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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川의 書院
전순표 전문위원
조선시대 조정의 관학으로 중앙에는 성균관과 지방은 향교를 설치하여 공교육을 시행하여 양반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이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시켜 대과나 소과 등과거시험을 거쳐 관리를 선발, 등용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지방의 유림들이 선조들을 제향하며 그들의 학문적 위업을 계승하고 당시 그들의 제자나 지방유림인 사림들의 학문을 강학하고 교류하는 사설 중등교육의 요람으로 서원은 조선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옥천군은 창주서원(滄洲書院)을 비롯한 삼계, 쌍봉, 목담, 덕봉, 등 4개의 서원이 설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전쟁으로 인한 서원의 소실과 조선후기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헐려 버린 다음 복구되지 못하였고 그 자리에 서원이 있었다는 유지비와 기록만 남아 있다.
또한 서원이 훼철된 이후 목담서원은 그 후 전식 선생 등의 영정을 모신 영당으로 오늘날까지 지방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춘계제향이 모셔진다.
서원과는 그 성격이 다르나 유림들이 모여 친교, 강학, 향악을 만들어 지방풍속을 바로 잡는 등의 역할을 하던 옥주사마소의 경우 조선시대 대소과에 합격한 유림들의 후손들이 사마계를 조직하여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또한 옥천지방 유학자로 당대에 석학이었던 중봉 조헌,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방 유림을 모아 강학했던 당집도 소개한다.
1.쌍봉서원(雙峰書院)
옥천의 남부지역 명산인 함박산 남쪽 기슭인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 검지내에 위치하였고 1571년(선조 4)에 당시 옥천군수 서희여(徐希呂)와 옥천 유림들이 건립하였다.
쌍봉서원에는 옥천지역 유학자인 송정 전팽령(全澎齡), 탄암 곽시(郭詩), 충의공 김문기(金文起) 등의 위패를 모신 옥천에서 첫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었으나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지 못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 일본과의 전쟁중에 서원건물과 함께 송정공 전팽령과 탄암공 곽시 선생의 문집과 저서가 모두 불에 탔다.
임진왜란 몇 년 전에 조헌 선생이 낙향하여 은거하던 후율정사는 옥천군 안내면 용촌리에서 금강을 건너와 쌍봉서원에서 후학들에게 강학하고 교류하였으며 이 서원과 관련하여 시편을 남겼다.
2007년 6월에 <사단법인>옥천향토사연구회에서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 서원골 태양광 및 풍력발전연구가인 이종학(85세) 선생 소유인 쌍봉서원터 입구에 서원관련 안내판을 설치했다.
1)이 름 : 쌍봉서원
2)위 치 :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 검지내
3)건립자 : 옥천지방 유림
4)건립연대 : 1571년(선조 4) 창건,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소실
5)건물유무 : 추춧돌 만 남아 있음
6)규 모 : 미상
7)기 문
중봉 조헌(趙憲) 시문
【원문】
其二
遠客沈淪寂寞濱 逢君二歲許心親 題名老岳津三涉 講禮雙峰友十臻
至行空聞人愛慕 奇才曷使世沈淪
年踰四十終無子 天道何緣問鬼神
【번역문】
먼 길 나그네 적막한 시냇가에 묻혀 사는데
그대를 만나 이 태를 마음으로부터 친하였네
老岳에 이름 쓰고 나루를 세 번 건넜으며
雙峰에서 詩論을 강론하니 벗들이 모여왔네
지극한 행실 공연히 들려 남들이 그리는데
기특한 재주는 어찌하여 세상에 묻혔는가
나이 사십 넘어 끝내 자식 없었으니
天道는 무슨 까닭인가 귀신에게 물어보네
※참고문헌 : 완택 중봉시 택주, 변형석 택, 중봉조헌선생기념사업회,
2004년, 도서출판 동경(천성숙)
8)관련 일화 :
임진왜란 당시 옥천에서 조헌선생의 의병 이후 이곳 쌍봉서원에서 이충범 의병장을 비롯한 정립 선생 등 옥천지방 유림들이 2차 의병을 기의하고 의병지휘소인 도총소를 이 서원에 두었다.
특히 그 당시 옥천군 양산(현 영동) 출신인 이충범 의병부대는 옥천 남쪽 금강 상류인 이원면 원동리 적등진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는 등 옥천지방 등지에서 활약했다.
