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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양철학인가
1. 한 페이지 요약 및 견해
이 책은 쉽지 않은 용어들을 비교해서 의미와 뜻을 상세히 알려준다. 동양철학이라면 약간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일관하는데 동양철학의 입문서답게 일목요연하다. 문장은 대체로 간결하지만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좋았다. 나에게는 동양철학을 관통하는 맥을 잡은 느낌이다. 불교 유교 이기론(理氣論) 노장사상 법가 등을 두루 탐색하면서 동양적 사유가 가진 ‘근대 극복’의 힘을 높게 평가했다. 또한 앞으로의 유학이나 불교가 고민해야할 부분까지 세심하게 짚어내고 있다. 동양철학을 통해 미래 인문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이에게 권하고 싶다.
저자인 한형조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동아시아의 철학적 전통을 읽고 그 전망을 탐색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조선유학의 범형을 연구한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동양고전의 세계를 산책한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선(禪)불교의 이념과 역사, 방법을 해설한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가 있다.
근대적 사고는 인간의 본질을 도덕감이 아니라 사적 욕망으로 보며, 사회를 자기 절제와 배려가 살아있는 공동체적 유대의 장이라기보다 여러 개인들이 물질을 소비하고 타자와 경쟁하는 공간으로 이해한다. 그 이후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유교를 비롯한 동양 전통을 근대와 접목시키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오히려 ‘근대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오늘날 유교의 핵심 가치가 있다고 한다. 옛 사람 하나를 놓고 율곡학파니 퇴계학파니 꼼꼼히 따지고는 하는데 지금은 사유의 공통점을 논할 때라고 한다. 탈근대의 시선으로 볼 때 유교와 불교의 차이도 작다 할 수 있다. 물질충족의 욕구를 넘어서는 초월적 정신주의라는 점에서 이들은 같은 지평을 공유한다고 본다. 저자인 그는 장자와 같이 타자화해 바라보기를 요구하는 눈을 원하고 있음을 느꼈다.
동양철학의 골격인 불교, 노장, 유학, 법가를 해설하고, 이들을 종합한 주자학이 세계와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늘 헷갈리는 용어나 의미를 알기 쉽게 꿰뚫었던 부분은 매우 좋았다. 그리고 동양철학 전체를 관통한 저자의 통찰력을 높이 사고 싶다. 그런데 그 중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인지 같은 이야기를 몇 번 강조하며 설명하여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2. 나를 확장시킬 책 속의 내용들
철학의 시금석은 오히려 적실성과 유효성이다. 그런 점에서 강단의 철학보다 길거리의 사주관상이 더 철학적이다. (p.7)
위대한 문학자들은 삶의 의미를 탐색하고 가능성을 추구하는 진정 철학자들이었다. 직접 겪은 이야기만큼 위로와 감동, 그리고 지혜와 용기를 주는 것이 없다. 동양철학은 머리로 말하기보다 가슴으로 말하며, 객관에 숨지 않고 주관적 진리를,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문득 삶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의 신성을 일상에서 구현하겠다는 유학에 심취했다. 친교와 대화의 공동체는 멀고 현실은 충돌하는 힘과 조정의 각축장이기 때문이다. (p.8)
동양철학은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특별한 존중을 받았다. 시민적 의식보다는 공동체와 국가 전체에 대한 협력과 동의를 강조하기 위해 ‘국민윤리’는 전국의 대학과 연수원에 필수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p.19)
현실적 실용과 미래적 전망을 획득하지 못하는 사유는 언제나 자연 도태했다. (p.32)
삶이 단순하지 않을진대 사상과 역사, 인간과 문화의 생생한 파노라마를 그 경직된 틀로 어떻게 다 담아내겠는가. 지료는 언제나 이론에 선행하고, 해석은 자유로이 열려있다. (p.33)
피레우스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지를 때 잡힌 가슴의 동계를 잊을 수 없다. (p.39)
고(苦)의 실체는 명상이 깊어가고 삶의 실상을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직면할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깊어질 것이다. (p.44)
인연법(因緣法)에 의하면 타인이 불행한데 나만 행복할 수 없다. (p.45)
불교의 바닥에 깔려 있는 관용의 정신, 그리고 진리란 결국 구원에 이르는 사다리일 뿐이라는 도구적 인식, 즉 이른바 방편론이 극단적인 이단의식을 차단했을 것이다. (p.47)
"생사의 근본과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네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어디 말해보라“ (p.50)
우리는 대체로 진리를 특정한 정보로 인식한다.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책을 통해 배우거나 남이 전해주거나 혹은 자신의 이성을 통해 획득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선은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생각은 판단이고 이미지이다. 그런데 판단이나 이미지를 통해서는 결코 진실의 옷자락을 만질 수 없다. (p.51)
