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테의 문학을 통한 시대적 실천과 잉태한 변혁의 씨앗들
- 단테의 운명과 『신곡』 집필
한봉수 문학평론가
들어가며
대서사시 『신곡』은 인류의 문학적, 철학적, 종교적 유산의 총집결체이며 중세를 넘어 근대 문학의 심원한 원천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는 단테가 연옥 정상에서 그의 구원의 여인이자 사랑의 불꽃인 베아트리체를 만나서 함께 천국의 첫 하늘에 오르는 감동을 시로 지었다. 「천국편」 2곡에 묘사되어 있는 기독교 교리, 신의 사랑, 사람의 사랑, 신화, 과학을 최대한 담아보았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노래, 신곡 천국편 제2곡
구원을 찾는 마음 하나 / 자그마한 쪽배를 탄 영혼들이여
천상을 향한 노래 부르며 / 노 저어가는 나의 배를 따르세요.
함께 시를 써요 / 미네르바가 영감을 주고
아폴론은 이끌고 / 아홉 뮤즈들이 북두로 안내하듯이.
신의 나라 향한 염원의 눈물 / 마르기도 전에 / 우리를 싣고 가는 걸 보세요
베아트리체는 하늘을 보고 / 나는 그녀만 바라보는데
우리를 태운 화살이 무한한 장력(張力)에 / 벌써 천상에 오릅니다.
첫 번째 성좌(달)에 이끄신 빛과/ 영원한 물방울 같은 진주가
한 덩어리가 되고 / 그 사랑 속에 우리 영원하길
마돈나여 / 그 빛 /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
망명길 좌절로 삶의 바닥을 뒹굴던 단테는 어두운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저승 세계를 여행하게 된다. 지구 북반구 반대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남반구에 높은 산이 있는데 이곳에 연옥(煉獄)이라는 독특한 세계가 있다. 연옥 정상에서 비로소 천국에 오를 수 있다. 어느 날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손에 이끌리어 고통의 지옥을 지나 여기까지 올라간다. 죄의 기억을 말끔히 지우는 ‘레테의 강’을 건너고 드디어 십여 년 전에 죽어 천국의 별이 된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함께 하늘에 오른다. 시의 장면이다.
『신곡』의 원 제목은 ‘LA COMMEDIA DI DANTE ALIGHIERI’로 번역하면 '단테 알리기에리의 희극'이다. 보카치오가 ‘신성스러운(divina)’을 제목에 포함시켜 『LA DIVINA COMMEDIA DI DANTE ALIGHIERI』라 하였다. ‘신곡(神曲)’이라는 번역명은 일본의 작가 모리 오가이가 만든 이름이다. 한자 뜻 그대로 '신성스런 노래' 라는 뜻이다.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Inferno, Purgatorio e Paradiso) 세 편으로 되어있다. 각 편은 33곡(canto)으로 이루어진다. 서곡을 「지옥편」에 더하여 총 100곡으로 구성된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는 대서사시(敍事詩)의 저자이자 작품에 출연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서 극 중 에피소드들이 사실주의적으로 그려진다. 단테를 어두운 숲에서 건져 이끈 자는 로마 최고의 지성이자 시인인 베르길리우스(로마의 건국 신화 『아이네이스』 저자)이다. 그는 일천여 년 전에 죽어 림보(Limbo, 예수를 몰랐던 사람이 선하게 살다 온 영령이 고통 없이 머무는 특수한 지옥)에 있던 영령이다. 단테를 지옥 세계와 연옥 세계 정상까지 동행하며 순례를 이끌어 간다.
작가 단테를 위대한 작품 세계로 이끈 동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신비의 여인, 바로 단테의 영원한 사랑이자 구원인 ‘베아트리체’이다. 작품 속에서 모든 저승 세계 여행을 기획한 자는 베아트리체이다. 그녀는 연옥 정상부터 천국 여정을 안내한다.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며 단테를 각성시킨다. 이승에 돌아가거든 저승의 경험과 교훈을 글로 남길 것을 단테에게 강권한다.
요한 볼프강 괴테는 『신곡』을 ‘인간이 손으로 만든 최고의 작품’ 이라 칭송하고 『신곡』의 영감을 받고 『파우스트』를 집필했다. 화가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는 단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1465년에 단테와 신곡의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세 세계를 한 폭에 담아 대형 그림을 그렸다. 이 대작은 피렌체 성당에 걸려져 있다.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는 ‘신이 내린 작품’이라 칭송하고 전국을 돌며 『신곡』을 강의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T.S 엘리어트는 “서양의 문학은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양분된다”고 하였다. 두 문인은 문학과 예술 등 인류 문화에 단연 큰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호메로스를 더하면 이 세 사람이 서양 3대 문인이라는 데에 모두 동의한다.
문명사상가들은 수백 년 과학 기계문명과 위기에 처한 인류에 대한 경고로 네오-르네상스(Neo-Renaissance) 즉 ‘새로운 부활’을 주창하고 있다. 필자는 인류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에 대응하여 ‘신성(神性)’과 ‘영성(靈性)’을 주시한다. ‘절제하는 인간 본성과 이성’의 가치가 필요한 시대이다. 인류는 다시 단테의 『신곡』에 주목해야 한다.
지난 2021년, 단테 서거 700주년을 기념하여 가톨릭계는 『신곡』의 메시지는 ‘인류의 회심을 촉구하는 일과 인류의 참 행복을 선포하는 일’이라 했다.
단테는 문학을 통한 시대적 실천으로 인류를 회심케 하는 종교적 업적을 넘어 인류 문명에 변혁을 가져오는 씨앗들을 잉태하였다. 단테는 인류를 위해 예비 된 선지자 같은 존재였다. 그러면 단테가 대작을 쓰기 위한 운명적 준비와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단테는 「지옥편」 7곡에서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는 언제나 자신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고 했다.
