을 채찍으로 몰지도 아니하고 그는 양을 걷게 해서 집으로 끌고 오지도 아니한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떨고 있는 양을 어깨에 멘다. 만일 그 양의 살이 찢어지거나 상처를 입었으면 그 양을 품에 꼭 안아 그의 품의 온기로 양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자는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그 양을 우리로 메고 간다. 그리고는 벗과 이웃을 불러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며 기쁨으로 잔치를 베푼다. 이 비유에서 얻는 교훈 *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 비유 속에는 하나님의 우리에서 벗어난 양이 비록 한 마리일지라도 못 본 체하여 버려 두거나 방임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보증이 있다. 누구든지 구속함을 받기 위하여 주께 마음을 바치는 자를 그리스도께서는 타락의 구렁텅이와 죄의 가시밭 속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목자가 자기 양을 사랑하고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한 무한히 큰 사랑으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영혼들을 사랑하신다. 사람은 비록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릴 수도 있고, 그에게서 멀리 떠나갈 수도 있고, 또 다른 주인을 택하여 섬길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찾고자 열망하신다. 비유에 나타난 목자는 한 마리의 양, 곧 가장 적은 숫자의 양을 찾기 위하여 나아갔다. 그러므로 비록 잃어버린 영혼이 단 한 사람뿐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한 영혼을 위하여 죽으셨을 것이다. 우리에서 벗어난 양은 모든 양들 가운데서 가장 가련한 양이다. 이 양은 목자가 찾아오지 아니하면 혼자서는 돌아오는 길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도 이러한 양과 같다. 그는 마치 길 잃은 양처럼 가련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구하러 가지 아니하면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결코 찾을 수 없다.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과연 하나님께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를 당신의 앞에 나오도록 용납하실까”하고...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나서셨다. 우리 죄인들이 그분을 배반하고 있는 동안도 그분은 우리를 찾으러 나가셨다. 그분은 목자와 같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아흔 아홉마리를 뒤에 남겨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들로 나가셨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의 팔로, 터지고 상하여 거의 죽게 된 영혼을 안아 몹시 즐거워하며 안전한 우리로 가신다. 곁길로 나갔던 양을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에 잔치를 베푼 목자의 기쁨은, 곁길로 나가 방황하는 자들을 찾았을 때에 있는 하늘과 땅의 기쁨에 비유된다. * 잃어버린 지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러나 이 비유는 더욱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잃은 양은 한 사람의 죄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배도하여 죄로 멸망하게 된 한 세계를 대표한다. 이 지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광대한 우주에 비해 지극히 작은 한 개의 원자(原子)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타락한 작은 세계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으로써 우리에서 벗어나지 아니한 아흔아홉보다 더욱 귀중한 것이다. 하늘에서 사랑받는 사령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잃어버린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계시던 그 영광을 버리시고 그 높은 자리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는 이 세상을 위하여 하늘에 있는 죄 없는 세계들, 즉 당신을 사랑하는 아흔아홉을 뒤에 두시고, “우리의 허물을 인”(사 53:5)하여 “찔림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함을 받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을 주신 것은 잃어버린 양을 도로 찾는 기쁨을 얻으려 하심이었다. 얼마나 큰 사랑인가! 2.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8~10) 비유에 나타난 상징 * 여인: 잃어버린 죄인을 찾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 은전: 잃어버린 죄인 * 잃어버린 은전은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된 줄을 모르는 죄인을 가리킨다. 비유의 이야기 예수께서 하신 또 하나의 비유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은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동양에서 가난한 사람의 집은 대개 방이 하나뿐이었고 흔히는 창이 없고 방이 어두웠다. 그런 집에서는 방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방바닥에 떨어진 돈은 곧 먼지와 쓰레기에 덮여 버렸다. 그래서 만일 잃어버린 돈을 찾으려면 대낮에도 촛불을 켜고 집을 부지런히 쓸어야 했다.
예수님 당시 신부의 결혼지참금은 대개 돈이었는데, 그는 그 돈을 자기의 가장 아끼는 소유물로 여기고 잘 보존했다가 자기 딸에게 다시 물려주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돈 중의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큰 재난으로 간주되었으며, 그것을 다시 찾게 될 때에는 이웃 부인들까지도 다 같이 기뻐할 만큼 큰 기쁨이 되곤 했다.
이 비유는 앞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찾으면 무척 기뻐할 수 있는 어떤 물건을 잃어버린 데 대한 비유이다. 그러나 이 두 비유는 같지 않은 계급을 대표한다. 잃어버린 양은 자기가 잃어버림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 양은 목자와 양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 길을 잃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다. 잃어버린 양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고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는 자들로서, 심한 시험에 싸여 있는 자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잃어버린 은전은 허물과 죄로 잃어버림을 당했으나 저희가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표상한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 저희의 영혼이 위태한 가운데 있으나 저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다.
이 비유의 이야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요구에 무관심한 태도를 가진 자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찾아야 할 대상들이다. 이 비유에서 얻는 교훈 * 잃어버린 자를 향한 열심
은전은 집안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다. 비록 그것이 매우 가까운 곳에 있으나 그것을 찾으려면 부지런히 찾아야만 한다. 먼지와 쓰레기 속에 묻혀 있지만, 은전은 역시 은전이다. 그 소유자가 그것을 애써 찾는 것은 그것이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사람이 죄로 인하여 몹시 타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이 매우 귀한 존재들이다. 돈에 통치자의 화상과 글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창조되던 당시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죄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러한 흔적이 손상되고 희미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각 영혼에게는 그것이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영혼을 회복시켜 그들에게 의롭고 거룩한 당신의 형상을 재생시키고자 하신다.
