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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9회 이시카와·도야마②
생애, 묘법을 가슴에 안고
대승리의 인생을!
슬픔을 이겨내고
1963년 8월 14일, 신이치는 도야마를 방문했다. 도야마지부의 지부장인 다카마쓰 도시하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제8권 ‘청류’)
다카마쓰가 타계한 것은 2주 전인 7월 31일로, 주부제2본부 간부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야간열차 안에서였다. 열차 안에서 다카마쓰는 지부의 회원들이 있는 곳을 돌며 거듭 개인지도를 하는 등 끊임없이 동지를 격려한 뒤 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앞자리에 있던 사람이 다카마쓰를 깨웠지만 대답이 없었다. 다카마쓰의 아내 시즈코도 남편을 깨웠지만 이미 숨을 거두었다. 그야말로 얼굴은 웃음을 짓는 듯한 편안한 임종이었다.
다카마쓰는 간부회가 끝난 뒤 신이치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신이치는 “믿을 지어다/ 우주의 보물과/ 부처를/ 반드시 지키리로다/ 군도 자식이라면”이라는 도다 선생님의 시를 건넸다.
다카마쓰는 신이치의 진심을 느껴 도야마 광포를 다시금 서원하고, 즉시 열차 안에서도 스승의 마음을 생명에 새기며 동지와 대화한 것이다.
신이치는 다카마쓰의 부고를 듣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시즈코는 의연하게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보다도 동지 여러분이 걱정입니다…”
신이치는 시즈코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신이치는 이때 도야마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8월 14일, 다카마쓰의 장례식에 달려가 있는 힘을 다해 다카마쓰의 가족을 격려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신이치는 도야마시공회당에서 개최한 호쿠리쿠총지부 간부회에 참석했다. 다카마쓰의 죽음을 슬퍼한 회원들이 슬픔을 이겨내고 다카마쓰의 뜻을 계승해 광포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의에 넘치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신이치는 간부회에서 “생애, 묘법을 가슴에 안고, 대승리의 인생을 살아갑시다.” 하고 외쳤다.
초창기 시절의 도야마 남자부를 개척한 호리오카 야스히로 씨(도야마총현주사)는 “간부회에서 이케다 선생님의 지도를 듣고 다시 새롭게 결의했습니다.” 하고 자신의 원점을 상기하며 말했다.
그 당시로부터 3년 전, 도야마지부 결성대회(1960년 11월 12일)가 끝난 이튿날인 13일, 호리오카 씨는 이시카와로 가는 선생님 일행과 동행했다.
가나자와에 도착하자 선생님이 간담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호리오카 씨의 얼굴을 본 선생님은 “당신은 대기만성형이군요. 열심히 하세요.” 하고 격려했다.
“그 무렵에는 일이 불안정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가운데 남자부원을 격려하기 위해 날마다 걸었습니다. ‘선생님이 모두 알아주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그렇게 격려해주신 말씀을 ‘생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호쿠리쿠지부 간부회에서 선생님은 다시 한번 ‘생애’라는 말로 우리에게 지침을 제시하셨습니다.”
청년시절에 폐병을 앓아 의사가 ‘오래 살 수 없다’고 했지만 신심을 만나 극복한 호리오카 씨는 “먼저 학회 창립 100주년을 목표로 선생님의 제자로서 끊임없이 성장하겠습니다.” 하고 힘차게 말했다.
호쿠리쿠 광포 20주년 기념총회
4월 28일은 ‘이시카와의 날’ ‘도야마의 날’이다. 그 연원은《신·인간혁명》제19권 ‘보탑’에서 언급했다.
1974년 4월 28일, 가나자와시에 있는 이시카와현 산업전시관에서 호쿠리쿠광포 2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총회를 개최했다. 구도심에 넘치는 동지들이 전시관을 가득 메웠다.
4월 28일은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입종선언일(立宗宣言日)이기도 하여 이와 관련해 신이치는 ‘니치렌 대성인은 도대체 무엇을 이 세상에 넓히려 하셨는가.’라는 점을 언급했다.
“대성인이 이 세상에 넓히려 하신 것은,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본존(本尊)’입니다. ‘본존’이란 ‘근본(根本)으로 삼아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에 미혹되면 부차적인 일에도 미혹되며, 근본에 미혹되지 않으면 부차적이고 하찮은 미혹도 저절로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가장 근본이 되는 ‘본존’을 일체중생에게 수여하시고 넓히셨습니다.