1. 위대한 여정을 위한 운명적 준비
1) 청신체 시인 활동 – 신이 아닌 ‘사람’을 노래한 시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담은 『신생(La Vita Nuova)』을 쓰던 20대 젊은 시절에 단테는 ‘청신체’(dolce stil novo, 감미로운 새로운 문체의 시)라는 문학 활동을 했다. 청신체 시문학은 이탈리아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형식은 소네트(sonnet)와 자유로운 발라드이며 신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노래한다. 단테는 「연옥편」 24곡에서 한 영령에게 청신체를 정의하며 본인을 소개한다.
사랑이 내게 불어올 때 받아 적고,
사랑이 안에서 불러 주는 대로
드러내려는 사람이오 – 연옥편 24곡 52~54
연옥에서 한 영령이 “사랑의 지성을 가진 여자들로 시작하는 새로운 시를 쓴 사람이 아닌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은연중 청신체의 주제를 소개한 것이다. ‘새롭고 감미로운 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감성의 발로이다. 영령 카셀라가 단테의 시를 노래로 부르자 단테와 스승은 잠시 정신이 팔릴 정도로 감동한다.
‘마음속에서 나에게 속삭이는 사랑’
그때 그가 그리도 부드럽게 시작했는데
그 부드러움은 아직 내 안에서 울린다. - 연옥편 2곡 112-114
청신체는 앞 세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활동하던 음유시인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단테와 귀도 카발칸티 등이 주도한 ‘청신체’라는 새로운 유형의 시들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자유롭고 혁신적이다. 단테는 엄격한 기독교 사상체계를 뚫고 연인 간의 사랑과 자유, 신이 아닌 사람을 노래하고 있었다.
죽은 그녀가 / "이제 나는 평화의 원천이 보여요" 말하는 것 같았다. - 신생 23
조반나(세례요한의 여성형)가 앞서고 / 베아트리체가 걸어온다
여자가 아니라 천국의 아름다운 천사이다. - 신생 26
2) 문학 영감의 영원한 원천, 베아트리체와의 운명적 만남
연옥 정상(지상천국)에서 베아트리체와 극적인 상봉을 할 때 단테는 여기까지 안내해 준 스승 베르길리우스에게 감격에 겨워 외친다.
내게는 떨리지 않는 피란
한 방울도 없다오. 내 눈에는
저 어릴 적 불꽃의 표적을 지금 보고 있다오. - 연옥편 30곡 46~48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향한 대담한 사랑을 고백한다. 꿈속을 찾아가 영감으로 불러 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무심했던 단테를 탓한다. 결국, 림보에 있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단테를 지옥을 거쳐 여기까지 데려다주길 간청했다”고 말한다. 어두운 숲에 빠진 단테를 천국으로 이끄는 엄청난 기획을 본인이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전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살던 피렌체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 오랜 성곽들, 그들이 두 번째 만났던 산타트리니타 다리가 있다. 단테는 아홉 살 때 한 살 어린 여덟 살 베아트리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베아트리체를 천사와 같은 순결한 존재로 여겼기에 감히 말도 걸지 못하고 평생 가슴에 품고만 살며 문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키워왔던 것이다. 단테는 그녀를 ‘아름다움뿐 아니라 순결과 정숙함이 넘쳐 흐르는 숙녀’라고 하며 영원한 구원의 여신으로 마음에 새겼다.
피렌체에 가면 단테가 세례를 받은 곳이자 종국에도 돌아갈 곳으로 지목했던 산 조반니세례당이 있고 베아트리체가 묻혀 있는 산타 마르게리타성당이 있다. 어릴 적에 공부하고 예배드리던 오래된 성당들에는 아직도 단테의 오래된 숨결이 배어 있다.
한때 사랑으로 나의 젊은 가슴을 뜨겁게 했던
저 태양은 아름다운 진리의 부드러운 모습을
온전하게 논박과 증거로 내게 나타내 보였다. - 천국편 3곡 1~3
9살에 운명적인 만남과 9년 후 18살에 두 번째 만남이 있었다. 숫자 3의 배수들이다. 작품 속 숫자 3과 7에는 기독교적 의미들이 담겨 있다. 베아트리체가 죽는 날도 1290년 6월 9일이다. 그녀가 25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단테는 엄청난 슬픔과 괴로움에 빠진다. 그날은 단테의 생애에서 창작과 관련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단테는 엠피레오(최고의 하늘)에서 자신의 공덕으로 마련된 옥좌에 앉은 베아트리체를 본다. “그녀는 영원한 빛을 반사하면서 면류관을 이루고 있었다.”(천국편 31곡 72)
가능한 모든 길들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당신은 나를 속박에서 자유로 이끌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이루는 권능을 지녔습니다. - 천국편 31곡 85~87
오! 영원한 뮤즈, 아니 모든 영감의 원천, 아니 아니 구원의 마돈나,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문학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고 뮤즈이다. 그녀는 단테의 삶과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창조의 모티브이자, 종교적 교리이고, 신앙적 구원의 상징이다.
『신생』 2편에 유명한 ‘단테의 계시’ 장면을 소개한다. 18살에 베아트리체와 두 번째 마주친 후 단테는 엄청난 기쁨에 싸여 선잠을 자다가 생생한 꿈을 꾼다. 자신 방에 불의 구름을 타고 무서운 외모이지만 환희에 찬 남자 형체가 나타나 "나는 너의 주님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양팔에 안은 알몸은 피처럼 붉은 천에 싸여 있는 여인, 베아트리체이다. 단테에게 "네 심장을 살펴보아라" 하고, 그녀에게는 “불타는 그것을 주어먹으라” 한다. 그녀는 그것을 사납게 먹어 치운다. 단테는 심장을 그녀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신은 그녀를 하늘로 데려가는 듯 했다. 단테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3) 정치 참여와 운명적인 망명
– 광야와 같은 길에서 위대한 집필
작품 속, 1300년 성스러운 희년 부활주간 성금요일 새벽이다. 단테가 저승 여행을 출발하는 날, 여행 기간은 7일 동안이다. 『신곡』 첫 대목을 소개한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
올바른 길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있었네. - 지옥편 1곡 1~3
「지옥편]의 첫 구절이다. 단테가 인생 중반에 문득 바라보니 ‘어두운 숲속’에 처해
길을 잃고 헤매는 자기 모습을 본다. 이 숲을 빠져나가려 하나 무서운 세 짐승 표범, 사자, 암늑대가 가로막고 있다. 각 각의 상징하는바, 표범은 음란/사자는 오만/암늑대는 탐욕을 뜻한다.
