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이는 마음 - 강헌철 신부- 본당 신부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첫자리에 놓이는 것이 강론이다. 날마다 신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풀어 설명하고 생활 안에서 묵상거리를 주는 것이 부담이 될 때가 많다. 나도 보좌신부 시절에 주일 강론 때문에 밤을 지새우기도 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신부님, 오늘 강론 참 좋았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자들이 “어떤 신부님 강론은 이래서 좋고, 어떤 신부님 강론은 저래서 재미가 없다.” 는 말을 들을 때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함을 느낀다.
똑같은 복음 말씀을 듣고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다른 것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에게 전해지는 복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말하는 기술에 따라 좋고 나쁜 것으로 판단해 버린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부모는 아이의 말을 잘 알아듣는다. 그 이유는 아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지 세심하게 살피고 들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그렇다. 무심코 들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될 수 있지만 조금만 세심하게 들으려 하면 나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적극적 응답을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 ?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제 하느님이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제가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습니다. 몹시 덜렁거리고 장난기가 유난히 심했던 저는 학교 안에서 자주 대형사고를 치곤 했었습니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이 "부처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너그러우시고 관대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고를 저지를 때마다 담임선생님의 선처로 적당히 넘어가곤 했었지요. 그런데 한번은 제가 적당히 넘어가기 어려운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현관 앞에 놓인 대형 거울을 제가 통과해버린 것입니다. 거울이 보통 큰 거울이 아니었고, 동창회에서 기증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 거울이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교장 선생님까지 그 모습을 보셨으니...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이 일을 어쩌나? 담임선생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울 값은 어떻게 하나? 부모님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쩌지?" 갖은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며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거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제 얼굴부터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조금밖에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앞으로는 조심하거라." 하시면서 깨진 유리조각들을 손수 치우셨습니다. 아마도 그날 담임 선생님은 저 대신 교장실로 불려가서 호되게 질책을 당하셨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너무도 미안했던 저는 그 뒤로 많이 회개했었지요. 담임선생님을 하늘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 속을 상하지 않게 해드리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시 아직 어린 저였지만 너무도 관대했던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짧은 날들이 마치 천국에서의 생활 같았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제 하느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큰 사람으로 여겨졌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 한가지 사실 때문에 너무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비의 크기입니다. 하느님 자비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 천 배, 몇 만 배나 커서 우리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가 이토록 큰데 괜히 그렇게 걱정했잖아"하는 후회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확인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와 인내,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나라입니다. 지옥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거절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천국을 거절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기 위한 우리의 조건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거절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거절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편 하느님 나라는 역설적으로 죽어서 가는 나라입니다. 우리들의 그릇된 생각과 잘못된 삶을 "죽여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소유와 욕심에 붙들려있는 한 인간은 천국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현세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푸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천국은 온갖 물질적 풍요와 안락이 약속된 곳도 아닙니다. 진정한 천국이란 우리의 욕망이 절제되고 편리함이 포기된 그러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생활은 수도자의 생활처럼 검소하고 질박합니다.
몇 달 전, 새벽 묵상 글에도 썼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서울 강남의 어느 성당으로 강의를 하러 여유 있게 2시간 전에 출발했다가 강의 시작 바로 전에야 간신히 도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강의를 하러 갈 때면 언제 출발해야 할지가 항상 저의 큰 고민입니다.
그저께 저는 또다시 강남의 모 본당으로 대림특강을 위해 가야만 했습니다. 서울 강남의 교통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요. 워낙 많이 막혀서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제가 출발하는 시간이 퇴근 시간하고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몇 시에 출발해야 할지를 도대체 모르겠더군요.
결국 저는 몇 달 전의 기억도 있고 또한 사람들 퇴근 시간 때문에 막힐 것을 예상하면서, 아주 여유 있게 3시간 전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왜 그런지요? 글쎄 길이 하나도 막히지 않아서, 출발한 지 1시간이 채 안되어서 목적지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의시간까지 2시간이나 남아서 근처의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요.
