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이야기보따리수기공모전 수상작
고댕이
윤영순
봉화 바래미 마을, 고택들이 이웃으로 자리했다. 낮은 산자락을 병풍 삼아 기와지붕마다 세월의 기품이 배어있다. 용마루의 곧게 뻗은 선은 위엄이 묻어나고 자연스레 올라간 양 끝 곡선의 미소는 잔잔하다. 골바람이 기와를 쓸듯 지나간다. 산등성이를 넘어온 햇살이 처마 끝을 품자 담 밑 풀잎도 하늘거리며 웃는다.
소강 고택으로 들어선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턱 앞에서 발길이 멈춘다. 문턱 가운데가 둥글게 파였다. 양옆은 입꼬리를 세우고 빙긋이 웃는 고댕이다. 손으로 문지방을 쓸어본다. 나뭇결이 순하게 닳았다. 숱한 발걸음과 비바람을 견디며 뻣뻣하던 문턱은 반들반들 윤이 난다.
주인장이 마루로 들기를 권한다. 자리를 잡자 차분한 어조로 집에 대한 내력을 꺼낸다. 독립운동가였던 몇 대조 선대께서 장가가는 아들을 위해 춘양목으로 이 집을 지었다며 천장을 가리킨다.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든다. 굵은 대들보가 천장을 가로질러 지붕을 떠받친다. 나뭇결은 짙은 빛을 머금고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단단함이 전해진다. 서까래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뻗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휘거나 처진 곳 없이 곧고 반듯하다. 집 한 채를 세우기 위해 들였을 정성과 품이 헤아려진다.
대청마루와 맞닿은 방은 어머니가 쓰던 곳이다. 방은 얼마나 많은 계절이 들고났을까. 새벽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구들을 데우고 밥을 지어 가족들을 먹이고 입혔을 어머니. 대가족에 손님맞이를 하느라 잠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장만 하느라 허리가 휘었을 터. 고단함을 삼키고 애써 지은 웃음도 주름 속에 묻었으리라. 아이들은 마당과 고샅길을 뛰놀며 고댕이를 넘나들었을 테고 웃음소리는 대청을 건너 사랑채까지 번졌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발길에 대문턱은 닳았을 테고 방안에는 가족의 정이 켜켜이 쌓였을 테지.
이 집에는 서로 다른 두 결이 흐른다. 춘양목으로 깎은 대들보와 서까래는 아버지가 세운 마음처럼 지금도 이 집을 굳건하게 지킨다. 반면 고댕이는 어머니가 아이들을 기르고 이웃을 맞아들인 것처럼 닳고 낮아진다. 하나는 처음 뜻으로 버텨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시간을 품으며 깊어진다.
머리가 하얗게 센 주인장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어린다. 도시에 살다가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와 집을 돌본다. 객들이 집 안팎을 둘러보는 동안 재촉하지 않으며 누군가 말을 건네면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끔 몇 발짝 떨어져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어쩌면 걸음마다 태어나고 자라난 한 시절이 스쳐 가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발길을 받아들이는 대문턱처럼 주인도 나그네를 편안하게 맞이한다. 마당에는 옛사람의 기척도 함께 스민다.
바람이 살갗에 닿는다. 추녀 끝 풍경이 바람을 만나 맑게 울리고 소리는 마루를 스치고 마당으로 흩어진다. 기왓장 사이에 내려앉은 이끼는 바스러질 듯 메말랐다. 담장에 번진 햇살은 오후의 적막을 길게 늘여놓는다. 눈으로 보던 고택이 어느새 몸 안으로 스며든다. 말 없는 풍경 속에 오래 머문다.
뒤뜰을 넘는 중문은 낮고 좁다. 연분홍 찔레가 꽃송이를 소담스럽게 내걸고 봉선화와 백일홍은 서로 어깨를 맞댄 채 흐드러졌다. 벌과 나비는 꽃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 참새와 콩새도 지붕 끝에서 내려앉는다. 마당은 작은 생명의 소리로 가득하다.
고댕이를 넘으면 장독들이 담장을 따라 늘어섰다. 크고 작은 항아리마다 햇빛과 바람이 스며든다. 먼 기억 하나가 유년의 풍경을 끌어들인다. 시험 점수가 생각보다 잘 나온 날이었다. 어머니가 장독대에서 행주질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앞선 나는 살짝 내려앉은 부엌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화풀이로 애꿎은 문지방에 올라서서 발을 굴렀다. 돌아보면 고댕이는 수많은 발길을 붙잡고 장독은 기다림 끝에 장맛을 들인다. 그렇게 저마다의 맛과 결을 빚어간다.
어머니가 막내를 낳고서였다. 외할머니가 산바라지를 오셨다. 입담이 좋은 할머니는 어딜 가나 인기가 많았다. 그해 우리 집엔 고추장 독이 비었다. 구두쇠라고 소문난 이웃 어르신이 고추장 한 사발을 퍼주더라면서 들고 왔다. 궁해서 더 맛있었던 걸까. 보리밥에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듬뿍 넣고 비볐다. 매워서 콧등에 땀방울이 송송 맺혔는데도 숟가락을 내려놓지 못했다. 연신 입김을 불어대던 나에게 찬물 한 그릇을 건네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맛있냐?”
소나무 아래 화단에는 옥잠화가 남실거린다. 옆에는 쓸모를 다한 항아리 위에 벌집무늬 항아리 하나가 포개졌다. ‘별 헤는 밤’ 한 수가 적힌 기왓장이 항아리 앞에 비스듬히 기댔다. 어느새 들마루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를 만난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을 읊조리다가 어머니에 이르면 늘 목이 메었다. 그 까닭은 아직도 모르겠다.
용마루는 하늘 아래 느린 곡선을 그리며 집의 품격을 드러낸다. 고댕이는 발밑에 있다.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늦춘 사람만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대들보가 집을 떠받치듯 아버지는 한 가정을 받쳤다. 고댕이가 수없이 많은 발길을 기꺼이 받아냈듯 어머니는 가족과 이웃을 품었다. 하나는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고, 또 하나는 삶을 쉬게 하는 품이다.
주인장이 솟을대문까지 배웅을 나온다. 안경 너머로 선한 눈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넨다. 들뜨지도 과하지도 않은 은근한 몸짓. 백 삼십 년 된 집이 사람을 보듬어 온 것처럼 성정이 한결같다. 고댕이의 미소가 주인장에게 고스란히 배어있는 듯하다.
오래 남는 건 높은 곳에 있지 않다. 발밑의 작은 문턱 하나가 많은 발걸음을 받아내며 사람의 시간을 새긴다. 이제는 그처럼 정겨운 풍경을 만나기 쉽지 않기에 이 고택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문득 고댕이가 웃는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는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된다. 지켜야 할 것은 오래된 집보다 고댕이에 스며든 마음이다. 나도 푸근함을 간직한 채 문턱을 넘어 마을을 나온다.
멀리, 바래미 마을 풍경이 점점 작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