그럼 그 ‘본존’의 내용은 무엇인가.”
“감히 오해를 염려하지 않고 말씀드리자면, 총(總)해서는 ‘인간의 생명을 본존으로 삼아라’ 하는 말입니다.”
“즉 대성인의 불법(佛法)은 ‘일체의 근원은 생명 그 자체다. 근본으로 삼아서 소중히 하고 존경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생명 그 자체다.’라는 철리(哲理)이자 사상입니다.”
신이치는 거듭 이렇게 말했다.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과 똑같은 오대종(五大種)으로 인간도 구성되었습니다. 대성인은 ‘우주법계의 모든 요소’와 ‘니치렌이라는 한 생명체의 모든 요소’는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는 대성인 당신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에게도 공통합니다.
우리 몸은 즉 대우주이자 묘법의 당체(當體)입니다. 그런 까닭에 생명을 ‘본존’으로 삼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지남에서 ‘생명존엄’의 원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을 담아 강조했다. “이 불법이라는 생명법리(生命法理)를 원점으로 삼아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되물어 새로운 ‘인간복권(人間復權)’을 지향하는 것이 우리의 광선유포 대운동입니다.”
이 기념총회에는 각계 내빈 500명 정도가 참석했는데 신이치의 이야기에 모두 놀란 듯했다.
“호쿠리쿠는 정토종(淨土宗) 신앙이 깊이 뿌리내린 지역이다. 그러한 염불(念佛)의 애음(哀音)과 사상은 마음의 ‘위안’이 됐다고는 해도 사회를 변혁·창조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이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한 불교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생명존엄’의 철리를 근본으로 삼고 인간의 복권을 목표로 삼는 창가학회의 불법운동이 충격적이기 조차 한 듯했다.”
신이치는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 4월 28일을 ‘이시카와의 날’ ‘도야마의 날’로 정해 전진의 마디를 새겨 나아가자고 제안했다.
가나즈 요코 씨(이시카와총현 부인부 총주사)는 깊은 감회에 젖어 “이케다 선생님은 이날 호쿠리쿠의 발전을 위한 ‘혼’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를 해주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선생님은 기념총회에서 ‘본존론(本尊論)’에 이어서 이시카와현과 도야마현 사람들의 기질을 언급하고 이렇게 말했다.
“실리주의인 도야마에는 지성(知性)의 훈풍이 필요하고, 노토의 중후한 기풍은 머지않아 냉엄한 생활환경을 극복해 자유로운 인간정신으로 승화해야 하며, 가가의 온화함과 신중함은 그와 더불어 기세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도에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시카와와 도야마의 장점과 부족한 부분을 단적으로 지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어서 말했다.
“사람은 어떤 일을 이루려고 하면 기세 좋게 온몸으로 부딪치는 태도가 매우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회활동이든, 문화활동이든, 아니면 모든 직업의 전개든, 순수한 신심을 근간으로 정말로 마음껏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나즈 씨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일찍이 호쿠리쿠는 ‘염불왕국’이라고 부르는 구습이 깊은 땅으로 어딘가 모르게 ‘단념’하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기세 있게 온몸으로 부딪친다’는 말씀이 모든 참석자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소심한 우리에게 용기가 솟아나는 지도였습니다.
기념총회 이후에는 모두 ‘무엇이든 좋아하자!’는 슬로건처럼 서로 격려하며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즈 씨 자신도 민생위원 등 지역활동에도 분투하고 지난해 4월부터 노인회 회장도 맡았다.
가나즈 씨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주신 ‘심지가 강하고 상냥한 사람이 돼라’는 지침을 가슴에 품고 앞으로도 모든 일에 적극적인 자세로 부딪쳐 나아가겠습니다.” 하고 서원했다.
고마쓰회관으로
기념총회 이튿날, 선생님은 이시카와에 있는 고마쓰회관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 회관은 호쿠리쿠 하늘의 현관인 고마쓰공항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세 차례 이곳을 방문했다.
모리 아쓰코 씨는 세 차례 모두 함께했다. 도다 선생님의 생가가 있던 가가시의 시오야마를 무대로 하는 이시카와도다현에서 부인부 주사를 맡고 있다.