어두운 숲은 망명길 희망 없는 삶이고, 세 짐승은 단테를 몰아낸 교황청과 정적인 흑당파들, 모욕을 주는 피렌체인들이다. 단테는 당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지지
하지만 세속권력까지 장악하려는 교황의 야욕에 반대한다.
교황을 지지하는 궬프당은 1266년 피렌체에서 기벨린당(황제 지지파)을 물리치고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단테의 궬프 백당(白黨)은 교황의 야심적인 영토확장정책을 반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또한번의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단테 시절에 피렌체는 인구가 10만 명으로 파리, 런던보다 컸다. 면직산업, 무역업, 금융업이 번성했던 선도 도시국가이었다. 1302년, 단테가 피렌체의 특사로 로마 교황청 파견 중에 교황의 세속권력 확장을 지지하는 궬프 흑당(黑黨)이 쿠테타를 일으킨다. 단테가 속한 백당(白黨)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약탈, 사살 혹은 추방당한다.
단테는 「지옥편] 제8곡 분노의 스틱스 늪에서 배반한 흑당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다. 피렌체 흑당의 괴수로 단테를 추방했던 악명 높은 필리포 아르젠티 악령을 저주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 망할 놈의 영혼아! 이곳에 갇혀 영원토록 통곡하거라!” 이를 보던 스승이 단테를 팔로 감싸며 얼굴에 입을 맞추며 칭찬한다.
악에 분노할 줄 아는 자야,/ 너를 낳은 여인에게 축복이 내리시리라- 지옥편8곡 44,45
단테의 복수가 이어진다. 극 중에서 망령 한 무리가 “필리포 아르젠티를 결딴내자!”고 부르짖으며 잡아다가 늪 가로 끌고 가서 난도질하였다. 단테는 이 광경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단테는 백당의 최고 지도자로 정치에 희생되었다. 화형 선고를 받고 쫓겨서 망명길에 오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먹고 자는 오이코스(사적 영역)만을 해결하면 되는 동물이 아니라, 폴리스(공공 영역)에서의 정치적인 삶을 누리는 인간이어야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테는 폴리스를 쫒겨나 가치 없는 삶을 사는 ‘어두운 숲’(신곡, 첫 행에 표현)에서 자칫 몰락하는 신세였다.
단테는 때로는 군인으로 참전하고 때로는 외교관으로, 때로는 행정 공직자로 활동하면서 공동체의 이상을 이탈리아 전체에 확산시키고자 했으나 음모에 빠져 망명길에서 여생을 살아야만 했다. 여생 20여 년을 베로나, 라벤나 등을 떠돌며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숙명적으로 위대한 작품을 위해 단테에게 예비된 광야와 같은 곳이었다.
망명 생활은 단테에게 좌절과 실패의 시간이었지만, 한편 지성인으로서의 자각과 실천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의 기회이기도 했다.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피렌체를 떠난 단테는 로마에서 억류된 후 1302년 망명길에 올라 『신곡』을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지옥편」과 「연옥편」을 1312년경까지 집필하고 1321년, 죽기 바로 전까지 「천국편」을 기필코 완성했다.
단테는 망명의 시절을 겪으며 피렌체를 넘어 이탈리아와 유럽을 보게 된다. 이를 통해 신의 위대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한 그의 눈은 인류의 미래를 보고 있었다.
4) 당대 최고의 지성 브루네토 라티니 스승의 교육
단테는 13세 때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인 브루네토 라티니(Brunetto Latini)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4년 후 17세에 볼로냐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의 교육을 받았다. 18세에 부친이 사망한 이후에는 라티니 스승의 보호를 받게 된다. 스승은 단테의 청소년기 독서와 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브루네토 라티니는 고전에 능통하였다. 그의 저작 『테세로』(Tesero, 보배의 서)는 중세시대 지식의 집대성인 백과사전과 같았다. 라티니가 프랑스 망명 중에 프랑스어로 쓴 백과사전식 3부작 작품이다. 1부는 역사, 우주의 기원, 천문학, 지리에 대하여, 2부는 덕과 죄에 대하여, 3부는 수사학과 정치에 대하여 기술한 유명한 책으로 단테에게 「천국편」 집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옥편」 제15곡 동성애자들이 고통받는 지옥에서 영원히 불길을 걸어야 하는 형벌을 받는 라티니 선생님이 단테를 알아본다. 선생님은 단테의 가문이야말로 부패한 피렌체를 구할 명망 가문이라 칭찬하고 단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너의 별을 따라가거라!
사는 동안 내가 너를 잘 보아서 아노라
너는 영광스러운 항구에 꼭 도달하리라. - 지옥편 15곡 55-57
선생님은 단테에게 희망을 잃지 말고 목적의 길을 가게 되면 결국 이루리라는 예언을 한다. 또한 여러 정파와 거리를 두라고 충고한다. 단테는 ”저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면 아마 선생님은 아직도 명예롭게 살아 계셨을 거예요. 선생님은 늘 제 마음에 자애롭고 친절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머물러 계십니다. 제 앞날에 대해 주신 말씀을 잘 기억하겠습니다.”하고 감사한다.