비유 가운데 여인은 잃어버린 돈을 열심히 찾았다. 그는 촛불을 켜고 방을 쓸었다. 그 여인은 찾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다 걷어 치웠다. 비록 하나만 잃었을지라도 그 여인은 그 하나를 찾을 때까지 쉬지 않고 찾았다. 이 비유에는 가정에 대한 교훈도 들어 있다. 우리 가족들 가운데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도 가정 안에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선물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해야 되겠다고 염려하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
가정에서 만일 한 가족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그를 찾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부지런히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생활 습관을 살피고 잃어버린 사람으로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무슨 잘못이나 가정 처리법에 어떤 결점은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가족 중에 자기의 죄된 상태를 깨닫지 못하는 자녀가 있으면 부모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촛불을 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그 성경 빛으로써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부지런히 살펴서 그 자녀가 왜 잃어버린 바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저희 자녀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은 부모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사이다. 이 일은 참을성 있게 하는 수고와, 일생 동안 부지런하고 끈기 있는 노력이 요구된다. 은전을 잃어버린 여인은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찾았다. 이와같이 부모들도 사랑과 믿음과 기도로써 저희 가정을 위하여 일하여야 할 것이다. *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잃어버린 은전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과연 그것을 찾고 있는가? 우리는 매일같이 종교적 사물에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과연 그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영적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그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는가?
한 영혼의 가치를 누가 능히 평가할 수 있을까? 만일 그대가 항 영혼의 가치를 알고자 하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핏방울과 같은 땀을 흘리시면서 몹시 고민하시던 모습을 주목하여 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보라. 상처를 입은 머리와 찔린 옆구리와 상한 발을 바라보라. 그리스도께서는 한 명의 죄인을 위해서라도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간다면 거기서 그대는 한 영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될 것 같으면 그대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평가하신 것처럼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대하여 품으신 사랑과 같은 깊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된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두시며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찾고 계신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사랑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하늘에서는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모두 즐거워하며 스랍과 그룹들은 금 거문고를 타며 인간 자녀들에게 베푸신 자비와 인자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찬양을 돌린다.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자!
3부-탕자의 비유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11~32). 성경이나 설교 예화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곧잘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한 비유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놀랍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비유는 바로 “탕자의 비유” 이야기이다. 이 “탕자의 비유”에는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집을 나간 방탕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간절한 심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 비유의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느끼며 감탄하게 된다. 다음은 그 비유를 편지로 각색해 본 것이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한번 쯤 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아들을 기다리는 어떤 아버지의 편지 사랑하는 아들아! 아직도 나는 그 날을 기억한다! 인사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채, 커다란 가방을 손에 들고 네가 총총히 집을 떠나가던 그날을... 이 아빠 엄마와 형, 우리 네 식구가 가졌던 아늑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그리고 또 아무 부러울것 없이 다 가지고 누렸던 풍족함과 안정을 무겁고 부담스러운 제재와 지루함으로 몰아 부치며, 자유를 향해 떠나겠노라고 유산을 받아 쥔 채 바람처럼 집을 나서는 너의 모습은 내겐 충격 그 자체였다! 내 사랑이 정말 그렇게도 네게 아무 의미없는 것이었더냐?... 정말 나의 사랑이 그렇게도 너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느껴졌더냐?... 따뜻한 가정과 함께 나누던 그 사랑스럽던 교제들이 진정으로 너를 숨막히게 하는 구속으로 여겨지더냐?... 그렇게 차가운 얼굴이 되어서 이 애비의 손을 뿌리치고 떠날 만큼?... 네가 떠난 뒤로 뒷 숲에서 노래하던 구구새의 노래 소리는 슬픈 흐느낌으로 변하고, 정원의 흐드러진 꽃들의 화려한 빛깔도 의미없는 퇴색함으로 이 애비에게는 다가온다. 함께 대화를 즐기며 가지던 주말저녁 식사 때가 오면, 그리고 식탁 가득히 차려진 맛있는 음식, 그 중에서도 네가 좋아하던 음식이 상위에 올려진 것을 보면, 나는 슬며시 수저를 놓고 멀리 네가 떠난 산등성이를 바라다 본다. 눈가에 이슬이 맺혔는지, 산등성이 고갯길이 흐려져 뿌옇게 보이고, 방금이라도 네가 “아버지!”하고 부르며 나타날 것만 같아 귀를 곧추 세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지내는지...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도 문을 열어 놓고 잠든다. 새벽에라도 혹시 네가 돌아왔다가 잠긴 문을 보면 두드릴 용기가 없어서 다시 돌아갈까봐... 그동안, 수 많은 날들 동안 뒤척이며 밤을 지샜다만, 내가 자꾸 그러면 네 엄마가 더 신경을 써서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이제는 네 엄마 곁에서 잠든 척하다가 네 엄마를 재워 놓고는 슬며시 빠져나와 새벽녘이 될 때까지 별을 세며 너를 기다리곤 한다. 너 생각나니? 네가 어렸을 때 이 아버지와 함께 별을 세며 하던 말 말이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아빠를 모시고 별나라를 여행시켜 드리겠다고 하던...아무리 세어도 끝이 없는 별을 세다가 내 품에 살며시 잠든 너를 안고 오던 감촉이 아직도 팔에 느껴지는구나! 그 별은 아직도 높이 떠서 나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내 팔이 허전한거냐?... 너도 혹시 저 별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젯밤에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 하고 부르며 네가 들어서는데, 어찌나 그 미소가 아름답던지!... 너를 번쩍 안으려는데, 깨니 꿈이었다. 잠깐이라도 네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포근했는지... 그러나 한편으로 얼마나 더 허전하던지!... 얘야! 베고 자는 배개는 편안하니? 너는 유난히 푹신한 베개를 좋아했지!... 아직도 네 방에는 네가 좋아 하던 책, 모아 놓은 그림들, 그리고 네가 베고 잠들던 푹신한 베개가 주인을 기다리며 덩그마니 놓여 있다. 아들아! 오늘도 네 방에 들어와 네가 떠난 뒤로 언제나 그랬듯이 불을 켜 놓는다. 그리고 네가 없는 책상을 행여 먼지라도 앉을까 손으로 쓸며 마음 속으로 기원해 본다. 네가 어서 속히 돌아 오기를... 그리고 돌아오면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그냥 옛날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살거라고... 너는 영원히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네가 돌아오기를 매일 손꼽아 기다리는,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이 비유에서 배우는 교훈 1. 죄의 처참한 결과
