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루나와 설법.
우리 불교역사에 최초의 순교자 아닙니까? 爲法忘軀(위법망구)의 정신.
우리 부루나에게 배워야 되지요.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일이 전법ㆍ포교 입니다.
전법과 포교. 부루나는 정말 그 험한 수루나국 이라고 하는 나라에 전법하러 갔다가 그들로부터
살해를 당하게 되지요. 그야말로 “불교의 최초의 순교자다.” 그렇 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분이 말을 잘해서 설법제일이 아니라, 물론 말은 기본입니다만, 정말 법을 전하기 위한 순교정신이
너무 위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부루나를 그렇게 높이 받듭니다.
佛告富樓那彌多羅尼子(불고부루나미다라니자)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富樓那(부루나)가 白佛言(백불언)하대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하나이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於大林中(어대림중)에 在一樹下(재일수하)하야
爲諸新學比丘說法(위제신학비구설법)이러니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내위아언)하되
唯富樓那(유부루나)여 先當入定(선당입정)하야 觀此人心然後(관차인심연후)에 說法(설법)이니
無以穢食(무이예식)으로 置於寶器(치어보기)어다 當知是比丘心之所念(당지시비구심지소념)이니
無以琉璃(무이유리)로 同於水精(동어수정)이어다 汝不能知衆生根源(여불능지중생근원)인댄
無得發起以小乘法(무득발기이소승법)이니 彼自無瘡(피자무창)하니 勿傷之也(물상지야)어다
欲行大道(욕행대도)인댄 莫示小徑(막시소경)이니 無以大海(무이대해)로 內於牛跡(내어우적)하며
無以日光(무이일광)으로 等彼螢火(등피형화)어다 富樓那(부루나)여 此比丘(차비구)는
久發大乘心(구발대승심)이나 中忘此意(중망차의)어늘 如何以小乘法(여하이소승법)으로
而敎導之(이교도지)리오 我觀小乘(아관소승)하니 智慧微賤(지혜미천)이 猶如盲人(유여맹인)하야
不能分別一切衆生(불능분별일체중생)의 根之利鈍(근지이둔)이라하고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卽入三昧(즉입삼매)하여 令此比丘(영차비구)로 自識宿命(자식숙명)케하니 曾於五百佛所(증어오백불소)에
植衆德本(식중덕본)하야 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회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卽時豁然(즉시활연)하여 還得本心(환득본심)하고 於是(어시)에 諸比丘(제비구)가
稽首禮維摩詰足(계수예유마힐족)커늘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因爲說法(인위설법)하여
令阿耨多羅三藐三菩提(영아뇩다라삼막먁보리)에 不復退轉(불부퇴전)케하니 我念聲聞(아념성문)은
不觀人根(불관인근)하며 不應說法(불응설법)일세 是故(시고)로 不任詣彼問疾(불임예피문질)이니다
佛告富樓那彌多羅尼子(불고부루나미다라니자)하사대, 부처님이 부루나 미다라니자에게 고하사되,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그대가 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 좀하게.
富樓那(부루나)가 白佛言(백불언)하대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하나이다.
저도 그에게 가서 문병할 수 없습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왜냐하면 기억 하건대 옛날 옛적에
於大林中(어대림중)에 在一樹下(재일수하)하야, 큰 숲 가운데 한 나무 밑에 있으면서
爲諸新學比丘說法(위제신학비구설법)이러니, 新學比丘 들을 위해서 제가 설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내위아언)하되, 그 때에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씀하시기를
唯富樓那(유부루나)여, 여보시오. 부루나여
先當入定(선당입정)하고, 설법먼저 입정을 하고 그리고
觀此人心然後(관차인심연후)에 說法(설법)이라.
이 사람들의 마음을 관찰한 연후에 설법해라.
無以穢食(무이예식)으로 置於寶器(치어보기)어다.
더러운 음식으로써 보배로 만든 그릇에 담지 말라. 저 사람들은 보배야, 보배로 그릇이야.
그런데 당신 설법의 내용은 전부 아주 추한 더러운 음식이야. 보배 그릇에다 왜 더러운 음식 담느냐?
여기 소승법이라 는 것 입니다. 아~ 무서운 소리지요? 이렇게 소승 법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當知是比丘心之所念(당지시비구심지소념)이니,
마땅히 알아라. 이 비구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無以琉璃(무이유리)로 同於水精(동어수정)이어다.
유리로써 수정과 같이 여기지 말라. 그러니까 유리가 훨씬 값진 것이 되고, 수정이 얕은 것이 되는 것이지요.
汝不能知衆生根源(여불능지중생근원)인댄, 그대가 능히 중생의 근원을 알지 못할진댄
無得發起以小乘法(무득발기이소승법)이니, 소승 법을 가르치지 말라. 중생 근원이 뭐냐? 이 겁니다
. 중생 근원... 그대가 중생의 근원ㆍ뿌리ㆍ중생의 궁극적 차원.위에 표면상의 그 모습만가지고 쫓아가지 말라.