단테는 다짐한다. “저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한 운명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단테는 선생님이 비록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지만 ‘올리브 관을 쓰려고 달려가는 승리자’로 묘사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몸을 돌려 마치
파란 잎사귀로 된 상을 받으려 베로나의 들녘으로
달음질치는 사람 같았고 또 그들 중에서도 그는
패배한 자가 아니라 승리한 자처럼 보였다. - 지옥편 15곡 121-124
2. 변혁을 향한 단테의 시대적 실천과 잉태한 씨앗들
1) 사람의 심리를 다루고 독특한 음률과 리듬으로 창작
-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에 영향, 유럽 문예부흥을 열다
단테가 창작한 『신곡』의 문체는 신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만큼 혁신적이다. 특이하게 11음절 3행 연귀시로 각운을 살려가며 시를 썼다. 단테는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하며 긴 서사시를 질서 있게 음률의 흐름 따라 써 내려갔다. 독특한 형식과 정신은 한 세대 후배인 페트라르카가 저서 『칸초니에레』로 정립한 소네트(14행 연가 )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이어 영국 소네트 문학이 뒤를 이었다.
『신곡』 서곡(제1곡)의 첫 부분을 보고 글의 맛(형식과 음률)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처해 있었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사나웠던지
어떠했노라 말하기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쳐진다!
죽음보다도 더 쓰거웠기에
나 거기서 깨달은 선을 다루기 위해
거기서 본 다른 것들도 말하련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a vita ..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b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a
Ahi quanto a dir qual era è cosa dura, ..b
esta selva selvaggia e aspra e forte, ..c
che nel pensier rinova la paura! ..b
Tant'è amara che poco è più morte; ..c
ma per trattar del ben ch'i' vi trovai, ..d
dirò de l'altre cose ch'i' v'ho scorte. ..c
청중에 읽어주거나 낭송하는 공연형식을 갖는 서사시는 운문 고유의 음악성과 리듬, 악센트, 각운, 음절들의 숫자 등 형식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 『신곡』은 이러한 형식과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사람의 심리를 묘사하며 써내려간 서사시(敍事詩)이다. 시의 행은 각각 11음절로 반복되고 연이어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각각의 곡마다 시행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140행 전후이며, 100곡을 합한 전체는 1만 4,233행에 이른다.
위에서 보듯 세 개의 행이 하나의 단락을 이루는 3행 연구(terza rima)로 이루어져 있다. 각 행 끝의 두 음절은 서로 교차하며 외형률을 엄격히 지켜 간다(사슬운 형식). 위 원문 시에 표시한 것처럼 “aba bcb cdc ded...xyz y” 패턴을 이어가며 마치 판소리를 읊듯이 리듬을 탄다. 끝 연을 한 행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특이하다.
2) 토스카나 속어로 대서사시 쓰기
- 라틴어 배제하는 유럽 민족어 운동 시초가 되다
단테는 본인의 열렬한 사랑과 증오, 기독교 신앙, 정치 참여와 망명의 험한 인생 체험을 역사, 신화, 기독교 교리와 철학, 자연과학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신곡』을 완성했다. 사용한 언어는 라틴어가 아닌 민중이 말하는 쉬운 토스카나 속어(피렌체 방언)로 글을 썼다. 7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큰 불편이 없다.
이것은 공용어 라틴어를 배제한 혁명적 사건이다. 이 피렌체 방언은 이탈리어 표준어가 되었고, 단테는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다. 이에 영향을 받은 라틴계의 로망스어 네 속어들(에스파니아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이 교황청 언어인 라틴어를 극복하고 각 국가의 표준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어 게르만계의 언어와 영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호메로스가 그리스어를, 베르길리우스가 라틴어를 처음 드높였던 것처럼 단테는 이탈리아어를 처음 드높여 존경받는 언어가 되었다고 평했다. 『신곡』을 통하여 이 언어에 음절, 음운, 적절한 압운을 만들어 내어 마치 예술적 도구로 창조해 내었다고 극찬하였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문학어로 표현이 제한된 영국어를 작품을 통해 어미에 변화를 주고 새 단어를 구사하며 현대 영어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영어는 문학어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나 셰익스피어 문학을 통해 영국인의 자긍심이 된다. 영어는 세계를 지배하는 강력하고 권위 있는 언어로 군림하게 된다.
3) 단테의 상상력, 과학적으로 디자인한 저승 세계
- 문학을 넘어 과학 지평을 넓히다
『신곡』 작품 속 순례 여행의 시기적 배경은 단테 추방 2년 전 1300년부터 시작한다. 이 해는 한 세기의 시작이자, 교황이 ‘희년(禧年, 성스러운 해)으로 선포한 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신곡』은 단테가 망명 중 죽기 전까지 무려 18년 이상 걸려 완성한 대서사시이다. 단테는 저승의 세 세계를 극적 형상화하였다. 신화와 역사, 성경의 공간을 재배치하고 천문. 지리, 건축학의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탁월한 기하학적 세계를 창조한다. 플라톤은 "수학은 세계를 이해하고 기술하는 최적의 언어이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아카데미아 학원)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단테는 그리스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단테의 저승 세계를 기하학적 설계를 기반으로 놀랍도록 과학적으로 구축하였다. 그리고 본인이 주인공이 되어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작품 세계의 공간적 구조는 인간이 사는 동안 ‘죄와 벌’(지옥, 연옥), 그리고 ‘선과 별’(천국)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이루어져 있다.인과응보를 콘트라파소(Contrappasso)라 한다. 예를 들면 교만한 자는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걸어야 하고 분열을 일으킨 자는 자기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단테는 1301년 피렌체를 떠나기 전 피렌체 세례당 둥근 지붕 내 그려진 ‘마르코 발도 모자이크’ 작 「지옥」 그림을 기억하며 지옥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극 중 스승인 베르길리루스의 「아이네이스 모험담」도 지옥 여행 스토리의 모티브가 되었다.
천국 세계 구상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 『알마게스트』의 천동설(天動說)을 기반으로 한다. 단테는 천국 9개의 하늘을 설계하였다. 별들은 ‘구원의 길’을 의미한다. 행성들과 별들은 각 천국 원들의 랜드마크이다. 단테는 천문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천체 운행을 기술하고 있다. 각 편 마지막 행마다 모두 ‘별들’이라는 시어를 끌어들여 끝맺고 있다.
지옥편 34곡, "그리고 나서 우리는 별들을 다시 보러 나갔다.”