모리 씨는 제1차 종문사건의 폭풍이 휘몰아친 1978년 무렵부터 남편 미키오 씨(이시카와도다현 주사)와 뜻이 있는 동지와 함께 한집, 한집 회원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마쓰는 난폭한 종문 승려들이 학회에서 탈퇴하게 만들려는 공작이 심해 간부가 퇴전하거나 지구(地區) 하나가 통째로 종문을 따라 가기도 했다.
모리 씨 부부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날마다 아니 몇 시간마다 상황이 바뀌는 격동의 나날이었습니다. 분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우리는 큰 은혜를 입은 학회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회원을 끝까지 격려했습니다.”
1982년, 선생님의 두 번째 방문이 실현됐다. 모리 씨를 본 선생님은 “잘 지켜주었군요.” 하고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모두 알아주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서적에 잇달아 휘호해 현지 동지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 새로운 회관을 짓자고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당시는 함석지붕으로 된 낡은 회관이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습니다. 새 회관을 짓자고 제안하신 일은 고마쓰에 크나큰 희망이 되었습니다.”
재건축공사가 이루어지고 그 이듬해인 1983년에 새로운 보성(寶城)이 완공되었다. 1984년 8월, 선생님은 도쿄로 돌아가기 직전에 회관을 방문해 동지 200여 명과 함께 근행을 했다.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착실하게 신심해서 복운(福運)을 쌓으십시오.” “여러분은 불자(佛子)입니다.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어떤 일이 있어도 끈기 있게 나아가주십시오.”
스승의 지도를 생명에 새긴 벗은 지역공헌과 성의의 대화에 힘썼다. 고마쓰회관에서도 지역우호 모임을 개최해 회관은 지역교류를 나누는 곳이 되었다.
회관 주변은 일찍이 밭이었지만 지금은 주택가로 바뀌었다. 이사 온 사람도 늘어 창가의 선(善)의 연대는 크게 확대되었다.
단결하려고 노력하면
경애혁명이 된다
호쿠리쿠의 노래 작사
제28권 ‘대도’에는 호쿠리쿠의 노래 ‘아, 서원의 노래’에 담긴 스승의 마음이 씌어 있다.
1978년 8월 8일, 창가문화회관 안에 있는 광선회관에서 개최한 현장회의에서 신이치는 앞줄에 있는 호쿠리쿠 부인부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쿠리쿠의 노래를 작사했습니다! 가사에는 코스모스꽃 이야기도 있습니다. 기억할지 모르겠군요. 나는 그때 받은 여러분의 진심을 잊지 못합니다.”
‘그때 받은 진심’이란 한해 전 여름 다테야마 연봉(連峰) 기슭에 핀 코스모스꽃에 억새를 곁들여 만든 꽃다발로, 호쿠리쿠의 부인부 멤버가 도쿄에서 온 부인부 간부에게 부탁해 야마모토 회장에게 보냈다.
신이치는 꽃다발을 불단 앞에 올리고, 꽃을 따서 보낸 벗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창제했다. 그리고 ‘어느 때고 기회가 생기면 호쿠리쿠 부인부의 다기지고 깨끗한 마음을 찬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코스모스꽃’은 제자의 진심이 담긴 결정체였다. 그 진심에 스승은 작사라는 형태로 보답했다.
현장회의 하루 전날, 신이치가 부인부 대표와 나눈 간담에서 도야마현의 부인부장 다키무라 지사가 호쿠리쿠의 노래 작사를 직접 부탁했다. 그때 신이치는 “여러분이 직접 노래를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고 말했지만, 간담이 끝난 뒤 작사를 시작했다.
호쿠리쿠의 노래 ‘아, 서원(誓願)의 노래’ 가사를 발표했다.
1. 아 사랑스러운/ 코스모스와
렌게(蓮華)의 향기로운/ 고향에
아 상락(常樂)의/ 호쿠리쿠는
자 구가(k)하노라/ 행복의 광포를
2. 평화의 진열/ 전원(田園)에서
벗과 벗이 나누는/ 굳은 악수
아 유락(遊樂)의/ 호쿠리쿠는
일어서 나아가는/ 그대의 장한 모습
3. 흰 눈 밟고 나아가는/ 행진은
마음도 가볍게/ 날아오른다
아 동심(同心)의/ 호쿠리쿠는
눈보라 치는 겨울에도/ 고귀하다
4. 묘법(妙法) 용자의/ 발자취는
지키노라 제천도/ 씩씩하게 일어서
아 서원의/ 호쿠리쿠는
공덕의 선율/ 벗의 노래
그리고 신이치는 호쿠리쿠의 동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사는 4절까지 있는데 각 절의 3행이 중요합니다. ‘상락의 호쿠리쿠’란, 어떠한 고난에 부딪혀도 넘치는 생명력으로 언제나 인생을 즐기는 경애입니다. ‘유락의 호쿠리쿠’도 자유자재로 만족하는 경지입니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신앙이므로, 즐겁고 신나게 학회활동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려면 신심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수동적이 아니라 자신이 적극적으로 투쟁을 일으켜야 환희가 생깁니다.
