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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웬만한 채소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으니 제철 채소라는 개념이 무의미한 듯도 하다. 그렇지만 가지만큼은 아무래도 여름에 먹어야 어울린다. 후텁지근한 날씨로 온몸이 끈적거릴 때 먹는 가지볶음과 가지찜, 아니면 더위에 지쳐 헉헉거릴 때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는 가지냉국은 여름에 먹어야 더 맛있다.
한방에서도 가지는 성질이 차가워 한여름에 먹으면 더위를 식힐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찬 성질로 인해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하는데, 아이를 가진 며느리에게는 가지를 먹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간에서 떠도는 속설이지만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 근거를 두고 나온 말이다.
오늘날 가지는 평범한 채소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채소와 비교해 덜 선호한다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가지를 처음 먹어보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이국적인 채소라고 생각했다. 가지가 보통 사람들은 쉽게 먹을 수 없는 고급 수입 채소였기 때문이다.
가지의 원산지는 인도다. 《자치통감》에 한나라 때 가지를 키웠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1~2세기 무렵 인도에서 티베트를 넘어 동쪽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보급이 늦었기 때문인지 요리법이 다양하고 맛있었기 때문인지 가지는 꽤 긴 세월 동안 희소가치가 높은 귀한 채소로 대접받았다.
6세기 무렵의 농업서인 《제민요술》에 가지의 재배법과 요리법이 보이는데 가지를 자를 때는 뼈로 만든 칼이나 대나무 칼로 잘라야지 쇠로 만든 칼로 자르면 가지의 절단면이 검게 변한다고 적혀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가지를 손질한 것인데 당시에는 가지가 그만큼 귀한 채소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지는 별명이 ‘곤륜과(崑崙瓜)’다. 곤륜산에서 나는 오이라는 뜻으로 가지를 바라보는 옛날 사람들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곤륜산은 중국 신화에서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곳으로, 곤륜과란 곧 신선들이 먹는 좋은 채소라는 의미가 있다. 고대인들은 곤륜산이 지금의 티베트와 칭하이성 사이에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니 곤륜과라는 별명에는 가지가 서쪽에서 티베트와 칭장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가지를 언제부터 먹었을까? 인도가 원산지인 가지가 언제 어떻게 한국으로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가지는 한반도에서 나는 것이 맛있기로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관련된 이야기가 《해동역사》에 전한다.
신라에서 나는 가지는 모양이 달걀처럼 생겼고 엷은 보라색을 띠면서 광택이 나는데 꼭지가 길고 맛이 달다. 그 씨앗이 중국에 널리 퍼져 있다
원나라 때의 농업서인 《농서》에서도 가지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발해의 가지가 열매가 실하고 티베트의 가지는 열매가 가늘다고 했으니, 우리 땅에서 자란 품종이 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왜 가지를 그렇게 좋아했을까? 수입 채소인 만큼 귀한 것도 한 가지 이유였겠지만 유제품이 흔치 않던 시절, 가지를 치즈와 버터 맛이 나는 특별한 채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가지에서 ‘낙소(酪酥)’의 맛이 난다고 했으니 고대에 왕후장상들이나 먹었다는 치즈의 맛을 느낀 모양이다.
중국 청나라 때 소설인 《홍루몽》에서는 가지를 풀로 만든 자라에 비유했다. 중국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라를 강장 식품으로 여기니, 가지를 자라에 버금가는 특별한 채소로 여겼다는 말이 되겠다.
인도에서 서쪽으로 간 가지는 중동에서도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터키 요리 중에 가지에 양파와 토마토를 넣고 올리브 오일에 익힌 이맘 바일디라는 음식이 있다. 이맘 바일디는 ‘성직자 이맘이 기절했다’는 뜻이다. 부인이 이 가지 요리를 하자 이맘이 향기에 취해 기뻐서 기절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고대에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가지를 특별한 채소로 취급했다. 앞으로 가지나물을 먹을 때는 기절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맛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