정말로 사람 일이란 잘 모르겠더군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늦고 또 이 정도면 딱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일찍 도착하는 것을 보면서, 내 생각이 절대로 옳은 것만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내 생각이 옳다면서 사람들에게 힘주어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일까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내 생각을 어떻게든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다툼이 생깁니까?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셨던 사랑을 따르기보다는 대신 미움과 판단과 단죄라는 폭력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도 하십니다. 이 폭력을 쓰는 자는 당시에 요한의 세례를 거절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묵살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했으며, 하느님까지도 자기들 생각대로 놀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잘못된 것은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고 잘된 것은 자기들 공로로 돌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폭력을 쓰고 있으며, 이들의 폭력에 의해서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도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항상 자기 공로만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하느님 안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내 안의 한 부분 정도로만 생각하는 아주 작은 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 하늘나라에 폭행을 하는 폭력을 쓰는 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 모습에서 당연히 벗어나야 합니다. 즉, 이제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하늘나라를 완성하는데 일조를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대림을 사는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귀 있는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 머릿속의 지식이 아니라 당신의 친절한 마음씨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W.H.데이비스)
“여자에게서 태아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양승국신부- <다시 광야를 향해>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투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태양으로 떠오르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참 예언자로서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양성했던 제자들에게 ‘바로 저분이시다. 저분을 따라가거라!’라며 제자들을 떠나보냅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은 ‘신발 끈조차 묶어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며 자신을 끝도 없이 낮췄습니다. 연극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더욱 부각되도록 조연으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나타나시자 아주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져간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례자 요한처럼 깊은 내적 광야를 향한 우리 각자의 여행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편리하고 안이한 삶을 버리고 불편한 삶, 그러나 주님께서 기뻐하실 그 삶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점점 성장하시고, 그에 반비례해서 나는 점점 작아지기를 바랍니다.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분 -방교원 신부- 폭력이라면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 전쟁, 파괴 등을 쉽게 떠올리지만, 역설적이게도 폭력이라는 단어에는 생명이라는 의미도 숨어 있답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비오스’(생명)와 ‘비아조마이’(폭력)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법을 거스르는 경우에 비아조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폭력의 뿌리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이 얼마나 빨리 퍼져나가고 강하게 되는지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카인의 탄원을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보장해주십니다. 그 어떤 폭력도 자비로운 하느님을 거스를 수 없고 하느님 그분만이 세상의 폭력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창세 6,11). 우리는 이런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고 오래 전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이신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오신 그분을 만져볼 수 있고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이 정말 크다 -김찬선신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예수님께서 큰 인물이라고 할 때 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몸집이 크다는 것은 물론 아니리라. 포용력이 크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생각하는 스케일이 크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룬 업적이 크다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하늘나라에서 큰 것을 말함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큰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같은 마태오 복음 18장에서 이에 대해 제자들이 묻자 주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렇다면 낮출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산처럼 높아서 큰 것이 아니라 바다처럼 낮아서 넓고 큰 것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넓어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정도로 큽니다. 노자의 말씀과 닿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고 한 세례자 요한은 큰 사람입니다.
다른 식으로 또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비어낸 만큼 커집니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이치입니다.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커집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여관은 예수님을 모실 여백이 없었습니다. 비어있던 마구간과 구유는 사람의 아들 중에 가장 큰 사람보다 더 큰 분 하늘 땅 통 털어 가장 크신 분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서양화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여백으로 더 많은 것을 얘기하는 우리 한국화와 같은 여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인가? - 김영수-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 공생활 당시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그동안 믿고 따라온 율법에 반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개혁적인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로서는 당시의 고행자인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몹시 불편했다. 세례자 요한은 고행을 하면서 스스로 미래에 오실 분을 위한 길잡이라고 선포하며 많은 사람에게 회개할 것을 외치며 또한 이를 행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바로 그분임을 선포했다. 요한은 성경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런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최고의 평가를 하신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모든 예언서와 율법서에 적힌 메시아가 자신이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오는 길을 닦는 예언자 엘리야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답답한 예수님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셨으리라. 우리의 현실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우리를 돌아보자. 주일미사 참례가 신앙 생활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주일 신자는 아닌가? 성당 내에서 미사 중에 회개하고 평화를 구하고 자비를 바라며 복음화를 마음속으로 약속했다가 성당 문을 나서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율법에 자신을 내맡기고는 성내고 탐내고 다투며 남에게 상처 주고 빼앗고 하지 않는가? 미사 시간마다 늘 하느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 본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려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귀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 귀로 전해지는 말 중에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이지. 그 말씀이 왜 내게 전해졌는지. 말씀의 참뜻을 헤아리고 가다듬어 생활로 이어지는 실천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가 세례자 요한보다는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귀 있는 사람인가, 귀 먹은 사람인가? 나에게 좋은 말씀은 듣고 나를 힘들게 하는 말씀은 거역하는 그런 사람은 아닌가? 하느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온 것은 언제였던가?
