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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결투
-호적수(好敵手)-
심 종 은
일요일 한낮이다. 대낮인데도 기원 안에서는 또래들만의 흥미진진한 대결이 벌어지곤 한다. 주말이라면 젊은이들은 대개 도심을 벗어나 한산한 야외로 나들이를 떠남직도 한데, 기원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늘 북새통이다.
연륜이 지긋해 보이는 시장 상인들이 주로 드나들어 젊은 사람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든 곳이 기원 안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두 사람이 전망 좋은 창가에 앉아 한창 대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찾아온 손님 중 대부분이 장년층 이상이라 그런지, 많은 기객들 가운데서도 두 사람의 모습은 한껏 두드려져 보였다.
열려진 창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기어 들어오면서, 게임에 열중하는 두 사람의 땀을 적당히 식혀주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데도 그들은 게임에만 열중이었다. 첫 게임을 시작한 것이 오전 열시 경이었는데, 해는 어느 새 중천을 넘어서고 있었다.
일찌감치 기원의 문을 열기 무섭게 자리 잡은 두 사람이다. 마주 앉아 쟁투하기를 5시간 여…. 그림자가 서에서 동쪽으로 옮겨가는 시간의 흐름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백주(白晝)에 반상의 결투를 벌이느라 두 사람은 주위를 돌아볼 여념도 없었다.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만나면 어울리는 것이 바둑이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한번 두기 시작하면 하루해가 저물도록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야 비로소 마지못해 일어서곤 했다.
오늘도 두 사람은 일찌감치 맞붙었다. 선수를 결정짓기 위해 가위․바위․보로 내기를 했다. 흑만 잡게 되면 당연히 필승지세라 기분이 좋을 것은 뻔한 이치다. 그것은 서로 똑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운 나쁘게도 이번에 역시도 친구 한(韓)이 먼저 선수를 잡았다.
프로기사나 아마추어라도 정식 게임이라면 공식적으로 오호 반 내지 육호 반을 공제하는 규정이 따로 정해져 있었으나 순수 아마추어 입장에서는 그 당시 덤이란 건 별로 중요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을 잡게 되면 그 사람은 인상을 찌푸리기 마련이었다. 신중한 모션으로 첫 점을 우상 귀에 사뿐히 내려놓고 점잖게 팔짱을 끼는 상대방의 모습에서 몹시 밸이 꼬였다.
마치 천하제일고수 이창호가 된 심정으로 앉아 ‘오늘의 승리 역시도 내 것’이라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느끼게 되자 아니꼬운 기분에 내심 언짢아졌다. 종합전적에서 늘 앞서는 상대방인지라 완벽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모습이긴 했지만, 그 정도에 기죽을 내가 아니었다. 비록 처지는 형편이었어도, 상대방에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상대방에게 판세가 밀렸으나 내게도 자존심과 오기라는 게 있었다. 최근 실력이 급증하면서 이기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과거에 당한 참패를 되새겨 분발하고자 이를 깨물어왔다. 멋지게 설욕하고자 고진감래 얼마나 참담한 세월을 버텨왔던가.
설욕의 기회를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온 것이 어찌 한 순간뿐이랴. 설령 이기지 못할지언정 그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만 속이 편했다. 어쨌든 상대를 꺾어 팽팽한 국면이라도 유지해 보겠다는 생각이고 보면, 도무지 내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패할 때마다 눈물을 머금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 아픔을 누가 알기나 하랴.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할 내 몫이었다. 기본 대국료에 자장면 값을 비롯한 저녁 술값, 또 안주 값. 여기에다 줄줄이 피어대는 담배 값은 물론이다. 하다못해 음료수 값까지 몽땅 치러야 하는 안타까운 신세였다.
실력이 엇비슷하여 겉으로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과는 아주 비참했다. 삼판양승이나 오판삼승으로 결정전을 치루면 매 게임 결승까지 따라갔다. 하지만, 최종대국에 이르면 꼭 지고 마는 한심한 신세라 카운터를 뒤돌아서며 남몰래 눈물을 쏟곤 했다.
지금까지 지불한 돈을 모두 합친다면 눈알이 튀어나올 금액이었다. 엄청난 액수를 자진해서 카운터에 갖다 바쳐야만 했다. 그 치욕의 강도가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이치였다. 여태껏 당하기만 한 처지라 감히 옆에서 훈수했다간 욕보기 십상일 만큼 잔득 독이 올라 있었다.