연옥편 33곡, "다시 살아나고 순수해져서, 별들에 올라갈 열망을 가다듬었다.”
천국편 33곡,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이끌고 있다.
지옥(地獄)은 예루살렘 아래에서 시작한다. 지옥은 땅속 공간이라, ‘별 없는 하늘(l'are senza stelle)’로 별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 지옥의 구조는 역피라미드의 팽이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 지옥을 ‘cerchio’(원)라 표현한다. 9개의 원(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부지옥들은 4~10구역으로 세분되어 총 24구역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설정된 지옥으로 상부보다 좁아진 8옥(獄) ‘말레볼제’ 경우 10개 구렁이 각각 지름이 수십 킬로미터씩 되어있다.
오귀스트 로댕의 불후의 걸작인 청동 조형물, ‘지옥의 문(Porte de Inferno)’에는 수백 점의 인물 군상이 있다. 신곡 「지옥편」을 주제로 하여 인간의 욕정, 탐욕, 배신, 신성모독과 여러 가지 죄악의 비참한 짐을 표현하고 있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져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아,
하늘에서 떨어져 그리 땅에 찍혔는고 … 스올 구덩이 맨 밑에…” -이사야서 14장 11~15-
계명성은 천사장 루키페르를 상징한다. 성경에 하나님에 대항한 천사장 루키페르는 지옥의 맨 하단에 얼음장에 갇힌 채로 지옥을 다스린다. 단테가 지옥 중심을 통과하자 어느 순간 루키페르는 다리가 얼음장에 거꾸로 처박혀 있다. 지구 땅속 끝 지옥 끝을 통과하니 중력이 다시 바로 서고 밤낮이 바뀌었다. 단테는 이렇게 중력의 변화로 잘 설명하였다. 뉴턴보다 수 세기 전에 구체적으로 통찰하고 기술한 것이다.
연옥(煉獄)에 대한 교리는 단테 시대에 와서야 정립되었다. 지옥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단테는 지구의 반대편으로 뚫린 굴을 통하여 남반구의 바다에 솟아오른 정죄(淨罪)의 산, 연옥(Purgatorio) 입구에 도달한다. 지옥이 지하에 건설된 어둠의 세계라면 연옥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빛의 세계다. 연옥의 '솟아오름'은 하늘을 향해 나아가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단테는 지옥편 34곡 121~126행에 연옥이 만들어진 배경을 흥미롭게 기술하였다. 패역한 천사장 루키페르가 남반구로 추락할 때 원래의 남반구 육지는 무서워서 바다의 너울을 쓰고 북반구로 도망쳐 왔고 땅에 큰 구멍이 생기며 남반구 남은 흙들이 바다 위로 솟구치어 연옥산이 되었다고 한다. 단테가 『신곡』을 통하여 연옥의 구조를 창안하고 그 내용을 제대로 채웠다고 볼 수 있다.
연옥산은 로마의 티베레강 어귀 오스티아에 집결하고 천사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질러갈 수 있다. 지구의 정반대 남반구에 솟아있다고 설정되어 있는데, 배를 타고 남반구에 간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지구가 둥글다’라는 묘사를 한 것이다. 당시에 금지된 ‘지구는 둥글다’라는 주장을 감추어 표현한 것이다. 단테가 지옥을 통과하자 밤은 순식간에 지나고 어느새 아침이 되어있었다. 개울 따라 거친 길 걷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보였다.
산은 일곱 개의 둘레로 되어있다. 악마에게 벌을 받는 지옥과 달리 연옥의 영령들은 천사들에게 연단을 받는다. 각 둘레 층은 ‘일곱 가지의 대죄’, 즉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에 할당되어 있다. 속죄가 끝나게 되면 지상낙원(Paradiso terrestre)에 도달해 천국으로 오를 수 있게 된다.
천국(天國)은 믿음의 등급에 따라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아홉 권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겹겹 하늘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된다. 복 받은 영혼들은 최고의 천국(엠피오레, Empireo)에 살지만, 각 천사들의 품위가 있는 하늘별로 배치된다. 단테는 아래 하늘부터 오르며 선하고 위대한 영혼들과 대화하고, 최고 하늘로 오르게 된다.
단테가 바깥 천구에 올라가서 아래를 보니 멀리 지구가 웃음 나올 정도로 조그마하다. 지구 중심으로 아홉 천구(하늘)들이 회전하고 있다. 또 위를 보니 엄청나게 많은 천사들이 거대한 공 모양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천국은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색채와 빛으로 가슴 벅찬 향연으로 둘러싸여 있다. 단테는 음악과 시의 최고신 아폴론에게 이 경이롭고 위대한 천국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도록 영감을 달라고 기도한다. 또한 계관시인이 될 수 있도록 월계관을 씌워 달라고 호소한다.
단테는 아인슈타인처럼 직관을 발휘한다. 그의 기하학적 직관은 프톨레미의 천동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스승 부루네토 라티니의 『보배의 서』에서 기하학적 구체 묘사에서 영감의 원천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용의 기술을 보면 천동설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이다. 제9원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우주와 별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인 원동천이다. 지구가 우주 중심을 축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은근히 시사한다.
「천국편」은 “모든 것을 운행하시는 그분의 영광은 온 우주를 가로지르며 빛난다(제 1곡 1, 2행)”로 시작한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삼라만상은 운명처럼 질서가 있다. 생물들 마음속에 생명력을 키우고 행성마다 힘을 끌어모으게 한다. 우주의 무한한 활은 그 질서를 주관하는 섭리이고 고요한 천국 하늘에는 천사들이 빛이 되어 쉴 새 없이 돌고 있다. 우주의 원동력으로 단테가 천상에 오름은 시냇물 내려오듯 편하다.