성경에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롬 1:22) 된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바로 비유 중에 나오는 탕자의 경력(經歷)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째 아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한 그는 자기의 기분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 청년은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대한 감사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아들로써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특권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 몫으로 받게 될 유산을 지금 받기를 원했다. 그는 현재의 낙을 누리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장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부모에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 집에서 떠나 “먼 나라”로 갔다. 돈을 넉넉히 가지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 이 젊은이는 자기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 곳에는 그렇게 하면 네게 해가 될 터이니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이것이 옳은 일이니 이 일을 하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악한 동무들은 그로 하여금 더욱 큰 죄에 빠지도록 부추겼다. 그리하여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물을 허비”하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이기적인 목적으로 달라고 해서 받은 유산과 재물을 방탕하는 일에 다 허비해 버렸다. 그의 귀중한 청춘은 허송되었고, 인생의 중요한 시기와 지력(智力), 그리고 젊은이의 유망한 전도와 영적 포부,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정욕의 불꽃에서 소멸되었다. 그런데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그는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유대인에게는 몹시 천한 직업인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한때 자기가 자유롭게 되었다고 뽐내던 이 젊은이는 지금에 와서 자기가 노예가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를 매혹시키던 찬란하고 번쩍거리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 와서는 속박의 쇠사슬의 무게에 눌리게 되었다. 돼지 외에는 다른 아무 친구도 없는 쓸쓸하고 흉년이 든 그 지방에서 그는 땅 위에 홀로 앉아 배가 너무 고파서 짐승이 먹는 팥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 그가 잘 살때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돈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던 친구들 중에 그의 친구로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허랑방탕하며 즐기던 오락은 이제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는 전에 자기의 양심을 달래고 감각을 마비시키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배도 고프고 그의 자만심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도의심은 위축되고 의지력은 약해져서 믿을 수 없게 되고, 그는 인간 중에 가장 가련한 자가 되었다. 여기에 묘사된 죄인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한가! 비록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둘러싸여 살지만 방종과 죄악적 쾌락에 몰두하는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는 것만큼 슬픈 일이 없다. 죄인은 감사하지 않은 탕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을 마치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권리로 생각하고 주장한다.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감사도 돌리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사랑의 봉사도 하지 않는다. 가인이 자기의 살 곳을 찾기 위하여 여호와 앞을 떠나간 것처럼, 또는 탕자가 “먼 나라”로 떠나간 것처럼 죄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롬 1:28). 2.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도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선택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아직도 그러한 사람을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감화를 끼치고 계시다. 가련한 형편에 빠진 탕자는 자기의 고생이 자기의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깨닫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말한다. 탕자는 비록 가련한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와같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강권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보증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은 금 쇠사슬이 되어 위기에 처해있는 모든 영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주께서는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고 말씀하셨다. 이 방탕했던 아들은 피곤하고 무거운 발을 끌면서 고향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에도 한 분이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 “상거가 먼데”도 그의 부친은 아들의 모습을 분간했다. 사랑은 눈을 밝게 한다. 여러 해 동안의 죄된 생애로 초췌해졌을지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눈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몰라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사랑의 팔로 그 아들의 목을 오랫동안 꼭 안고 있었다.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가정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아들이요 수종하는 남녀 종들의 존경과 섬김을 받아야 할 아들이었다.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조소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 그 아들은 자기의 과거가 용서함을 받고 잊어버린 바 되었으며 영원히 그의 죄가 도말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도 죄인에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사 44:22),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고 하신다. 3. 영접하시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마치 탕자처럼 죄인이 일어나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그분께서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를 영접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디딘다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그대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트는 그 순간에 그분은 그것을 아신다. 기도가 아무리 더듬거리고 눈물을 아무리 은밀하게 흘릴지라도 그분은 아시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마중 나가지 아니하시는 때는 없다. 기도가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마음의 소원이 알려지기도 전에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은혜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는 은혜를 만나기 위하여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우리의 천부께서 죄로 더럽혀진 옷을 우리에게서 벗기시고 새 옷을 주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마치 스가랴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비유적 예언처럼 주께서는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슥 3:4, 5)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구원의 옷” (사 61:10)으로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입히실 때, 우리는 마치 “양우리에 누”운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시 68:13)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될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집나간 방탕한 아들을 기다린 아버지의 사랑은, 그리고 돌아오자 아무 꾸중없이 덥석 아들을 안아 받아들이며 가장 좋은 옷과 반지를 끼우고 다시 아들됨을 인정해주는 아버지의 놀라운 자비의 모습은, 늘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비유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고 언어와 국경의 차이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할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그분의 사랑을 가장 잘 깨닫게 해주는 최고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되고 있다.
