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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 향 문 학 원문보기 글쓴이: 황득 김한규
<현대시조>
한용운 편
석야 신웅순
1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히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한겨울 냉방에서도 꼿꼿하게 앉아 있었던 저울추, 죽는 날까지 민족을 껴안으며 몸부림쳤던 독립 운동가이며 승려인 시인, 설중매 만해 한용운!
만해는 고향 홍성을 떠났다. 홍성은 더 이상 그가 살아가야할 땅이 아니었다. 1904년 그의 나이 26세, 그는 마침내 출가했다. 오대산 월정사를 거쳐 백담사로 들어갔다. 승려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는 출가 후 죽을 때까지 한번도 고향 홍성을 내려가지 않았다.
1906년 3월 만해는 백담사를 떠났다.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도전과 모험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항구 구경을 나갔다. 갑자기 조선 청년들이 나타나 만해를 결박, 바다로 던지려고 했다. 삭발한 만해를 일본인으로 오인한 것이다. 한인들은 일본식으로 삭발한 사람들은 모조리 죽였다. 그만큼 일본에 대해 원한이 깊었다.
일촉즉발, 절체절명의 위기, 만해는 죽을 힘을 다해 조선 청년과 결투했다. 러시아 경관의 개입으로 죽음 일보 직전에서 살아났다. 만해는 이국땅에서 같은 동포끼리 죽고 죽이는 것이 서럽고 억울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만해는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로 강원도 간성에는 갈 수 없어 안변의 석왕사로 피신, 거기서 참선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해의 운명적인 만남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선배승 박한영과 박유운이었다. 석전 박한영은 만해의 정신적인 후원자였다.
1907년 건봉사에서 최초의 안거수행, 만화선사로부터 전법, 용운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제 그는 중견 승려가 되었다.
2
만해는 첫사랑이라 할 수 있는 속초 거주, 부유하고 젊은 서여연화 보살을 1907년 건봉사에서 처음 만났다. 남편은 선주였으나 해난 사고로 일찍 돌아갔다. 남편의 영가 법회에서 서여연화 보살과 만해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서여연화는 한용운에게 마음이 갔고 한용운 역시 그녀의 미모에 마음이 끌렸다.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 우리라’고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었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이운 것이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 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선사의 설법」전문
선사는 만화선사이며 님은 서여연화였으리라. 사랑의 속박을 끊음으로써 해탈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단단히 얽어맴으로써 해탈이 얻어진다는 것이다.
만해는 1925년 초여름 백담사로 돌아갔다. 제자 이춘성과 재회의 정을 나누고자 먼저 신흥사에 들렀다. 신흥사의 안양암에 머물며 심신을 추스렸다. 거기에서 만해에 대한 서여연화 보살의 정성은 지극했다.
오세암으로 갔다. 거기는 만해가 참선하는 도중 진리를 깨달은 곳이다. 오세암은 눈과 바람으로 유명하다. 눈이 내리면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다. 매서운 눈보라가 치는 밤이었다. 1917년 12월 3일 밤 10시 좌선 중 문득 무엇인가 떨구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견성오도, 만해의 깨달음이었다.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몇몇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한마디 큰 소리 삼천대천 뒤흔드나니
눈 속의 복숭아 꽃잎이 펄펄펄 나부끼노라
- 「오도송」전문
만해도 어느덧 47세의 중년이 되었다.
몇 개월 간『님의 침묵』88편의 혈흔을 각혈하듯 쏟아냈다. 님은 누구였을까. 누구였길래 만해는 그토록 님을 찾아 헤매였을까. 민족이었을까, 중생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었을까.
만해의 나이 47세 1925년 8월 29일 밤 백담사 화엄실! 거기에서 시문학사에 길이 남을『님의 침묵』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위대한 탄생 뒤에는 위대한 희생이 따르는 법, 님의 침묵 뒤에는 만해를 사랑한 미녀 보살 서여연화가 있었다.
만해를 시봉했던 이춘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여름의 오세암에서 십현주주해에 열중하고 있을 때 서여연화 보살의 시봉은 지극했 어. 그런가하면 가을 한철을 백담사에서 계실 적에도 보살은 거의 백담사 객실에서 살 다시피했지.
원효는 요석 공주로 하여금 설총을 낳아 이두 문자를, 의상은 선묘라는 여인으로 하여금 부석사를, 만해는 서여연화라는 여인으로 하여금 위대한 시『님의 침묵』을 상재하게 했다.
한용운은 진정 서여연화의 첫사랑이었을까. 이를 설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14년『불교대전』출판도 서여연화가 뒷바라지해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용운은『불교대전』출판 직후 한동안 신흥사 경내에서 서여연화와 생활을 하며 그동안 정력적인 대전 편찬의 피로를 풀었다.
