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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있었던 앉은뱅이 병인이 일어난 사건은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중요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기독교의 구원론이 이 사건을 통해서 선포된 것입니다. 11절과 12절에 보면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진모퉁이에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가 산에 드린 공예에서 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체포되어 산에 들인 공예에 끌려갔어요. 이곳은 최고의 권력기관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지금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난 일이 그들에게는 매우 중차대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한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
이 두 가지를 선언했습니다. 베드로는 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에요. 평소에 덤벙 덤벙대다가 아주 결정적인 때는 결정타를 치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진지하고 아주 열심히 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골대 앞에서 똥볼을 차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이 반대로 이 베드로는 실수도 많고 여러 가지 다혈질에 문제도 많고 너무 성급하고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골인을 하는 거예요.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여러 일들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계시를 주신 것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근거로 교회론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을 이제 반석이라 하라. 내가 그 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다 하면서 교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주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교회론을 출발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내들인 공예 앞에서 한 이 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독론을 출발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구원론 유대교에도 구원론이 있었어요.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서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선민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게 구원이라고 그들은 믿었어요.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새로운 구원론을 말씀하는 겁니다.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이 구원론이 선포되고 이 구원론이 확립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지만 그 당시 유대 사회에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 이것은 천천병력 같은 선언입니다. 오랜 기간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서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왔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예수 이름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율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그들을 당황하게 하는 그런 선언인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시작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동안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은 뭐냐? 이것이 유대사회와 또 유대인으로서 여러분 초대교회는 복음이 안디옥에 전해질 때까지 대부분은 다 유대인이 예수를 믿은 거예요.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은 거예요. 근데 예수 믿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들에게도 이 선언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거였어요.
그러면 우리 조상과 내가 그동안 온 힘을 바쳐서 지켜왔던 율법은 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 내내 갈등을 빚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선포했다면 그것을 율법과 복음 율법은 그렇다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풀어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것을 기록한 성경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예요. 율법이 뭐냐 율법을 왜 주셨느냐 바울도 유대인 중에 유대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율법으로는 최고 가는 사람이었는데 다메섹에서 예수 만난 후에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이라면 그러면 율법은 뭐냐 이걸 가지고 광야로 들어가서 3년을 그리고 고향으로 들어가서 10년을 고민하고 연구한 거예요.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 마지막 로마서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쓰면서 또 고린도에서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이것을 집대성해 냅니다.
사실 바울은 기독교의 구원론을 완성한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율법이 뭐냐?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라는 거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야 되는데 혈통이 거룩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을 선택하시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다라는 거예요.
갈라디아 3장 19절에 그런 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수들로 말미암아 중부의 손을 베풀어 빌리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예수님 오신 다음에는 임무 끝이라는 거예요.
놀랍죠. 유대인으로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그다음에는 율법은 그러면 크리천에게는 어떤 의미냐 유대인이나 그 후에 예수를 믿은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냐 율법이 필요 없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아직도 기능이 있는데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여러분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인지 모릅니다. 교통법규가 없을 때는 그냥 차 타고 빨간불에 지나가도 누가 잡을 이유도 없고 그게 잘못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빨간불 딱 켜지고 규정이 딱 있으면 지나가고 나면 찝찝합니다. 그러다 교통 순경이라도 보고 경찰차라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하죠. 막 쳐다보는 것 같고 쫓아오는 것 같고 죄를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 율법서를 읽으면서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죽을 수밖에 없나 이걸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근데 유대인들은 내가 이만큼 지켰으니까 나는 훌륭한 선민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율법의 기능을 왜곡한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구약의 성경 하나님은 너무 무섭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막 죽이고 뭘 좀 잘못했다고 징계하고 이러냐 나 이런 하나님 못 믿겠다. 이래서 구약을 안 잊거나 신앙을 떠나는 사람도 있어요.
구약의 하나님은 이 구약의 하나님의 모습은 율법의 모습이에요.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모르다가 거울을 딱 보면 내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를 보이는 거예요. 아주 적나라하게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구약인 겁니다. 그게 율법의 기능이에요.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길이 없어 하나님이 원래 처음부터 율법으로 구원을 베푸실 생각이 없으셨어요.
