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72
23.조선시대엔 사형수의 인육을 먹었다 [충신·간신2]
-김옥균·사육신 사건(신숙주-신면,신정,신용개)·성희안·홍윤성·한명회
사진1. 서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된 갑신정변의 주모자 김옥균.
머리는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글씨와 함께 효수돼 있고 그옆으로 토막난 시신이 널려있다. 1894년. 명성왕후 민 씨는 "갑신정변 피해자의 아들들이 김옥균의 간을 꺼내 씹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고 <매천야록>은 전한다. 사진 미국 헌팅턴도서관.
조선의 형벌제도는 동시대 다른 국가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가장 무거운 형벌인 참형도 만물이 생동하는 춘분부터 추분 동안은 형을 집행하지 않고 법으로 유예했다. 그러나 강상대역(綱常大逆·부자와 상하의 윤리를 어지럽히거나 왕권을 범하는 행위)의 중대 범죄는 예외였다.
이 경우 즉각 형을 집행했다. 이를 '부대시참(不待時斬)'이라 했다. 왕조에 반기를 드는 역적은 처벌이 제일 혹독했다. 역적 본인은 참형에 처한 뒤 시체를 5등분해 전국으로 돌려 경계로 삼았다. 능지처참 또는 능지처사라는 형벌이다.
사형수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은 1596년 임진왜란의 혼란기를 틈 타 반란을 일으켰다가 능지처참된 이몽학과 송유진의 시신을 입에 댄 고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우야담은 이몽학의 난때 서울에 머물던 중국 무관이 사형수의 시체를 갖고와 먹으면서 자신을 접대하던 이충원(1537~1605)에게도 강권해 먹였다고 전한다. 이충원은 선조를 호종해 호성공신 2등에 올랐고 한성부판윤과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사형수 식인풍습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매천야록은 "명성왕후 민 씨가 갑신정변 희생자의 아들들이 주모자인 김옥균의 배를 갈라 간을 씹지 않는다고 격분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역적에게는 그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와 아들(3족)도 연좌시켜 죽이고 어머니, 아내, 딸 등 여자는 신분을 종으로 만들었으며 재산도 모두 몰수했다. 세조를 살해하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된 '사육신 사건'은 최대 역모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핵심 연루자들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사육신을 포함해 12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그들의 여자가족 173명은 세조의 공신들에게 하사됐다. 공신들은 평소 친구로 지냈을 사육신의 아내를 서로 갖겠다고 다툼까지 벌였다.
사진2. 친구 사이로 보이는 양반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사육신 사건 이후 세조의 공신들은 평소 친구로 지냈을 사육신의 아내를 서로 갖겠다고 다툼까지 벌였다. 사진 미국 헌팅턴도서관.
신숙주(1417~1475)가 주군으로 모셨던 단종의 아내 정순왕후 송 씨를 탐낸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순왕후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신숙주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이끌려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조선말 사관이었던 김택영(1850~1927)이 쓴 <한사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조는 이런 신숙주의 요구를 묵살했다. 어린 조카를 죽인 비정한 세조였지만 차마 조카며느리까지 다른사람에게 첩으로 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세조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됐는지 "정순왕후가 정업원(남편을 잃은 후궁이 거처하는 사찰)에 살게 하라"고 특명을 내렸다고 <한사경>은 서술한다.
놀랍게도 공신이 왕의 후궁을 첩으로 받은 사례가 있기는 하다.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에 의하면, 성희안(1461~1513)은 박원종, 유순정과 함께 '중종반정의 삼대장'으로 불렸다. 그는 연산군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는 것을 훈계하다가 말직으로 좌천됐다. 거사 후 1등 공신이 됐지만 공을 박원종과 유순정에게 모두 양보했다.
하지만 그는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긴다. 연산군의 후궁을 첩으로 달라고 해 데리고 산 것이다. <송와잡설>은 "섬기던 임금의 후궁을 첩으로 삼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성희안의 공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지은 죄는 천지에 가득하다"고 논평한다.
사육신 사건에서 희생된 이들과는 달리 세조의 편에 섰던 배반자들은 막강한 부와 권력을 보장받았고 그들의 가문 역시 번성했다. 세조의 핵심 공신 중 한 명인 홍윤성(1425∼1475)은 성질이 사나워 사람들을 업신여겼고 제 성미에 맞지 않으면 아무나 예사로 죽였다.
