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지역(Middle East)
유럽에서 보아 동쪽 땅 중에서 극동과 근동의 중간지역으로 일반적으로 서아시아를 말하는데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널리 쓰이게 된 말이다.
1. 역사적 배경
가. 메소포타미아 문명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 일대에서 약 4000여년 전에 전쟁이 일어나자 유태인의 지도자 아브라함은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카나아니:팔레스타인 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부른 이름) 땅으로 불리는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어느해 팔레스타인 지방에 흉년이 들어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유태인들(야곱일족)은 이집트로 넘어가게 되고 이집트에서 그 세력이 크게 확장하게 되자 이집트인들은 유태인들을 노예로 삼는 등 가혹하게 핍박하게 된다.
모세는 유태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만에 팔레스타인 땅에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고향을 비운 사이에 이민족이 살고 있어 전쟁이 계속 된다.
이 와중에서 BC1020년 이스라엘의 여러 부족(12개 부족)이 통합하여 이른바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 왕국은 BC922년에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데 북쪽 왕국(ISRAEL 10개 부족)은 BC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했고, 남쪽 왕국(JUDAH)도 BC587년에 바빌론에 의해 멸망되어 이스라엘 유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들을 바빌론의 포수라고 한다.
그 이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멸망시키자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귀환하게 되나 페르시아의 식민지가 되어 주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페르시아는 마케도니아(알렉산더)에 의해 멸망되었고, 그 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유대민족은 수차례 반란에도 실패하고 마침내 AD70년 수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대부분 학살되었으며 포위망을 벗어난 일부(960명) 유태인은 오늘날 사해 남단에 위치한 마사다의 요새로 도피하였다.
이 당시 예루살렘의 함락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진 유태인 ㅡ이른바 Diaspora ㅡ은 약 9만 7천 여명 이었다고 한다.
60년이 지난 후 유태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군에 의해 괴멸당하고 이로부터 1900여 년 동안 정처 없이 유랑하게 되고 팔레스타인 지방은 아랍민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나. Zionism의 대두 (유태인이 그들 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유태민족 국 가를 건국하려는 민족주의 운동)
시오니즘 운동은 ‘데오도로헤르쯜’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의 사후 1897년 제 1회 세계 유태인 대회가 열리는 것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다. Macmachon 선언(후세인-맥마흔 각서 교환)
“아랍인이 오토만 제국을 공격해주면 영국은 Hussein(아랍인의 정신적 지 주)이 제안한 한계 내에서 아랍민족의 독립을 승인한다.”
․영국은 1882~1906 이집트를 점령하고 터키의 시나이반도를 탈취했다.
․19c 말 영국은 오토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아랍민족과 유태인의 시오 니즘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표명, 중동지역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기도
․1914년 7월 제 1차 세계대전 발발하자 오토만 제국은 즉시 추축국에 가
담하여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당시 영국은 유럽전선이 급박했기때문에 오토만 제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아랍의 민족주의 사상을 이용하려 하였다.
따라서 아랍 측과 합의 내용은 맥마흔 선언으로 그 구 체적인 성과로는 이른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아랍민족을 지배하여 다마스커스를 장악하고 오토만 제국을 격파하였지만 아랍이 제시한 지역과 영국이 주장하는 지역이 서로 상반되어 끝없는 논쟁이 되어왔다.
※팔레스타인 땅은 순수한 아랍민족의 땅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미 2000여 년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땅을 10%에 불과한 유태인들에게 돌려주려고하였다.
라. Balfour 선언(유태인 시오니즘을 이용, 팔레스타인 지역 장악)
영국은 “유태인의 민족적 모국 건설을 돕겠다.”
․1917. 12. 11 예루살렘을 공격, 함락함으로써 1506년 이래 411년간 팔레스타인을 지배해온 오토만 제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 그후 영국의 조치
․발포 선언 약속이행을 요구하는 소수민족이었던 유태인이 90여만명으로
팽창하자 1946년 6월 29일 소위 검은 토요일에 지도자급 3000여명을 라
파에 구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런저런 연유로 영국에 대한 국제적 여론이 나빠지자 구금했던 유태인
을 석방하고 결국 팔레스타인문제는 1947년 5월 UN에 상정되었다.
그해 7월에는 4500여명의 유태인이 Exodus호에 승선하여 팔레스타인에 집단
이민하는 대사건이 발생하였다.
․UN은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수민족 거주지별로 불규칙하게(얼룩소의 무늬) 분할하였고,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통치를 종결짓고 철수함과 동시에 동지역에 유태 및 아랍국가가 수립되도록 가결했다.
․영국의 철수로 인해 유태인에게는 2000여년 동안의 숙원이 이루어졌으나
아랍 민족에게는 2000여년 동안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의
순간이 되었다.
따라서 아랍인들은 UN에서 분할안 가결의 투표가 있던 날 유태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가맹하였는데 이때부터 2000여년 동안 휴면기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분쟁의 불씨가 다시 점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국가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는 도덕이나 윤리라던가 정의, 신의 같은 단어의 뜻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오로지 이해의 차이와 관련지어지는 힘만이 고려될 뿐이다.
☆콜럼버스, 하이네(시인), 스피노자(철학자), 디즈렐리(영국수상), 마르크스(혁명가), 로드차일드(금융왕), 러시아의 케렌스키, 트로츠키도 유태인이다.
2. 제 1차 중동전쟁(1948. 5. 15~1949. 2. 24)
가. 원인: 강대국의 이해, 무책임한 외교각서
원인: 이스라엘의 독립과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의 실지회복의지
나. 군사력 비교
이스라엘: 병력 5만, 비행기, 전차 전무
아랍측(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이스라엘의 40배(인구), 병력 3만, 무기 및 장비 다수
다. 전쟁경과
초기: 아랍측의 우세(휴전-UN강요)
후기: 이스라엘의 우세(휴전-아랍측 요청)
라. 결과
이스라엘: 군인 4000여명, 민간이 2000여명 사망 전비 5억불 소비
전과-영토 분할 당시보다 5900㎢ 확장(총 20.662㎢)
예루살렘 분할 점령
기타-1차 중동전을 계기로 천만명 귀국운동 전개→1951년 말까지 인구가 150여만으로 증가
아랍측: 이스라엘을 둘러싼 아랍측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아랍측은 새로이 확정된 이스라엘 지배권 안에 살고 있던 70여만명의 팔레스타인내의 아랍인들은 고향땅을 버리고 요르단(60%), 가자지역(20%), 시리아와 레바논(20%)으로 피난을 시켰다.
☆로이터, AP, UPI,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등은 유태인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미 CIA보다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이스라엘의 첩보조직 ‘모사드’는 세계의 중요정보를 실제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이라크의 원자폭탄 제조 공장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것도 모사드의 역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