일방적으로 당해온 내 입장에서 상대방을 제압하겠다는 욕심보다는 오히려 한판만이라도 상대방의 기를 꺾어볼 요량으로 차근차근 게임을 풀어가려고 했다. 마음을 다지고 또 가다듬는 내 눈초리가 날카롭게 번뜩이는 것을 보며 필살의 의지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상대방도 극히 긴장을 하며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다.
병가의 상사라지만, 승부의 세계는 참으로 냉혹한 것이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진짜 하늘과 땅 차이고, 친한 친구일수록 그 강도는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존심이 걸리는 문제라 돈을 따질 게재도 아니었고, 승부결과 여하에 따라서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체증이 뒤따랐다.
당하면 당할수록 설욕을 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지사다. 지는 날이면 복수심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지는 날이면 가슴속 들끓는 혈기를 겨우 달래며 밤샌 날이 어찌 하루 이틀이랴. 그렇듯이 ‘언제고 반드시 설욕할 날’을 다짐하며 악착같이 별러온 날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 배수의 진을 친 기분으로 오직 승부를 위해 칼날을 매섭게 갈고 닦았다. 승리의 날을 기약하며 다짐을 하기를 수없이…. 집요한 마음에 복수의 칼날은 오히려 무디어지는 것일까. 무심한 마음으로 두면 승리는 이쪽이나 막상 게임에 돌입하면 생각대로 두어지지 않는 게 또한 바둑이었다. 우세하다 싶어 안심을 하는 순간, 어느 틈에 판세가 뒤집혀진 것을 보고 만다.
상대의 노련한 수법에 걸려든 것이 벌써 몇 번이던가. 완승의 국면이라고 자칫 기분이 좋아져서 안심했다가 거덜이 났다. 아주 작은 약점이라도 파고드는 상대방의 치밀한 작전에 어느 새 판은 뒤집혀져 버렸다. 위기를 맞이하면서도 틈을 파고드는 냉혹한 승부사 기질에 손쉽게 말려들곤 했었다.
오늘도 그를 만나 전의를 불태웠다. 전처럼 절대 실수하지 않으려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하지만 굳건히 마음 다져먹어도, 일단 게임에 들어서면 주눅이 드는 것이었다. 불같던 복수심도 눈 녹듯 사그러들고 계속 밀렸다. 잘 나가는 듯싶다가도 두다보면 과수를 연발하게 되고, 자칫 한눈파는 사이에 우세하던 판도가 뒤집히는 것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한꺼번에 전세를 만회할 욕심에 무모한 작전을 벌이다 번번이 완패를 당하곤 했다.
흑을 잡았다면 그래도 거의 6할 이상은 이길 확률은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흑을 잡으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기원했건만, 재수 없게 이날마저도 선수를 빼앗겨 마음이 몹시 언짢아진 상태였다.
‘오늘마저도 헛수고인가…’
10번기로 치루는 치수고치기에서 막판에 몰려 헤어나려고 얼마나 발버둥쳤나.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상대는 한껏 여유를 보였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계속 이어지자 그는 봐준다는 듯이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이쪽 입장에서 보면, 내 체면은 도무지 말이 아니었다.
날렵한 제비 조훈현에게 당하기만 했던 순 된장바둑 서봉수의 심정이 과연 이러했을까? 지고 돌아오는 날이면, 공연히 심술궂은 화풀이를 가족들에게까지 쏟아붓곤 했다.
‘어떻게 하면, 놈의 콧대를 납짝하게 꺾어놓을 수 있을까?’
일요일마다 계속되어 온 연구며 끈질긴 도전이었다. 종합전적을 보더라도 한 달 동안 상대방을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가망성이 희박한 만큼 승부의 결과는 언제나 불을 보듯 뻔했다. 오직 이겨야겠다는 일념에 갈수록 승부의 골은 깊게 드리워졌다.
필승의 신념에 불타오른 나는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거리며 기보를 집중 연구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름난 전문기사가 집필한 바둑저서를 구입해서 탐독하기에 이르렀다. 기력증진에 온 심혈을 기울이면서 승부의 추를 자신에게로 돌리고자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무엇보다 첫 판이 승부의 관건이었다. 첫 판을 놓치는 날이면, 그 날의 승부는 늘 비관적이었다. 그런 흐름인데 오늘마저도 조짐이 좋지 않았다. 치수 고치기 이후로 초반에는 속수무책으로 계속 밀려나는 형국이었고, 그. 고비는 계속되고 있었다. 바라는 대로 진행되기는커녕 오히려 번번이 두 점 이상 하수로 전락해야 할 위험지경에 몰리곤 했었다.
