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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했던 까마귀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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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악, 까~악
제기랄. 빌어먹을 까마귀까지 재수나쁘게 ... 빛 보다는 그림자, 생명보다는 죽음이 떠오르는 음산한 기운이 주위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것 같은 잔뜩 찌푸린 날씨에 까마귀까지 울어대어 미신 같은 것을 싫어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게했다.
필자가 어린 시절을 보낸 산골마을에서는 한밤중에 가끔씩 고라니 울음소리가 구슬퍼게 들리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어른들은 몹씨 언짢아했다.
고라니 울음은 누군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징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것처럼 까마귀는 주로 시체를 먹고 사는 흉조(凶鳥)로 받아들여졌다.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이른 새벽. 칼날 같은 암벽을 타고 오르다 좌우를 살피니 보이는 것은 수백미터 낭떠리지 뿐. 차라리 측면도 후면도 살피지 않고 그냥 앞만 보고 짐승처럼 두 손이 발이 되어 기어 오르기만 하는 것이 속이 편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찔한 공포심만 생겼고 천하의 절경을 감상하기 이전에 실족했을 경우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곳에서 사망한 등산객이 있었고 연간 몇 건의 사고가 났을 만큼 위험하니 지금이라도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가라는 문구와 함께 관련 사진이 붙은 안내판들은 으시시한 분위기를 더했다.
현기증이 났다. 한발이라도 잘 못 딛기라도 한다면, 잡고 있는 자일이 풀어지기라도 한다면, 앞서가는 대원의 실수로 낙석이라도 발생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중상이나 죽음과 직결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설사 생명을 부지한다해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른 새벽 심산유곡에서 듣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귀에 더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그럼 그렇지. 용아(설악산 내설악 용아장성)를 등정하기가 쉽겠는가.
산꾼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한다는 용아를 탐방하기 위해서는 이런 위험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때로는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용아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과연 이름값을 하는 것인가. 용(龍의 어금니(牙)를 통과하는 것이 그렇게 쉽고 간단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산꾼들이 가고 싶어도 주저하거나 갈 수 없었겠는가.
긴장이 풀리거나 실족등 단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이 그냥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허무감이 밀려왔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정치과 사업이 교도소 담장위를 걷는 것에 비유된다면 옥녀봉을 필두로 시작된 용아장성 등정이 1봉부터 차례대로 거쳐서 8봉에서 마무리 될때까지 내딛는 한 발 한 발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 했다.
9봉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추격자(?)를 따돌리기 위해 전략적으로(?) 등정을 생략했다.
이렇게 위험하고 힘드는 산행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오지 말 것을 차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왜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사방을 둘러보는 순간 산세의 황홀한 비경에 금방 빠져들었다.
그동안 대청봉에 오르고 공룡능선을 탓는 것 만으로 설악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여겼던 자신이 한심하고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무지한 것이 무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설악에 대한 무례이자 무지의 소치였기에 참회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렵고 중요한 것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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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라는 어느 산악인의 말처럼 빨리 위험한 암반타기를 마무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귀가하고 싶었다.
처음보는 용아의 절경을 느긋하게 감상하기에는 칼날 같은 암벽위를 걷너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불현듯 어느 소설의 주인공이 생각났다. 세상살이가 마음에 안든다고 자기 발로 걸어서 관속에 들어 갈 수는 없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기꺼이 죽음앞에 당당 할 수 있다고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자신에 찬 어조로 외치곤 했다.
하지만 인생이 오늘 이대로 끝나면 억울해서 편히 눈을 감을수가 없다고 항변했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 볼 때 분노가 치밀어서 편히 잠들 수가 없다고.
북망산천 갈 때 가더라도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오줌을 누면 소변 줄기를 타고 고드름이 열리는 동지섣달 살인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바가지 가득 찬물을 벗은 몸에 끼얹으며 전의(戰意)를 다지던 주인공.
벌거벗은 몸에 뒤집어 쓴 냉수가 얼음이 되어 머리와 어깨, 그리고 등을 타고 내리며 신체부위 곳곳에 비수처럼 꽂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조모(祖母)의 말이 무색했던 가시밭길 같았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몸서리치고 복수심에 밤잠을 설치던 그였다.
용아 탐방을 위해 전날밤 집에서 10시 반에 나와 서울에서 자정에 출발 할 때만 해도 그저 북한산 백운대나 문수봉, 또는 도봉산 Y계곡이나 설악산 공룡능선을 탐방로 따라 산행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실상은 너무 달랐다.