기다림 2 -장재봉신부- 오늘 독서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을 들으면 ‘이제는 그 바보 같은 사랑을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결코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벌레 같은 야곱”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인줄 뻔히 아시면서도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도와주리라”고 다짐을 하시니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세상에는 신도 많고 종교도 다양합니다. 단언하건데 그 많은 종교는 모두 뇌물을 요구합니다. 상이 잘 차려진 제사일수록 기도의 힘이 세지고 더 많은 복채를 통해 더 큰 복을 받게 된다하니 그렇습니다.
오직 그분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만이 ‘속죄제’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죄,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얻지 못하는 구원의 역사가 그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장이 미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믿음이며 사랑이며 희생이어야 할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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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한 세월이 430년입니다. 세상의 어느 민족도 400년을 꼬박 노예로 지내는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하다고 합니다. 긴 세월은 자신의 주체를 흐리게 할 것이고 긴 시간은 서로를 동화시킬 것이며 긴 시간을 참아내지 못한 민중의 궐기와 반항의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이라 합니다.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서 이르신 하느님의 약속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 23)는 말씀은 35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한 마태오사가의 집필시기를 따지면 거의 400년이 흘렀을 것이라 꼽아집니다. 그 긴 세월,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언이 사라지고 역사가 뒤바뀌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갑갑함이 얼마나 컸을까 싶습니다. 호세아에게 들려주신 하느님의 절규를 기억하며 죽어간 숱한 세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면서도 아무런 확신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세대도 있었습니다.
무조건 믿고 기다린 그들의 간절한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적었던 마태오사가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에게만 들리는 복음,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메시아, 그것을 몰라보는 이스라엘이 안타까워서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잊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내게 와서 “두려워 마라”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받아들이는 마음에만 가능합니다. 이미 곁에 와 계신 그분을 두고 누구를 찾으십니까?
그분을 기다린다면서 무엇에 분주하며 무엇에게 휘둘리며 무엇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새벽을 열며 양을 한 마리 잃은 양치기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양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잘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도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양을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을 때에도 그 양치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화로운 얼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우리는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정작 주인은 태평하니 어떻게 된 일이야?”라고 말들을 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이 양치기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왜 걱정하지 않습니까?”
이에 양치기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저는 하나 남은 저 언덕까지 다 뒤져보고 양을 찾지 못하면, 그때 걱정하겠습니다.”
아직 하나의 언덕이 남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언덕을 살펴보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걱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리 걱정부터 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 실마리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부터 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물론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걱정만 할 뿐이지요.
이렇게 걱정 속에 사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실까요? 걱정으로 인해서 힘들어하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리고 복음 말씀을 통해서 힘을 계속해서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힘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보다도 크지 못하니, 잘난 체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물론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세례자 요한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예수님을 철저히 준비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기쁜소식인 복음을 알지 못했으며 구원사업에도 직접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이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기에 요한보다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세례자 요한도 누리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선물을 왜 주실까요? 우리가 잘 나서? 아니지요.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서 무상으로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주님의 선물을 걷어차는 미련한 행동은 하지 말고, 자신감 있게 생활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잃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하늘 나라의 작은 이 -조명연 신부-
세례자 요한의 삶을 생각하면, 잉태 때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주님을 위한 도구로서 생활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남들처럼 부귀영화를 좇지도 않았고, 광야로 나가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취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했던 이유는 곧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아온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보다도 못하다고 하는데, 하물며 잠시의 시간도 주님을 위해 제대로 봉헌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과연 하늘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청만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부족한 우리인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네요.