1922년 한용운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의 일이다. 서여연화가 서울에 와 있으면서 한용운을 면회한 일이 있었다. 한용운은 보지도 않고 획 감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는 출옥할 때까지 서울에 있다가 그를 만나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정인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으랴. 한용운 하면 대명사처럼 늘 함께 따라다니는 단어, ‘님의 침묵’이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구절쯤 다 외우고 있는 시이다. 승가에서는「님의 침묵」의 ‘님’이 서여연화라는 풍문이 떠돌았고 이러한 소문은 수좌들 사이에서도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둘 사이는 누구도 알 리 없고 지금도 여백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읍니 다.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 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 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 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읍 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 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전문
만해의 님은 만해가 순수하게 창조해낸 님이 아니다. 여러 체험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오랜 인고 끝에 탄생된 님이다. 만해에게 나타난 젊고 아름다운 여성 서여연화. 그녀가 없었던들 위대한 작품「님의 침묵」은 탄생했을까. 그에게 단테의 여인 베아트리체는 아니었을까. 위대한 인물 뒤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기 마련이다. 만해도 하나의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미모의 서여연화가 있었기에 영원한 수수께끼, 만해의 님이 창조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3
만해는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고, 불교를 대중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1910년 탈고한『조선불교 유신론』은 한국불교의 개혁과 유신을 위한 책이었으며 1912년『불교대전』은 불교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책이었다. 산중 불교를 여항 불교로, 승려 불교를 민중 불교로 불교 개혁과 유신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또한 1917년 국민들이 갖추어야할,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교양 처세 철학서인『정성강채근담』을 간행하기도 했다.
천하(天下)의 선지식(善智識)아 너의 가풍(家風) 고준(高峻)한다
바위 밑에 할일할(喝一喝)과 구름 새의 통봉(痛棒)이라
묻노라 고해중생(苦海衆生) 누가 제공(濟空)하리오
- 「선우(禪友)에게」전문
‘선지식’은 불도 높은 중을, ‘가풍’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이나 범절을 말한다. ‘고준’은 산이 높고 가파른 것을 뜻한다. ‘할일할’은 망상을 꾸짖어 반성하게 하는 소리로 반성을 거듭한다는 뜻이다. ‘통방’은 스승이 마음의 안정을 잡지 못하는 사람을 징벌하는 데 쓰는 좌선할 때의 방망이이다. ‘고해중생(苦海衆生)’은 세상은 파도가 휘몰아치는 거친 바다와 같다하여 고뇌의 바다에 빠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제공’은 공의 세계를 건너간다는 해탈의 뜻인 듯하다.
천하의 불도 높은 중아, 너의 가풍이 높고도 높아 가파르구나. 바위 밑에 꾸짖어 반성하는 소리와 구름 사이에서 징벌하는 방방이라. 묻노라, 고뇌의 바다에 빠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누가 공의 그 세계를 건너 해탈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자기 수행에만 몰두하고 있는 승려들을 비판한 작품이다. 불교에서의 수행이란 혼자하는 고립독행(孤立獨行)이 아니라 구세적으로 행하는 입리입수(入泥入水)이다. 대중을 떠나 불교를 행할 수 없고 불교를 떠나 대중을 제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대승적 이념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어 있는 시조이다.
4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네 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나무 베어내고 무궁화를 심으과저
-「무궁화 심으과저」첫수
‘옥중시’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한시가 집중적으로 쓰여진 1920년대 초의 첫 시조 작품, 세수 중 첫수인「무궁화심으과저(1922)」이다.
계수나무는 일본산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수입목이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에서 차용, 용사(用事)한 것이다. 용사는 옛날의 뛰어난 글들에서 표현을 이끌어 쓰는 것을 말한다. 동요에서의 계수나무는 동경의 나무로 등장하나 한용운의 시조에서는 일제 강점기를 상징하는 억압의 나무로 등장한다. 달에 비친 계수나무, 일본의 제국주의를 베어내고 조선의 국화인 무궁화를 심자는 것이다. 무궁화를 심어 민족 독립의 염원을 형상화했다.
1922년 9월『개벽』27호에 발표된 시조에 ‘옥중시’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육당 최남선이「독립선언서」를 썼고 만해는「공약삼장」을 썼다. 만해는 3·1운동의 주동자로 3년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그 때 창작된 시조이다.
만해는 이 때부터 시조를 쓰기 시작했고『불교』16집에 ‘묵당’이라는 필명으로「제심우장」을 발표한 1938년 10월까지 1930년 대에 대부분 시조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35편 45수가 전하고 있다.
1921년 12월 22일 만해는 감옥에서 수행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왔다. 선학원에 머물렀다. 5월 청년불교 청년회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그는 그 유명한 철장 강연을 했다.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 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 는다.