진리란 말을 통한 정보 혹은 명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물건을 건네받듯이 받들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진즉에 나눠주었을 것이 아닌가. (p.52)
무명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인식을 조건지어놓았다. 이 ‘실상’을 통찰하는 것이 불도의 첫걸음이다. (p.54)
인식은 주관에 의해 왜곡된 사물의 ‘이미지’들의 집적일 뿐이다. 불교는 ‘실제法)’ 와 ‘이미지(相)’ 사이의 심연을 분명히,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한다. 주관이라 불리는 의지와 이미지로서의 대상은 짝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유식과 여래장은 바로 이렇게 ‘이미지로서의 세계’가 성립함으로써 그 충돌과 소외로 본원의 고요가 깨어지고, 세상의 고통과 비참이 시작되었다고 역설한다. (p55)
모든 사상이나 체계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인데, 새삼스럽게 웬 휴머니즘이냐는 생각이었다. (p.62)
주희는 공맹의 프로토 유학이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던 유신론적 종교적 함의를 무신론적 형이상학으로 변모시켰다. (p64)
공자가 말을 아낀 것은 종교적 체험이 이론적 교설로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대란 지속적인 성찰과 자각을 통해 일상에서 터득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67)
누구보다 공자를 가까이에서 모신 손자 자사는 할아버지의 위대한 기획을 이렇게 요약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인간의 본질은 초월적 근원을 갖고 있다. 삶의 의미는 그 초월적 본질을 실현해나가는 데 있다. 그 길을 닦아나가자는 것이 교육과 수양이다. (p.67)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하늘(天)은 바로 그 인간 신성의 기원으로서의 절대자를 가리킨다. (p.72)
통치자의 관건은 테크닉이 아니라 인격이다. (p.74)
성현들은 자연과 우주의 의미를 미리 체득한, 즉 선각(先覺)들이다. 그들의 체험이 담긴 ‘길의 노하우’가 바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경전들이다. 그런 점에서 독서란 객관화된 정보를 얻자는 것이 아니요. 바로 인간의 본성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p.75)
근대적 사고는 인간의 본질을 도덕감이 아니라 사적 욕망으로 보며, 사회를 자기 절제와 배려가 살아있는 공동체적 유대의 장이라기보다 여러 개인들이 물질을 소비하고 타자와 경쟁하는 공간으로 이해한다. 과학과 기술은 이 같은 이념에 따라 욕망의 무한 충족을 위한 수단과 도구를 제공하고, 법률과 제도는 도덕과 관습 대신 분절된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파수꾼으로 등장했다. (p.75)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 나의 행동과 선택을 필요로 하는 ‘아주 작은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 의미와 보람은 바로 그곳에서 창조된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일상이 곧 초월이고, 학습 없이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p.78)
인문학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그렇다. 보편적 원리와 이론적 정합성에 몰두하느라 발밑을 돌아보지 않는 탓이다. 이론적 취향, 언변만 키워서는 공허한 구호와 낭만적 도취에 그치기 쉽다. 실무에만 매달리면 그 일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전체적 목표에 대한 감각과 연관을 놓치기 쉽다. 머리와 손발은 항상 서로를 돕고 서로를 비판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p.88)
장자는 우주의 필연성을 자각하고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것을 ‘운명에의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차라리, 자신에 대한 적극적 무관심에서 오는 평정이라면 어떨까. (p.103)
장자는 즉물과 피상을 넘어 생명의 본질과 그 소외에 대한 철학적 통찰에까지 들어갔다. 인간의 비극이 많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물론 유가를 비롯한 동서양의 내로라하는 철인들도 이 사실을 확인하기는 했다. 그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긍정한 다음, 이를 분배하고 관리하고 조정하는 인문적 방식을 모색했다. (p.108)
한 인격이 포괄하기에는 우주가 너무 크고 또한 너무 작다는 직관이 의인화의 유혹을 떨쳐냈다. “신은 그 스스로 있는 자다(自然).” 천지를 운행시키면서 동시에 들꽃의 생육과 조락에 간여하는 이 불가해의 신비적 존재에 그는 도(道)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p.113)
자연에는 생성도 소멸도 없다, 자연은 ‘하나’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치를 꿴 사람만이 (다양한 사물들이) 차별 없이 한 얼굴임을 안다. 그리하여 그는 (유용성의 편견이 낳은) 사물의 다양한 외관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깃들인다. 거기에는 각각 나름의 우주적 기능들이 숨 쉬고 있고, 이 우주적 기능들이 자연의 전체적 통일을 구성한다. 이 통일성에서야 진정한 앎이 가능하고, 그 앎을 통해 인간은 길로 다가선다. 여기서 ‘나’의 주관적 관점은 활동을 그친다. 그렇더라도 의식은 그 소식을 감지하지 못한다. 길이란 그런 것이다. (p.115)
