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시편 126편 1-6절
제목 : 운명의 역전
일시 : 2019년 6월 30일
1.
성전에 올라가는 일곱 번째 노래이다.
이전 시편의 무드가 약간 어두웠다면, 이번 시편은 분위기가 밝다. 물론, 저 밝은 노래 이면에 슬픔과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것이 시인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안으로 안으로 잦아들게 하기 보다는 위로 위로 향하고, 밖으로 밖으로 씩씩하게 실천하게 만든다.
앞의 시편의 연장선에서 읽는 게 맞는다면, 이 시편은 성전에 당도해서 불렀을 것이다. 고된 몇 날, 몇 달 간의 여정의 목적지인 성전에 도착해서 대지에 입 맞추고, 계단을 겅중겅중 뛰어 오르는 시인이 연상된다. 마치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눈을 뜬 사람이 그랬듯이 신이 나서 덩실 덩실 춤을 추었을 게다. 그리고 성전 안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향한 다짐을 나누는 순례자 무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2.
이 시를 묵상하기 전에 주석을 찾아봤다. 새롭게 알 게 된 것은 1절의 ‘포로’가 ‘운명’(fortunes)과 같고, 학자들에 따라서 운명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만약에 ‘포로’라고 읽는다면, 이것은 특정한 시점이 있다. 특별한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으로 거슬러 가면 출애굽이 있었고, 두 번째 출애굽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 포로 귀환이다.
여기서는 바벨론에서 유배 생활하던 이들이 본문과 더 맞아떨어진다. 그렇게 읽는다면, 귀환하는 무리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그런 독해가 가능하다는 증거는 또 있다. 본문에 ‘때’라는 단어가 자주 출몰한다. 새번역의 경우, 1절의 때가 한 번, 2절에는 ‘그때에’가 2회이다. 일반적인 시간이라기보다는 콕 집어서 바로 이 때라고 말할 수 있는 어느 시간/사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라고 읽는다면, 보다 보편적인 경험에 기반한 노래가 될 것이다. ‘운명’으로 읽는 것도 나름 괜찮은 증거는 5-6절이다. 몇 번을 읽어봐도 5-6절은 앞의 구절과 잘 맞지 않는다. 4절 때문에 이어지기는 한다만, 이음새가 매끄럽지 않다.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바, 힘들게 수고한 다음, 수확하는 농부의 기쁨처럼, 성전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이 마침내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고백인 게다.
나는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기에서, 그리고 포로로 귀환한 공동체가 이 시편을 편집했다면, 나는 전자에 조금 더 무게를 싣고 싶다.
그렇지만, 운명 = 포로라는 것이 함의하는 바가 크다. 가나안과 바벨론 제의와 세계관에서, 그리고 그리스인들과 스토아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운명의 포로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라. 어떤 인간도, 그가 헤라클레스와 같은 불세출의 영웅일지라도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심지어 신들도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정해진 숙명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서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가혹한 시련을 겪는다.
오이디푸스를 생각해 보라. 신이 정한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애썼던 모든 노력이 허사이었고, 끝내는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아들인 오이디푸스마저, 그리고 그의 딸들까지도 비극으로 몰아넣지 않았는가. 뉘라서 운명을 거역할 것인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된 숙명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결정된 바 없고, 미래는 나의 도전과 응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 증거가 야곱이다. 이는 내가 쓴 <내 안의 야곱 DNA>에 자세히 썼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라. 죽음이라는 절대 운명을 예수는 뒤집어버렸다. 죽음이라는 독화살마저 무력화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명에 사로잡힌 노예가 아니다. 얼마든지 바뀐다. 인생은 주님과 함께 써나는 것이다. 성서라는 대본을 따라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다.
3.
1절 하반절부터 2절은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을 뒤엎었을 때, 성전에 도달했을 때의 기뻐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읽는 내 마음도 덩달아 행복하다. 그 모습이 마치 꿈꾸는 사람들 같다고 한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내 뺨 한 대 때려봐라, 찰싹. 아이코, 이게 생시구나. 꿈조차 꿀 수 없고, 꿈꾼들 이루어지겠느냐며 자포자기했었는데, 꿈같은 일이, 꿈보다 더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부터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웃음을 참으려도 참을 수 없다. 연신 싱글벙글 거리다가 호탕한 큰 웃음을 웃다가, 아무래도 안 믿겨지는 듯 허허, 거리는 순례자들, 그러다가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한다. “하나님이 운명의 노예로 살던, 애굽의 노예로 살던, 바벨론 강가에서 노예로 살던 우리 운명을 바꾸셨도다. 노예로 살던 우리를 해방하셨다.”