※참고문헌 : 沃川鄕誌, 옥천군·관성동호회, 동광인쇄사, 1984
2.목담서원(鶩潭書院)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신촌 마을 앞에 있던 목담영당(鶩潭影堂)은 원래 목담서원(鶩潭書院)이 훼철된 터에다 영당만을 지었다.
즉 서원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사립학교인 재(齋)와 지방에 명망이 있던 유현의 위패를 모셔 놓고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묘사(廟祠)가 함께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 영당을 다시 지으면서 제사만 올리는 영당만 갖추게 되었다.
이 서원은 1765년(영조 41)에 지방 유림과 옥천전씨 문중 후손들이 영당만을 세우고 송정 전팽령의 영정을 모셨다.
그 후 1767년(영조 43)에 강의할 수 있는 강당을 건립하므로 비로소 서원으로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819년(순조 19)에 임진란, 병자호란의 충신인 충간공 사서(沙西) 전식(全湜)선생의 영정을 경상도 상주에서 옮겨와 추가 배향하게 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모두 헐리어 버렸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강당과 재실을 세우지 못하고 영당만을 세우고 관성군(管城君) 전유(全侑)을 주벽으로 추가 배향하여 현재3분의 위패를 모셔 옥천 유림이 춘계제향을 매년 지내며 서원 원장이 있다.
목담영당의 사서공 전식(全湜) 선생 영정은 충북 유형문화재 제171호 이며 그는 조선 선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70여세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는 등 충신으로 귀감이 된다.
목담영당 뒷산에 전팽령 상주목사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과 시문을 읊으며 심신을 수양하던 팔작 목조기와 지붕에 3칸인 양신정(養神亭)이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29호 이다.
1)이 름 : 목담서원
2)위 치 :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77번지 신촌(목시)
3)건립자 : 옥천지방 유림
4)건립연대 : 1765년(영조 41) 창건, 1767년 서원 강당 건립
1868년(고종 5) 훼철, 1936년 목담영당 복원
5)건물유무 : 목담영당 현존함
6)규 모 :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
7)기 문 : 미상
8)관련 일화
일화 :
목담영당(鶩潭影堂)은 옥천군 관아 남쪽 십오리에 위치하며 금지(金地)에 있다.
송정(宋亭) 전팽령(全彭齡)과 충간공(忠簡公) 전식(全湜)의 진상(영정)을 봉안하였다. 학생(원생) 10인 이며 보직은 10명이다.
※참고문헌-옥천읍지 校院편 21쪽
일화 :
송정 전평령과 충간공 사서 전식의 영정이 있고 무인년 신창하였다.
※참고문헌-옥천읍지 校院편 71쪽
일화 :
목담서원 보직(鶩潭書院 保直)은 10명이다.
경진년에 처음 두었으나 지금은 없다.
※참고문헌-옥천읍지, 私募屬편, 65쪽
3.삼계서원(三溪書院)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서원동(書院洞)에 있던 삼계서원은 옥천서부지역의 명산인 대성산(705m) 응봉 아래 깊은 골짜기인 서원골 안 사자바위에서 조금 올라가면 산 밑 양지바른 1천여평 밭이 있고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재는 삼계서원이 터에 삼계서원 유지비만 서 있고 주변에 매화분재로 유명한 옥매원과 집 몇 채가 있다.
이 삼계서원은 1621년(광해군13)에 처음으로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선생과 탄암(坦菴) 곽시(郭詩), 중봉(重峰) 조헌(趙憲) 선생 등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삼계서원은 옥천군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원 이었으나 이곳에 모셔진 세분 중에 최하위로 모신 조헌 선생의 위차(位次) 문제로 심각한 분규가 서원내 유림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당시 삼계서원 분규로 일부 유림들이 한양 조정에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 당시 한양 조정에서 다른 극심한 당쟁이 일어나는 와중에 1657년(효종8년) 헐리고 말았다.
그 후 삼계서원을 재건치 못하고 현재에 이르렀고 삼계서원에서 유래하여 마을 이름도 서원골이라 하고 서원동(書院洞) 계곡도 서원골로 불리고 있다.
1)이 름 : 삼계서원
2)위 치 :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서원동
3)건립자 : 옥천지방 유림
4)건립연대 : 1621년(광해군 13) 창건, 1657년(효종 8) 헐림
5)건물유무 : 유지비 남아있다.