4부-마음의 변화가 필요한 사람을 위한 비유
하나님께서 우리 형편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변화시켜서 하늘에 적합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 그리고 그렇게도 냉냉하고 굳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신비이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이루어낼 수 없다. 이것은 하늘에서 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는 마음의 거듭남과 변화의 필요성, 그리고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의의 품성을 입어야 할 것에 대해 실례를 들어 말씀하신 이야기들이 있다. 그 비유들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참된 마음의 상태를 진단해 보자. 1. 누룩의 비유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 13:33). 비유에 나타난 상징 누룩: 하늘나라, 또는 영혼을 소생시키고 동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상징한다. 이 비유에서 얻는 교훈 * 누룩의 작용 = 은혜의 역사 유대인들은 때때로 누룩을 죄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유월절이 되면 사람들은 저희의 마음속에서 죄를 없이 하듯이 저희 집에서 모든 누룩을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 비유 가운데서 누룩은 하늘나라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동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예시하고 있다. 이 능력이 역사할 수 없을 만큼 그처럼 극악하고 타락하고 저속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는 사람 속에는 새로운 생명이 심어져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된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써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사람은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능력을 갖지 못했다. 전적으로 밖에 있는 누룩을 가루에 넣어 섞지 아니하면 기대하는 변화가 생길 수 없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죄인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이룰 수 없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차원 높은 모든 교양과 교육을 가지고도 죄인을 하늘의 자녀로 변화시킬 수 없다. 갱생시키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변화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변화함과 구원을 얻기 원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은 성령의 역사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루 속에 넣은 누룩이 속에서부터 부풀게 하는 작용을 일으켜 점차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역사도 먼저 마음속이 새로워짐으로 이루어진다. 외적인 개선만으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런 악습, 저런 악습을 교정함으로 품성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먼저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은혜의 역사 = 성령의 역사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마음속에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우리는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이 먼저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거듭남의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가루 속에 감추인 누룩은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그 모든 가루를 부풀게 만든다. 이와같이 진리의 누룩도 사람이 모르게 조용히, 끈기 있게 마음을 변화시킨다. 타고난 본성이 부드러워지고 억제된다. 새로운 사상과 감정과 동기가 심어진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새로운 품성의 표준으로 세워지게 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흔히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노라고 주장하는 데도 그들의 말과 정신과 품행에 전혀 변화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데 그 까닭이 무엇인가? 또 자기의 목적과 계획에 대한 반대를 참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품성을 나타내며, 말이 거칠고 거만하고 툭하면 성을 잘내는 자들이 많이 있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생애에서 세상 사람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일과 이기심과 급한 성미와 성급한 말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처럼 자만하기를 잘하고 선천적인 못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괴벽한 품성을 자주 나타내는 것을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듭나지 못한 까닭이다. 그들은 진리의 누룩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 그 누룩이 작용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들의 선천적 또는 후천적인 나쁜 성벽이 누룩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굴복되지 않았다. 그들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결핍, 즉 품성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나타낸다. * 진리의 누룩 = 하나님의 말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성경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연구하고 지키면 마음속에 작용하여 모든 거룩하지 못한 성벽을 복종시킨다. 성령께서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마음속에 생긴 믿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역사하게 되어서 우리의 몸과 영과 혼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된다. 성경의 진리는 사람의 가장 큰 필요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심령의 거듭남”을 이루게 해 준다. 이 진리는 우리 생애의 크고 작은 온갖 일에 침투되어야 한다. 진리의 누룩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고, 우리의 사상을 순결하게 하고, 우리의 성미를 부드럽게 한다. 그것이 또 우리의 정신력을 소생시키고 심령에 힘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과 사랑하는 능력을 넓혀 줄 것이다. 구속하시는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그 사랑이 다른 모든 동기를 정복해서 그 사랑의 소유자로 하여금 세상의 부패한 감화를 초월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갖는 인간 가족들과의 모든 교제에 거룩한 감화를 끼쳐야 한다. 진리의 누룩은 경쟁심이나 야심이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않는다. 하늘로부터 온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거나 변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은 사람의 칭찬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들의 심령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기쁘게 해주거나 자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감사히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산 소유물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들은 자신의 동기와 말과 행동이 오해를 받거나 오전(吳傳)된다 할지라도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따라간다. 그는 친절하고 사려깊고 자신에 대해 겸손해 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신뢰하고 소망에 가득 차 있다. 진리의 누룩은 사람 전체를 변화시켜서 거친 행동은 세련되게 되고, 난폭한 기질은 온순해지며 이기심은 관대하게 된다. 진리의 누룩으로 말미암아 순결치 못한 자가 어린양의 피에 씻음을 받아 깨끗하게 된다. 생명을 주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과 힘을 신령한 생애와 일치되도록 해줄 것이다. 그리하여 인성을 가진 사람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이러한 우리의 성품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이런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보고 천사들은 말할 수 없이 기쁜 노래를 부르게 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도 그분의 품성을 닮은 영혼들을 인하여 몹시 기뻐하시게 된다. 2.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의 비유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2~13) 비유에 나타난 상징 * 임금: 복음의 초청을 보내시는 하나님 * 첫번째와 두번째 초청을 받은 사람들: 유대인 * 세번째 초청을 받은 사람들: 이방인 - 복음의 초청이 이방인에게로 감 *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진멸함: 예루살렘의 멸망과 형벌 * 예복: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가 가져야 할 합당한 품성 * 임금이 손님의 예복을 검사함: 하나님의 심판사업을 표상함 비유의 이야기 예복에 대한 비유는 가장 중요한 공과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혼인잔치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을 표상하고 있으며 예복은 혼인 잔치에 참석할 자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합당한 품성을 표상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복음의 초청과 유대인의 거절, 또한 이방 사람에게 보내는 자비의 초청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초청을 거절한 자들이 주인에게 큰 모욕을 돌릴 것과 그들에게 무서운 형벌이 임할 것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복음의 초청을 받아 들인 사람이 갖추어야 할 품성의 중요성과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 복음의 초청 맨 처음 잔치에 오라는 초청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 우리 주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내시고 그 후에 칠십인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기별을 전하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요청을 하셨다. 