용아는 그 차원을 달리했다. 거칠고 험한 암벽을 넘고 또 넘으며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도로가 끊긴 곳에 다리를 놓아 연결하 듯, 길이 아예 없거나 막힌 곳에는 자일을 설치하고 강을 건너 듯 조심하면서 암릉을 타고 앞으로 가야 했다.
개구멍 바위와 뜀바위, 그리고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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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도 없는 가파른 암벽 구간에서는 패대기쳐져서 사지(四指)가 쭉 뻗어 있는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암벽에 있는 홀드(hold)만 잡고 올라 가야 할 때도 있었고 직벽의 로프 구간 같은 경우 왼쪽 손으로는 자일을, 오른쪽 손으로는 홀드를 잡고 올라가야 했었는데 왼쪽 팔에 힘이 없으면 체중을 받쳐 암벽을 올라 설 수가 없으므로 필사적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는 데 필자는 오른손잡이 이긴 해도 다행히 평소에 왼쪽 수족 근육 사용 연습을 했던 것이 뜻밖에 도움이 되었다.
나름대로 위험하고 험한 구간을 많이 지났다고 생각되어 옆에 있는 대원에게 개구멍바위와 뜀바위를 이미 지난 것이 맞느냐고 물었을때 돌아온 답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면 그 두 지역을 아직 지나지 않았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야 버스 안에서 특별히 위험한 곳이 서너 곳 있다는 산행대장의 언급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개구멍바위와 뜀바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봉(峯)을 지나면서 앞에 있는 고봉(高峯)을 보며 설마 저곳은 애당초 갈 수 없는 곳이기에 가지 않거나 최소한 우회하겠지 생각했지만 어김없이 칼날 같은 암반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의 무한질주 같았다.
낙석의 우려가 있는 구간에서는 앞에 가던 사람이 '낙석'이라고 소리치며 아랫쪽에서 뒤따라 암벽을 오르던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개구멍바위에서는 그야말로 강아지가 갈 수 있을 만한 좁은 암벽 사이를 지나가야 했는데 왼쪽에는 내려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까마득한 절벽이고 오른쪽으로 바위에 바짝 붙어 난간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야 했는데 그 공간이 너무 좁아서 몸을 최대한 움츠려 가까스로 기어가야 했다.
어느 지점에 좌측 발을 둘지, 우측발은 어디에 밟는 것이 안전할 지를 안내 받고 숙였던 상체를 어디에서 조금이라도 펼 수 있는지를 지도 받으며 몸을 1자로 엎드려 철조망 아래를 통과하듯이 낮은 포복자세로 겨우 지나가야 했다.
숙련된 조교가 시범을 보이면 줄서 기다리던 병사들이 한 명씩 자기 차례를 기다려 장애물을 넘거나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군대 훈련소 같았다.
개구멍바위를 넘다가 추락하여 목숨을 잃은 산악인을 기리는 동판 추모비가 눈에 띄었다.
뜀바위에서는 두개의 큰 암벽 사이에 있는 공간을 멀리뛰기 하듯 뛰어 넘어야 했다. 혹시라도 실수하여 추락하면 아래는 수십미터 절벽이었다. 추락하는 순간 그것은 절명(絶命)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건너지 않으면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우회로 같은 것이 전혀 없었기에 외나무 다리 같았다. 그곳을 건너야 다음 봉(峯)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얼마나 어렵게 기회를 잡아 온 용아장성인데 ... 수 개월에 걸쳐서 세 번이나 잡혔던 일정이 취소되고 연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밤잠을 설치고 서너시간 차로 이동후 아침도 노상에서 새벽 별을 보며 행동식을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왔는데 돌아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산행대장과 또 다른 남자 대원 한명이 여성 대원의 양손을 잡고 이끌어 주면 한사람씩 긴장속에 있는 힘을 다해서 이쪽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건너뛰어 지나가는 식이었는데 필자가 혼자서 건너뛰어 착지(着地)를 막 했을 무렵 뒤에서 "다리가 길어서... (쉽게 건넜다). " 라는 말이 귓전을 스쳤다.
시계바늘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돌아간 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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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봉인지 8봉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산행 대장이 휴대하고 있던 자일을 직벽에 가까운 암벽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걸쳐 놓는 듯이 묶더니 성큼성큼 앞서 간 후 바로 뒤에 서 있던 필자에게도 건너오라고 했다.
자일은 우(右)에서 좌(左), 즉 수평으로 연결되어 양쪽이 모두 묶여 있었는데 중간부분이 빨랫줄처럼 느슨하게 축 쳐져있었다.