6)규 모 : 미상
7)기 문 : 미상
※참고문헌 : ⌜沃川鄕誌⌟, 옥천군·관성동호회, 동광인쇄사, 1984
4.창주서원 (滄洲書院)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216-7번지 현리 마을에 있던 조선시대 사액서원으로 현재는 건물이 없고 그 자취를 알 수 있는 충청북도 기념물제105호인 창주서원 묘정비만 남아 있다.
이 묘정비는 1682년(숙종8)에 창주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세운 기념비적인 비석으로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글을 짓고 곡운 김수증(金壽增) 선생이 글을 썼고 조선시대 전형적인 모습을 잘 나타낸 비석이다.
옥천지방 유림들이 1670년(현종11)에 건립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어 묘정비만 서원 터에 남아 있다.
1)이 름 : 창주서원
2)위 치 :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216-7 (현리마을)
3)건립자 : 옥천지방 유림
4)건립연대 : 1670년(현종 11) 창건, 1868년(고종 5) 훼철
5)건물유무 : 묘정비 현존
6)규 모 : 미상
7)기 문 : 미상
8)관련 일화
관련기록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29-l 번지에 위치하던 창주서원은 원래 중봉 조헌 선생을 배양하던 표충사를 이곳에 세우고 창주서원 이란 임금께서 내리신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본래 표충사는 1608년(선조41)에 안읍(안내면) 도리동(도이리) 중봉선생 묘소 앞에 세우고 표충사(表忠祠)란 사액을 받았는데 1636년(인조2) 중봉선생 묘소를 안남면 도농리 뉴티(축령) 서쪽 도현 마을에 묘소를 이장하면서 표충사를 옳기지 못하여 퇴락하여 버리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주동이 되어 1646년(인조 24)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 적등진(赤登津)에다 표충사를 세우고 사액을 청하였으나 재(齋)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1657년(효종8) 이를 다시 이원면 이원리(현리마을) 현 위치에 옮겨지었다.
1670년(현종11)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배양하고 사액을 다시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1682년(숙종8)에야 숙종에 의해 창주서원(滄洲書院) 이란 사액(액자)을 하사받았다.
1694년(숙종20)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고 1718년(숙종44)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선생을 추가 배향하게 되었으며 그 후 용촌(龍村) 곽은(郭垠)을 따로 사우를 지어 배향했다.
1868년(고종5)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전국적인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려 버리고 현재 묘정비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여지도서의 옥천군 단묘편에 보면 “창주서원은 옥천군 남쪽 30리에 위치하고 배향 인물은 문열공 조헌, 문경공 김집, 문정공 송시열, 문정공 송준길, 동부승지 곽은” 「在 郡南 三十里 亨文烈公 趙憲 配 文敬公 金集 文正公 宋浚吉 同副承旨 郭垠 別亨」 이라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沃川鄕誌⌟, 옥천군·관성동호회, 동광인쇄사, 1984
기록
창주서원은 옥천군 관아 남쪽, 30리에 위치한 이원지역 이며 원생이 20인 이며 보직을 맡은 사람이 20명이다.
창주서원의 위전답은 3결 이고 역은 면제한다. 이남면 하리(下里) 이다.
◦숭정(崇禎) 병자년에 적등진 강가에 문열공 조헌의 표충사를 건립하고 상소하여 조정에 사액을 요청하였다.
◦오랜 뒤 정유년에 이원현으로 옮겨 세웠다.
◦현묘(현종) 경술년에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배향하고 액호(額號)를 붙이려 하였으나 두루 요구할 수 없었다.
◦숙묘(숙종) 임술년에 창주(滄洲-강에 있는 모래 삼각주) 라고 사액하였다.
갑술년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고 무술년에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후 승지(承旨)를 역임한 곽은(郭垠)을 별사하여 향사하였다.
현재 창주서원 터에 서원 묘정비(廟庭碑-위패 모신 사당내 뜰)가 서 있는데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찬술) 운곡(雲谷) 김수증(金壽增)이 글씨를를 쓰고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회고한 추기(追記)가 있다.
기록
창주서원(滄洲書院)의 주향(主享) 문열공 조헌 이며 추가 배향은 문경공 김집과 문정공 송시열 이다.
별사는 승지 곽은과 문정공 송준길 이며 원생은 15인, 보직은 12인(지금은 20명이다), 고직(庫直) 1명 등 이다.
위전답은 3결 이고 제역은 이남면 하리이다.