남의 말을 듣고 겨우 움직이는 사람과 스스로 ‘자, 이렇게 하자!’고 정하고 활동하는 사람은 기세도, 기쁨도 전혀 다릅니다. 날마다 하는 학회활동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은 자진해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신심입니다.
3절은 ‘동심(同心)의 호쿠리쿠’로 했습니다. 단결이야말로 신심의 핵심이고, 광신유포를 추진하는 대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간부끼리 서로 사이가 나쁘고 마음을 하나로 하지 못한다면, 이미 마(魔)에 농락당하고 있다고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파화합승(破和合僧), 다시 말해 광선유포의 단결을 파괴하고 학회조직을 교란하는 싹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결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가 없으면 거북한 상대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거나 직접 연락하는 것도 피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오해도 생깁니다.
‘어딘가 자신과 관계가 불편하다.’는 등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면, 역직이나 처지에 관계없이 용기를 내어 자신이 먼저 연락해 대화해야 합니다.
어째서 학회는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불의불칙(佛意佛勅)의 단체로서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는가. 그 까닭은 광선유포를 추진하려는 동심, 다시 말해 단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광선유포를 위해 단결하려고 노력하면 자신이 인간혁명이 되고, 경애혁명이 됩니다.”
《신·인간혁명》’대도’에는 ‘단결’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씌어 있다.
“인간은 자칫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집착한 나머지 ‘소아(小我)’의 세계에 갇히게 되고 만다.
광선유포라는 위대한 사명을 자각하고, 그를 위해 동지와 단결할 때 작은 ‘소아’의 세계가 깨지고 ‘대아(大我)’가 열린다. 그때 자기 개성도 크게 빛낼 수 있다. 광선유포를 위해 동지와 마음을 맞추고 협조하는 일은, 작은 자신을 탈피하고 큰 경애를 구축하는 도약대가 된다.
사람마다 생각이나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근본목적으로 돌아가 일치점을 찾아내고 동심을 지향하면 서로 이해하게 되고, 단결도 도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평화사회를 실현하는 원리도 있다.
단결 - 그 말이 입으로 나올 때마다 신이치의 눈빛은 엄해졌다. 그것은 단결을 파괴하려는 사람과는 철저히 맞서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도다 조세이는 ‘학회는 인재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결하지 못하면 창가성(創價城)을 이루는 인재의 돌담도 무너지고 만다.”
<기고> 아름다운 정신의 결합
무토 하루부미 도야마총현장 / 다카하시 사토미 총현부인부장
‘사제불이(師弟不二)’
묵흔도 선명하게 쓰신 휘호가 도야마문화회관 은사기념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도야마의 이케다 문하생에게는 불멸의 혼입니다.
1957년, 이케다 선생님이 처음 방문한 뒤로 도야마 지도는 여덟 차례를 헤아려 많은 벗과 사제의 유대를 넓고 강하게 맺어주셨습니다.
구습이 뿌리 깊은 혹독한 환경에서 이를 악물고 투쟁하는 한 사람 한사람을 끌어안듯 격려하고 마음에 희망의 등불을 밝혀 주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의 마음에 부응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끝까지 싸워 이겨낸 것이 도야마 광포의 역사입니다.
소설《신·인간혁명》제2권 ‘용무’에는 도야마지부 결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초대 지부장은 생활고에도 여비를 마련해 여러 차례 학회본부로, 이케다 선생님 곁으로 구도의 발걸음을 옮겼다고 합니다.
첫째 아드님이 “아버지는 모두 이케다 선생님 지도대로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선생님, 선생님’ 하고 스승을 끝까지 구도하는 제자의 일념이 바로 도야마 동지의 원점입니다.
제28권 ‘대도’에 호쿠리쿠의 노래 ‘아, 서원의 노래’의 탄생 드라마를 써주셨습니다.