그 사람의 업이 어떻든,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중생의 어떤 역사적인,
현상적인 차원 이전에 궁극적 차원이 있다. 본래 갖춘, 본래인 이라고 하자 이 겁니다.
本來人. 본래인의 차원에서 한번 보라 말 입니다. 그것이 중생의 근원이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지금 표면상, 어떤 역사적인 사실만 가지고 소승 법으로써 그 사람들을 가르치니, 그 짓 좀 하지 말라.
彼自無瘡(피자무창)하니, 그들은
自無瘡 이여, 그들은 곪은데 병난 것은 없어, 그런데 병난 곳도 없는데 괜히 긁어서 부스럼 내고
상처를 주지 말라. 아~ 참 무서운 표현이지요? 그러니까 뭐 참회해라. 뭘 끊임없이 그렇 게 죄 덩어리ㆍ
업 덩어리ㆍ죄인이다. 서양 종교에서는 “죄인이다ㆍ죄인이다.” 많이 그렇 게 하지요?
“죄인이로소다ㆍ죄인이로소다.” “당신종 이로소다ㆍ종이로소다.”
불교는 그렇 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요.
방편 상 그런 말을 조금은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 그렇 게 믿고,
그렇 게 하면 그 것은 중생 근원을 잘못 아는 겁니다. 여기도 그랬잖아요.
그대는 능히 중생 근원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소승 법으로써 가르치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 아무 부스럼도 없는 것을,
병난 곳도 없는데 괜히 긁어서 상처를 내는 것이다. 그런 짓 하지 말라.
勿傷之也(물상지야)어다. 성한 몸에 상처내지 말라.
부처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부처를 중생이라고 하지 말라.
欲行大道(욕행대도)인댄 莫示小徑(막시소경)이니,
큰 도를 행하고자 할진댄 작은 길로 보여주지 말라.
無以大海(무이대해)로 內於牛跡(내어우적)하며,
큰 바다로써 저 소가 밟은 그 발자국에다가 넣으려고 하지 말라.
無以日光(무이일광)으로 等彼螢火(등피형화)어다.
태양의 빛으로 저 형광등과 같다고 여기지 말라.
형광등이 아니라 반딧불이네요. 형광등도 반딧불 螢자니까요.
富樓那(부루나)여 此比丘(차비구)는, 이 비구는, 내가 보건데
久發大乘心(구발대승심)이나,
본래부터, “오래 전에” 이런 말은 본래부터 대승심을 발했어.
中忘此意(중망차의)어늘,
중간에 잊어버리고 있던 사람이, 그런 그 본래적인
자기능력ㆍ본래불성ㆍ불성인간ㆍ부처로서의 그 가치를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런데
如何以小乘法(여하이소승법)으로, 그대는 어찌 소승법을 가지고
而敎導之(이교도지)리오? 그 사람을 교도하고 가르치느냐?
我觀小乘(아관소승)하니, 내가 소승들을 관해 보니
智慧微賤(지혜미천)이 猶如盲人(유여맹인)하야,
지혜가 미천해. 마치 맹인과 같애. 눈이 캄캄한 사람과 같애.
不能分別一切衆生(불능분별일체중생)의 根之利鈍(근지이둔)이라하고,
일체 중생의 근기가 둔하고 영리한 것을 분별할 줄을 몰라.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卽入三昧(즉입삼매)하여,
그 때에 유마힐이 곧 삼매에 들어가서
令此比丘(영차비구)로 自識宿命(자식숙명)케하니,
이 비구들로 하여금 스스로 숙명을 알게 했다. 인간의 근본을 알게 했다.
인간 불성을 알게 했다. 이런 뜻이겠지요 .
曾於五百佛所(증어오백불소)에, 일찍이 오백 부처님 처소에서
植衆德本(식중덕본)하야, 衆德本 을 심었어. 그래서
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회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아뇩다라샴먁삼보리에 회향 했더라 이 겁니다.
卽時에 豁然(즉시활연)해서 還得本心(환득본심)이라. 於是(어시)에,
諸比丘(제비구)가 稽首禮維摩詰足(계수예유마힐족)커늘,
본심을 얻고는 이에 모든 비구가 유마힐의 발에다가
稽首 예배 하거늘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因爲說法(인위설법)하여,
그 때에 유마힐이 그로 인해서 설법해서
令阿耨多羅三藐三菩提(영아뇩다라삼막먁보리)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게 했다.그래서 더 이상 보리심에서
不復退轉(불부퇴전)케하니, 물러서지 않게 했으니...
我念聲聞(아념성문)은, 내가 생각하건데 성문은
不觀人根(불관인근)하며 不應說法(불응설법)일세,
제가 생각하건데 聲聞. 소승들은 사람들의 근본을 관찰할 줄 모른다.
