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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서 의롭다함을 받음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지난 8일 용인의 한 18층짜리 아파트 화단에서 고양이집을 만들던 50대 여성과 20대 청년이 아파트 상층부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아 50대 여성은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 사람은 크게 다쳐 병원치료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경우를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지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갑작스럽게 닥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시각이 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분이 구원받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하늘로부터 떨어진 벽돌에 의하여 죽었다고 하면 이것처럼 간담이 서늘한 게 없습니다. 이 News를 접한 여러분과 저에게 단순히 넘어가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생각지 않을 때에 급격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요. 나라고 해서 이런 경우를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언제 어디서 갑자기 닥치는 유명(幽明)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다면 나는 구원받아 하나님께 갈 수 있나요? 이 세상의 생명이 다하고 내 영혼이 가야 될 곳을 늘 준비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본론은 1:18부터 시작되는데요. 첫 번째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1:18에서 1:32까지 이방인의 죄 문제가 다뤄지는데 이방인의 죄의 핵심은 불경건과 불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경건이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불의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2:1에서 3:8까지 유대인의 죄 문제가 다뤄집니다. 유대인의 죄의 핵심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본문 3:10-20에서는 인류 전체의 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 랍비들이 흔히 쓰는 문학적 특징을 사용하여 인류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데 이것을 카라즈(charaz)라고 하며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슬 꿰기라는 것입니다. 즉 전도서, 시편 이사야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주제를 보다 강하게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인간에 대한 확고한 전제(前提)는 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율법의 기능은 나를 살펴보는 거울과 같다고 했습니다. 율법에 비춰 본 사람들의 모습은
첫째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에 대하여 11~12절에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 삶에 충실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살기에 바빠서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삶에 충실한 사람을 가리켜 성실하다고 높이 평가합니다. 거기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나를 평가할 분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는데 세상 가치기준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며 삽니다. 스스로의 도덕율과 윤리의식을 가지고 그 테두리에서 자신의 늘 변호하고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스스로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에 의하여 자신의 악을 깨닫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깁니다.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은 모두 환경 탓이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몰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자기 탓으로는 돌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을 또 말하고 있습니다. 13~15절에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팔레스틴에 있는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굴로 되어 있으며 그 입구는 돌로 막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사람의 목구멍을 열려 있는 무덤에 비유한 것은 그 목구멍이 어떠한 것도 삼킬 만큼 넓다는 의미로 탐욕 스러움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은 가져도 또 가져도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을 그치지 못합니다. 미국의 제일의 부호였던 록펠러에게 기자가 인터뷰하면서 “당신은 돈을 얼마나 더 갖고 싶습니까?”그랬더니 “지금 가진 것 보다 조금 더요”라고 했답니다. 요즘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는 재벌 2새들의 다툼을 보십시오! 그렇게 많이 가졌는데도 더 가져야 한다고 아귀(餓鬼)다툼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그 안에 가득 쌓인 악을 토해내므로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궤변(詭辯)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으로 우연하게 만물이 조성되었다는 학설입니다. 이 이론을 근거로 해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인간은 허무한 존재로 몰아가게 됩니다. 목적도 없이 어느 날 아메바(amoeba)라고 하는 단세포(單細胞)로 시작되어 내 생명이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낭설(浪說)입니까? 그런 거짓 이론을 믿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고 ‘사람이 좋아하고 찬성하면 선이다’라는 관념에서 ‘동성애도 선이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도 어떠냐?’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 숨겨져 있는 악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율법의 내용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에 비춰서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가 없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평가하면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이고 믿었다는 것을 구실로 해서 자기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기에 죄에 대한 회개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요? 회개 없는 신앙으로 율법을 들여다보면 그 율법이 자기를 지지해주고 있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의롭다고 더욱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만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기의 의로움을 더욱 강조하게 되고 회개는 저만치 물 건너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配慮)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옳고 그름에 의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나타내고 뽐내려고 합니다. 누구 때문에 시험이 들었나요? 그렇다고 하면 나는 아직 회개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또한 이처럼 교회 안에 악인을 길러내는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은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한 대형교회의 목사님은 사람의 욕구인 Need에 초점을 맞추고 설교하여야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여름에 겨울옷을 가지고 나와서 여러분! 이것은 정말 좋은 옷입니다. 이것을 사십시오! 라고 외쳐서 옷이 팔립니까? 여름에는 거기에 걸맞게 수영복을 들고 나와서 팔아야 제대로 사람의 요구에 맞게 장사하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요구하는 것에 맞추어 말씀을 가르쳐야 교인들이 호응할 것 아닙니까?”라고 목회자 세미나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욕구가 선한 욕구이겠습니까? 그런 욕구에 맞추다 보면 복음은 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았으니 더 이상의 회개가 필요 없다고 외치는 구원파가 있습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16~18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천방주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박보영 목사님의 간증 중에 지옥에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었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회색 옷을 입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라 천사에게 물었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과 회색 옷 입은 사람들은 누구냐고 하였더니 즉각적으로 그의 마음에 답이 들어오더라고 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예수를 전혀 믿지 않은 사람이고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많은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마음에 회개 없이 신앙생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나는 교회 나와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데 주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신다면 그 때는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 없는 저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선지자'로 불리는 에이든 토저목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으라>는 책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할 수 없는 은밀한 죄와 자신의 과거의 생활이 용서받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면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너무 오랫동안 블라인드가 내려져있지는 않은가?”를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안에 깃들여 있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이란 잣대를 가지고 ‘너는 죄인이다’ 라고 몰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것이 있다면 비난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너는 이것이 잘못되고 저것이 못되었다’고 지적으로 그치면 그것처럼 악랄한 저주의 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십니다. 율법을 통하여 나의 죄를 지적하시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한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독초가 있는 곳에는 그 독을 제거할 수 있는 약초도 그 근방에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마라의 쓴 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나뭇가지를 준비하셨고 광야에서 목이 말라 기진할 때 므리바의 반석을 예비하셔서 물을 마실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율법이 있는 곳에 은혜 또한 넘치도록 준비하셨습니다. 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절대적이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그 율법에 의하여 내가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룩한 율법으로 인하여 나의 죄 됨을 깨달을 때 복음 즉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들려집니다. 출20:21절에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모세를 영광스러운 빛의 자리로 초청한 것이 아니라 흑암으로 초청하였다는 말입니다. 죄인의 자리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죄인의 자리 절망스런 자리에 들어설 때 복음이 들려집니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죽음의 공포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한강에 투신하였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어 살아난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물속에 들어가 이렇게 해서 죽는구나 생각하니 정신 아찔해지면서 아! 살고 싶다. 살아내야 한다는 갈급함이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게 밀려왔습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정직한 표현입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면 사람은 살고 싶어집니다. 그 때 “살 수 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를 선포해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한 의가 나타났으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 분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므로 율법을 완성하셔서 완벽한 의로운 자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 분이 이루신 의로움을 내가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를 내가 받아 누리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내게 숨겨진 죄의 고백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일 때 내 안에 있는 죄를 밝은 빛을 비춰 들쳐 내보이십니다.