창피만발이었다. 6-4로 밀리는 것은 호각지세로 보아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한판이라도 잘못 두는 날엔 당장 스코어가 7-3이 되어 한 점을 접혀야 하고, 단박에 하수 신세로 추락하게 되는 치욕을 면치 못한다. 그런 난처한 입장에 한껏 내몰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악전고투하며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굳건히 다져온 승부욕과 끈기였다. 처음부터 흑을 빼앗겨 시작은 안 좋았지만 오히려 필승의 투지를 불태우며 덤볐다. 각오를 다지며 끝까지 해보겠다는 자세로 버티어냈다. 야무지게 돌을 움켜쥐며 반상을 주시하는 호적수의 눈길로 불꽃이 연달아 작렬하기 시작했다.
한 수, 또 한 수…. 놓여질 때마다 들려오는 경쾌한 금속성. 여기에 한숨과 기성이 간간이 곁들였지만, 몸은 경직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묵직한 침묵이 주위를 감싸면서 분위기를 더욱 열띠게 몰아갔다. 진정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한동안 잘 어울리던 판세가 종반에 이르면서 승부수를 던진 내 작전이 효과를 보며 승부의 추가 넘어왔다. 기회를 잡으면 소극적인 자세로 밀려나던 것이 종전의 자세였으나 이번만은 그렇지 않았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뒷걸음치던 나약한 모습을 탈피하고 과감히 역(逆)으로 나갔다. 날렵하게 쪼아대는 한 마리의 맹금과 같았다.
냉철한 판단 하에 과감하게 몰아붙인 것이 확실히 판도를 뒤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대담한 작전이 대성공을 거둠으로서 먼저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것은 숙원의 한을 푸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값진 승리로 보기 좋게 서전을 장식하면서 기선제압의 우위에 올라서는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껏 별러왔던 복수혈전은 승부욕에 대한 끈질긴 집념의 결과이기도 했다. 여기서 사기충천한 나는 피날레가 자신의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얄궂기만 했던 우거지상을 자연스럽게 지워버릴 수 있었고, 흡족한 마음에 드리워진 미소에는 자신에 찬 승리의 쾌감마저 엿보였다.
여유를 갖고 슬쩍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맛이 떫은지 상대방은 씁쓸한 표정에 혀마저 끌끌 차는 것이었다. 판이 바뀌어 다음 대국을 시작할 참인데도 착수할 생각도 않고, 한동안 판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뜸들이며 바둑판을 노려보던 친구는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돌을 들어 우상 귀 쪽에 살그머니 내려놓았다.
‘아주 신중한 모션이다….’
상대방은 전투를 피해 다니며 집짓기에 열중하는 극히 소극적인 전법으로 나왔다. 친구의 내심을 알아채고, 의표를 찌르며 나는 역으로 세력을 쌓아갔다. 단단히 철옹성을 형성해가며 중반 이후로는 그 외곽세력을 바탕으로 흑을 포위망 속에 가두어놓고 거세게 밀어붙였다. 거친 해일처럼 끈질기게 몰아붙인 끝에 결국 상대방의 대마를 함몰시키면서 일방적인 나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2연승으로 한발 더 달아나자 기분이 풀리면서 점차 몸은 달아올랐다. 그러자, 이내 유지해왔던 평상심을 잃고 잠간 틈을 보이게 되었다. 심기일전하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상대방이 오히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무심코 따라 두다가 졸지에 외곽으로 쫓김을 당한 나는 허둥대다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안정시키려 무진 애를 써봤으나 눈앞이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빈틈을 보이자 상대방 역시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려하지 않았다. 도망갈 여지없이 맹호가 되어 거칠게 달려들었다. 몰아쳐 온 상대의 맹공에 응수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덤벙거리다가 결국 완벽한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멋모르고 따라 응수했다가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전적은 아직 2대1. 아직 앞서 있긴 했으나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 나도 차츰 본래의 성정을 되찾았다. 게임은 정작 이제부터인 것이다.
본격적인 승부사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서서히 바둑판은 무르익어 갔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이며 꾸준히 연구한 보람 덕분인지 마음마저 금방 신중해졌다. 전국(戰局)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대처하는 요령도 재빨라지고 확고해져 있었다. 그새 나의 진가는 갈수록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게임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갔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응수해온 것이 어느 덧 냉정을 찾는 효과를 보이며 계속해서 4연승을 했다. 종합전적에서도 6대 1이었다. 승부는 그것으로 이미 끝이 났다. 이는 꾸준한 연구와 노력으로 빚어낸 나의 걸작이었지만, 끈덕진 인내와 열화와 같은 투지로 달구어낸 눈물겨운 전사의 승부사적 투쟁사였다.
