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십여 년째 다니고 있는 홍천 서석성당은 성당 축성 65주년을 맞아 본당 공동체의 내적·영적 발전과 성공적인 새 성전 신축을 지향하며 전 교우가 마음을 모아 마르코 복음서를 필사하기로 했다.
지난 10월 30일 성당 축성 65주년 기념일부터 쓰기 시작했고, 내일 11월 26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자 성서주간 첫날에 완필한 필사 노트와 함께 소감문을 제출해야 한다.
마르코 복음은 신약 성경의 두 번째 복음서이지만 4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여져서 다른 복음사가들이 많이 참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약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독파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마태오 복음서부터 펼치면 몇 줄 지나지 않아서 접하는 대목이 아브라함부터 42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오는 예수님의 족보인데 대체로 이 대목에서 바로 질리게 된다. 이에 반해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건너뛰고 곧바로 세례자 요한부터 등장한다. 그래서 그런지 마르코 복음은 4복음서 가운데 길이가 가장 짧다.
마르코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복음사가 마르코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강조하려 했음이 분명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느님의 아드님'을 복음서의 첫 대목으로 삼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한 건 마르코 복음서를 끝까지 다 읽어도 '하느님의 아드님(아들)'이라는 말은 그 뒤에 세 번만 더 나오고 그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열여섯 번이나 등장해서 읽고 쓰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말을 내가 처음 접하게 된 건 성경책이 아니라 소설책이었다. 1980년대 꽤 잘나가던 소설가 이문열의 장편소설 제목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소설책은 잘 안 읽는 편인데 그 무렵엔 이문열 작가가 펴낸 «삼국지»와 «사람의 아들»의 유명세가 워낙 대단해서 덩달아 사서 읽었던 것 같다.
«사람의 아들»은 처음엔 추리소설처럼 주인공인 형사가 살인범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흥미진진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세상과 종교(그 중에서도 기독교)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작가는 분명 이 소설의 제목인 '사람의 아들'이 예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썼을 텐데 내가 그때 이 책을 읽으며 그걸 알고 읽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이 소설에는 기독교뿐 아니라 고대 국가들의 종교와 각종 신학 이론이 복잡하게 뒤얽혀 난해하게 전개되는 터라 더 헷갈렸을 것이다.
하물며 그때는 내가 아직 성당에 다니기 한참 전이었다. 그 뒤에 성당을 다니며 성경을 읽게 되면서 신약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이 예수를 지칭하는 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예수가 자기 자신을 부르는 호칭임을 깨닫게 되면서 또 다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아들)'이 아니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분명 마르코 복음사가도 자신의 복음서 맨 첫머리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못 박지 않았던가? 예수님께서 갑자기 맹자의 사양지심이라도 발동한 것인가?
'사람의 아들'은 신약에만 나오는 건 아니다. 구약의 예언서 중에 에제키엘서에 엄청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구약에서 언급되는 '사람의 아들'은 예수를 지칭하는 신약의 '사람의 아들'과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신약에서 예수님이 곳곳에서 하신 말씀처럼 '이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번에 마르코 복음서를 써 내려가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내가 이천 년 전의 베드로로 살짝 빙의되는 듯한 영성적인 체험을 했다. 25년 전 처음 예비자 교리를 받을 때 성당에서 보여준 영화 장면이 성경에 쓰여진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고뇌하는 베드로 사도의 인간적인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하자, 베드로는 크게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라고 세 번째로 예수를 부인한다. 바로 그때 들려오는 두 번째 닭 울음 소리. 그 소리는 청천벽력처럼 쩌렁쩌렁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덥수룩한 수염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울기 시작한다.
두 번째 닭 울음 소리가 들렸을 때 베드로는 얼마나 놀라고 참담한 자괴감이 들었을까? 쩌렁쩌렁 울리는 닭 울음 소리에 묻힌 베드로의 처량한 울음 소리가 너무나도 뚜렷하게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오늘밤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거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한 장담은 결코 빈 말이나 헛소리가 아닌 마음 깊숙한 데서부터 우러나온 진심이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단지 상황이 스승님은 붙잡혀 가고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자신마저도 외톨이가 된 신세가 되고 보니 스승님과 같이 있을 때 가졌던 철석 같은 믿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구차하게 혼자라도 살아남겠다고 그렇게 따르던 스승님을 얼떨결에 배신하게 되고 만 것이리라. 베드로 자신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자기의 이런 처신에 오히려 스스로가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베드로가 때때로 보이는 우왕좌왕하고 좌충우돌하는 행동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고 오히려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져서 좋다. 베드로가 매력적인 까닭은 그가 항상 그렇게 덤벙대기만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말해서 예수님께 칭찬을 들을 때도 있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나약해 빠진 베드로도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신 베드로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도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이듯, 예수님도 '하느님의 아드님'인 神性의 예수와 '사람의 아들'인 人性의 예수가 한 몸으로 있으면서 그때그때 우리의 신앙 생활에 알맞은 성령의 빛을 비추고 계시다고 믿으면서 이번 마르코 복음서 필사를 감사한 마음으로 마친다.
"주님! 저희가 성경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기도하며 살고 선포하게 하시어 언제나 성령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2023. 11. 25 성서주간 시작 전날에
#마르코복음 #베드로
#사람의아들
첫댓글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필사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
신부님께서 그저 격려차 좋은 글이라고 하셨음을 알면서도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2천년전의 베드로를 현세의 베드로님이 잘 표현해주셔서 끝가지 눈을 떼지 못하였습니다.
필사하는 성심 응원합니다.
그렇게까지 얘기해 주시니 민망하군요. 댓글 감사합니다.^^
늦게 보게되었네 잘 접하지 못하는 성경의 말씀을 베드로의 글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네요 열심한 베드로 잘 잘봤어요
두 달 가까이 지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지난 4년간 어렵고 힘든 시기에 사목회장의 중임을 맡으셔서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아마도 하늘 나라에도 잘 표시되어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