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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신인상 제도 이대로 좋은가?
이승하
등단을 꿈꾸는 그대에게
메일 잘 받았습니다. 저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고도 ‘아직까지’ 등단하지 못하고 있어 송구스럽다고 쓰셨지요. 제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는데 왜 저한테 송구스럽다고 하는지, 제가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등단이라는 것……. 이 땅에서는 책을 자비로 출간하거나 동인지에 작품을 싣는 과정을 통해 문단에 나간 사람은 등단한 것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묘한 관습이 있어서 어떻게든 등단을 하려고 하지요. 신춘문예 공모에 아직도 많은 작품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입니다.
엊그제 만난 출판편집인의 말이 귀에 쟁쟁합니다. 시집을 사서 읽는 독자층은 이제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이 없으면 문예지와 시집 출판시장은 완전히 고사할 것이다, 문학도 이제는 역사서처럼 기획상품으로 만들지 않는 한 절대로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2006년도 상반기에만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 35명에 이르고 있네요. ‘35’라는 숫자는 제가 직접 찾아본 문예지의 등단자 수일 따름이지 제가 찾아보지 못한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까지 합치면 50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하반기에는 상반기보다 훨씬 많은 당선작이 문예지에 실리므로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시인의 수는 1년에 최소 100명이 넘을 것입니다. 시집은 도무지 팔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시인 지망생과 시인으로 등단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이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차적으로,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습니다.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보기 싫어하여 신문을 안 보고 사는 20대, 30대, 40대가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인터넷 언론을 통해 중요 기사 혹은 관심 있는 기사만 대충 보는 거지요. 시 60여 편이 실려 있는 시집을 첫 페이지부터 한 편씩 음미하면서 읽는다는 것은 끔찍한 고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대학생 중 90%는 일본의 만화가 중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만화가가 있습니다. 90%는 너무 많다구요? 그럼 제가 적을 두고 있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라고 한정하겠습니다. 어쨌든 35명 중에서 제 눈에 들어온 몇 분의 시를 살펴보면서 문예지를 통한 등단의 의의를 논해보고자 합니다. 150여 편을 한꺼번에 읽어보니 최근 등단작들의 특징이 보이는군요.
오래 집 비운 사이, 그 노인
베란다에 놓인 난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주도 검은 돌로 지은 벼랑의 집에서
햇볕 한 줄기에 굽은 몸 따뜻이 기대고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정경남, 「제주 한란」(『열린시학』) 도입부
문화회관역 3번 출구,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서
삐뚤삐뚤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직 그들은 오프라인 상태에 있었다
시계를 본다
모래가 씹힌다
―김휴, 「결빙 예감」(『현대시』) 제2연
간디학교 1학년 김연희는 오늘 모내기 수업을 한다 하얀 종아리 걷어붙이고 맨발로 못줄 앞에 선다 서툰 솜씨로 모를 심으며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난다 발의 감각만으로 논바닥을 살피며 혹시 있을지도 모를 돌도 피하고 조그만 구덩이도 피한다. 부드러운 자리를 골라 모를 심는다 (하략)
―유영곤, 「간디학교 모내기 수업」(『불교문예』) 전반부
3편 시에 어떤 공통점이 있지요? 시적 화자인 ‘나’는 숨어 있습니다. 그 대신 그 노인, 사람들(혹은 그들), 간디학교 1학년 김연희를 등장시켜 ‘타인’을 형상화합니다. 즉, 자신의 내면세계를 독특한 자기만의 어법과 문법으로 탐색하는 ‘미래파’(문예사조상의 미래파가 아니라 권혁웅 씨가 말하는 미래파)의 시 세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서정적 자아가 세계와의 동일화를 꿈꾸는 일은 최근 등단자들에겐 관심 밖인 듯합니다. 자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관찰기록부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면세계에 대한 탐색이 아니기 때문에 시들이 자연히 일상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대신에 체험 영역을 중시합니다. 관념 표출 대신 현실세계에 천착합니다. 형이상학 대신 일상성을, 사변 대신에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시선』의 당선작 「황 과장」(정준영 작)은 “황 과장은/ 모든 이에게 친절하다”로 시작되며, 『창작21』의 당선작 「1999 봄, 그 환한 열림」(박영희 작)은 “답십리5동 언덕배기 지하방/ 어린 내 누이 건빵 같은 잠을 잔다”로 시작됩니다. 1인칭 화자가 등장하더라도 자신의 일상적 체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A4용지 한 장의 분향으로 써라 하니