“‘호쿠리쿠의 노래’를 작사했습니다! 가사에는 코스모스꽃 이야기도 있습니다. 기억할지 모르겠군요.”
그것은 도야마의 부인부가 선생님에게 보낸 다테야마산 연봉(連峰) 기슭에 핀 코스모스로 만든 꽃다발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쉽게 잊어버릴 만큼 작은 꽃다발이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런 제자의 진심을 최대로 칭찬하고 영광의 역사로 써서 남겨 주셨습니다.
진심과 진심이 함께 울려 퍼지는 창가의 세계. 사제불이는 그 아름다운 정신의 결합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드디어 내년은 창가학회 창립 90주년, 이케다 선생님의 제3대 회장 취임 60주년 그리고 도야마지부 결성 60년의 가절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믿음직스럽게 뛰어나온 청년부와 함께 절복과 홍교의 크나큰 확대로 내년을 성대하게 축하하고 ‘사제불이’ 도야마의 신시대를 반드시 열어갈 것을 서원합니다.
대서원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을 가장 빛낼 수 있는 길
은사의 정신을 계승한다
신이치는 말을 이어갔다.
“‘호쿠리쿠의 노래’ 4절 3행은 ‘서원의 호쿠리쿠’라고 했습니다. 광선유포의 위대한 서원을 위해 살아갈 때, 환희 가득한 지용보살의 대생명이 넘칩니다.
그 무엇도 겁내지 않고,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내는 무한한 용기와 지혜 그리고 힘이 맥동합니다. 대서원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을 가장 빛낼 수 있는 길입니다.
호쿠리쿠는 ‘광포의 서원’에 몸 바친 도다 선생님의 탄생지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은사의 그 정신을 이어받는 투장이기 바랍니다.”
‘아, 서원의 노래’ 작곡은 초등학교 음악교사인 청년부원이 맡아 그날 창가문화회관의 금무회관에 있는 피아노로 작업했다.
신이치는 호쿠리쿠의 멤버들과 금무회관으로 이동해 곡의 이미지를 말하고 거듭 조언했다. 그리고 이틀 뒤 가사와 악보를 <세이코신문>에 발표했다.
다카무라 사치코 씨(전국 부인부 주사)는 “현장회의에서 가사를 발표할 때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하고 웃으며 말했다.
“가사를 듣고 ‘이토록 따뜻한 가사라니! 이토록 평화로운 마음이 넘치는 노래라니!’ 하고 감격했습니다. 작곡하는 자리에도 있었지만 호쿠리쿠의 동지를 생각하는 선생님의 진심이 가슴에 스며들어 ‘이 노래와 함께 우리는 전진하자’고 깊이 결의했습니다.”
다카무라 씨는 가사 첫머리에 나오는 ‘코스모스’에 관한 일화가 소설에 씌어 감동했다.
“코스모스는 어떤 분이 다테야마 산기슭에서 따서 보내주었습니다. 꽃다발은 참으로 소박했지만 선생님은 그 순수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장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꽃을 따서 주신 분은 결코 ‘제가 만들었습니다.’ 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않는 겸허한 분입니다. 그런 만큼 선생님이 이런 분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렇게 감사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다카무라 씨는 “코스모스에는 ‘우주’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 서원의 노래’에 코스모스를 써주셔서 선생님에게 우리는 우주대의 격려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서(誓)’라고 휘호
이케다 선생님은 <수필 인간세기의 빛>에서 1982년 9월 호쿠리쿠 지도의 모습을 이렇게 썼다.
“이시카와문화회관에서 붓을 든 나는 내 혼을 호쿠리쿠에 남겨 동지를 끝까지 지키자는 결의로 이렇게 썼다.
‘서(誓)’-
휘몰아치는 박해의 눈보라 속에도 꿋꿋이 창가의 깃발을 내건 사랑하는 호쿠리쿠의 어머니여, 아버지여! 젊은 아들이여! 딸이여!
우리 위대한 ‘서원의 동지’여!
‘서원’은 역사를 만드는 ‘힘’이다.
‘서원’은 캄캄한 어둠을 비추는 ‘빛’이다.
‘서원’은 사악을 물리치는 ‘검’이다.”
지금 호쿠리쿠의 벗은 사제서원에 불타 신시대 ‘광포의 울림’을 쳐서 울리는 대화를 확대하고자 열심히 달리고 있다.
서원하는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다.
서원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
서원에 끝까지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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