귀찮은 잔소리 -김명희-
제게는 딸아이가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고등학교 1학년이고 또 한 명은 중학교 2학년입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사춘기의 표상인 여드름이 덕지덕지하고 그놈의 여드름 때문에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려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밥은 안 먹어도 샤워는 해야 하고 늦었다고 징징대면서도 드라이기와 고대기를 집어 들고 머리를 다듬느라 요란을 떱니다. 옆에서 보다 못해 단정한 머리가 어울리니 풀어 헤치지 말고 단정하게 묶으라고 하면, 아이들은 대뜸 엄마는 유행을 모르고 너무 촌스럽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외식을 하려고 나서다 보면 아이들은 여기저기 일부러 찢어놓은 청바지를 입고 나옵니다. 얌전한 바지로 갈아입으라고 하면 남들은 다 보기 좋다고 하는데 엄마는 왜 그러느냐며 다른 아이들도 다 이런 거 입고 다닌다고 대들기도 합니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음악을 크게 틀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습니다. 소리 좀 줄이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친구의 채팅 창이 나타나면 금방 채팅을 시작합니다. 엄마인 나는 옆에서 바라만 봐도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공부할 때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니 음악을 끄라고 충고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합니다. 저는 딸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로서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이라고 예수님 친히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보다 앞서 오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그 사람임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딸들이 저의 말을 귀찮은 잔소리로 여기는 것처럼 저 또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그저 그런 잔소리인 양 들어 넘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너무 바쁘고, 지금 중요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한가하게 무슨 천국 이야기냐고, 천국은 아주 머나먼 미래의 일이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오리라 한 그분이시고, 당신의 나라는 이미 제 가까이에 와 있고, 당신은 제가 저의 딸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사랑으로, 사랑하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들의 나라”
-홍성만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구세주를 예언했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내면서 직접 준비를 시킨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구원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에서의 그 '하늘나라'는 다름 아닌 구세주로 인해 드러나게 될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마주 보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충만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전합니다. 이를 향해 전진하는 우리들은 순간순간 하느님을 포착하나 부족한 사랑으로 이내 놓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살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을 사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실 주님을 기억하니 마음 설렙니다.
사람에게 호소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 하느님께서는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 친히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도우실 것임을 확신시키신다. 지렁이나 벌레처럼 약하고 보잘것없어 핍박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인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는 몸소 도와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산과 언덕처럼 높이 솟아 권세를 휘두르며 이스라엘을 압박하던 나라들을 짓뭉개시리라. 마치 타작한 곡식을 키질함으로써 껍데기를 바람에 날려버리고 알곡만 모으듯이 적대국들을 날려버리시고 이스라엘을 모으시리라. 마실 물이 없어 빈사상태에 빠진 자들을 살리듯이 그들을 죽음의 상태에서 구하시고, 벌거숭이산에 강물이 흐르듯이 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안겨주시리라. 그들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시어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시리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의 종살이에서 인류를 해방시키시고 풍부한 생명을 주시리라.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하시는 것을 그들이 보고, 알고, 체험함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돌아오너라! 극악한 반역자들아,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이사 31,6)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 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모든 죄와 악행을 다 잊으시고 용서하시며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불효를 저지르고 집을 나간 자식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향해 애타게 부르짖으신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주리라.”(예레 3,22) 하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당신께서 해주실 터이니 돌아오기만 하라고 사정하신다. 그러나 “이 백성은 얻어맞으면서도 아픈 줄을 모른다. 죽도록 맞고서도 타이르시는 말씀을 귓전으로 흘려버린다. 얼굴에 쇠가죽을 쓴 것들, 도무지 하느님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예레 5,3)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간구하며 호소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침묵 속의 하느님이며, 우리를 외면하고 거절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호소하시며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짖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스르고 외면하며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 관심사가 자신에게만 있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여 소리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에 가려 하느님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소리가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가 잠잠해질 때 비로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먼저 부르시고 찾으셨으며, 자신은 그 부르심을 이면하고 살다가 뒤늦게 부르심을 체험했다고 고백하곤 한다.