웃음이 나온다
마흔 해의 이력을
A4용지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영숙, 「바코드」」(『시안』) 도입부
나이 마흔이 넘은 시적 화자가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쓰기에 앞서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풍미했던 상징주의와 모더니즘(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상상력을 태양계를 넘어, 은하계를 넘어, 저 우주의 끝간데까지 가보게 했는데, 근년의 등단자들은 자기 자신의 체험과 이웃에 대한 관찰기록을 시시콜콜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어찌 보면 다소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독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아담하고 소담한 시편을 쓰다 보니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인에게 요구되는 신선미를 지닌 시인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명색이 신인인데 그만그만한 시를 쓰는, 개성이 없는 시인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침체된 우리 시단의 분위기를 깨뜨리면서 용트림을 할 시인이 필요한 시점임에도 소소한 일상체험의 시화(詩化)로 등단들을 하고 있으니……. 등단자들이 모두 나이를 밝혀놓지 않아 평균연령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20대 등단자는 없는 듯합니다. 40대가 제일 많고, 30대와 50대가 나머지를 절반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20대 젊은이들이 시를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투고를 하는데 나이 드신 분들의 연륜의 힘에 밀려 대다수 낙방을 해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작년 가을에 계간 『문학과 경계』와 『시로 여는 세상』으로부터 신인상 심사를 의뢰받고 잡지사로 가서 다른 심사위원과 함께 심사를 했었습니다. 정말 몇 시간 동안 논의를 했지만 신인상을 줄 만한 작품이 없어 ‘당선작 없음’이라고 밝히고 최종심에 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심사평을 두 군데 모두 길게 썼었습니다. 당선작을 못 뽑은 이유를 밝히는 글이었으니 길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심사 과정에서 투고된 수백 편의 시를 읽는 것만 해도 기운이 빠지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사로잡는 시가 없었지만 그래도 한번 건져보고자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했고, 끝내는 당선작을 못 뽑고 잡지사를 나왔으니 기진맥진할 노릇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손에 든 문예지 중에 ‘당선작 없음’이라고 사고가 나간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심사평은 대개의 경우 격찬에 가까운 것들이었구요. 정말 작품이 너무 좋아서 그렇게 상찬을 아끼고 있지 않은지, 의구심이 드는 문예지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아무튼 35명 등단자 중에서 제 시각에서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4명의 시인에 대해 몇 마디씩 하고자 합니다.
나는 조작 당하고 있다
벨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릴 때마다
두 귀를 쫑긋거리며
딩동거리는 소리에
번호표를 들고 창구 앞에 서자
‘여기는 KB 우대고객 창구입니다’
‘다른 창구를 이용해주세요’
그날 이후로 나는
거리의 자동차 경적음에도
침을 흘린다
파블로프!
치사하다
먹는 것을 갖고 장난을 치다니
당신의 실험이 증명된 이후
사람도 두들기면
개와 같이 된다는
세뇌기술이 범람하는 것을
아는가!
국민은행 구월동 지점
그곳에서 나는 개가 된다
―김영선, 「수인번호」(『시와시학』) 전문
이름을 보고 여성인 줄 알았더니 60년생 남자이고 공인노무사로군요. 이 시도 앞서 예로 든 몇 편의 시처럼 일상체험의 시적 형상화입니다. 우리는 은행에 가서 일을 볼 때 벨소리가 울리면 두 귀를 쫑긋거리고 붉은 번호를 쳐다봅니다. 순번이 되어 창구에 갔을 때 KB 우대고객만 받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화가 날까요. 김영선은 개를 데리고 조건반사실험을 한 파블로프가 못내 원망스럽습니다. 먹는 것을 갖고 장난을 치다니! 현대문명이 추구하는 철학은 시간 절약과 편리 도모이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또 하나가 더 있으니 신분의 차별입니다. 어디를 가나 우대고객이 있습니다. VIP도 있지요. 은행 일을 볼 때, 비행기를 탈 때, 운동경기를 관람할 때, 운동을 할 때, 호텔에 투숙할 때……. 시인의 생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멀쩡한 인간을 죄수로 만들고 분별력 있는 인간을 세뇌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조작 당하고 있다”고, 국민은행 구월동 지점에서 개가 된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김영선은 노무법인 ‘경영안전’의 대표요 월간 『경영안전』의 대표라고 하니, 앞으로 일상성(이라기보다는 현장성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이 충만한 작품을 써 우리 문학의 공백 지점을 메우는 것이 ‘살 길’일 듯합니다. 허영숙의 등단작을 좀 더 봅시다.