※참고문헌-옥천읍지 校院편 70쪽
관련기록
창주서원보(滄洲書院保)는 20명 이내이다 (13명이 병오년 이후 차차로 증가하였다)
※참고문헌-옥천읍지, 私募屬편, 64쪽
기록
창주서원과 용문영당의 수축修築과 개복(蓋覆) 때 역민(役民)의 폐단을 영구히 혁파하였다.
군보(軍保) 가운데 마침 願納子가 있어서 兩院의 稟目에 따라 同 3명의 원납전 60량을 齋所에 상납하게 하고 본전을 두고 취식하여 그 이자로서 수축과 개복을 하도록 하였다. 이 일은 을유년 절목이 되어 정식되었다.
※참고문헌-옥천읍지 禮房掌편 93쪽
5.덕봉서원(德峯書院)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서운동 마을에 있었던 덕봉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청산현 유림들에 의해 건립되어 중봉 조헌선생과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이다.
그 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전국적인 서원철폐령에 따라 모두 헐리고 이제는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조선시대 여지도서 충청도 청산현 단묘조에 ⌜덕봉서원은 청산현 서족 3리에 위치하고 중봉 문열공 조헌, 우암 문정공 송시열을 함께 위패를 모셔 제향하고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지 못하였다 ⌜在縣 西三里 重峰 文烈公 趙憲 尤庵 文正公 宋時烈 並亨 未賜額⌟라고 기록되었다.
1)이 름 : 덕봉서원
2)위 치 :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
3)건립자 : 청산지방 유림-조헌,송시열 위폐 봉안
4)건립연대 : 1701년(숙종 27) 창건, 1868년(고종 5) 훼철
5)건물유무 : 없음
6)규 모 : 미상
7)기 문 : 미상
※참고문헌
•沃川鄕誌, 옥천군·관성동호회, 동광인쇄사, 1984
•조선환여승람, 옥천군 서원편, 이병연, 1926년
6.경현당 (景賢堂)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53번지 구룡촌 마을에 있던 서당으로 용문서당이라 불리며 구룡촌의 세거성씨인 선산곽씨, 남양홍씨, 은진송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경현당은 근동 학동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개설한 서당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도 이곳에서 어린시절 공부하던 용문서당이다.
1697년(숙종23)에 서사(書舍)인 경현당과 제사(齋舍)인 용문영당(龍門影堂)을 지었으나 재사는 허물어져 없어졌다.
경현당(용문서당) 건물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납도리집으로 우측은 마루, 좌측은 온돌로 꾸민 소박하고 검소한 구조로 되어 있다.
1)이 름 : 경현당(龍門書堂)
2)위 치 :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3)건립자 : 옥천 이원면 구룡촌 곽, 홍, 송씨문중
4)건립연대 : 1600년대 초기
5)건물유무 : 용문서당인 경현당 있음
6)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 납도리집
우측-마루, 좌측-온돌
7)기 문 : 미상
8)관련 일화 :
일화
용문영당(龍門影堂)은 옥천군 남쪽 30리에 있는 적등강가에 있고 학생(원생)은 20인 이며 보직은 20명이다.
숙종 무인년에 문정공 송시열의 진상(眞像-영정)을 봉안하였다.
왕께서 무축년에 송시열의 5세손인 문경공(文敬公) 송환기(宋煥箕)를 추가 배향하였다.
※참고문헌-옥천읍지 校院편 21쪽
일화
용문영당 보직 (龍門影堂 保直)은 20명이다.
※참고문헌-옥천읍지, 私募屬편, 65쪽
일화
용문영당은 문정공 송시열과 문경공 송환기의 화상(영정)을 추향한다.
고직은 1명, 보직 20명 등이며 갑자년에 신창하였고 제역리(除役里)는 옥천군 구룡리와 미리 이다.
※참고문헌-옥천읍지 校院편 70~71쪽
일화
조선말엽에서 대한제국 시대에 국운을 다하여 쓰러져 가는 조선을 다시 이르켜 세우기 위해 전국 유림을 답방하여 강학했던 송병선 선생의 우국충정의 숨결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서당이다.
그는 우암선생의 9세 직손이며 대사헌에 올랐던 인물로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고종황제를 친견하기 위해 대전회덕에서 걸어서 한양 대궐에 입궐하여 고종을 만나고서 일본 헌병이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대전 소제동 사저로 돌아와 전국에 펼쳐 있던 1천명 넘는 제자들에 당부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또 그의 동생 애국지사 송병순도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되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하였다.