그러나 그 초청에 유의하는 사람이 없었고 청함을 받은 자들은 오지 않았다. 잔치에 오라는 초청은 왕이 한 것으로 이러한 초청을 받은 자들에게는 더없는 영광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영광은 감사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왕의 권위는 멸시를 받았다. 그리하여 다시 종을 보내어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하는 기별을 보냈다. 이 기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유대인들에게 보낸 기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나라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보내 주신 복음을 거절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복음을 몹시 멸시하는 태도로 거절하였다. 그들은 왕의 종들을 멸시하고 학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였다. 사람들은 구원이 제공되었다는 것과 영광의 주를 거절한 죄를 용서해 준다는 것에 격분하여 기별을 전하는 자들을 대적하였다. 그 때 “큰 핍박”(행 8:1)이 있게 되었는데, 남녀를 막론하고 신실한 주의 제자들이 옥에 갇히게 되었고, 스데반과 야고보 같은 주님의 사자들 중 몇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자비를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 그 결과가 그리스도의 비유 가운데 예언되어 있다.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이 유대 민족에게 선고된 형벌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백성들이 열방에 흩어진 사실로써 성취되었다. 잔치에 오라는 세번째 초청은 복음을 이방 사람들에게 보낼 것을 표상한 것이다. 임금은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말하였다. 큰 거리에 나간 임금의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왔다. 이 무리는 섞인 무리였다. 이렇게 복음의 초청은 누구에게나 주어졌다. 이 비유에서 배우는 교훈 * 초청과 예복 그러나 이 비유의 중요한 포인트는, 누구든지 초청을 받아서 왔지만 그 잔치에 참석할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준비가 있다는 것에 있다. 이 준비를 등한히 한 사람들은 쫓겨났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왔을 때에 각 사람의 본성이 드러났다. 그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손님을 위하여 예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예복은 임금이 마련하신 선물이었고, 그 당시 초청장을 보낼 때 예복이 함께 배달되었다. 손님들은 이 예복을 입음으로써 잔치를 베푼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이 평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임금이 요구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는 비싼 값을 주고 마련한 그 예복을 입는 일을 창피스럽게 여겼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그의 주인을 모독하였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는 임금의 질문에 대하여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임금은 종들에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명했다. * 예복을 조사함 잔치 자리에서 임금이 손님을 심사하는 일은 심판을 표상한다. 복음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며, 생명책에 저희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다 참된 제자는 아니다. 최후의 상급을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는 그가 줄 상이 그에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실”(계 22:12)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각 사람의 행위가 결정될 것이며, 그것에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각 사람의 상벌이 결정될 것이다. 하늘에서 진행되는 조사 심판은 사람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행해진다.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다 심사를 받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하늘 책에 기록된 대로 심사를 받게 되고 그의 행위에 따라 각 사람의 운명이 영원히 결정된다. * 예복이란? 비유 가운데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순결하고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성경에는 이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홈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이 순결한 흰 두루마기는 본래 우리의 시조가 거룩한 에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것이다. 이 빛의 두루마기는 하늘의 순결한 영적 옷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한 생애를 살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빛이 그 거룩한 부부를 둘러쌌다. 만일 저희가 하나님께 충실했더라면 그 빛의 두루마기가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저희를 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고 그들을 둘렀던 빛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림으로 하늘의 옷을 대신하려 했다. 저희는 저희 자신이 만든 옷을 입었다. 저희 자신의 행위로써 저희 죄를 가리우려 했고 저희 자신을 하나님께 가납되게 하려 했다. 사람들은 저희가 잃어버린 순결한 두루마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그리스도와 천사들과 함께 앉을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이나 세상 나라 백성들이 입는 옷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신 옷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옷, 곧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입혀 주실 것이다. * 예복을 입는다는 뜻 하늘 베틀로 짠 이 예복에는 사람이 만든 실은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 인성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품성을 나타내셨고 이 품성을 우리에게 나눠 주신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다.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죄로 더럽혀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되었고, 또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다(요일 3:5). 죄는 “불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계명을 지키셨다. 그는 당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 주시는 의와 은혜와 능력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 만든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임금의 심사를 받았다. 그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크신 하나님 앞에서 정밀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만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품성은 우리의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믿음의 진실된 여부를 보여 준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는 것만으로 넉넉지 않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신의 성품을 나눠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의의 표준, 곧 그분의 거룩한 계명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계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헤아릴 때 사용하는 표준이다. 이것이 심판 때에 사람의 품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예복, 곧 의의 옷을 입는다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해지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리하면 주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이나 죄로 인해 벌거벗고 뒤틀린 우리의 몸은 보지 아니하시고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당신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를 보게 된다. 풍부한 영적 만찬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무한한 대가를 치르고 마련된 예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자유와 성령의 안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생에 대한 확실한 보증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어야 할 때는 오직 이 세상에 사는 동안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하늘 집에 들어가기 위하여 품성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 사는 동안뿐이다. 우리를 위한 은혜의 시기는 빨리 끝나려 하고 있다. 끝은 가깝다. 그 날에 우리가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임금의 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5부-진리를 찾는 사람을 위한 비유