4) 교황청과 가톨릭 변혁을 위한 강력한 저항
- 종교개혁의 씨앗을 품다
「지옥편」 제7곡의 장면이다. 한 영혼이 “왜 그렇게 인색하게 모으기만 하느냐?” 그러자 다른 영혼은 “왜 함부로 낭비하는 거야!”라고 헐뜯었다. 서로 상반된 모순의 삶을 살았던 죄인들이다. 이들은 자비도 없고 절제도 모르는 자들이다. 참으로 처참하고 한심하게 보였다. 단테는 셀 수 없이 많은 대머리들이 있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이 답했다.
“머리카락이 없는 자들은 한때 교황과 추기경들이다. 이들은 지나치게 탐욕을 부렸지. 재화를 잘못 쓰고 잘못 챙긴 저들은 밝은 세상을 빼앗기고 이런 아귀다툼에 빠지고 말았단다. 아들아 보아라. 재화는 운명, 포르투나의 손에 들려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처절히도 싸우고 있지. 얼마나 헛된 일인가!”
달 아래 있는, 언제나 있어왔던
저 금은보화를 다 바친다 해도,
이 지친 영혼 하나라도 쉬게 할 수 있는가? - 지옥편 7곡 64~66
단테는 ‘하나님은 두 팔로 다스리신다.’라고 주장한다. 두 팔은 국가와 교회이다. 지상의 통치원리는 법이고 국가의 왕이 다스린다. 천상왕국의 통치원리는 복음과 말씀이고 교회가 다스린다.
루터의 ‘신앙의 자유’란 ‘로마 카톨릭의 종교권력과 세속화한 정부로부터 자유이다.’라는 주장은 단테의 실제 삶에서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외치는 말이다. 단테가 언어로써 오래 잉태한 씨앗을 루터가 부화하고 실천한 것이다.
단테는 지옥 8원에 마술로 점을 치거나 성직매매 등 신성 모독한 망령들이 고통받는 깊은 구렁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자리를 마련해 둔다.(지옥편 19곡) 이미 처박혀 있던 니콜라우스 교황의 입을 통하여 1300년 당시엔 아직 살아 있는 보니파키우스가 죽어서 곧 올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영령을 통해 교황에 대한 맺힌 원한으로 저주와 독설을 퍼붓는다.
그렇게 빨리 탐욕을 채웠느냐?
탐욕에 눈이 멀어 아름다운 신부도 속였느냐?
게다가 결국에 성직매매 하기까지 했느냐? - 지옥편 19곡 55~57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교황과 황제(신성로마 황제)라는 두 이질적인 권력의 충돌 속에 있었다. 단테는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두 권력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으나 교황의 비수를 맞은 것이다. 보니파키우스는 세속적 권력과 교황령 확장을 위해 흑당과 결사하여 단테의 백당 사람들을 무참히 축출한 자이다.
보니파키우스에 이어서 클레멘스 5세 교황도 윗구멍을 차지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클레멘스는 실제로 교황 즉위 대가로 프랑스 필리프 4세와 비밀협약을 맺고, 취임 후 교황청을 아비뇽에 옮기고 성직을 매매하다가 결국 수모를 당하고 죽는다. 「지옥편」 19곡은 교황들에 대한 응징이고 교황청에 대한 성직매매 반대 선전포고이다. 종교개혁의 불씨이다.
단테가 교황의 영혼을 꾸짖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기 전에 원하신 게 있었나요? 예수님의 제자 자리를 맛디아로 충원할 때 베드로와 제자들이 은이나 금을 요구하지 않았지요.
당신은 거기서 온당한 벌을 받고 있으니 불의로 번 돈이나 잘 간직하시오. 한때 신랑(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 신부(교회)는 일곱 개의 머리(성체)를 지니고 태어나 열 개의 뿔(율법)에서 힘을 얻었소. 그러나 그 신부는 타락하여 세상의 왕들과 간음하였다오. 당신은 금과 은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니 우상 숭배자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들이 금으로 만든 우상 하나를 섬긴다면, 당신들은 수많은 금을 섬겼구려!”
아, 콘스탄티누스여! 그대의 기독교 개종은 좋았으나
최초의 부유한 아버지(교황)가 그대에게서 받은 재물로
얼마나 많은 악의 어머니가 되었던가! - 연옥편 6곡 115-117
「연옥편」 6곡의 장면이다. 단테는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고삐를 고친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라고 한탄한다. 단테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고삐를 쥘 안장에는 성직자가 아닌 카이사르가 앉아야 한다’며 교황의 정치 권력을 반대하였다. 성직자들이 감히 고삐를 쥐고 있기에 이탈리아는 야수가 되어 아무리 박차를 가해도 똑바로 나아가질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왕의 눈부신 개혁도 ‘안장이 비어 있으면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긴 서사시는 종교의 격동기이며 새로운 문화가 움틀거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단테가 태어난 13세기에는 독립된 도시 민족국가들이 출현하며 부를 키웠다. 13세기 전까지 상상도 못 했을 유럽· 라틴어권에 아랍어가 알려진다.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고전과 철학을 피렌체가 앞장서서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며 새로운 기운이 일고 있었다.
단테는 망명의 시절을 겪으며 피렌체를 넘어 이탈리아와 유럽을 보게 되었다. 또한 그의 눈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신의 세계를 그리면서 한편 인간의 ‘자유’라는 화두를 던졌다.
5) 신의 예정설보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의 미덕 강조
- 근세 휴머니즘과 계몽주의의 씨앗이 되다
중세 인간은 감수성을 잃고 복종적, 이기주의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의지는 약화 되었고 결국 타인 의지의 노예가 되었다. 통제된 언어와 봉건제에 구속되어 창조성을 상실한 족속으로 전락하였다. 중세시대 타인의 의지란, 로만-카톨릭의 종교 시스템과 켈트·게르만 정복자들의 봉건제도가 두 축을 이룬다. 이를 타파하려는 물결이 단테 시대에 태동하기 시작했다. 단테가 태어난 무렵 피렌체는 변화의 물결의 가운데에 있었다. 도시국가 중 일찍 면직 산업과 금융업이 발달하며 번영의 토대 위에 있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자유로운 정신이 다시 소환되고 있었다.
