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강의(經史講義) 8 ○ 논어(論語) 1 신축년(1781)에 이시수(李時秀), 홍이건(洪履健), 이익운(李益運), 이종섭(李宗燮), 이현묵(李顯默), 박종정(朴宗正), 서용보(徐龍輔), 김재찬(金載瓚), 이조승(李祖承), 이석하(李錫夏), 홍인호(洪仁浩), 조윤대(曺允大), 이노춘(李魯春) 등의 대답을 뽑았다
[술이(述而)]
이 장(章)은 《집주》에 양씨(楊氏)의 학설을 끌어 와서 “신신(申申)은 그 용모가 펴진 것이고, 요요(夭夭)는 그 얼굴빛이 온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굴빛은 신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용모는 요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정자는 “신신(申申)이라는 글자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다시 요요(夭夭)라는 글자를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용모와 얼굴빛을 나누지 않고 형용(形容)이 제대로 갖추어졌는지로 뜻을 삼은 것이라서 양씨의 학설과는 같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도 《집주》에서 아울러 취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익운이 대답하였다.]
신신(申申)은 심광체반 서태중화(心廣體胖舒泰中和)의 기상(氣象)을 말함이요 요요(夭夭)는 옹용정가 이유자연(雍容整暇怡愉自然)의 색사(色辭)를 말함이니, 서로 바꾸어 가며 말할 수는 없을 듯한데, 정자의 학설에서 용모와 얼굴빛을 나누어 말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집주》에서 동그라미 밖에다 둔 것이 어쩌면 정의(正義)와 다소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성(聖)과 인(仁)을 내가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개 성(聖)은 바로 인(仁)이고 인(仁)은 바로 성(聖)인데, 성(聖)과 현(賢)의 구분에 이르러서는 그 조예(造詣)의 높낮이를 또한 흐릿하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있다. 맹자는 백이(伯夷)를 ‘성지청(聖之淸)’이라고 하였는데, 부자는 이 장에서 ‘옛 현인(賢人)’이라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가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부자가 이미 현인이라고 했고 보면 또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허여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현묵이 대답하였다.]
성(聖)이라 하고 인(仁)이라 하고 현(賢)이라 함에는 또한 전체(全體)와 일단(一端)의 구분이 있습니다. ‘성지청’이라고 한 것과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한 것은 일단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옛 현인’이라고 한 것은 전체를 들어서 논한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생각하지 않고도 알고 애쓰지 않아도 중도에 맞아서 도(道)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어울려 간격이 없으니, 마음에 얻음이 있어서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찌하여 생각에 얻지 못함이 있어서 발분(發憤)하여 식음(食飮)을 잊는 데에까지 이른단 말인가? ‘마음에 분치(忿懥)하는 바가 있음’과 ‘먹음에 그 맛을 모름’은 바로 학문의 공부에서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바인데, 일찍이 성인에게도 이런 것이 있다고 하였던가? 성인이 비록 자신을 겸양하는 말에라도 일찍이 불성(不誠)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이것을 “성인이 그렇지 않으면서 일부러 이를 위하여 퇴탁(退託)한 것이다.”라고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대학(大學)》의 분치(忿懥)와 맛을 모름[不知味]은 밖으로 치달려 사물에 부림을 당하는 것이고, 이 장의 발분하여 식음을 잊는 것은 그 안을 돌아보아 그 이치를 찾는 것입니다. 비록 생지(生知)의 성인이라 하더라도 공부의 순서는 차츰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니, 또한 어찌 발분의 경계(境界)가 없겠습니까. 만약, 성인은 한걸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불씨(佛氏)의 돈오(頓悟)의 학설입니다.
‘온화하면서도 엄숙하다[溫而厲]’와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다[威而不猛]’는 강(剛)과 유(柔)가 서로 도와 이루는 오묘함을 볼 수 있는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다[恭而安]’에는 유독 이런 뜻이 없으니, 어째서인가? 선유(先儒)는 비록 공(恭)을 위려(威厲)에 소속시키고 안(安)을 온(溫)과 불맹(不猛)에 소속시켰지만, 《시경(詩經)》에 온온공인(溫溫恭人)이라고 하였으니, 공(恭)이 어찌 위려(威厲)에 소속될 수 있겠는가.
[이석하가 대답하였다.]
공(恭)에는 수렴(收斂)의 뜻이 있고 안(安)에는 서태(舒泰)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 도와 이루는 오묘함이 되는 이유인데, 《집주》에 이른바 음양합덕(陰陽合德)이 이것입니다.
위는 술이편(述而篇)이다.
[述而]
此章集註。引楊氏之說曰。申申其容舒也。夭夭其色愉也。色不可言申申。而容不可言夭夭耶。程子則曰。爲申申字說不盡。故更著夭夭字。此則不分容色。而以形容得備爲義。似與楊說不同。而集註竝取之。何歟。益運對。申申者。言其心廣體胖舒泰中和之氣象也。夭夭者。言其雍容整暇怡愉自然之色辭也。恐不可互換言之。而程說之不分容色。誠如聖敎。集註之置之圈外。豈爲其稍異於正義歟。夫子嘗云聖與仁則吾豈敢。蓋聖則仁。仁則聖。而至如聖賢之分。其造詣高下。又有不可沕者矣。孟子以伯夷爲聖之淸。而夫子於此章曰。古之賢人也。孔孟觀人有不同而然耶。夫子旣謂之賢人。則又許以求仁得仁。何也。顯默對。曰聖曰仁曰賢。亦有全體一端之分。聖之淸。求仁得仁。就一端而言之也。古之賢人。擧全體而論之也。聖人。不思而得。不勉而中。與道爲一。渾然無間。則有得於心。樂而忘憂可也。何至於思之未得。發憤忘食耶。心有所忿懥。食不知其味。乃學問之工。所當深戒。曾謂聖人有之乎。聖人雖於謙己之辭。未嘗有不誠之訓。此不可謂聖人不然。而故爲是退託也明矣。如何看。則爲得耶。魯春對。大學之忿懥不知味。馳於外而役於物也。此章之發憤忘食。反其內而窮其理也。雖曰生知 之聖。工夫之循序漸進也。亦豈無發憤境界耶。若謂聖人一蹴便到。則此佛氏頓悟之說也。溫而厲。威而不猛。可見剛柔相濟之妙。而恭而安。獨無此意。何也。先儒雖以恭屬威厲。安屬溫與不猛。而詩曰溫溫恭人。則恭豈可屬之威厲耶。錫夏對。恭有收斂底意。安有舒泰底意。此所以爲相濟之妙。而集註所謂陰陽合德者是也。以上述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