책상 한 구석에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먹다만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줄에 기록된 것은
새우의 함량이라든가 출고 일자 혹은
숫자로 드러나는 가격에 불과할 뿐
비닐봉지 안에 갇힌
공기의 질량이나 내게 오기까지의 경로를
기록할 수 없다
어느 겨울 날
찬물에 돌미나리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한 줄의 좁은 칸에
다 적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나간 나를
이 작은 칸 안에 모두 말할 수는 없다
길 위에 버려진 신발이 몇 켤레였는지
밟아온 길을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질렀던 푸른 날의 한 때를
세로로 긋다가 올려다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찍고 간다
―「바코드」 부분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쓰기에 앞서 난감해 하다가 새우깡 겉봉에 있는 바코드를 보고는 상상의 날개를 폅니다. 바코드의 칸은 A4 한 장보다 훨씬 작지요. 이 칸 안에다 제품의 모든 정보를 다 담을 수 없듯이 A4 한 장에 나의 지난날을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시의 마지막 5행은 역설적인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내 지난 생의 바코드라고 한다면 내가 밟아온 길과 정오의 햇살 같은 것이지 제도나 조직이 될 수 없다고 시인은 항변하고 있습니다. 예심을 본 전동균 시인이 말했듯이 언어의 압축과 긴장을 유의한다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광활한 어둠을 찢으며 쉭쉭 날아드는 우파니샤드,
그 수없는 창날에 한 밤 내내 찔린 거문도 앞바다가 온통 피에 젖었다
이 낭자한 화엄의 바다 위에서 은갈치 떼들은
그 긴 몸을 뒤틀며 펄떡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다
피로 물들어버린 이 세상이 더 이상 환해지기 전에, 나는 지금
쇠바늘 하나로 저 갈치 떼들에게 열반을 강제하고 있는 중이다
게송(偈頌)도 없이,
선장과 나는 벌써 속으로 돈을 세고 있다
―안덕상, 「화엄바다 은갈치ㆍ2 」(『시와시학』 신춘문예) 전문
갈치를 낚는 광경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텔레비전 뉴스 프로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구요? 그럼 금방 이 시를 이해하셨겠네요. 거문도 앞바다로 몰려온 갈치 떼를 시인은 “광활한 어둠을 찢으며 쉭쉭 날아드는 우파니샤드”라고 표현했습니다. 우파니샤드란 오래된 힌두 경전인 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인데 갈치 떼를 우파니샤드라고 했으니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지던지요. 바다는 또 “이 낭자한 화엄의 바다”입니다. 화엄경은 불교의 경전 중에서도 정진의 힘든 과정을 가르치는 내용이 담겨 있고, 생명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긴 몸을 뒤틀며 펄떡거리며 몸부림을 치면서 갈치는 죽어가고, 우리 인간은 그 갈치를 먹고 힘을 얻습니다. 갈치는 그물로 낚지 않고 쇠바늘 낚시로 한 마리 한 마리 낚는데, 나는 저 갈치 떼에게 열반을 강제하고 있는 중이라구요? 하하, 살생을 하고 있는 중이지요. 달릴 생각해보면 화엄바다는 이 세상이고 은갈치는 우리 인간이지요. 아무리 펄떡거려도 바다를 어찌 벗어날 것이며, 죽는 순간을 어찌 피할 것입니까. 마지막 연이 의미심장합니다. 같은 생명체인데 누구는 죽어가고 있고, 누구는 그 시체 덕분에 돈을 벌고 있으니까요. KBS 라디오 제작기술팀에 재직중인 분이 1987년에 『현대시학』의 초회 추천을 받고 나서 20년 만인 이제서야 정식등단이라는 꿈을 이뤘습니다. 이처럼 싱싱한 시로 말입니다.