윌리스 파울리의 저서 『단테의 신곡-지옥편』 도입부 제3, 4, 5곡 해설은 ‘사람의 선택과 자유의지(自由意志)’에 관련된다. 제3곡의 입구 지옥에 있는 게으르고 비굴한 사람들은 결정 내리는 자유의지를 도피한 비굴한 영혼들이다. 지옥조차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제4곡의 림보에는 선택할 기회가 없어서 세례받지 못한 영혼들이 머문다. 제5곡에는 욕정에 사로잡혀 사랑을 선택한 자들이다. 본성의 포로가 된 자들로서 한편 인간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테는 “강한 연민을 느낀다.”라고 했다. 서사시는 시작부터 ‘자유의지’라는 화두를 던졌다.
중세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타인의 자유의지를 보호하고자 윤리적 제도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설을 근거로 단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훼손하는 사기, 배신죄를 폭력· 살인보다 더 무겁게 취급한다. 지옥 8원(옥)은 ‘사기’, 9원(옥)은 ‘배신’의 지옥이다. 8원을 열 개 구렁으로 분류하여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8원 말레볼제(Malebolge,사악한 구렁)는 「지옥편」 34곡 중에 13곡(18곡-30곡)이나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처벌받는 영령들은 모두 사기꾼으로 칭한다. 사기꾼은 뚜쟁이, 아첨꾼, 성직매매자, 점쟁이, 탐관오리,위조범 등으로 세분되며 열 구렁에 투옥되어 있다.
단테는 고리대금업과 공유개념을 설명하였다. 고리대금업은 자연의 순리와 사람의 재능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한다. 그래서 폭력의 범주의 죄악이라 규정하였다. 고리대금업자를 위한 지옥 구역도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연옥편」 15곡에 “사람들의 욕망이 땅바닥이 아니라 위로 솟구쳐 하늘의 사랑을 향한다면, 그리고 ‘우리들의 것(공유)’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선은 충만하여지고, 자비는 더 타오를 것이다.”라고 나온다. 모든 영혼은 거울처럼 사랑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공유’는 자본주의 폐단과 대안으로서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연옥편」 15곡은 마르코 영령의 입을 통한 자유의지에 대한 강해라 할 수 있다. 원문을 최대한 살려 요약했다.
“나는 롬바르디아 사람 마르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았고 사람들이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미덕(자유의지)을 사랑했다오. 사람들은 신의 예정된 계획대로 된 일이라 여기고 모든 원인을 하늘에 돌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자유의지는 없어지고 선에 대한 기쁨도 악에 대한 슬픔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오. 사람들은 분명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오.”
스스로의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처음에는 하늘과 갈등으로 상처를 입고 약해졌지만
잘 키워나가면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오
사람들은 위대한 힘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들이오.
그대들 안에 마음을 창조한 더 귀한 성품에 속한다오
하늘도 이 마음들을 통제하지 않는다오. - 연옥편 15곡 76~81
마르코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사람은 자유로운 주체다’라고 하며, 사람들의 ‘고유한 마음을 창조하였다’는 당시 세계에는 생각하기 힘든 사상을 들려주었다.
사람은 웃고 울며 재롱 피우는 어린애처럼 생겨났지만 하찮은 장난감에 이끌리다가 갈피를 잃게 되어 결국 법률의 구속과 도시마다의 통치자가 필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을 혼란케 한 원인은 사람들의 본성이 아니라 잘못된 통치였다. 로마는 원래 ‘선의 길’을 실현하였다. 두 개의 태양이 두 개의 길을 밝혀 주었으니 하나는 세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길이었다. 문제는 하나님의 길에 선 목자에게 지팡이에 칼이 더해졌으니 서로 뒤엉켜서 악이 커지게 된 것이다.
당신은 이제 세상에 이런 얘기를 들려주시오.
로마의 교회는 두 개의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렁에 빠져 자신은 물론 해야 할 사명도 더럽히고 있다고! - 연옥편 15곡 127~129
마르코의 통찰과 안목에 단테가 감탄하며 화답했다.
마르코, 당신 말은 구구절절 옳소.
레위의 자손들이 왜 유산을 상속하지
못했는지 이제 알겠소이다. - 연옥편 15곡 130~132
여기에서 레위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하나로 가나안 정복 후 땅을 받지 못한 대신에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지파가 된다. 제사장에게는 사유재산도 금했다. 단테는 교황청과 사도들의 세속적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을 신랄히 비난하고 있다.
나가며 – 인류의 위기, 『신곡』에서 길을 찾자
단테는 망명길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그는 피렌체를 떠나 이탈리아 조국과 유럽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은 이미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찰로 그는 신의 세계를 성경(에스겔서, 이사야서, 요한계시록 등)과 고대신화와 과학적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엄청난 상상을 해냈다. 그리고 『신곡』을 집필하였다. 서사시에는 작가 단테의 지성과 영성 그리고 감수성이 총동원되어 있다. 아감벤은 “단테는 중세의 신비로움을 갖춘 근세의 시인이다.”라고 하였다.
인류사에서 놀라운 변혁의 시대, 1265년 단테 탄생부터 1642년 갈릴레오 죽기까지 400년간은 인간의 본성과 개성을 더 중시하는 시대로의 전환기였다. 단테 사후 2백 년 후 바사리가 최초로 「리나시타」(Rinascita, 거듭남)라 명명한다.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이다. 변화의 기본사상을 인문주의(휴머니즘)라 이름 붙였다. 이탈리아에서 태동하여
새로운 역사적 원동력이 된 인문주의가 바로 ‘르네상스’이다. 이 출발선에 단테가 서 있었다. 바이런의 말처럼 작가란 "별을 찾아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언어들을 싣고 돌아와 우리에게 건네주곤 한다. 단테는 저승 세계의 여행을 다녀온 뒤 변혁의 씨앗을 품은 대서사시를 인류에게 건네주었다.