"아니 그런 위험한 곳에 무서워서 어떻게 갑니까" 웃으면서 필자가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겁이 났다.
깍아지른 듯한 가파른 각도의 암벽에는 발디딜 홀더도 안보이는데 어떻게 빨랫줄처럼 어설프게 늘어뜨려 놓은 자일 하나 잡고 수평이동을 한다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상하이동보다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많은 시선들이 필자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도 필자 보다 적게는 10살에서 많게는 20살 가까이 어려보이는 여성 대원 5~6명이 차례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줄곧 선두에서 진군하던 대원들이었다. 그 중에는 앳되 보이기까지 하는 여성 대원도 있었다.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하나의 공정이 마무리 되지 않으면 다음 공정을 진행 할 수 없는 것처럼 앞에 선 필자가 지나가지 않으면 기다리고 있는 다른 대원들은 한발짝도 앞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난감했다.
비겁하게 보여도 안전을 핑계로 꽁무니를 빼고 혼자 하산을 하든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빨랫줄 처럼 늘어뜨려 놓은 자일 하나 잡고 암벽을 건너든지 결정해야만 했다.
공룡능선이 그렇듯이 중간에 산행을 그만두고 빠져 나오는 탈출구도 없었기에 사실상 하산도 불가능했다.
산행내내 경탄을 금치 못했던 것은 여성대원들의 산행능력이었다. 언뜻 연약해 보이기도 하고 그 나이 또래 보통의 다른 여성들과 비교해서 달라 보이는 것이 없는데도 어디에서 그런 담력과 체력이 나오는지 놀랍기만 했다.
산행 경험이 많다고, 산꾼이라고 자부하는 남자들도 하기 힘든 일을 척척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살만큼 살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건장한 남자가 물러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망신을 당하고 불명예롭게 물러나면 두고 두고 마음에 걸릴것 같았다.
여성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비겁하게 도망칠 수도 없었기에 앞으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필자가 꼭 그런 꼴이었다.
등반은 목숨을 걸고 하는 거의 유일한 스포츠라는 어느 산악인의 말이 떠올랐다. 내심 배수의 진을 쳤다.
필자가 건너니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다른 대원들도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잘 건너왔다. 필자만 빼고 모두들 어렵고 위험한 일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았다.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외관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특히 젊은 여성 대원들은 용감무쌍한 여전사(女戰士)처럼 보였다.
자일은 대개 상단에서 하단으로 설치되고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자일을 잡고 타고 올라가는 것이 보통인데 앞에서 언급한 릿지(ridge)는 자일을 우(右)에서 좌(左)로 수평으로 설치하고 나아가는 방향도 동일 했다면 이번에는 자일을 보통 하듯이 상하(上下)로 늘어 놓고 아래에서 위쪽이 아닌 우(右)에서 좌(左)로 수평이동 하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즉 수직으로 늘어뜨린 자일을 잡고 수평이동 하는 것이었다.
용아에만 수 십번 넘게 왔다는 백전노장 산행대장이 어깨에 메고 다니던 자일을 어부가 냇가에 초망을 던지듯이 순식간에 설치 후 자일을 잡는둥 마는둥 거의 의존하지 않고 암벽을 타고 훅 지나갔는데 필자는 추락의 공포 때문에 자일을 비교적 오랜시간 계속 붙잡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음을 조금씩 옮겨가다 보니 자일이 시계 초침 돌아가 듯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것이 머리위에 보였는데 긴장된 그 순간에도 재미있고 신기했다.
각도가 가파른 암벽에 불안정하게 딛고 있는 발이 한발씩 나아 갈 때마다 자일이 마치 시계바늘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옮겨갔다. 처음 해보는 릿지(ridge) 방식이었다.
어느 베테랑 남자 대원은 마치 그네를 타는 것처럼 자일에 매달려서 공중부양 하듯이 암벽을 건너기도 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자일이 풀리거나 끊어지기라도 하면 수십 미터 아래로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나가 떨어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비탐방로라서 그런지 기존에 설치 되어있는 자일은 거의 볼 수 없었고 산행대장이 앞서 가면서 필요한 곳에 임시로 설치 했다가 대원들이 모두 건너면 철거하여 다시 휴대하는 식이었다.