조선 중기 문장가 차천로(1556~1615)가 쓴 <오산설림초고>는 세조가 그의 공을 높게 사 처벌하지 않자 더욱 기고만장해 조정에서도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홍윤성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청탁했다. 홍윤성은 땅을 내놓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에 숙부는 "내 덕분에 10여 년이나 잘 먹고 살았는데도 벼슬 하나 안 주느냐"고 따졌다. 화가 난 홍윤성은 숙부를 때려죽이고 산속에 파 묻어버렸다. 숙모가 억울한 사정을 관청에 고했지만 형조, 사헌부 모두 홍윤성의 권세가 두려워 사건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숙모는 세조가 온양온천에 행차하기를 기다렸다가 사건의 전모를 고해 바쳤다. 세조는 크게 화를 냈을 뿐 홍윤성을 처벌하지는 않고 대신 그의 하인 10명에게 벌을 주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어버렸다.
사진3. 한명회 묘지(墓誌) 조각.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다. 연산군때 무덤을 파내 시신을 훼손하는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이때 묘지도 함께 파괴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1415~1487)도 잔인한 인물이었다. 계유정난의 설계자이며 두 딸을 예종, 성종과 결혼시켜 당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 역시 살인을 예사로 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한명회는 부하들이나 노복들이 죄를 지으면 기둥에 묶어 놓고 활을 쏘아 죽였다.
술에 취해 조는 틈에 죄인이 밧줄을 풀고 도망치기도 했다. 그런 그는 정강이뼈가 아픈 병을 앓았는데 통증을 참을 수 없게 되자 종에게 바위로 정강이를 부러뜨리도록 했다. 주저하는 종을 향해 활을 빼어들자 종은 어쩔 수 없어 돌을 들어 정강이 위에 내려쳤다. 한명회는 결국 이 일로 앓다가 죽었다고 <어우야담>은 전한다.
신숙주 집안도 크게 번창했다. <송와잡설>에 따르면, 신숙주의 둘째 아들 신면은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젊은 나이에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된다. 그런데 신면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세조 13년(1467) 함경도 지방의 호족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반군이 쳐들어오자 대청 위 다락으로 피한다. 적군들이 관찰사를 찾지 못해 돌아가려던 차에 아전 한명이 신면이 숨은 곳을 밀고해 화를 입는다.
신면이 피살됐을 당시 5살에 불과했던 그의 아들 신용개(1463∼1519)는 그래서 할아버지 신숙주 슬하에서 컸다.
성장하면서 그는 꼭 아버지 원수를 갚으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함길도에 가서 아버지를 고발한 아전의 이름과 외모를 자세히 파악해뒀다.
성종 19년(1488) 별시문과에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해 정4품 벼슬에 오른 신용개는 아전이 한양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일행과 함께 도끼를 들고 그가 묵고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아전을 불러내게 한뒤 신용개는 뒤에서 도끼로 원수를 찍어 죽였다.
이 살인사건은 목격자가 없어 미제 사건으로 남는다. 그런 신용개는 후일 벼슬이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른다.
신숙주의 넷째아들 신정은 아버지의 위상을 믿고 감히 임금에게 대들다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송와잡설>에 의하면, 신정은 사찰 노비를 자신의 종으로 삼기 위해 임금의 옥새를 위조해 문서를 조작했다가 적발돼 옥에 갇혔다.
성종이 친히 의금부에 거둥해 "뉘우친다면 네 부친의 공로를 생각해 석방할 것"이라고 기회를 줬지만 귀하게만 자랐던 신정은 뉘우치기는커녕 격분해 "억울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성종은 "어리석은 고집쟁이로구나"고 개탄했다. 결국 신정은 재상의 신분으로 옥새를 위조한 죄로 사약을 받아야만 했다.
승자가 쓴 정사(실록)는 세조 일당의 치부를 숨겼지만 고전은 그들의 비행을 낱낱이 고발한다. 단종비까지 첩으로 두려고 했던 신숙주는 여러 고전이 비판한다.
<한사경>은 "논하여 말하노니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여러 아우를 살해하여 임금의 지위를 훔친 것은 영원히 남을 큰 죄악이다. 그러나 신숙주가 단종의 비를 달라고 청한 것은 간악한 것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것이다.
비록 신숙주의 후손이 후대에 걸쳐 창성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악명이 천지와 함께 존속되어서 큰 강과 바다로도 씻을 수 없으니 '음란한 자에게 화를 준다'는 천도의 진리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비분강개한다.
윤근수(1537~1616)의 <월정만필>과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도 신숙주의 행태를 비난한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23.조선시대엔 사형수의 인육을 먹었다 [충신·간신2] / 매일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