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로족의 세시풍속과 금기
혼인 풍속:
머로족은 지금까지도 많은 원시적인 옛풍속을 보류하고있다.
이는 인류가 고대혼인사를 연구하는 생생한 자료이다. 그 하나의 예로 머로족은 약혼시‘계괘주’(鷄卦酒)를 마신다.
계괘주란 닭을 잡은 뒤대퇴골로 길흉을 점치고 길상과 행운을 비는것이다. ”계과주’의 한어원음 은음이 ‘길한점괘’라는 발음과 비슷하다. 지금은 더는 원시적인 ‘신의판단’에 맡겨 닭대퇴골의 문양으로 길흉을 연구하지는 않으나 약혼석상의 술을 전부 ‘계과주”,‘ 길한점괘의술’로 통칭한다.
‘계과주’는 여자 측 집에서 마신다. 사위가 미래의 장인과 장모에게 올린다. 첫 그릇은 장모에게 두번째 그릇은 장인에게 올리는데 장인은 술을 받은 뒤 ‘우리 딸은 자네 장모가 다 키웠다고 할 수 있지..그러니 애 어미의 뜻을 따르겠네”라고 아내를 치켜세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풍속이 인류 모권제 혼인에서 여성이 가부장적이던 유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머로족의 여성들은 시집갈 때 스스로 윗턱 대구치 1~2개를 으깬다. 이는 여성들이 남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 생겨난 풍속이라고 한다. 또 시집온 처녀는 아주 경외심을 가져야 할 존재라고 여겨 치아를 깨부수어야 결혼식을 올릴 엄두를 낸다.
그 외 ‘문틀 잡기’ ‘신부의 뒤 쫓기, ‘살수친’도 머로족의 혼인 풍속 중에서 아주 이색적이다. ‘문틀 잡기’는 신부가 친정을 떠나 시집갈 때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의미에서 두 손으로 문틀을 꼭 잡고 놓치 않는 풍속이다. 이 때면 중매꾼이 다가와 억지로 신부의 두 손을 문턱에서 떼어내어 친정을 나서도록 한다.
“신부의뒤쫓기”는 처녀가 출가전 목놓아울며 ‘곡가가’(哭嫁歌)를 부르는 풍속이다. 신부는또 결혼식날,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도망’을 쳐야하며 친정의 형수나 숙모 등 여성 친지들이 도망간 신부 찾기에 나선다. 신부는 또 친정을 떠나기전에 친정의 조상들에게작별인사를 한다. 그리고 신부의 아버지는 딸의 옷깃의 단추를 반쯤 벗기는것으로 출가한딸이 더는 본가씨족의 성원이 아니라 부가씨족에 편입됨을 뜻한다.
‘살수친’은 신부가 신랑 집 문턱을 넘어설 때 시댁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맑은 물을 영친해온 사람들에게 쏟아 붓는 풍속이다. 맑은 물이 악마를 물리쳐 행운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민족과 다른 혼인 풍속을 본다면 머로족은 처녀가 시집갈 때면 양산을 펼쳐 든 영친과 송친 대오가 보행으로 신부를 신랑 집까지 데려다 준다. 신랑 집에 이르면 부모님에게 절을 올리는 등 의식은 행하지 않고 직접 침방에 들어간다. 혼수도 결혼식 날 시댁에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첫 아기를 출산해 만월이 차면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보내준다.
머로족의 혼인은 예전에 부모가 도맡았으며 혼수를 중히 여겼다. 히지만 지금은 이런 풍속이 변해 길일을 택해 결혼식을 올리고 신부는 양산을 펼쳐 든 영친과 송친 대오의 배동으로 시댁에 가 별도의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바로 신혼방으로 안내되는 풍속만 남아 내려왔다. 머로족은 결혼 후 “불락부가’의 풍속이 있다. 결혼 후 여성들은 신랑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집으로 돌아와 생산노동에 참가하고 어른들을 모신다. 그러다 농망기나 명절이면 시댁에 잠깐 돌아가 며칠씩 머물며 임신 후 아이를 출산해야만 시집에 정식으로 들어가 산다. 머로족은 일찍부터 장족과 한족들과 통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