산행 경력을 용아(龍牙) 탐방 전(前)과 후(後)로 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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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인류역사를 BC (Before Crist)와 AD(Anno Domini)로 나누고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 전염병 전(前, Before Corona)과 후(後, After Corona) 로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듯이 일천(日淺)하지만 필자 개인의 산행 경력을 고려할 때 용아 등정 전(前)과 후(後)로 구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충격과 감동이 너무 컸고 제대로 된 릿지 산행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는 인식의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보고 저리 봐도 용아에서는 온 천지가 산이었다. 보이는 것은 산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름 그대로 용의 치아처럼 삐죽삐죽하게 솟아 오른 암봉들이 압도하고 있었다.
산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만했다. 산의 포로가 된 느낌이었다. 단 부정적인 뜻이 아닌 긍정의 의미로.
포로가 되어 탈출의 가망이 없으니 포로 생활에 적응하고 나중에는 감시하는 병사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꼼짝 못 하고 산에 포위되어 탈출구는 영영 없을 것만 같았다. 사방을 둘러싼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神)들의 위용에 압도되어 암반 난간에 무릅꿇고 경배와 감사의 기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곳은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신(神)의 영역이었다. 조물주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기암절벽이 질서 정연하게, 또 어떤 곳은 자유분방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경이롭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오래전에 대청봉과 공룡능선, 천불동 계곡등을 산행한 적이 있지만 용아장성은 내설악의 속살, 설악의 숨겨진 진주였다고 해야 할까.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거친 듯 하면서도 다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권위가 있으면서도 소탈한 면도 있는 양립하기 어려운 신비스런 매력을 용아는 분출하고 있었다.
수많은 산꾼들이 용아에 와 보기를 왜 그렇게 갈망하는지 그 이유를 알 만했다.
대다수의 경우 산행에는 우회로가 있지만 용아는 그렇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 외통수 길이었기에 통과하는가 못하는가 둘 중 하나뿐이었다.
더 쉽고 덜 위험한 'B' 코스를 택하는 경우가 있는 일반 산악회들의 산행과 달리 하산을 완료할 때까지 단 한번도 그런 것은 없었다.
중도에서 힘들거나 싫다고 해서 빠져 나올 탈출구도 없었다. 1봉부터 8봉까지 계속 전진해서 가든지, 아니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 밖에 없는데 뜀바위와 개구멍바위등 특별히 까다로운 곳들은 누군가의 도움없이 아마츄어 등산객이 혼자서 산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거나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일단 발을 들여 놓으면 장기판의 졸(卒)처럼 죽든지 살든지 전진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휴대하고 있는 자일이 없으면 아예 갈 수 없는 곳도 많았다. 등산이 가능하다해도 하산이 쉽지 않은 암봉도 있다.
다시 말해서 오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내려 오는 것이 모두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등정이 가능하다 해도 하산의 난이도가 너무 높고 위험할 때는 아예 등반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무용지물이었던 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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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역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는 곳에 새벽 4시에 차에서 내렸을 때 필자는 스틱을 매만지며 산행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스틱을 펼칠 생각도 않고 출발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스틱이 거의 필요 없는 등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인류가 직립보행 이전의 모습으로 사지(四肢)를 바닥에 부쳐서 기어 오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두 손으로 자일이나 암벽의 홀더를 잡아야 했기에 스틱을 사용할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헤드 랜턴 뿐만 아니라 유난히 크고 밝게 빛나는 랜턴을 허리에 차고 온 여성 대원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 여성 대원 몇몇이 선두 그룹을 이루어 쫒기는 짐승처럼 무리지어 암흑속의 큰 계곡을 좌우에 번갈아 두기를 반복하면서 질주하다시피 속보로 갔다.
계곡을 따라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100~200쯤 후미그룹에 있던 어느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기요. 그쪽이 아닌데 ... 그곳은 백담사 가는 길인데요."
그 여성대원 덕분에 뒤돌아 와서 영시암으로 향하는 좌측으로 정정하여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않했다면 잘못 된 길로 접어 들어서 한참을 헤메고 시간을 허비하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선두에서 내달리다시피 가고 있는 선발대 같은 한 무리의 여성대원들을 뒤쫓아 가느라 한 참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등산모 위에 매달려 있던 랜턴의 빛이 점점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꺼져 버렸다.
시야가 가려 앞 사람 발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가야해서 속도를 내기 힘들었고 답답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밤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랜턴까지 이렇게 속을 태우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에 넣어둔 헤드랜턴이 잘못하여 전날 저녁 출발때 부터 배낭속에서 계속 켜져 있는 상태이다 보니 배터리가 모두 방전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새벽 4시반에 버스에서 내린 후 약 10km 걸어서 마침내 들머리에 접어 들어 산행이 시작되어 흙산이었던 옥녀봉에 올랐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경사가 심해서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일행인 다른 대원들 만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1봉 부터 시작된 용아장성 등정이 2봉, 3봉으로 이어질수록 필자는 풀이죽고 말았다.