인간의 궁극적 차원에 안목이 없다. 그래서 거기에 맞춰서 설법 할 줄 모른다.
不應說法. 應 자는 거기에 맞춰서. 거기에 맞춰서 설법 할 줄 모를세.
是故(시고)로 不任詣彼問疾(불임예피문질)이니다. 그에게 나가서 문병 할 수가 없습니다.
승려라고 하는 고집이 저도 있는 한, 승려들에게 이렇게 거사가 감히 함부로
이렇게 너무 지나치다 하는 생각이 들기는 들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大乘.
최고의 경전이 기 때문에 그간의 어떤 소승 법을 말하자면 배제하고 정말
대승에 눈을 뜨라 라고 하는 그런 내용 입니다.
근래에 우리 한국에서도 소승불교에 가가지고,
대승불교를 버리고 선불교마저 버리고, 소승불교에 가서 소승불교를 배워와 가지고
아~~ 그저 소승불교, 근본불교라고 하지요. 상좌부 불교라고도 하고요.
“이것이 야말로 부처님 의 진짜 불교다. 그 외에는 전부 변색된 불교다.” 라고 하고는
입에 거품을 물고 그냥 이야기합니다. 많이 봤어요. 그런데 불교 전체를 놓고 잘 관찰해서
스스로 지혜로 그것을 판단을 해서 취사선택을 해야지요. 그것이 무익한 것은 아니지요.
무익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아니, 선불교가 있고 대승불교가 있는데, 우리가 그 보다
저급한 것에 그렇게 심취할 까닭은 없 잖아요.
아예 그것만 안다면 그것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 밖에 모른다면...
그렇 지만 제대로 대승불교와 선불교를 이해한다면 그렇 게 거기에 빠져있을 까닭이 없 습니다.
그들이 대개 보면 한국에서 불교공부를 안하고, 안하고 무턱대고 간 것이지요. 무턱대고 가가지고
대승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고, 선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이 가가지고는 그것만 평생 공부했으니까요.
하~ 열악한 조건에서 말은 안 통하지요.
거기서 고생ㆍ고생ㆍ10년ㆍ20년 얼마나 그렇게 애써 공부했 습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핑핑 놀고는, 거기 가서는 죽을 만큼 고생한 겁니다.
피눈물 나게 고생해서 배운 공부니까 거기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있겠 습니까?
하기는 저라도 그 렇게 거품 물고 선전 할 겁니다. 그 렇게 피눈물 나게 고생했으니까요.
한국에 있을 때는 핑핑 놀고 그냥, 마음껏 놀다가 어쩌다가 그 쪽에 인연이 되어서,
너무 고생하고 공부만 했으니까 이것은 죽자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선전하는 겁니다.
제가 소승불교 공부한 사람하고 인도여행을 같이 했는데, 거기 영축산에 올라가는데,
영축산에 올라가면 법화경이야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싫어서 거기에
두 시간 걸린다고 그 렇게 거짓말을 하고는 주차장에서 올라가지도 않는 겁니다.
주차장에서 올라가는데 15분밖에 안 걸려요. 그런데 거짓말을 하고 안 올라가요.
거기 가면 법화경이야기 안 할 수가 없 잖아요. 대승불교를 입에 담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말하기 싫어가지고 자기는 안 올라가고... 자기 혼자 갔을 땐 여러 번 올라가 봤겠지요.
야~ 그렇 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 게 좁아버렸어요.
그래서 여기 유마힐이라든지 대승불교를 이해 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구 비판을 하는 겁니다.
소견 좁다고 배척하고 비판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기 반딧불이라고 했잖아요.
반딧불이라고... 반딧불하고 태양하고 비교를 해놨어요. 반딧불하고 태양하고 비교를...
야~ 참, 비교를 해도 이것은 너무 했 지요.그 다음 가전연과 논의. 가전연은 논의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것은 再(재)해석 입니다.
부처님 말씀의 재해석이고 부연설명을 논의라고 했어요.
이것을 가지고 부처님이 옳으냐 그르냐 따지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어느 시간에 설법을 했다면 그럼 그 설법을 가지고 제자들이 각자 쉬는 시간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할 것 아닙니까? 저의 이야기를 여러분도 또 이렇게 저렇 게 분석도해보
ㆍ 재해석 해보고ㆍ 부연설명 도 하고ㆍ서로 아는 바대로 이야기하다 보면 틀린 것도 나올 것이고,
그것을 가전연이 잘 했다 는 것 입니다. 부연설명ㆍ재해석. 아주 뛰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부처님도 설명하시다 보면 미진한 데가 많을 것 아니겠어요?
여기는 無常ㆍ苦ㆍ空ㆍ無我ㆍ寂滅. 이런 이치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대목 입니다. 간단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