애국지사 송씨 형제와 영의정 송근수 대감 등 당대의 대유학자가 이곳 경현당에 자주 회합하여 구국의 길과 학문을 논했던 장소로 큰 의미가 깃든 서당으로 충북유형문화재 제158호로 1986년 3월에 지정되었다.
7.표충사(表忠祠)
1721년(숙종 신축)에 건립하여 문열공 조헌을 배향하고 1734년(영조 갑인)에 사액을 얻고 조헌의 장남인 지평 조완기 충신을 추가 배향했고 이후 훼철됐던 것을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구조로 1990년대 다시 복원하였다.
매년 가을마다 개최하는 중봉충렬제에 조헌선생 추모제향을 이곳 표충사에서 모셔지고 있다.
한편 조헌선생 묘소는 금산싸움에서 순국하여서 옥천 안내면 도이리에 모셨다가 1636년(인조14) 현재 표충사 뒷산인 도농리 산63-1번지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묘소에는 白川趙氏 문중과 尤庵 선생이 세운 비석이 있다.
1)이 름 : 표충사
2)위 치 :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926-1번지
3)건립자 : 옥천군
4)건립연대 : 1990년대 복원
5)건물유무 : 목조 기와집, 맞배지붕
6)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7)기 문 : 미상
8)관련 일화
문헌기록
표충사(表忠祠)는 옥천군 관아 동쪽으로 30리에 위치하며 학생(원생)은 30인이며 보직은 20명이다.
숙종 신축년에 문열공 조헌(趙憲)을 향사하였다.
영조 갑인년에 사액을 받았고 조헌의 아들 증지평(贈 持平) 조완기(趙完基)를 추가 배향하였다.
※참고문헌-옥천읍지 校院편 70쪽
표충사(表忠祠)의 주향은 문렬공 조헌이고 배향은 증지평 조완기이며 원생은 4인, 보직 12명(지금은 20명이다) 고직은 1명이다. 제역은 안남 농막리, 지내리 이다.
※참고문헌-옥천읍지 校院편 21쪽
문헌기록
표충사 보직(表忠祠 保直)은 20명이다.
※참고문헌-옥천읍지, 私募屬편, 65쪽
8.이지당(二止堂)
이지당은 충북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조선중기 성리학자 이며 임진왜란 때 충청도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장소로 건물구조는 전면 7칸에 양측면에 각각 2층 누각을 지어 누대로 사용했다.
처음 건립 당시에 각신리와 옥각리 등 가까운 마을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던 각신서당으로 건립됐다.
조선중기인 1600년대 중기인 계사년에 尤庵 宋時烈과 同春堂 宋浚吉 선생이 이지당을 유람하며 강학도 하는 등 여러 유림과 관리들이 이곳의 아름다운 산수를 담은 시문을 지어 한시를 남겼다.
이지당 건립 기문과 시판 다수가 현재 장계관광지 옥천향토전시관에 진열 전시되고 있다.
二止堂 이란 서당 이름은 尤庵 선생이 사서삼경중에 중국 문학서인 詩傳에서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高山仰止고산앙지, 景行行止경행행지)라는 글귀에서 따와 二止堂 이라 했다고 전한다.
건립 이후 세월이 흘러 당집이 퇴락하자, 옥천읍 옥각리 금,안,이,조씨 네 문중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말 대한제국시기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분함을 못이겨 자결한 대사헌 송병준 선생이 자결하기 이전에 전국의 지방유림에게 구국을 위한 강학을 하며 전국을 순회할 때 첫 강론지로 옥천 이지당을 찾아 충북 남부지역 유림들에게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었던 장소이다.