세상에는 진리를 찾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구원과 영생을 사모하고 갈급하며 진정으로 진리를 발견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과 진리를 찾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진단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진실된 사람들이 진리를 갈급하여 찾기는 찾으나 그들의 대부분이 그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임으로 인해 오는 완전한 평화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진리는 그들을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가 되지 못하고 만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진리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파헤치시는, 그래서 그들이 진정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흥미로운 비유를 말씀하셨다. 제 5부에서는 그 비유들 중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하여 공부해 보기로 한다. 씨 뿌리는 비유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3-8).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많은 군중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심과 기대를 가지고 갈릴리 바닷가로 모여들어 있었다. 그 해변 일대에는 아름다운 게네사렛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에는 산들이 솟아 있었고 산비탈과 들에는 농부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씨를 뿌리고 있었으며 다른 이들은 이른 철에 나는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비유에 나타난 상징 * 씨: 하나님의 말씀 * 씨뿌리는 자: 진리를 뿌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 밭: 사람의 마음
비유의 이야기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대해 설명하셨을 뿐 아니라 진리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에 대하여, 그리고 크신 농부로써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자신의 사업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는 밭에서 씨를 뿌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 그 자체가 곧 씨앗이었으며 그는 이 씨로써 가장 귀중하고 은혜로운 진리들을 심으셨다. 이 비유에서 얻는 교훈 * 씨 뿌리는 자 동양에서는 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폭행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성안에 살고 있었다. 농부들은 매일 그 성밖에 나가 일했다. 그와 같이 하늘의 농부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나오셨다. 그는 평화스럽고 안전한 하늘 집과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을 버리시고 우주의 보좌를 떠나오셨다. 그는 괴로움과 시험을 받는 한 인간으로써 쓸쓸하게 이 땅에 오셔서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눈물로 생명의 씨를 뿌리시고 당신의 피로써 물을 주셨다. * 씨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이다. 씨앗마다 그 자체 속에 발아력이 있다. 그 씨앗 속에는 그 식물의 생명력이 들어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생명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5:2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과 품성을 받는 것이다. 씨마다 그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 씨가 올바른 조건하에 심어지면 곧 발아해서 그 식물 속에 있는 자신의 생명을 자라게 한다. 그와 같이 믿음으로 마음속에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의 품성과 생명이 그 사람의 생애 속에 실현될 것이다. * 길가에 떨어진 씨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마 13:19).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취급하고 있는 주된 문제는 씨가 뿌려진 땅이 씨의 발아와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이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듣는 자의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고 있다. 마치 사람이나 짐승의 발에 밟혀 단단해진 길과 같이 그들의 마음은 세상적인 거래와 쾌락과 죄가 난무하는 대로가 되어 있다. 이 밭은 이기적인 목적과 죄악적인 방종에 몰두 된,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히 3:13)된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그들의 영적 기능은 마비되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저희의 부족과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기별을 마치 저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간과해 버린다.
마치 새가 길가에 떨어진 씨를 재빨리 주워 먹는 것처럼 사단도 우리 심령에서 진리의 씨를 빼앗아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관심한 자들의 심령을 깨우치고, 완고한 자들의 마음에 감화를 끼칠까 두려워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도록 힘쓰는 반면에 사단은 그 말씀이 아무 효과도 나타내지 못하도록 재빨리 활동한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계략으로 점령해서 비평하게 하고 의심과 불신을 갖도록 조장한다. 설교자의 말과 태도가 청중의 마음에 맞지 않을 때 그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의 결점만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 주신 진리, 곧 그들에게 꼭 필요한 진리가 지속적으로 그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런 밭에 뿌려진 씨는 뿌리를 내릴 곳이 없으므로 사단이 그것을 빼앗아 간다. 그것은 길가에 뿌려진 씨이다. * 돌밭에 떨어진 씨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0~21). 돌밭은 흙이 깊지 못하다. 싹이 곧 나기는 하나 그 뿌리가 돌을 뚫고 들어가 필요한 양분을 섭취할 수 없으므로 얼마 안 가서 말라 죽는다. 믿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돌밭 청중이다. 선천적인 이기심이 땅속에 깔린 바위처럼 그들의 선한 욕망과 포부의 밑 바닥에 깔려 있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죄가 얼마나 흉악한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죄를 자각하고 겸손해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쉽사리 진리를 확신하고 겉으로는 유망한 신자처럼 보이나 그들이 가진 믿음은 피상적일 뿐이다. 이 돌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에 의해서 지적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받기는 하지만 거기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는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생활 습관을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하여 보고 자신을 전적으로 그 말씀의 지배에 맡기지 않는다.
식물의 뿌리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식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분을 빨아들여 식물 각 부분에 보낸다. 영적 생명이 영양 공급을 받는 것도 믿음을 통해서 사람의 심령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연합을 유지함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밭 청중은 그리스도 대신에 자신을 의지한다. 그들은 저희의 행실과 순간적인 선한 생각을 의뢰하고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강하지 못하며 그의 굳센 능력 안에서 강건하지 못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속에 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햇볕은 튼튼한 곡식은 강하게 하고 잘 익게 하지만 뿌리가 깊지 못한 곡식은 시들게 만든다. 이와같이 “뿌리가 없는 자는”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 많은 사람은 복음을 받지만 그들이 죄에서 구원을 얻기보다는 고통을 피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종교가 저희를 고난과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얼마 동안 기뻐한다. 그들은 생활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일지 모르나 풀무불의 연단과 같은 어려운 시험을 받게 될 때에는 엎드러지고 만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품고 있는 어떤 죄를 지적하거나 그들에게 극기와 희생을 요구하게 될 때 그들의 감정은 몹시 상한다.
그들의 생애에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큰 노력이 요구된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불편과 시련만을 보고 영원한 사물을 잊어버린다. 그럴 때 그들은 예수를 떠난 제자들처럼 서슴지 않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성령의 깊은 감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기호에 따른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저희의 구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그가 저희에게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실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계신 구주와 개인적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의 품성은 선천적인 결함과 후천적인 결함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거듭나야 한다. 진리의 이론이나 그의 제자라는 공언만으로는 어떤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목적 의식이 약해지고 갈망이 늘 변하는 것은 전심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를 겸하여 섬기려는 노력은 결국 우리로 돌밭 청중이 되게 할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시험이 이를 때에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복음의 씨는 가끔 가시떨기와 잡초 속에 떨어지는 수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덕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종래의 습관과 행위와 죄된 생애를 버리지 않고, 또한 사단의 특성들을 심령 속에서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발아된 씨는 질식될 것이다. 가시가 돋아나서 그 곡식을 덮어 마침내 다 죽게 만들 것이다.