그러면 어떻게 구원하시느냐? 율법 외에 또 하나의 의를 주시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은 지켜서 의롭게 되지만 하나님이 다시 주시는 의는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완전한 의를 이룰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그냥 믿기만 하면 그분의 의가 통째로 내게 들어오는 거예요.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는 율법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님은 또 하나의 의예요.
새로운 의 그 의는 지키는 것이 아니고 믿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아멘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계획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셨고 그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로마서 4장 13절에는 아브라함이나 그의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아브라함보다 모세보다 아브라함이 선조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선포하시는데 99세에 내 후손이 하늘의 별 같고 땅에 바다에 모래알 같으리라. 아니 아들이 하나도 없는데 지금 황당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때 아브라함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상황은 아주 복잡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다. 창세기에 의하면 그가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겼다. 말씀하셨어. 그 후에 율법이 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구원의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방법을 다시 만든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 때 처음에 정하셨어요. 믿으니 의로 여겼다. 그 후에 율법이 왔기 때문에 율법이 그 방식을 바꾸지 못했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내실 자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이것을 지금 유대 사회에서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어려움이 있겠어요. 그래서 이 바울을 얼마나 공격했는지 몰라요.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계속해서 바울을 공격합니다. 유대인들, 심지어는 크리천들까지도 유대 율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바리새인 크리스천들까지도 공격을 해요.
그러나 결국은 사도 바울은 그 일을 이루었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가장 후에 죽은 사도 요한 이분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지막까지 살아있다가 죽은 분이에요. 요한계시록을 쓰고 그도 이렇게 선언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다 각자 베드로도 다르고 요한도 다르고, 그리고 바울도 다르지만 그들의 공통적인 구원은 구원론은 오직 예수 솔로스 크리스투스 초대교회도 이 문제가 공격을 받았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오늘날에도 종교 다원주의에 의해서 공격을 받지만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의 길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멘이시죠. 예. 그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서 그게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이 없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것을 선포한 거예요. 그래서 이 사건이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이 사건이 초대교회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다음에 사도들의 용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절 20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 너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당국자들이 지금 위협합니다. 지금 풀어주지만 이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너희들의 가르침을 더 이상 가르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다시 잡아서 죽일 수도 있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얼마나 지금 위급한 순간인지 몰라요. 잡혀서 이제 참수당할 수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 목 잘라지는 거 봤어요. 이슬람 세계에서 이 참수하는 것을 유튜브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너무나 끔찍해. 야 순교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죽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지금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과 사도들은 그런 위기에 처해 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야 풀어줄 테니까 다시는 하지 말라 말하면 아마 한 8~90%는 그럴 거예요. 제가 그동안 미쳤었나 봐요. 조금이라도 더 살아야지 이 좋은 세상 다시는 그런 일 안 하겠습니다. 손금이 없어지도록 빌 수도 있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양심적으로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이런 위기 오늘 내가 이 한마디만 하면 살고 아니면 목이 잘린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점잖게 앉아 계시지만 아마 대부분은 아주 비굴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오늘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가 당신들이 생각해 당신들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신들도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아니냐 그런데 누구 말 듣는 게 더 중요하겠느냐? 나는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딱 잘라서 말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게 사도들의 용기예요. 우리가 말하고 선언하고 고백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믿고 고백하면 돼요. 진리를 선언하면 돼요. 그런데 그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해요. 진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확정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여러분 처음에는 무시당합니다. 에이 뭐 그런 게 있어? 그러다가 조롱당합니다. 그리고 박해당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끝까지 견디는 누군가에 의해서 그 진리는 확정되는 거예요. 이 과정입니다. 오늘 사도들이 용기를 내므로 살려주십시오. 빌지 않고 용기를 내서 나감으로 베드로의 베드로를 통해서 선포하신 이 구원론이 이제 힘을 얻고 초대교회를 끌어가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해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어요.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 만만치 않습니다. 이 사회도 만만치 않아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용기를 내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을 선택할 것이냐 타협하지 않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면서 나아가는 오늘 이 사도들과 같은 용기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거예요.