그 일은 당사자들도 믿기 어려웠겠지만, 주변의 사람들도, 주변국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다. 저 약하고 약한, 작고도 작은 저 민족이 귀환하다니, 저 지지리도 복이 없다고 탄식하던 저 사람이 저렇게 성공하다니, 라는, 수군거리는 ‘뒷담화’를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다. 너희들은 뒤에서 말하지만, 우리는 큰 소리로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큰 함성으로 외친다.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4.
위의 3번은 1절 후반부에서 3절까지의 묵상이다. 이제 4절이다. 새번역은 ‘네겝의 시내들’이라고 했지만, 본래는 남방 시내이다. 그 남방은 지금의 네게브 지역의 광야를 가리키고, 시내들은 ‘와디’(wa야)를 가리킨다. 이것은 시냇가라고하기에도 민망하다. 이 광야 자체가 건조한 아열대 지역인 팔레스타인에서도 물이 거의 없는 사막이다. 그러니 대부분 말라 있다. 그러다가 우기에 들어서 비가 한 번 내리면, 갑자기, 급속도로 물이 불어나서 시냇물이 흐르게 되는 그런 시내를 말한다. 돌연한 운명의 바뀜을 저들의 자연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의 어조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앞의 것이 감사와 감격이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것이라면, 이것은 기도와 간청이고,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즉, 운명이든, 적국의 포로이든 간에, 다시 회복한 것을 기뻐하던 어조가 그런 감격을 누리게 해 달라는 애절한 청원으로 전환되었다. 무슨 일인가?
‘포로’에서의 귀환이라고 읽는다면, 아직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고 있는 이들이 하루 속히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운명’이라고 읽는다면, 타고 나면서 바꿀 수 없는 부모, 성별, 지역 등의 운명의 덫에 빠져, 기독교적 운명관이 아닌 그리스적 운명관, 동양적 운명관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 다시 말해 잘못된 운명관에 자신을 위탁하고 나는 안 되는 사람이다, 를 되뇌며 자신을 스스로 가두는 사람들도 우리들처럼 바뀐 운명을 살아내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그러기 위해서 분발하자고 촉구한다. 씨를 뿌리는 농부는 그날부터 추수할 때까지 진탕 고생만 한다. 그래도 그렇게 수고하는 이유는 거둘 때가 있기 때문이다. 거두는 날이 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노동한다. 그렇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농부의 고생은 미래가 있는 고생이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에스컬레이터, 아니 엘리베이터 타고 아래로 아래로 한 없이 추락할 뿐이다.
5.
그런데 우리는 이 노래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자신을 얽매는, 계속해서 옥죄는 숙명에서 해방되는 삶은 성전과 연관지어야 한다. 즉, 성전에 계신 하나님 말이다.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통해 죄를 사함 받고, 정결해지고, 거룩한 삶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것, 그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재조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있었기에 운명의 역전이 가능하고 꿈꿀 수 있다.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 감탄했다면, 후반부는 감상에 젖어 살지 말고,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작든 크든, 네가 꾸는 꿈에 합당한 행동을 하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에 감사하는 이는, 하나님을 위해 새로운 일, 안 될 것 같다고 단념했던 일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와 그대의 입에 웃음이 그치지 않고,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찼던 나의 입과 말이 우렁찬 함성처럼 감사가 터져 나오길 기대한다.
6.
나는 꿈을 꾸는 사람이지만, 꿈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남들이 이렇게 저렇게 살았으면 하는 꿈이, 내게는 현실이다. 힘든 일이 없지 않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나는 꿈을 이루었다. 그래서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을 현실로 살고 있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꼰대질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대담한 고백을 하는 것은, 나를 시궁창으로 밀어 넣었던 하나님, 바벨론 강가 같은 부산에서의 유배 생활을 하게 하셨던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고백한다. “주님께서 내 운명의 노예가 되었고, 유배 생활을 하던 나를 회복시키실 때에, 나는 꿈을 이루었고, 그 꿈을 지금 여기서 살아내게 되었습니다. 죽을 만큼, 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책 읽고 글 썼던 것이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제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것이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오늘도 성전을 향해, 성전이 되어 세상을 향해 씨를 뿌리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