단테는 자연철학, 지리학, 천문학의 지식과 통찰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세계관을 창조해낸 사람이다. 누군가는 ‘시인은 신 다음의 창조자’라 했다. 단테와 그의 영향을 받은 밀턴, 괴테 등은 위대한 창조자들이다. 그 영향력이 문학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등 전 예술 장르에 퍼져있다. 『신곡』은 지식 융합의 최상의 모델이고 「연옥편」이나 「천국편」에서 보여 준 예술 분야에서도 멀티미디어를 동원한 종합예술이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도 신곡의 「지옥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역시 단테의 신곡에 영향을 받았다. 블레이크,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수 많은 화가들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프란츠 리스트는 「단테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단테는 새롭고 독특한 형식으로 라틴어가 아닌 ‘쉬운 언어(속어)’로 독자들을 넓혀 인간 본성과 자유의지를 담아 모색하고자 한 점에서 ‘최초 근대적 작가’라 할 수도 있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은 종교개혁의 중심 교리가 되었다. 그래서 단테는 인간 중심에서 신을 찾아가는 시각에서 보면 ‘최초 인본주의자’이고, 성서를 내세워 교황과 종교 시스템에 저항한 ‘최초 종교개혁가’이기도 하다.
단테는 고향 피렌체에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염원한다. ‘변한 목소리와 또 다른 양털을 지닌 시인의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을 한다. ‘변한 목소리’는 사랑을 노래하던 시인에서 인류의 보편적 구원을 논하는 철학자로 변신한 것을 말하며, ‘양털을 지닌’은 새로운 통찰을 갖춘 세계관을 뜻한다. 그런 기대가 있었기에 거대한 집필을 흔들림 없이 정연하게 죽기 전에 마무리하는 큰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길 수 있도록
당신의 영광의 단 한 순간 불티라도
포착할 정도의 힘을 나의 혀에 주소서 – 천국편 33곡 70-72
단테의 새로운 사유를 시작으로 루터와 몽테뉴, 데카르트를 거쳐, 인류는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그리고 산업혁명을 이룬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해 왔다. 인류는 예기치 못한, 아니 이미 예견된 전 지구적 종말론적 상황을 맞고 있다. 인간 이성과 과학 문명의 이기로 인류를 수백 번 멸망시킬 규모의 핵 위협, 해마다 증가하는 기후재앙 징후,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습격, AI가 언제까지 인류의 통제에 있을 것인가? 라는 염려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지구와 인류를 구하려면 멈추어야 한다. 멈추려면 생명과 ‘신성(神性)의 정신’이 담긴 ‘영성(靈性)의 시대’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 인류에게 다시 영적 상상과 문학적 구원이 절실한 시대이다.
단테가 14세기에 주장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다시 사유할 때이다. 「연옥편」 15곡에서 말하는 분명 책임과 선을 전제로 한 자유의지임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신곡에서 보여준 단테의 ‘영성’과 생명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의지’와 ‘신성’을 주시한다. 인류가 몰락을 피하려면 반드시 회복하여야 할 것들이다. 이 시대에 단테가 살아 있다면 인류에게 과연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줄까?
/ 끝
단테 알리기에리 연보
1265. 피렌체에서 출생 / 6살에 모친 벨라 사망, 18살 부친 알리기에로 사망
1274. 9세 때,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와 운명적 첫 만남
1277. 최고 스승 브루네토 라티니로부터 배움
1281. 볼로냐대학과 파도바대학에서 수학
1283. 9년 만에 베아트리체 재회/구이도 카발칸티 등 시인들과 청신체 활동 시작
/산타크로체 수도원에서 인문 7학 (문법, 논리, 수사, 산술, 기하, 음악, 천문) 공부
1289. 캄팔디노전투에 기병으로 참가
1290. 6월 9일, 베아트리체 25세로 사망/좌절 후 철학과 신학 전념
1291. 젬마 디 도나티와 결혼/슬하에 5남 1녀, 딸 이름을 베아트리체라 지음
1294. 『신생』 10년 만에 완성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즉위
1295. 의약 길드에 들어가 공직 및 정치 시작
1300. 교황이 성년(희년) 선포/ 『신곡』에서 순례일로 설정
1302. 로마 교황청 특사로 파견 중에 흑당에 의해 추방됨 /귀환 시 화형 선고
1304. 파도바에서 당대 최고 화가 친구 지오토 재회
1312. 피사에서 소년 페트라르카 만남
*1303~1320 『속어론』 『향연』 『제정론』 집필
1320. 「천국편」 완성으로 18년 동안 『신곡』 집필 완료
1321. 라벤나의 외교관 공무 중 베네치아에서 사망, 현재 라벤나 산프란체스코 안장
*1373. 피렌체는 50년 만에 보카치오의 단테 강연 승인
*피렌체는 단테 가묘를 만들고 묘비에 『신곡』 글을 새기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가장 높은 시인을 찬미하라, 떠나가신 그의 영혼이 돌아오는도다!” -지옥편 4곡 80, 81절
참고도서
텍스트, 주해
한형곤 『신곡』 , 삼성출판사
박상진 『신곡』 , 민음사
입문서, 참고서
김운찬 『저승에서 이승을 보다』, 살림출판사
윌리스 파울리 『쉽게 풀어 쓴 단테의 신곡』,이윤혜 역, 도서출판 예문
A.N 윌슨 『사랑에 빠진 단테』, 정혜영 역,
이선종 편역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 미래타임즈
호메로스 『명화가 말하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박찬영 평역, ㈜리베르
베르길리우스 『명화가 말하는 아이네이아스』,박찬영 평역2, ㈜리베르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이윤기 역, 민음사
보카치오 『단테의 생애』, 박우수 역, 민음사
단테 『신생, 로세티 해설』, 박우수 역, 민음사
................
저자 한봉수 약력
정읍 출생.
시인, 문학평론가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외대이태리어과 및 정책대학원 졸업
한국문인협회회원
2020년 착각의 시학 평론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시집 『날더러 숲처럼 살라하네』
평론 「인류의 몰락을 피하기 위한 문학과 예술의 소명」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