죄가 보이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마치도 썩은 냄새를 풍기면 어디서 왔는지 날아드는 똥파리처럼 말입니다. (유 1: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천사장과 성령이 하시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의 정죄(定罪)입니다. 심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 유보(留保)되어 있기에 성령 하나님이 내 죄를 가지고 심판의 정죄를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정죄는 마귀가 합니다. 마귀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죄를 빌미로 하나님께 송사(訟事)하고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 때에 내가 죄에 대하여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회개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나를 변호하십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만약 성령님의 밝은 빛으로 인하여 내 죄가 들춰졌는데 고집을 부리고 그 죄를 회개치 않으면 마귀의 송사에서 벗어날 길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마귀의 송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욥기서를 보십시오! 마귀의 송사에 하나님도 허락하지 않습니까? 동방의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았던 욥도 마귀의 송사를 받아 심한 고난을 받았는데 하물며 우리 죄안에 갇혀 있는 우리는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죄를 고백하는 순간 성령은 나로 죄에서 자유하게 될 수 있도록 활동하시고 예수의 피로 마귀와 대적하여 이기게 만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운영자를 주님께 넘겨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22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내 안에 왕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모를 때는 내 인생의 주관자가 나였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녀로 세움을 받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과 애씀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절히 깨달았을 때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게 됩니다. 내 계획이 무산되는 경험,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하리라고 결심했던 모든 것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약 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애써도 내일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에 부딪히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을 주님께 맡기라는 주님의 신호입니다. 순종하십시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도 내 힘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7:22~23)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율법에 정한 뜻대로 행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본성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포기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가 예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살전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미쁘시다’라는 단어는 ‘피스토스’(pistov")입니다. 이것은 ‘믿을만한 하다’ 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심을 말씀합니다. 이런 신뢰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친근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저보다 3학년 위에 있는 아이가 저를 못살게 괴롭혔습니다. 이유 없이 저에게 다가와 저를 툭툭 치면서 욕을 하곤 했습니다. 이 아이가 하도 저를 괴롭혀서 학교에 가기 싫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의 사정을 중학교 2학년이었던 셋째 형이 알고는 내게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걔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저보다 3살 위인 그 아이는 저 보다 힘도 세고 키도 컸기 때문입니다. 형이 또 제게 말합니다. “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내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네가 질 것 같으면 내가 나서서 그 놈을 혼날 테니 너는 무조건 그 아이의 코를 주먹으로 쳐서 코피를 흘리게 하면 네가 이기는 거야”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강가의 모래사장에서 맞장을 뜨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아이가 저를 가소(假笑)롭게 쳐다보더니 “아쭈 요놈 봐라!”그러면서 따라오는 겁니다. 뒤 따라오는 아이를 갑자기 뒤로 돌아서 양 손을 풍차 돌리듯 해서 그 아이의 얼굴을 내리쳤는데 이 아이의 코에서 코피가 흐르는 겁니다. 그 아이가 엉엉 울면서 저는 KO패로 이기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통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저의 형을 신뢰하였어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기는 것처럼 우리의 전능자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면 우리 인생의 모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분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걸까요?
성령은 실제로 우리에게 임하여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행하셨던 일들 즉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타이르시고, 위로하시는’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고아처럼 내버려지지 않았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십니다. 성령은 언제 내게 민감하게 작용하시냐 하면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회개할 때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심령에 성령의 활발한 역사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구체적으로 약속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말씀을 믿게 되며 소망이 생겨 내 안에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나게 됩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사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밀림의 왕자인 사자에게 여우가 걸려들었습니다. 으르렁 거리며 잡아먹으려고 하였더니 여우가 사자에게 “당신은 내가 누구인줄 모르고 그러는데 나를 따라와 보시오! 그리고 내가 누구인줄 분명히 알고 잡아먹든 하시오!”그러는 겁니다. 사자는 여우의 말을 듣고 뒤를 쫓아 숲으로 들어갔더니 온갖 짐승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를 보고 짐승들이 화들짝 놀라는 겁니까? 여우입니까? 사자입니까?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면 이렇듯 저주가 물러가고 실패한 요인들이 제압(制壓)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동행에서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습니다. 이 사망의 골짜기는 나의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만을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라 할지라도 동행하는 것 이것이 율법의 정죄함에서 벗어나 의의 길을 걸어가며 승리를 안겨다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