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구 > 황사평 성지
[함께 걷기] 제주교구 신축화해길: 순례길에 오묘한 하느님 섭리 가득
볕 바른 날을 택해 신축화해길 황사평성지를 찾았다. 순교자 묘역 앞에서 고개 숙이니 지난 10월15일, 제주 레지아 주관 황사평성지 미화작업 날 병환 중에도 자리를 함께하셔서 ‘황사평성지 역사 이야기’를 오롯이 들려주시던 이대원 미카엘 신부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 일인 듯 귓가에 들려왔다.
“여기 황사평성지 순교자 묘역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우리 레지오 단원 모두는 잘 아셔야 한다”면서 ‘신앙 선조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나라에서 받아낸 땅’임을 강조했다.
1901년에 발생한 신축교안으로 피살된 300∼350명가량 교우들의 시신은 관덕정 앞마당에 널려 있다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별도천 사이 기슭으로 옮겨져 가매장되었다. 그 가운데 연고가 있는 분묘는 가족들이 추슬러서 이장해갔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아 있었다.
당시 제주본당 주임은 구마슬(具瑪瑟) 마르첼리노 라크루(M. Lacrouts) 신부였는데,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해 상황을 살펴본 조선교구장 뮈텔(Mutel) 주교는 조정에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 사이에 교섭이 이뤄지면서 1903년 11월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고 이곳으로 합장묘를 포함해 총 26기 28구를 이장해 조성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무연고 순교자 묘역 서편에는 초대 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 묘를 비롯해 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및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성직자들의 공덕비도 세워져 기리고 있다.
- 곤을동 마을 터.
4.3으로 주민이 몰살당한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유적지’
황사평에서 출발해 화북성당에 멈춰 기도하고, 화북포구를 거쳐 별도천에서 별도봉으로 오르는 기슭에서 4.3으로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유적지’를 만나게 된다. 천주교 신축화해길과 4.3유적지 순례길, 제주올레 18코스(제주시 원도심∼조천 만세동산)가 겹치는 지점이다. 1948년 당시 군경토벌대가 들이닥쳐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몰살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4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서로 도우며 살아온 마을이다 ‘곤을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짓는 이들이 많다. 제1회 4.3평화문학상을 받은 현택훈의 시 ‘곤을동’이 다가든다.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중략) 말방아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후략)’
집터와 좁은 올레길, 말방아집, 무너져내린 돌담 등의 흔적은 아직도 저렇게 뚜렷하고 마당 잔디와 온갖 잡초는 그때처럼 푸르기만 한데 그 시절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가슴 아프게 옷깃을 여미는 시간이 흘렀다.
해안절벽 위 별도봉과 사라봉을 산보하듯 훌훌 걸어 넘어서 당도하는 4.3 주정공장터는 1948년 이후 최대 민간인 수용소였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감금되어 고문당하고, 육지부 형무소로 이감되는가 하면 제주 앞바다 수장의 길로 끌려가던 죄 없는 양민들의 절규가 환청처럼 들려와 귀 기울이게 한다.
- 향사당.
제주 최초 근대 여자교육기관 ‘사립 신성여학교’
그래서인지 겨울 초입 제주시 원도심은 스산하기만 하다. 관덕정 일대를 거쳐 관덕로 골목길에 들어서면 중앙주교좌성당 옆에 위치한 신성여학교 설립 옛터 향사당을 맞닥뜨린다. 향사당의 역사를 들춰보며 제주 여성 교육을 위해 기울인 교회의 노력을 엿보는 일은 무척 의미가 크다.
제주본당 2대 주임 라크루 신부는 신축교안을 겪는 와중에도 제주성 내 여아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고 신성여학교의 전신인 여학당을 세웠다. 1902년 즈음이라 기록되고 있다. 이후 정식 여학교 설립을 위해 적극 나섰는데 여기에 큰 도움을 준 이는 고종의 사위로 제주에 유배 중이던 개화파 박영효라고 한다. 그의 도움으로 1909년 10월18일 ‘사립 신성여학교’가 설립 인가됐으니 제주 최초 근대 여자교육기관으로 오늘날 신성학원의 모태이다. ‘신성(晨星)’은 ‘새벽하늘에 빛나는 별’ 혹은 ‘길잃은 이들을 인도하는 성모 마리아의 별’이라는 뜻을 내포한 명명이다. 라크루 신부는 서울의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에 여학교 교사로 수녀 파견을 요청해 2명의 수녀가 제주에 당도하면서 본격적인 여성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 1915년 라크루 신부가 제주를 떠나기전 신성여학교 학생들과 기념촬영(좌) 재봉틀로 봉재를 배우는 신성여학교 여학생들<사진 신셩 100년사>
학생수는 1910년에 50여 명, 1912년에 60여 명, 1914년에는 22명이 더 늘어났다고 전해진다. 졸업생은 1914년부터 1회 6명, 2회 6명, 3회 16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6년에 이르러 주임신부 공백 상황으로 재정난에 봉착하고 이를 기화로 일제는 여학교 건물이 불법 점유됐다는 이유를 들어 ‘교사양도령’을 통고하면서 1916년 자진 휴교하는 결과를 빚었다.
재개교를 위한 노력은 해방 후 본당 주임으로 서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한 이래 1회 졸업생 최정숙과 지역 유지 홍완표, 고창호, 이기형, 고영일, 김종철 등이 참여해 옛 신성여학교 건물을 되찾고 1946년 9월 3일 ‘신성여자중학원’(3년제) 개교를 재인가받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월호, 안창흡 프란치스코(제주 Re. 명예기자)]
첫댓글 자세하게 설명 하여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