1)이 름 : 이지당, 충북 유형문화재 제42호
2)위 치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 33번지 이지당
3)건립자 : 옥천 옥각리 금,안,이,조씨문중
4)건립연대 : 1500년대 후기에 각신서당, 현 건물 1901년(광무5)
5)건물유무 : 목조 기와집
6)규 모 : 정면 7칸, 측면 1칸, 양측면 2층 누각
7)기 문 및 시문 : 다수
옥천군수 金仁淳 기문
【원문】
地固因人顯遺
篇閱幾秋峯高
如卓越庵古?0
尊周老樹生新
感寒磯續舊遊
堂前溪一派流
去接滄洲
▶김인순 옥천군수 : 철종비 철인왕후 안동김씨의 친할아버지,
제243대 옥천군수(재임기간 1802 순조2~1807 순조7)
대사헌 宋秉璿 記文
【원문】
堂古遺風在巖
花閱幾秋倫常
扶廟社道 0 0 扶 도울 부,
程周宇宙生吾
晩溪山感舊遊
長懷二老興乘
月下空洲
宋秉璿 敬次
▶송병선 : 대사헌, 애국지사-을사보호조 체결 자결
尤庵 9세손(직손)
영의정 宋近洙 記文
【원문】
敬次板上0
堂古地因顯名區
幾百秋淵源追盛
宋文物講成周草
樹猶精采溪山舊
息游登臨久不去
明月滿汀洲
崇禎五己卯中秋,
恩津 宋近洙
▶송근수 : 조선말엽 대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尤庵의 8세 직손으 로 묘소는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안터에 있다고 전한다.
추증 영의정 중봉 조헌선생 이지당 시문
⌜李生 宗喆과 냇가를 산보하는데 때마침 生員 金大升과 周賢仲 獻民 이 술을 찾아왔다. 醉하여 뜻을 말하다⌟
【원문】
水麗山明地 風高葉落秋
徜徉提督趙 邂逅廣文周
幸値仙翁集 因携童子遊
悠然成一醉 乘月步長洲
萬曆丙戌十月坐00砦金?圭士大?升周
汀道獻氏李秀丈0宗哲問0遊0예0西0下0汀물가정,
右 重峯先生親筆
【번역문】
물곱고 산 밝은 땅 / 바람 높고 잎 떨어지는 가을
배회하는 조제독 / 주광문을 해후했네
다행히 신선들 모인 때에 /어린 사람 데리고 같이 노닐며
한가로이 모두 다 한껏 취하고서 /달빛타고 긴 모래톱 걷는다네
※참고자료 : 옥천향토전시관 소장 시판
◦조헌선생 친필 시판-음각, 크기 가로34.5 ˟ 세로31.5cm
목재, 옻칠, 흑판
※참고문헌 : (사)중봉조헌선생기념사업회, 중봉시 택주, 88~89쪽,
택주자 변형석,2004.9, 도서출판 동경
송시열 시문
【원문】
敬次 重峯 先生 韻
新構0淸泚山頹
問幾秋天0箕尾
遠人世星周事業
朱書裏淵源德水
遊0生動仰止今
日立汀洲
崇禎 甲寅(1638년-선조16) 秋 恩津 宋時烈
▶우암 宋時烈 : 1602년 옥천군 남부지역인 이원면 용방리 구룡 촌에서 태어나 기호학파의 태두인 이율곡의 문인으로 연산 의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김집 선생 수학 문인으로 노론의 영수로 조선 禮學의 대유학자 이며 중국에서 宋子라 칭함.
송시열,송준길,이유태,유식(인평대군사부,옥천출신) 연산 김장생 선생 부자에게 동문 수학한 같은 문인.
金萬均 詩文
-後學 光山 金萬均, 甲寅 秋(서체 : 행서)
宋來凞 詩文
【원문】
重峯先生韻
昔賢留躅地雲物
幾徂秋古木當溪
偃巉巖挾路周藏
修勤後學薖軸想
前遊경韻空延竚
輕煙巳夕洲
丁未孟夏恩津
宋來凞 謹稿
金元行 시문
【원문】
敬次 二止堂 韻
名區曾二老正學 曾일찍증
0天秋厓古字猶 厓언덕애, 낭떠러지 애
在山空戱幾周晉 幾 기미기, 위태롭다 기
0坐嗟己後此地未
周遊欲溯眞源去 溯 거슬러 올라갈소
徘徊立晩洲
安東 金元行
恩津 宋煥箕 기문 (옥천향토전시관 소장)
【원문】
敬次 二止堂韻
古堂巖樹翳炎夏
伈淸秋石往丹崖
轉層堦碧澗周碩
薖留往躅疎放得
來遊山仰懷何極
披襟立晩洲
8)관련일화
문헌기록
이지당(二止堂)은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두 선생이 유람(杖履-장리)하던 장소로 보직이 5명 이고 계사년에 신창하였다.
※참고문헌-옥천읍지 校院편 71쪽
첫댓글 올려주신 자료 잘 보았습니다. 향토사 회원들이 서원 하나씩 돌며 공부하고 답사기를 올린다면 더욱 좋은 카페가 될것 같습니다. 반가운 글 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