가지 끝에 새 한 마리 위험하게 걸려 있다
자신만의 길이 있다는 듯, 날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며 텅 빈 하늘을 응시한다
함부로 길을 내지 않는 새가
오래 밀고 왔던 자국의 파문 속으로 투신할 때
가냘프게 떨리는 날갯짓은
하何! 많은 인연들이 불러온 파장의 모음,
지구가 그 주위를 기우뚱하게 운행을 하고
비 오는 날, 허름한 집들이 흘러내릴 듯
비탈길 산동네가 엉거주춤 허리춤을 부여잡고 있다
나는, 어스름 밤 골목길에서 맞닥뜨린
낯선 사내의 적의敵意를 애써 피해 귀가한다
간혹, 비상하는 새가 급반전할 때
자전의 한 축이 우지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하훈, 「23.5」(『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전문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국내 문예지 중에서 유일하게 단심 추천제도로 신인을 뽑는 지면입니다. 투고작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신인상을 표방하기도 하지만.『문학과 창작』과 『미네르바』도 신인상과 추천이 뒤섞여 있는 묘한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세영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하훈은 외국어대 불어과와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고 현재 (주)웨이커업닷컴에서 영상음악을 기획ㆍ제작하고 있으니 별난 이력입니다. 요즘에는 이런 별난 이력을 지닌 분들이 시단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현상이지요. 단, 시가 탄탄한 경우에만.
이 시의 제목은 지구의 기울기입니다. 지구는 남․북극의 축이 약 23.5도 기운 채로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 표면에는 낮과 밤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23.5도 정도 기울어 있는 비탈길 산동네의 허름한 집들은 흘러내릴 듯 엉거주춤 허리춤을 부여잡게 됩니다. 위험에 대한 인지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지요. 시인이 보기에 새도 비가 많이 오자 가지 끝에 위험하게 걸려 있는 듯합니다. 제1연 전반부는 지상의 위험을 감지하고 있는 새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불안의 근거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합니다. 시적 화자는 어스름 밤 골목길에서 맞닥뜨린 낯선 사내의 적의를 애써 피해 귀가할 수 있었지만 집중호우는 끝내 지축을 흔듭니다. 제1연의 마지막 행과 제2연이 산동네 집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광경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 자연의 무서운 힘? 기우뚱한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 알 듯 모를 듯한 주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의 형식일 것입니다. 첫 행부터 끝 행까지 긴장감이 한 순간도 늦춰지는 적이 없습니다. 긴박감이 넘치는 시는 문예지 한 권을 통독해도 한 편 만나기가 어려운데 하훈의 “재개발 사무실 옆에/ 휘어진 느티나무 서 있다”로 시작하는 「독거」와 “그대여, 지지 마시라”로 시작하는 「무생화」는 언어의 조율 능력이 뛰어난 시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율되지 않은 음이 기성시인의 작품에서 속출하는 요즈음 하훈 시인의 등장은 시를 쓰는 저를 긴장시킵니다.
이밖에도 눈에 띄는 몇 분의 시인이 있었습니다. 「귀로 보는 슬픔」을 쓴 유영곤(『불교문예』), 「잠수함」을 쓴 김창재(『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늙은 호수」를 쓴 박미산(『유심』), 「가을에, 불륜을」을 쓴 황경순(『미네르바』), 「시간을 두 발에 징을 박고」를 쓴 조옥동(『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돼지국밥을 먹다가」를 쓴 이인주(『서정시학』) 등이 그들입니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습니다. 이들 모두 더욱 새로운 각오로, 배전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 기대의 한 명 시인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문예지 신인상 출신은 신춘문예 출신과는 달리 모지가 있어 작품의 고정적인 발표지면이 확보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신문사는 1년만 지나면 나 몰라라 하니까 웬만하면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도록 하십시오. 그럼 좋은 소식 있기를 기다리면서 여기서 펜을 거두겠습니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