하느님은 지극한 사랑이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을 내거나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고,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른다.”(1고린 13,4-5.7-8)
사랑은 끝없는 용서요, 부르심이며, 호소요 절규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호소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신다.
오늘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며,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절규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루가 되자!...................◆
회개의 시작은 첫마음으로 -민경철 신부-
참으로 좋은 뜻으로 시작했고, 순수하게, 열심히, 소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살아온 모습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의 권력단체가 되어버린 이들을 본 적이 있을까요? 조직적이 되고, 체계가 잡혀가면서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왜냐면 그 모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위해서 이 한생 바치겠다고 큰 뜻을 품어 공부를 시작하고, 세상에 나섰는데, 집단 속의 한 구성원으로 살다보니까 자연스레 그들만의 생각과 분위기에 묻혀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또 권력이 되다 보니까 이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겠지요.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하늘 나라의 수호자와 전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 나라를 폭행하고 있는 범죄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여자들 가운데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큰 인물이라고 높이 사시는데 요한은 ‘회개’를 외친 인물이었습니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더 넓고 더 깊게
-오영숙 수녀-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물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의 제자들을 돌려보낸 후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우리는 우리가 본 것, 들은 것에 대해서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틀림없이 내 눈으로 보았다”고, “확실히 내 귀로 들었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 내 주관적이었는지, 나 중심적이었는지를 깨달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한 요한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기에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많은 핑계를 대며 받아들이지 않고 이러한 것을 합리화하지는 않는지요? 이러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데 크나큰 장애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더 넓고 더 깊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때, 하느님의 눈으로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부터 이루어 나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는 점점 멀어져만 갈 것입니다.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 김상조 신부-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이 말씀은 "내가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라는 말씀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일텐데, 요한이 한 일을 보고 예수님이 직접 그 사람됨을 인정해주신 말씀이다. 요한의 사명은 지난 주일 복음말씀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것,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것,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낮추고. 굽은 데는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그 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 극도의 칭찬을 받았다. 예수님도 당신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실 것이었다. 요한의 사명이 훌륭해서일까? 요한이 특별한 은총을 받아서였을까? 요한은 어떻게 자기 사명을 수행해냈을까? 우리의 사명은 보잘것없는 것인가? 우리는 특별한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가? 요한의 사명과 우리의 사명은 다른 것일까?
아니다. 우리의 사명도 요한의 사명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도 그분의 길을 곧게 하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추고 굽은 길은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이해하고 충분히 받아들이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능력이 안된다" 하지 않고, 기꺼이, 요한처럼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도 해낼 수 있는 사명일 것이다. 우리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일 게다. 요한처럼 위대한 사람만이 굽은 길을 곧게 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한, 예수님처럼 특별한 사람만이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 우리 스스로가 하늘나라에 폭행을 가하고 있을지도 모을 일이고, 만일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 것이다. 안내자와 그리스도인의 역할 -이찬홍 신부
복음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두 가지 평가를 내리십니다. 처음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입니다.
첫 부분은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둘째 부분 곧,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 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떤 인물입니까? 복음에서 알려주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그 어떤 예언자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시기로 예언된 엘리야 예언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예수님 보다 먼저 오시어 예수님의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맞이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한 요한이.. 세상에 태어난 인물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면, 과연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갈 수 있는 나라일까요? 얼마나 더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이라야 갈 수 있는 나라일까요?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저 같은 니나노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진작 포기해야할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안내자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안내자로서 생활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내자로서 지녀야할 모습, 자세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안내를 받은 사람임과 동시에 안내자입니다. 사제로서 저는 안내자입니다. 미사와 성사집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자 입니다. 어제부터 성탄 판공성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해실안에서 고해성사를 청하는 분들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주고, 죄를 용서하는 사죄경을 염해줍니다.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격려해 주고 다시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실제, 성실하게 성사에 임하는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의 물로 목욕을 해서 기쁜 마음으로 고해실을 나섭니다.