조삼모사는 자연의 궁극적인 통일, 무분별의 혼돈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물을 구분하고 가치를 매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다. (p.115)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자연의 축복임을 알 때 마음의 현묘한 깊이에서 비로소 관조와 웃음이 피어난다. (p.116)
꿈속에서는 그러나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른다. 혹 꿈속에서 그 꿈을 해몽까지 하더라만 깨어나기까지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큰 깨침이 있어야 우리의 삶이 진정 한바탕 큰 꿈임을 알아채리. 바보들은 자신들이 깨어 잇다 여기고, 우쭐거리면서 이는 ‘임금’, 저는 ‘소치기’라 짚어댄다. 얼마나 굳어터진 영혼인가. 공자도 그리고 너도 하나의 꿈이다. 너희들이 꿈이라고 말하는 나 역시 꿈이다. (p.116)
미리부터 임종의 자리에서 바라보듯 그렇게 삶을 대하는 훈련을 한다면? 그때 인생은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 (p.119)
장자는 사후세계가 실재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해골이 읊고 있는 세계는 상상력의 미학적 공간일 뿐이다. 초월적 인격의 전제적 지배도 없고, 삶에 곤고한 영혼들을 다시금 심판하겠다는 으름장도 없다. 해고의 기쁨은 조건 없이 평등한 선물이다. (p.122)
바깥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렇게 바라보는 나를 바라볼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눈이 두 개다. 두 번째 눈은 저 너머 의미의 공간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적 힘이다. 이 눈을 통해 우리는 상황의 피동적 매몰과 의지의 맹목적 견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p.125)
장자의 눈은 스스로를 타자처럼 바라보는 반성적 명상의 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눈은 에고를 넘어 있다. “천지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수많은 동물과 식물, 그리고 바람과 물이 섞여 운화하는 광대한 공간을 한 줌도 못 되는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장자는 자연이라는 절대의 지평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보지 않고 자연의 눈으로 인간을 응시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p.128-129)
신의 의지나 로고스가 있다면, 그것은 초월적 타자로소가 아니라 내재하는 원리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즉, 우주는 특정한 의도나 인위적 목표 없이 오직 저“스스로 생성하고 조직해나갈(自然)” 뿐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에서의 절대는 ‘자연(自然)’이다. (p.146)
기의 사유는 정적 사물들이 다만 정태적이지 않고, 유동하는 과정 속의 산물이며, 그 자신 모종의 활동력임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p.149)
신체가 무겁고 둔한 음(陰)인 데 비해, 영혼은 가볍고 민감한 양(陽)이다. 또 신체는 거친 데 비해 영혼은 정련(精鍊)되어 잇다. 그 영혼도 자체 내에 음양의 두 부분을 함장하고 있다. 자극에 반응하고 신체의 욕구를 구현하는 수동적 부분(陰)과, 신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정신의 적극적 능력(陽)이 그것이다. 전자를 백(魄), 후자를 혼(魂)이라 부른다. 혼백은 죽음과 더불어 신체와 분리된다. 분리된 혼백은 대기 속에서 자체의 무게에 따라 갈라진다. 무거운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가벼운 혼은 하늘로 뜬다. 땅으로 돌아간 백은 곧 썩어 문드러지지만, 혼은 천지간에 가장 순수하고 정련된 기로 이루어졌기에 쉽사리 태허로 흩어지지 않는다. (p.151)
‘물질’은 근본적으로 세계를 정지에서 바라보는 인식의 산물이다. 그것은 기에 담겨 있는 자발적 변화와 변이를 포괄하지 못한다. 기의 사유는 세계를 정지에서가 아니라 활동에서, 죽음에서가 아니라 생명에서 파악한다. 계절의 순환에서 생리의 흐름까지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p.161)
이(理)란 동태적 삶의 연관에서 확인되는 척도이지, 대상에 대한 박제된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p.164)
주희는 복기견천지지심(復碁見天地之心)이라는 주역의 일구를 “생명의 단초, 새로운 시작에서 하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풀어놨다. (p.168)
인간은 자기 에너지가 발현되는 통로와 양상을 나름대로 주조할 수 있는, 우주 안에서 가장 유연한 존재이다. 동물과는 달리 자극의 반응에 있어 가치와 의미를 도입함으로써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인격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p.181)
감정의 원형은 우호와 적대이다. 감정은 그 자동적 계산의 결과이다. (p.184)
이는 기의 운동과 변모를 유도하고 지시하는 구조와 형식, 패턴과 가치 등을 가리키는바, 이름 그대로 ‘형태 너머(形而上)’의 무엇이다. 그러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모두 기의 이름 아래 논의될 수밖에 없다. (p.187)