귀한 진리의 씨를 받기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는 마음속에서만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잘 자라날 수 있다. 죄의 가시떨기는 어떤 땅에서든지 자란다. 가시떨기는 가꾸어 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곡식은 반드시 잘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 가시는 언제나 빨리 자라게 됨으로 제초하는 일이 늘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지배하에 두지 않거나 성령이 끊임없이 품성을 세련시키고 고상하게 하지 않으시면 옛 습관은 우리의 생애 속에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죄를 이기지 않으면 죄가 저희를 이기게 된다. 가시떨기를 잘라 버렸을지라도 뿌리가 뽑히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것이 다시금 속히 자라서 그 덩쿨이 영혼을 덮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을 위태롭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 주의를 주셨다. 마가는 그것들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욕심과 다른 모든 물욕이라고 말했고, 누가는 이 세상의 염려와 부와 쾌락을 열거하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고 영적 씨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사람의 심령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그의 영성은 사멸해 버린다. A. “세상의 염려”- 어떤 계층의 사람들을 막론하고 세상의 염려로 시험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역(苦役)과 빈곤과 궁핍의 염려가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또 무거운 짐이 된다. 부자에게는 재물을 잃어버릴 염려와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들의 꽃에서 배우라고 그분께서 당부하신 공과를 잊어버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보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의 짐을 그리스도께 맡기지 아니하므로 그분은 저희의 짐을 지실 수 없다. 그리하여 생활의 염려가 그들로 그리스도께 가서 도움과 위안을 얻도록 하는 대신에 그것들이 오히려 그들로 그분에게서 떠나게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재물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의 모든 정력을 그들의 사업에 바치게 되어 자연히 영적 사물을 등한히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희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해야 하고 사업에도 종사하여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업에 너무나 열중하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도, 성경을 연구할 시간도 없고 하나님을 찾아 섬길 시간도 없다. 때때로 그들의 심령이 성결하게 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떠나 장엄하고 위엄 있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시간이 없다. 영원한 사물은 부차적이 되고 세속적인 사물이 으뜸으로 삼아진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심령의 활력이 세속의 가시떨기를 자라게 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B. “재리의 유혹”- 재물에 대한 사랑에는 사람을 호리고 기만시키는 힘이 있다. 흔히 세상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저희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린다. 저희의 재물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는 대신에 저희 자신을 높이게 한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을 섬기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사용된 재물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특성을 계발시키는 대신에 사단의 특성을 조장한다. 그리하여 말씀의 씨는 가시떨기에 덮이어 기운이 막히게 된다. C. “이생의 일락”- 자기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추구하는 오락에는 위험이 있다. 체력을 약화시키고, 정신을 흐리게 하며, 영적 식별력을 마비시키는 모든 방종의 습관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벧전 2:11)이다. 이것은 조수와 같이 밀려드는 유혹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교적인 오락과 경박한 환락에 몰두하게 되고,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과의 교제가 저희의 마음을 취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한 가지 형태의 방탕에서 다른 형태의 방탕을 즐기도록 인도되어 마침내는 보람 있는 생애를 보내기 위한 좋은 소질과 욕구를 잃어버리게 된다. 신앙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식어지고 그들의 영적 생애는 어두워진다. 심령의 모든 고귀한 기능들이 마비되고 사람을 영적 세계와 교통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력이 저하된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행해지는 인생의 게임에 사단은 근심과 재리와 쾌락 모두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주어졌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 16). 또 사람의 마음속을 펴놓은 책처럼 들여다보시는 그분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눅 21:34)질 것이라고 하셨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딤전 6:9). *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은 삼십배가 되느니라” (마 13:23).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써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비유 가운데 말씀하신 “착하고 어진 마음”은 죄가 없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자는 마음이 착한 자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필요를 느끼는 자이다. 그는 진리를 알고자 하고 그것을 순종하고자 진정으로 열망하는 자이다. 어진 마음은 믿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진 마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가 없다. 좋은 밭으로 표상된 청중은 그분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으로 받는 자들이다. 성경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는 자만이 참으로 배우는 자이다. 그는 그 말씀을 인해 떨게 될 것인데 이는 그 말씀이 그에게 생생한 현실(現實)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하려는 자세로 마음문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 한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청중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할 것이며, 사단이 자기의 모든 악한 부하를 총동원할지라도 능히 그 말씀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런데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성경에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에게 제시된 진리를 깊이 명상해야 한다. 그는 열심히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알고자 하고 그 거룩한 말씀의 깊은 의미를 맛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위대한 사상과 순결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라고 명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고, 구원의 대 경륜에 나타난 그분의 기이한 역사를 연구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마음의 순결과 사상의 명료함을 바라는 우리의 욕구가 더욱 고상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거룩하고 순결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심령은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것이다. “열매맺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행동 속에 나타날 것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과 생애가 그들의 품성과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고 말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유전과 후천적으로 이루어진 품성과 생활 습관 등과 충돌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계시된 모든 요구 조건을 다 받아들인다. 그러고는 그의 모든 습관과 관습과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킨다. 그는 유한하고 허물 많은 인간의 말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면 전혀 보잘것이 없다는 견해를 갖게 된다. 그는 전심을 다해 오직 한 가지 일념으로 영생을 구하게 되고, 모든 손실과 박해와 죽음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내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고난과 시험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환난이 올 때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불안해 하거나 불신하거나 낙망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사건의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없고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분간할 수 없지만 우리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윽한 자비를 기억하고 우리의 염려를 그분에게 맡기는 동시에 인내로써 그분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투쟁을 통하여 영적 생애는 힘을 얻게 된다. 시련을 잘 견디게 되면 그것이 견실한 품성과 보배로운 영적 미덕을 계발시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길이 참아 그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사람은 더욱 강하고 완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길이 참는 능력의 근원이신 자와 산 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거룩한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보통 사람과 같은 이기적인 생활을 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거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품성이 그들의 성품 가운데 재현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당신의 마음의 밭은 어떤 밭인가?...