전날 저녁 버스를 타고 올때만해도 용아장성에는 쉽지 않은 구간이 있다고 해도 여성 대원들도 가는 용아를 남자가 못가겠는가 하는 자신감이 없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것은 일종의 만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행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숨가쁘게 치고 올라가서 허급지급 옥녀봉에 올랐지만 직벽이 가로 막고 있어서 더이상 앞으로 갈 수 없어서 잠시 가야동 계곡을 감상하며 뒤따라 올라오는 다른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를 포함 선두에 섰던 6~7명만 빼고 나머지 대원들 다수는 우리가 기다리는 능선쪽으로 오지 않고 산행대장과 함께 오른쪽으로 빠져서 산허리를 타고 우측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나중에 산행 시작부터 알바(등산에서 애당초 계획하지 않았던 곳으로 길을 잘 못 찾아 들어가서 시간을 허비한다는 뜻의 은어)로 반시간을 보냈다는 말이 들렸다.
용(龍)의 치아를 빼닮은 20여개의 암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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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을 기점으로 할 때 용아장성을 중심으로 왼쪽에 가야동 계곡이 펼쳐져 있었고 오른쪽에 구곡담 계곡과 서북능선이 눈에 띄었으며 공룡능선과 마등령이 수 킬로미터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용아장성 1봉부터 8봉까지 넘는 산행은 목숨을 담보로 한 산행이었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만큼 끊임없이 위험한 난간과 절벽이 도사린 암릉을 걸어야 했기에 칼날처럼 뾰족한 암벽 타기는 이제 좀 그만 했으면 하는 심정이었지만 고도의 긴장속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제발 좀 느긋한 마음으로도 갈 수 있는 구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비경이 펼쳐졌다.
'공짜 점심은 없다 (No free lunch.)'는 말처럼 위험을 감수 했기에 그 대가로 잠시도 눈을 떼기 힘든 비경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용(龍)을 본적도 없는데 그의 치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수백미터 이어져 있는 암봉의 모습이 용의 어금니(牙) 모양과 꼭 같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할 만큼 신비롭고도 기이했다.
치아가 나란히 나열되어 있는 모습 그대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왜 용아장성(龍牙長城)이라고 이름했는지 충분히 이해되었다. 전설속의 신비에 쌓인 동물, 용(龍)의 치아를 빼닮은 20여개의 암봉들이 솟아 있는 모습이 큰 성(城)을 이룬 것 같다하여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손가락바위나 용머리바위는 누가 옆에서 그 이름을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짐작 할 수 있을 만큼 꼭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특히 용머리바위는 용이 승천(昇天)할때 하늘로 치켜든 머리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누군가 용이라는 거대한 신비의 동물을 옆에 두고, 혹은 그것을 상상하면서 20여개의 뾰족한 암봉을 태초에 이곳에서 창조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을까. 다름아닌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조물주였을 것이다.
무박 2일, 12시간 반이 걸린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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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특별한 신앙이 없었기에 한때는 굳이 따지자면 무신론자(無神論者)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생각했던 필자였지만 이 순간만은 신(神)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오묘한 자연의 신비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인간이 신(神)을 찾듯이 논리와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도 같은 것이 아닐까.
옥녀봉을 필두로 1봉에서 8봉까지 산을 탓던 거리를 제외하고 백담사 옆을 지나 영시암과 수렴동 대피소로 이어지는 평지를 걸었던 것만 계산해도 왕복 18km 정도 되었다.
새벽 4시에 시작된 산행은 오후 4시 반경에 종료 되었으니 꼬박 12시간 반이 걸렸다.
8봉을 끝으로 하산하여 백담계곡을 보며 새벽에 갔던 길을 역으로 걸어 내려오는데 살벌한 전장(戰場)에서 살아 돌아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릿지(ridge) 산행 경험이 일천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거칠고 위험한 산행이었지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쉽지 않은 경험을 했기에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오고 싶다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느꼈다.
한마디로 용아 탐방은 필자의 예상을 초월했고 충격과 긴장, 감동의 연속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生)과 사(死)의 경계선을 걸어 가는 듯 도전을 거듭해야 했던 쓰릴(thrill) 넘치는 산행 경험으로,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상상하기 힘든 수려한 자연 경관을 갖춘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된 산행으로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것임에 분명했다.
다시한번 올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좀 더 여유있게, 그리고 보다 심도있게 용아를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