그런데, 사제로서 제가 그렇게 신자 분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예수님과 멀어질 수도... 구원에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은 구원해 주면서도 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예수님께 인도해 주면서 저 자신은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 ‘안내자로서는 충실했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충실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안내자로서 제가 경계하고 늘, 조심해야할 모습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본당에 쉬는 교우 방문이 한창입니다. 며칠 후면, 여러분들이 인도한 예비신자 분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 성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안내자로서, 쉬는 교우들에게 다가갔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전해주고, 교회로 인도해 왔습니다. 이런 모습이 안내자로서의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남은 그렇게 잘 인도해주면서도, 정작 여러분스스로는 안내하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에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멀어지고, 구원에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낫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하느님을 만났을 때, ‘삶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지만,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 말씀은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을 전해주는 말씀도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레자 요한이 구약에 마지막 예언자요, 하느님 보시기에 훌륭한 일을 한 인물이라도, 우리가 얻은 지위, 곧 하느님 자녀라는 칭호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심지어는 예수님께 까지 세례를 베풀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예수님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훌륭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준 그리스도인이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보편성을 갖고,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하지만, 그 구원의 가능성은 명확하지가 않고 좀 에매 모호합니다. 아무리 예수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다 하더라도...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인도했지만, 스스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헤로데에서 죽음을 당하여 순교했지만, 순교 의미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참된 순교의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교만으로 똘똘 뭉친 저만의 생각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받은 신앙인입니다. 구원이 명확하고, 구원받는 다는 확실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요한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보다 덜 위대하지 않을까 감히, 교만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분입니다. 비록, 안내자로서 충실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안내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안내자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혹, 안내자로서 구원을 받더라도 명확하지 않음을...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이요, 예언자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를 알려준 세례자 요한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안내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도록 합시다. 아멘.
<작은 자> - 이현철신부- 작은 자는 남들이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자는 자신의 재능이나 덕행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서슴지않고 말째의 자리에 자신을 놓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 기뻐합니다. 작은 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 시간, 물질, 덕행 등 모든 것이 홀로 선하신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아무 것에 대해서도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남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작은 자는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고 자기가 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흥분하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자는 사람들이 칭찬해 줄 때에나 비난을 할 때에나 항상 평화중에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이지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자는 진심으로 통회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11, 11-15)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었다..."라고 하십니다만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작은 자라고 하며, 장차 내 뒤에 오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자라고 자신의 겸손함을 보입니다. 이번에 성직자로 수품을 받은 저 젊은이들이 이러한 작은 자로서 충실한 사목생활을 하여 주님으로부터 세례자 요한처럼 큰 인물로 칭찬받기를 기도드리립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보기드문 큰 키'라고 지금 칭찬을 받고 있을 민성기 신부님의 많은 저서중 '하늘로부터 키재기'라는 책에서 일부 발췌하여 퍼드립니다. <신학생 시절, 가르멜수도회의 동갑내기 신부 장석훈 베르나르도는 창경궁을 거닐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 "요셉아, 나이 마흔될 때까지는 나서지마라. 침묵해라. 공부해라.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할 그때까지…" 그 사이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묵상한 글들을 책으로 묶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책으로 묶는 것은 어제의 삶에 애착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름방학이 끝나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혜화동 보나벤뚜라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초가을 9월 17일, 너무나 뜻밖이었던 그 여름 사건을 떠올리며 끄적이다가 아래의 졸시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 <하늘로부터 키재기> 세우려 한다 세우려 한다 한없이 세우려 한다 오르려 한다 오르려 한다 한없이 오르려 한다 재려 한다 재려 한다 한없이 재려 한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한없이 세우고 한없이 오르고 한없이 재려 한다 누가 더 높이 쌓았는지 누가 더 높이 올랐는지 한없이 쌓고 오르고 재려 한다 사람은 땅에 사는 동물 사람은 땅으로부터 높이를 재는 동물이다 보이는 것의 기준은 땅이기에... 허나 보이지 않는 게 있다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이라 불렀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는 분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높이를 재는 분이시다 오늘에야 사람들은 불현듯 하늘로부터 키재는 법을 알았다 하늘로부터 키재기를 시작한다 난쟁이의 키가 커져 보인다 바벨탑은 낮아지고 난쟁이의 키는 커졌다 내리고프다 무너뜨리고프다 오, 캐노시스! * 갑자기 비가 내리고 세상이 바로 보인다. ※ 캐노시스 : 어원은 희랍말의 kenosis로서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쓰여지고 '비움'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늘로부터 키를 재는 지혜, 이러한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야고 3, 13-18).