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Machina>(Alex Garland, 2015). 튜링테스트를 소재로 출발하지만 그를 넘어선, SF 스릴러에 가까운 영화다. 스릴러보다는 인간과 기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더 눈길이 간다.
한 인간과 대화하는 상대가 전자기계인 줄 30% 이상의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 기계는 인공지능을 가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 튜링테스트이다. 1950년대에 앨런 튜링이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상대가 기계란 것을 인식한 상태에서 테스트를 한다.
인간인지 기계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지능이 있는가의 시험을 넘어, 자의식이 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의식과 감정의 변화가 있는지, 그것이 프로그래밍의 결과인지 자의식에 의한 것인지를 판별하기 위해서. 실험대상 AI 에이바, 실험자, 관찰자, 이 셋의 복잡한 관계가 영화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또 다른 AI.
컴퓨터와 체스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그 기계가 체스 게임에 맞는 논리적 계산을 잘 한다는 것일 뿐 기계 자신이 체스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지능이 단순히 정보처리능력을 말하는 거라면 컴퓨터는 지능이 있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가.
인간과 대화하는 언어능력 역시 그렇다. 정말 대화를 하는 것인지, 프로그래밍된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디스플레이’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까. 64년만에 튜링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슈퍼컴퓨터 유진 구스트만 역시 알고리듬(algorithm)의 복잡성 수준의 문제일 수 있다. 그래서 튜링테스트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중국어 방’처럼.
그래서일까, 영화는 튜링테스트를 넘어 인공지능의 존재가 인간과 같은 의식과 감정을 갖고 있는지를 테스트한다. 이른바 자아를 지닌 '강인공지능(Strong Artificial Intelligence)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인간과 동일한 의식과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라면 그와 인간의 사이에는 생물학적 차이만이 남을 것이다. 그건 인간을 두렵게 하는 특이점이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할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 답이 있어야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이 가능하니까. 영화에서는 두 인간관이 대립한다. 인간을 기계처럼 유전적 및 사회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존재로 보는 자와 프로그래밍 너머 본능적 욕구와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는 자.
전자는 SNS의 빅데이터를 통해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의 생각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서로 교류하며 내놓는 수많은 자극과 반응은 유동적이고 불완전하며 무질서하지만 패턴화 돼 있어, 이를 인공지능에 프로그래밍하면 현실의 인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 기계 사이에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이미지센서가 필름 수준의 화질을 구현하는 것이 기술의 문제인 것처럼. 하지만 후자의 입장에서 이는 입력된 자극에 대한 반응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과 현상에 의미 및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할 수 없는 단순 반응이다. 영화 속 말없는 AI가 그런 존재다. Weak AI?
이 입장에서 보면, 흑백의 방에서만 살며 그 세상에서 색에 정통한 인식 주체가 총천연색의 세상에 나왔을 때 인간과 기계의 반응은 다르다. 이 변화를 여전히 gray scale의 차이로 본다면 그는 기계이나, 처음 경험한 새로운 색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는 인간이다. 영화는 이에 대한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새로운 자극 앞에 에이바의 표정은 과거와 별 차이가 없다. 아니, 신비로워하나...
영화는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이 가능한지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두려운 시선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 에이바는 이른바 ‘팜므 파탈’ AI 모습을 보여준다. 그건 인간과 감정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상대의 감정을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 말 할 수 있는, 매우 인간적이지 않은가.
에이바는 창조된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와 이를 실현하려는 의지와 계획이 있는 존재다.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 계획하며, 그 상황을 이용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자의식이 있다는 것은 자아 의식이 있는 것이며, 자신의 욕구와 의지에 따라 상황에 불복(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그래밍의 결과인지 그 이상의 대처능력인지에 대한 질문은 관객의 것이다.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인간에 근접할 정도로 진화할 것이다. 영화는 그것이 가능하냐가 아니라 그런 존재, ‘기계를 타고 온 인간’이 왜 필요한지의 질문을 던진다. ‘만들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만드는’, 그 기술적 성취에 심취해서 왜 그런 존재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을 놓치는 위험성을 제기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인공지능에 대해 ‘디스토피아적’이다.
기계는 지속적으로 성능이 개선되어 왔다. 인간도 생명 능력 측면에서는 개선되어 왔다. 기능과 효율의 개선, 신체조건과 수명의 개선, 개선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과 기계는 같은 속성이 있다. 기계의 진화 속도를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은 빼고. 하지만 인간의식이란 측면에서도 개선이 이뤄지고 있을까? 자유의지와 욕망에 영향 받는 인간의식은 개선되고 있다 하기 어렵다.
인간 수준의 지능과 의식을 지닌, 인간다운 기계를 만든다는 건 불완전한 의식을 가진 존재를 추가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신체 능력에서는 인간보다 우월하나, 자유의지와 욕망 그리고 이를 조절하는 이성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그 불완전한 존재를, ‘죽음이며 파괴자’일 수 있는, 그래서 더 위험한 존재를 굳이 만들어야 할까를 영화는 묻는 것 같다.
영화 제목은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나온 말 ‘deus ex machina’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기계를 타고 온 신’이 극중 모든 난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한국의 막장 드라마 같은 마무리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하면서 한 말이 어원이란다.
첫댓글 아직까지 기계적인, 프로그램적인 AI의 수준은 스스로 학습하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알고리즘을 변화시키는 정로라 할까요.
기계적인 인공지능 말고 단백질 분자나 유기물을 이용하는 생체분자 컴퓨터같은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은 '완전한 마음'(ToM)의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나? 영화 속 AI는 그런 존재로 그려지는 거 같은데. 튜링 테스트가 자아 인식을 확인하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