6부-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한 비유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또는 우리의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빚을 지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를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신 비유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만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이해하기는 아주 쉽지만 실천하기는 아주 어려울 수 있는 이 비유를 함게 공부해 보자. 빚진 자의 비유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23~33). 비유에 나타난 상징 * 빚을 탕감하여 준 왕 : 예수 그리스도 * 빚진 자 : 우리 인간들 비유의 이야기 이 비유는 한 왕이 자기 나라의 국사를 맡아보는 신하를 처리한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당시 왕의 신하들 중 더러는 많은 국고금을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왕이 신하들에게 맡긴 돈의 관리 상황을 조사했을 때 한 사람이 일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빚을 진 것이 드러났다. 그는 왕의 앞에 끌려 나왔다.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었으므로 왕은 그 당시 풍습을 따라 그와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빚을 갚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 명령을 듣고 떨면서 왕의 발 앞에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고 탄원하였다. 탄원하는 신하를 불쌍히 여긴 왕은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용서를 받은 그 신하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에게 작은 액수의 빚을 진 친구를 만났다. 잠깐만 참아주면 갚겠노라는 친구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친구를 감옥에 넣고 말았다. 그 불쾌한 소식을 들은 왕은 그 신하가 자기의 친구에게 대접한 그대로 그 신하에게 대접해 주었다. 이 비유에서 얻는 교훈 * 왕의 용서 이 비유에서 왕이 베푼 용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나타낸다. 종을 불쌍히 여기고 빚을 탕감해 준 왕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사람은 율법을 범함으로 인하여 죄의 선고 아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가리우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며, 각 사람에게 피로 사신 용서를 값없이 제공해 주신다. 비유 가운데 빚진 자가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는 약속을 하면서 연기해 주기를 간청했을 때, 그에게 내린 선고는 취소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빚이 완전히 탕감되었다. * 동료에게 나타내는 우리의 정신 그런데 왕으로부터 그처럼 자비로운 대우를 받고 탕감을 받은 그 신하는 자기 동관을 전연 딴판으로 대접하였다. 그에게 빚진 동관은 그가 왕에게 탄원했던 것처럼 그에게 탄원했다. 그러나 바로 조금 전에 용서함을 받은 그 사람은 부드러운 마음이나 동정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베풀어 준 자비를 그의 동관을 취급하는 일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조금만 더 참아 달라는 동관의 호소에 유의하지 않았다. 이 은혜를 저버린 종은 마음속에 오직 자기에게 빚진 적은 금액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빚진 돈 전부를 갚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자기에게서 내렸다가 은혜스럽게 취소된 선고와 유사한 선고를 그에게 그대로 집행해 버렸다.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가! 그 빚진 자가 임금에게 자비로운 처분을 호소했을 때에 그는 자기의 빚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속절 없는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힘으로 그 빚을 갚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는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고 말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자기자신의 어떤 행위로 얻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능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받지 않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우려 한다. 죄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찢고 겸비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각박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 저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저희 형제가 그들에게 지은 죄와 비교한다면 일만달란트 대 백데나리온, 즉 거의 백만 대 일이나 되는 데도 저희는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 * 참된 용서 비유 가운데서 주인은 그 빚졌던 무자비한 종을 불러다가 말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에게 붙이니라.” 예수께서는 그와 같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고 하셨다.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그렇게 함으로 결국 자기의 용서의 희망을 내던지는 것이다. 주 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나와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취급할 때 우리가 바로 그같은 처지에 놓일 때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고 싶어하는 대접을 그들에게 해주어야 한다. 거듭거듭 죄를 범하는 자가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에 그 상대자는 싫증이 나서 너무 많이 용서하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짓고 있는 자를 취급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만일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거든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 형제가 우리에게 와서 죄를 자복할 때에 우리는 그의 겸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나 그가 진정으로 자복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하여 주신 숫자만큼 용서해 주어야 한다. * 우리는 모두 빚진 자 우리 자신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빚을 지고 있다.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이게 했다. 구주를 통해서 나타난 은혜가 우리의 구속과 중생을 이루게 하고 예수와 더불어 후사가 되도록 역사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죄에 빠진 자에게 낙심할 기회를 만들어 주지 말아야 한다. 바리새인과 같은 완고함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조금이라도 조롱하고 비웃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 억양에 있어서도 조롱하는 기색이 나타나지 않게 하자. 죄를 지은 영혼에게는 그의 마음을 감동시킬 동정어린 마음, 곧 맏형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형제가 필요된다. 그 영혼으로 하여금 자기를 굳게 붙잡아 주는 동정 어린 손길을 느끼게 하고 또 함께 “기도합시다”라는 속삭임을 듣게 하자!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과 그대 자신 두 사람 모두에게 풍성한 경험을 주실 것이다. * 예수를 바라 볼 때에 사람이 그들의 눈을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돌려 예수를 바라볼 때에 그들의 품성에 신령한 변화가 생긴다.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게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의 눈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만히 받고 누릴 때 비로소 남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어떤 것으로도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변명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용서를 체험하게 되면 죄인의 마음은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크신 마음에 가까이 끌리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동정의 조류는 죄인의 심령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에게서 다시 다른 사람의 심령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를 통해 친히 나타내신 동정과 자비는 또한 그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서도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모든 용서는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은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 당신은 용서했는가? 그러면 당신은 용서받은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