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禪과 닮았다.
선은 이치에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삶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논리는 존재에 대하여 우리가 꾸며낸 틀이다.
우리는 사물을 분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존재는 아름다운 혼란이다.
우리는 사물을 이러쿵 저러쿵 계산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존재에 있어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으로 전환한다.
진흙이 연꽃이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연꽃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간다.
진흙이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가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나무에 들어가 녹색의 푸르름과 빨간 장미꽃이 된다.
고귀한 향기가 흩날리며, 어느 날 꿈처럼 모두 사라진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존재는 모순 속에서도 아무런 불화가 없다.
우리에게 불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이다.
"마음 없는 구별이 옳다."
달마는 언어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점까지 접근하여 보았다.
이 역설을 보라. 그 중요성은 무엇을 하고 안 하는 "행위"에 있지 않다.
달마 대사는 간단히 그것을 떨쳐 버린다.
그것은 이것을 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저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성질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 속에서는 한순간 옳았던 것이
다른 순간에는 그릇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상황에서, 어느 한
문장에서, 어느 일정한 공간에서, 어떤 사람의 행위는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공간, 다른 문맥에서는 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그릇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행위는 결정지을 수 없다.
수피, 도가, 선의 마스터들의 신성함과 특별함은 그대의 관념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들은 그대의 기대를 그냥 박살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고안해 내려고 움직인다. 그들은 결코 그대의 기대를 채워 주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참된 마스터의 표시이다.
그는 결코 그대의 기대를 채워 주지 않는다.
만약 누구인가 그대의 기대를 채워 준다면 틀림없이 그는 엉터리
사기꾼이다.
이 아름다운 구절을 기억하라.
"도에서 가장 굳게 세워진 것은 가장 무기력하게 나타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사람들이 좀더 "깨어" 있고
그들을 "의식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 오직 이 한 가지만 해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노벨상을 주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런 작업"은 미묘하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역사는 언제나 뿌리부터 제거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너무 표면적이어서 우리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바로 그 본질을 깊이 꿰뚫어 볼 수 없다.
달마 대사는 바로 그 본질적인 핵심을 그대에게 쏟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