일제히 청중들의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일본 경찰관까지도 박수를 쳤다고 한다.그의 대중 강연은 유명했다. 대중 강연에 능하고 논리가 정연했으며 목소리가 힘찼다. 적절한 재치와 비유로 청중을 사로잡았으며 청중을 울리고 웃기면서 민족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만해가 강연이 있는 날이면 일본 형사들은 반드시 참석했다.
만해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누구인지를 청중들에게 물었다. 청중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남들은 일본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는데 정말 그런지 다시 물었다. 이 때 임석한 형사는 ‘중지’를 외쳤다. 만해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소련도 아니요, 미국도 아닙니다. 물론 일본도 아닙니다. 우리 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 입니다.
만해의 웅변술은 이렇게 뛰어났다. 물론 청중들로부터 박수갈채가 쏟아진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만해는 당시 지성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 받았다. 정인보는 학생들과 청년들을 만나거나 강연할 때면 조선 청년은 만해 한용운을 배우라고 했다. 물으면 만해는 ‘한국의 간디’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 경향문학파와 국민문학파라는 우리 문학사의 큰 두 흐름이 있었다. 경향문학파의 대항마로 등장한 것이 국민문학파였으며 경향문학파는 정치적, 사상적으로 목적을 지닌 문학이었고 국민문학은 민족정신 또는 전통 양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문학이었다.
국민문학파가 표방한 것이 바로 시조였다.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 이병기 등에 의해 전개되어 갔다. 당시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양자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흐름에서 한용운이 시조를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할 것이다.
1920년대 문단의 큰 흐름이 자유시였는데 이 때 한용운은 국권 회복의 염원을 민족 형식인 시조로 노래했다. 1924년 창간된 잡지『불교』의 권두언을 이따금 시조로 쓴 것을 보면 그의 생각과 사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님의 침묵(1926)』이후 본격적으로 시조를 썼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破邪劒) 높이 들고 남선북마(南船北馬) 하여 볼까
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뿐인가 하노라
-「무제 7」전문
이순신은 왜적과 싸워 이긴 장수이고 을지문덕은 수나라와 싸워 이긴 장수이다. 이를 사공 삼고 마부 삼아 잃어버린 님을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파사검은 ‘사악함을 물리치는 검’으로 여기서는 위력적인 칼을 말한다. 남선북마는 ‘남쪽은 배, 북쪽은 말'이란 뜻으로, 사방으로 바쁘게 돌아다님을 이르는 말이다. 님은 국권을 상실한 조국을 상징한 말이다.
조국을 되찾고자한 독립의지, 조국애를 표출한 국권 회복을 염원한 시조이다. 옛시조가 그렇듯 다분히 교훈적이고 선각자적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5
새봄이 오단말가 매화야 물어보자
눈바람에 막힌 길을 제 어이 오단말가
매화는 말이 없고 봉오리만 맺더라
-「조춘2」
1933년 1월 불교 103호 권두시에 발표한 시조이다. 새 봄이 오다가 말았는가, 매화야 물어보자. 눈바람에 길이 막혀 제 어이 온다는 말인가. 매화는 말이 없고 봉오리만 맺더라.
절망을 말한 것 같으나 그렇치가 않다. 말없이 봉오리만 맺고 있는 것은 곧 꽃이 핀다는 매화의 의지이다. 미래를 묵묵히 준비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만해는 매화가 되어 독립이 오고 해방이 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시조에는 희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면에는 상실과 절망도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전의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산 집의 일 없는 사람 가을꽃을 어여삐 여겨
지는 햇빛 받으려고 울타리를 잘랐더니
서풍이 넘어와서 꽃가지를 꺾더라
-「추화(秋花)」전문
산 집의 일없는 사람이 가을꽃을 예쁘게 여겨서 햇빛을 받으려고 울타리를 잘랐다. 그러더니 서풍이 넘어와서 꽃가지를 꺾었다는 것이다. 초·중장의 기대와 희망이 종장에서 상실과 좌절로 바뀌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는 국권 회복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이다.
비낀 볕 소등 위에 피리부는 저 아이야
너의 소 짐 없거든 나의 시름 실어주렴
싣기는 어렵잖아도 부릴 곳이 없어라
-「무제」
비낀 볕 소등 위에 피리 부는 저 아이야. 너의 소 짐 없거든 나의 시름을 실어주려무나.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목동은 싣기는 어렵지 않으나 부릴 곳이 없다고 하더라. 시름조차 부릴 곳이 없다니 이러한 상실감은 당시 지식이라면 누구나 겪어야하는 일이었다.
고뇌의 심정을 시조를 통해서라도 풀어야 했을 당시 만해 한용운을 생각해본다.