주리 선험적 - 형이상학 - 관념론 - 원리주의 - 도덕(윤리) - 종교 - 슈퍼에고 - 주자학
주기 경험적 - 형이하학 - 유물론 - 공리주의 - 자연(물리) - 과학 - 에고 - 실학 (p.200)
주희는 “길道이 인간으로 하여 비로소 존재한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경계했다. 요컨대 천지의 운행과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뭇 생명들은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생명과 자연은 하늘 혹은 영원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성즉리性卽理! 그 영원의 뜻이란 바로, 짐작하겠지만,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p.204)
그 중심적 가치에 있어 유교는 근대와 대척적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유학의 미래는 바로 그 ‘전근대적’이고, ‘비현실적’인 지평에 있다. 다시 말하면, 유교의 핵심적 가치는 근대에의 적응이 아니라, 근대를 반성하고 비판하는 지평에 있다는 말이다. (p.217)
유학의 본원적 가치는 근대의 보조에 있기보다 그 도저한 전근대성에 있다. 나는 거기에 유교의 미래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p.219)
상례는 재래의 장중한 의식과 경건한 법도를 잃었다. 마을과 친지 전체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은 유교문화의 상징이었으나 이제 죽음은 병원 영안실에서 누가 볼 세라 황급하게 치러진다. 그리하여 죽음은 치욕이 되었다. 죽음이 치욕인 세상은 곧 삶이 수치인 세상이다. (p.220)
유학자들의 문집을 채우고 있었던, 삶에서 맞닥뜨리는 사태에서 무엇이 적절한 예식인지를 묻는 그 많은 물음들, 그리고 조선 후기 왕실의 복제(服制)를 두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였던 그 무지막지한 예송(禮訟) 논쟁은 아득한 원시부족의 카니발처럼 기이한 에피소드로 남았다. 조용히 봉인되어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채, 창고 속에 잠들고 있다. (p.221)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유교가 미래에 존재할 가치와 의미가 있는가?” 이다. 그렇다면 살리고,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임종을 지켜볼 일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면 유교는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공자가 말했듯 “도道가 사람을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만이 도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p.223)
한말의 지사들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이 궁핍의 시대에 나는 그들의 타협 없는 비현실주의를 빛과 소금으로 기린다. (p.226)
나는 공자를 위시한 유교적 사유의 토대를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표’에 대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 의미는 있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으로부터 유학은 시작한다. (230)
동서양의 현자들은 인간이 특정한 목적과 본성을 갖고 있으며, 이 본성에 따라 그의 에너지를 유도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심신의 건강과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231)
내 속에는 나도 어찌해볼 수 없는 ‘자기’가 있다. 신독(愼獨). 이 자기의 입법자와 화해하지 않으면 그는 근원적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자신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誠)은 그 조건을 수긍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p.235)
주자의 격물(格物)은 이 존재와 만나기 위한 지적 탐구이고, 경敬은 이 존재를 지속적으로 파지하기 위한 훈련이다. 격물의 끝이 어째서 할연관통(豁然貫通)이라는 ‘신비적’ 언술로 귀착되는지 고민해본 사람이 있는가. 주자의 격물을 사물의 객관적 탐구가 아니라, “지금은 청동거울처럼 희미하나 그날은 얼굴을 마주한 듯 분명해질” 바로 그 얼굴을 향한 정신적 모험이다. 공자는 이 얼굴을 나이 오십에 만났다고 증거하고 있다. (p.235)
유교에서의 합일은 다시 말하지만 ‘자신과의 대화’이고, 이것의 무대는 ‘일상의 생활’을 떠나지 않는다. (p.237)
의미는 오직 생활 속의 규율과 일상적 습관에 있다. 바로 그 신기할 것도 없고, 통속적인 삶의 자잘한 현장이 의미가 구현되는 성소(聖所)이다. “중용의 도는 부부에서 출발한다.” 가장 비근하고 친근한 기거와 교제, 일과 놀이를 의미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다. (p.238)
사람들은 자신의 의미와 존재를 ‘자신의 밖에서’ 추상적으로 찾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중용은 그것을 경계해 마지않는다.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목표를 현실 바깥에서 그리고 자신의 일상적 삶의 공간 밖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日常이 곧 성사(聖事)이다. (238)
서원이든 사당이든 유교의 건축과 상징에 장식과 문양이 극도로 절제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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