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랑말 타고 오치령을 넘는다
며칠 전 은퇴를 앞두고 거창에서 공동체 목회를 하는 친구가 내 집에 다녀갔다. 밀양 단장면이 고향인 그는 늦게 신학을 하여 늦깎이 목사가 되어 몇몇 시골교회를 담임하다가 나이 칠십에 이르러서야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을 꿈꾸며 새로운 목회를 시작하는데 덜컹 사모가 병을 얻어 입원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한 위로의 정도 나누지 못하고 일정이 바빠 어깨가 축 처져 돌아가는 친구를 배웅한 뒤 그가 타고 온 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아직 해는 길고 봄이 무르익는 계절이라 나도 내 조랑말을 타고 얼마 전부터 벼려오던 상춘(賞春) 길에 나섰다.
내가 사는 청도군 매전면 호화리에서 58번 국도(靑梅路)를 따라 용전 마을에 와서 언덕 아래 아스라이 세워진 가례교(嘉禮橋)를 건너 동창천 제방 길을 조금만 가면 길가 마구간에 진짜 조랑말 한 마리가 매여 있고 동판이 모두 떴긴 중남교(中南橋)가 나온다. 다리의 상판 첫 난간에 교량의 이름과 연혁이 새겨진 동판은 십수 년 전 어느 지각없는 사람이 훔쳐 고물상에 구리로 팔렸을 터이지만 지금은 석판이라도 새겨 다시 붙였으면 좋겠다.
다리에서 바라보이는 바깥내동 마을에는 1961년에 설립한 중남교회(담임목사 권혁주)가 있다. 출석 교인 10여 명 밖에 되지 않은 미자립교회로 목사님께서 어려운 목회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교회가 어려운 것은 꼭 교인의 숫자나 재정 문제가 아니고 이 마을의 문화적 환경이 더 큰 요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내동의 애미각단(母村)에서 중각단(中村) 안마(內村)에 이르기까지 모두 육화산(六花山, 해발 674.9m)에서 흘러내리는 큰골계곡 가에 취락이 형성된 산간 마을로 지나는 곳마다 큼직한 재사(齋舍)가 마을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주로 노인들로 구성된 상주인구 60여 명 밖에 되지 않은 마을에 의흥예씨 문중의 황강재(黃岡齋)와 춘장재(春壯齋) 안동권씨 문중의 적암재(赤岩齋), 경주최씨 문중의 벌산재(閥山齋), 김해김씨 문중의 경동재(景東齋) 등이 있어 이 마을의 유교적 주류문화와 씨족 분포를 짐작게 한다.
그리고 냇가 노거수에 둘린 금줄이나 안마 입구에 있는 돌무지에서 청도의 민간신앙 특유의 서낭신앙도 엿볼 수 있었다. 오늘날의 시골교회가 겪는 공통적인 문제이지만 지금까지의 고전적 목회로는 이 마을의 문화적 환경을 극복하기는 매우 어렵겠다는 내 나름대로 대안 없는 진단을 내려 본다.
안마 마을 끝에는 ‘느림&여유’라는 상호가 붙은 전통찻집을 누가 황토로 새로 지은 것 같은데 아직 영업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를 지나면서 길은 갑자기 좁아 들고 자동차 한 대 겨우 갈 수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 나오는데 모퉁이를 돌아서는 가파른 언덕 위에서 너덜겅(돌강)이 아득한 산정에서부터 흘러내린다. 흔히 산사태의 흔적쯤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너덜겅은 산 위의 주상절리 같은 직벽 단애가 무너져 내리면서 강같이 형성된 바위 군(群)으로 수만 년 전 빙하기 때 한반도 기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너덜겅을 지나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 올라가면 아름드리 소나무 밑둥치에 인위적인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보면 송진 채취를 위한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으로 보인다. 이어서 꽃이 만개한 산벚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일본에서 건너온 보통의 벚나무와 형태는 유사하나 어린잎과 잎자루에 털이 없는 점이 다르며 주로 깊은 산의 500~600m 고지에 서식하고 개화 시기는 일반 벚나무보다 조금 늦다.
산길을 숨 가쁘게 돌고 돌아 마침내 오치령(烏峙嶺, 560.7m) 고갯마루에 다다라 속이 빈 소나무 아래 내 말을 매고 집에서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 고개는 자동차가 없던 시절 청도에서 밀양 산내면 송백장(팔풍장)이나 울산으로 가기 위한 최단거리 길로 보부상들이 주로 넘던 고갯길이다.
오치마을을 우회해서 새로 난 길로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 쪽으로 3.8㎞ 내려가면 바로 송백 장터다. 나는 오래전에 오치 마을(용전3리)을 안으로 들어가서 오치 못을 지나 성황당 앞 옛길을 돌아 용전리 저전 마을로 내려가 본 적도 있다. 오치령에는 내리 기점 2.95㎞, 신곡~용전지구 3.77㎞ 임도 표지석이 각각 서 있다. 내리에서 올라온 길이 2.95㎞, 신곡리로 내려가는 길이 3.77㎞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날은 산 남쪽 능선 임도를 따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상동면 신곡리로 향했다. 비록 비포장로이기는 하나 내동 길보다 경사가 완만하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차창을 열어놓고 천천히 내려가는데 고라니 한 마리가 머물다 간 자리에서 장끼와 까투리 한 쌍이 놀라지도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맞은편에서 묘목을 잔뜩 실은 트럭이 먼지를 날리며 올라오자 후다닥 놀라 날아가 버렸다.
이후에도 여러 굽이를 돌아 내려와 신곡리 양지마을에 이른다. 이 마을은 내가 청도로 이사 오는 해인 2011년 7월에 내린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주민 4명이 숨지는 참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방금 내가 지나온 임도 아래가 무너진 것이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임도 개설을 원망하기까지 했으나 지금은 수해 복구는 물론 마을 환경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도착지로 정한 양지마을 건너편 별빛교회 앞에 섰다.
별빛교회 김태군(49세) 목사는 청도 출신으로 밀양에서는 화제의 인물로 알려졌다. 2017년 KBS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 무대에서 대상을 받아 일약 스타로 떠오른 분이다. 목사가 노래자랑에 나가 상 받은 것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의 수상 소감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마을 어르신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불렀던 노래로 대상을 받아 너무 감사합니다.”
마을 노인들을 섬기이 위함이란다. 오직 마을그가 노래자랑에 나가게 된 것도 신곡리 이장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한 것이고, 그리고 수상한 노래 ‘향수’ 또한 동네 할머니가 추천한 곡이다.
별빛교회는 종종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음식 대접을 하며 ‘별빛음악회’를 열어 격의 없는 관계를 유지하며 문화적 동질성을 찾아갔다. 어린이를 포함한 전 교인 20여 명의 시골 개척교회지만 지역민을 섬기는 공동체 지향의 목회는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지난 2월에는 미국 남가주 사랑의 교회(담임목사 노창수) 초청으로 이 마을 어린이 22명을 김 목사 부부가 인솔하여 미주 수학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이 교회에서 오늘의 농촌 마을을 변화시키는 시골교회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 목사와 인사를 나눌 겸 교회를 찾았으나 공교롭게도 도시에서 견학 온 교인들을 실은 관광버스가 교회 마당을 가득 메우고, 구경 온 사람들로 분주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고 돌아오는 길에 김 목사가 부른 ‘향수’의 노랫말인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鄕愁)’를 가만히 읊조린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鄭芝溶詩集(1935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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