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 작아진다는 것,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아 보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지는 그 곳, 바로 그 곳에는 낯설음이 있습니다. 왠지 어색하게 낯설은 그 곳에서 우리는 여느 세상과는 다른 새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지기를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는 것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그 새로움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새로움과 낯설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육화하시어 우리와 같은 피조물로까지 작아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수모를 당하시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셨던 세상, '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 1)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 되는 변화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의 신비입니다(마르 4, 31). 정현종 선생의 「섬」이라는 단순한 시가 있습니다.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저는 이 시를 대하면서 시인이 노래하는 이 '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우리는 곧잘 이런 말을 합니다 :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디오게네스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나, 정현종 선생이 노래 한 '섬'을 저는 같은 맥락에서 보고 싶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은 찾기가 어려운 만큼 우리 눈에도 잘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동경하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처럼, 한번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드러나지 않아 우리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일까?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참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나의 삶의 자세를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 자신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야 하는데 그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자존심을 뭉그러뜨려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 (루가 14, 11 : 18, 14)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낮아지게 됩니다" (마태 18, 4). 작음, 작아진다는 것,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이며 신앙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덕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질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공간,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을 비우면 비울수록,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세상의 눈으로 보아 바보가 되고 어리석어 보이면 보일수록,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 작아집시다! 우리가 작아질 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육화하실 것입니다." 상품이 되어가는 성탄준비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 11,3) 하고 묻게 한 대목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라는 대답 대신에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4절)고 하셨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구원역사 안에 차지하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할에 대하여 증언하신다.(7-19절) 오늘 복음은 그 증언의 핵심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모든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9절) 인정하신다. 또한 말라기 예언자가 특정한 때에 올 것으로 예언한 ‘특사’와 ‘엘리야’로 인정하신다.(14절) 말라기 예언자는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그리고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낸다.”(말라 3,23)고 하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길을 닦을 야훼의 특사가 먼저 올 것이며, 세상 종말에 야훼의 심판이 있기 전에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던(2열왕 2,11)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을 도모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특사(선구자)와 하느님의 세상심판을 준비하는 엘리야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로 인정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은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을 없었다.”(11절)는 말로 극에 달한다. 이는 실로 놀라운 극찬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는 크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극찬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에 복음사가가 하향조정을 목적으로 덧붙인 말일 수도 있겠다. 허나 세속의 굴레를 벗고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을 뵈오며 사는 이라면 그가 아무리 작은이라 할지라도 요한보다 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극찬은 세례자 요한의 인품이나 인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세사적 위치와 역할에 있다. 문제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과 메시아의 실제적 도래로 시작된 하느님나라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예언이 요한에게서 끝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예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야훼의 특사요 엘리야인 요한을 잡아다 옥에 가두었고,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그 문을 잠가버렸으며, 하느님나라의 상속자인 예수님조차도 세상의 배척과 폭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상도 마찬가지로 하느님나라를 배척하고 폭행하고 있다. 세상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분의 나라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배척할 리도 폭행할 리도 없다.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도 알고 그분의 나라도 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하느님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인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 아닌가. 그것은 성탄이 세상에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세상은 성탄을 상품으로 생각하고 한 몫 잡을 기회로 삼는다. 아니면 놀 수 있는 휴일로, 선물을 주고받을 계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교회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하지만 상품이 된 성탄 안에 정작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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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자의 오심으로 온 세상이 즐거워 하오니,당신의 기쁨을 더욱 충만히 느끼게 하소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