비겁한 사람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풀려났어요. 예루살렘 교회가 그들이 풀려난 사건과 더불어 모여서 기도회를 시작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회 23절과 24절에 보면 사도들이 노이의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제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니시오.
사도들이 갇혔을 때 얼마나 마음이 졸렸겠어요? 사도들이 거기서 다 잡혀 죽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어떤 용기를 가지고 또 신앙생활을 유지하겠어 이 공동체를 유지하겠어요. 그런데 그들이 풀렸다 풀렸는데 비곤하게 풀린 것이 아니고 당당하게 그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당당하게 용기를 가지고 그들에게 선포하고 풀렸다는 사실을 듣고 이 예루살렘 교회가 힘을 얻은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기도회는 뭐였습니까? 마음이 하나가 됐어요.
어려울 때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도자가 어려운 국가든지 가정이든지 사회든지 교회든지 어려운 상황에서 지도자가 갈팡질팡하거나 자기 몸보신하려고 하거나 용기를 잃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는 거예요.
지도자는 그때 필요한 거예요. 그때 용기를 내서 진리를 붙들고 선포하고 나가면 여러분 나머지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초대교회가 그랬어요. 이 사건 하나로 그 사도들의 그 용기 그것을 보고 예루살렘 교회가 다시 힘을 냈어요. 한마음이 되어 막 기도소리도 커졌어요. 통성 기도는 그때도 있었어요. 목소리를 합하여 한국교회만 통성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초대교회부터 그들은 이렇게 소리쳐 기도했어요. 기도 내용이 뭡니까? 대주제요. 여러분 대주제하여 천지와 바다와 그 물을,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자요. 지금 막 기도가 굉장히 글로벌하고 유니버설하고 이 기도의 사이즈 스케일이 달라요.
큰 사건 하나 겪고 나면요. 스케일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저 기도 내용이 그저 오늘 굶지 않게 해주세요. 오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걸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큰 사건 한 번 겪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가 달라졌어요. 대주제시어 만왕의 왕이시어. 천하만물의 주언자지요. 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도 바뀌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뀌어야 돼요. 그리고 그들이 한목소리로 소리 높여서 기도합니다. 축제 분위기에서 그런데 기도의 내용이 이거예요. 저들의 위협을 지켜봐주시고 사람이니까 저들의 위협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또 우리들을 보호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하시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와 기적이 계속 일어나게 하소서 여러분 이 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닙니다.
지금 사도들이 잡혀 들어간 이유가 뭐냐 잡혀 들어간 이유가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에요. 또 치유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이 사건은 예수님의 예수님의 현장성이에요. 예수님이 지금 사라지셨지만 승천하셨지만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 행하셨던 기적이 지금도 일어남으로 예수가 영적으로 현연에 계시다 현장에 계시다 그것 때문에 발칵 뒤집어진 거거든요. 그것 때문에 지금 위기를 당한 거예요. 사도들이 그런데 보통 같으면 하나님 이제 좀 우리를 위험해서 건져주세요라고 끝날지 모르지만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우리가 위험을 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게 해주세요. 말씀을 전하고 치유를 베풀고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가 여러분 파워플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우리 기도가 너무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에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한번 기도해 보세요. 기도의 사이즈를 키워보세요. 기도의 영역도 넓혀보시고 그러면 그 기도가 폭발력을 갖습니다. 31절에 빌기를 다함에 모인 곳이 진동했다.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도들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이제 다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완전히 변화된 모습. 거기다가 땅이 진동했습니다. 땅만 진동했습니까? 예루살렘 공동체가 진동한 것입니다. 그 사회가 진동했고 그 인생이 진동했어요. 기도는 그런 능력이 있어요. 이런 기도는 여러분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기도가 금년에는 우리가 2023년 기도 대행진의 해입니다. 우리에게 기도에 불이 붙어야 되고 또 기도의 지경이 넓어져야 되고 기도가 파워풀해야 돼요. 그저 작은 일 그것도 중요해요. 우리의 마음 아픈 거, 내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 하나님 앞에 아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스케일 있는 기도를 드려야 된다. 그때 놀라운 초대교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비겁하지 마세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우리가 받은 이 복음을 이웃에게 꼭 나누고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구원과 치유와 회복의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