6
1933년 만해의 나이 55세에 그는 『불교』의 잡지사, 불교사를 떠났다. 한용운은 사외승으로 사실상 비승비속의 처사였다. 16년 동안 단성사 옆 진성당 병원 간호원으로 있었던 36세 충남 보령 출신인 미혼 유숙원과 결혼했다. 20년 연하였다. 성북구 신흥사 부처님 앞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만해는 만년을 성북동 심우장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들도록 남향으로 짓자고 했으나 만해는 거절했다.
“그건 안 되지 남향으로 하면 총독부를 바라보게 될 텐데 여름에 볕이 덜 들고 덥더라도 북향으로 짓는 게 좋겠어”
조선총독부를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만해에겐 여간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심우장에서 암울한 시대를 지켜보며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심우장「尋牛莊」전문
만해는 소를 잃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소를 잃지 않으면 소를 찾을 이유가 없다. 만해가 소를 찾는다는 ‘심우’는 무엇일까. 민족, 님, 겨레? 조국을 잃지 않았다는 굳은 신념이 여기에 있다. 잃을 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잃지 않았기 때문에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역설일지 모르겠다. 부정적인 의미 같으나 빼앗긴 조국을 찾는다는 그의 굳은 신념,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소를 찾는다는 것이다.
만해에게 초심구도(初心求道)의 확신이 없었다면 이름을 심우장이라 명명했겠는가.
심우장에는 사상가, 운동가, 문인, 학생, 승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특히 홍명희, 방응모, 김적음, 박광, 송만공, 정인보 등은 만해의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심우장에서 만해와 바둑을 두며 술을 마시며 시국을 논했다.
1934년 딸 한영숙이 출생했다. 딸 한영숙은 호적이 없었다. 물론 유숙원도 혼인 입적이 되지 않았다.
만해는 처음부터 “나는 조선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신변 보호도 받을 수 없었고 모든 배급 제도도 제외되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외딸 영숙이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호적이 없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본놈의 백성이 되기는 죽어도 싫다.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 그는 손수 어린 딸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호적이 없었기에 최소한의 배급은 만해와는 무관하였다. 부인의 삯바느질과 만해의 원고료로 삶을 지탱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어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일부
생로병사는 어쩔 수 없는 법, 누구나 세월이 가면 늙고 병이 들기 마련이다.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 큰 별이 떨어졌다. 세수 66세 법랍 40세였다. 미아리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수덕사의 고승 송만공은 이제 서울에서는 만날 사람이 없다면서 만해가 떠난 후로 서울에 한번도 올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인보는 영결식장에서 아래와 같이 조곡했다.
풍란화 매운 향내 당신에게 견줄 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가 이외 없으니 혼아 돌아오서서
- 「고 용운당대선사를 생각하고」
1930년 대 그의 시조는 자유시와는 달리 다분히 여기적, 즉흥적 성격을 지녔으나 당시의 시조 형식은 안티 카프의 목적 문학의 대항마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혼, 민족 형식의 구현이라는 시대 정신을 만해는 우리 고유의 형식인 시조로 담아냈다.
암울한 식민지 시절, 전쟁, 강요, 타협 그리고 변절이 판을 치고 있었을 때 그는 심우장에서 조용히 한겨울 매화 한 그루가 되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봄 작은 언덕 쌓인 눈을 저어마소
제 아무리 차다가도 돋는 움을 어이하리
봄옷을 새로 지어 가신 님게 보내고자
-「조춘 1」
이른 봄 작은 언덕에 쌓인 눈을 두려워하지 말라. 제 아무리 추워도 돋는 움을 어찌하겠느냐. 봄옷을 새로 지어 가신 님께 보내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일제의 억압이 심하다 하더라도 독립운동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신 님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국을 떠난 해외 독립운동가를 지칭한다. 이분께 봄옷을 새로 지어 보낸다는 것은 독립운동에 힘을 모아 무장해야한다는 겨레의 의지 표현이다. 예언서 같은 시조이다.
만해는 독립이 오고 해방이 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해방 1년을 앞두고 독립의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영원히 입적했다.
그에겐 1904년 한용운이 출가한 그해, 맏아들 첫부인 전정숙 소생의 아들 하나가 있었다. 한보국이었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그는 북에서 1977년 6월 30일 73세로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 자녀들에게 통일이 되면 자신을 대신에 할아버지 묘소에 가서 성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해방이 아니라 통일이다. 선생의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묘소 앞에서 성묘하는 그날은 언제면 올까. 우리 한민족의 한이 언제면 풀릴 것인가.
시조 한 수 첨언한다.
따슨 빛 등에 지고 유마경(維魔經)을 읽노라니
가볍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 하리요.
- 한용운의 「춘주(春晝) 」첫수
-서예문인화,2018.6. 106-112 쪽
[출처] 한용운 편|작성자 석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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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 향 문 학 원문보기 글쓴이: 황득 김한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