처음 예상과 달리 일방적인 게임이라 상대방도 놀랐겠지만, 내 자신도 무척 놀랐다. 최근 들어 기력이 월등하게 늘었다고는 생각해왔으나,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감을 갖고 일방적인 페이스로 치고나가 단번에 적수를 K․O시킬 줄은 차마 몰랐었다. 더구나 아직은 상대가 대등한 편이거나 한 수쯤 위일 것으로 여전히 생각해왔던 터였다.
한 달 전부터 시작해 온 치수 고치기 10번 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동안 백을 넘겨줄 뻔했던 고비가 어찌 한두 번뿐이겠는가. 지금까지는 계속 곤경에 몰리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겨우겨우 위기를 탈출해왔다. 다른 건 몰라도 그날의 총 전적이나마 단지 한 판만이라도 앞서는 게 소원이었으니 이제는 그야말로 대 만족이었다.
상대방을 완벽히 이겨본 역사라고는 한 달 전에 6대 3 더블․스코어가 고작이다. 그것이 최초요 마지막이었다. 더 이길 수도 있었다고 생각은 되었으나 중요한 고비에서 번번이 쓴잔을 마셨다. 가장 분한 일은 두 번째로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로 기억되고 있다.
난생 처음으로 시작부터 앞서 나갔다. 희망찬 순간이었으나 판수를 거듭하자 역전에 역전을 허용하면서 거듭 시소를 벌였다. 엎치락뒤치락하기를 수어 차례. 약 10여 시간에 걸친 대 격전 끝에 종국에 가서는 토털․스코어 8대7로 결국 내가 또 지고야 말았다.
승부의 추는 좀처럼 기울지 않았다. 처음에는 2연승으로 내 쪽에서 곧장 앞서 나갔으나 이내 3-2로 역전을 허용했다. 다시 2연승을 거두어 4-3으로 판세를 재역전시켰으나 또다시 연거푸 패점을 받아 6-4로 상황은 반전 되었다. 분발하여 또 다시 기세를 올리며 6-6까지 따라 붙기도 했지만, 거기까지가 그 날의 한계였다. 끝끝내 지고 만 것이다.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서는 내가 좋아하는 불고기가 식탁에 놓였어도 밥맛을 아예 잃을 정도로 입맛이 씁쓸해했다. 회상해 보면, 그날 처음 이겼던 순간이야말로 진짜 꿀맛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고작 이겨야 한 두 판이지 좀처럼 그를 이긴 전력이 없지 않은가. 그러던 참에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쾌승이었다. 그동안 눈물로 감수해야만 했던 하수신세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맞수로 인정받게 된 쾌거였다.
친구 간에 호적수로 자리 잡은 것은 정작 이 때부터다. 자신감을 얻자 상승세를 탄 김에 백을 잡을 욕심으로 내가 먼저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래서 친구 간의 우정 어린 바둑혈전은 치수고치기로 이어졌고, 최근까지 상호간에 일진일퇴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여왔다.
하지만, 내가 앞서 나가기는커녕 계속 끌려 다니는 입장이었다. 따분하게도 승산은 좀처럼 없었다. 최근에 이르러 겨우 비세를 만회하나 싶더니, 마침내 원․사이드 스토리를 엮어내며 승리의 월계관을 낚아챈 것이다. 난생 처음 맛보는 승리의 환희야말로 실로 통쾌했다.
상수로 올라선 이 감격. 이 흥분. 모든 세상이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프로기사가 첫 타이틀을 따는 기분이나 아마추어가 프로에 입단하게 되는 그 순간의 희열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내게는 한없이 감미로운 세상이었다. 하늘에 떠있는 햇빛마저도 나의 영광을 빛내주는 조명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멋들어진 그 날의 하이라이트. 그 감격. 졸업반 단짝이기도 했던 친구에게 늘 뒤쳐져 있다는 한스러움. 이제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며 쥐꼬리만한 자존심이나마 되찾는 순간의 희열을 맛보았다. 그만큼 내게는 더욱 뜻 깊은 날로 받아들여졌다.
바둑을 처음 두기는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이다. 당번이라 함께 실내청소를 끝내고 모처럼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방 한쪽 구석에 바둑이 놓여있었다. 친구의 집으로 놀러간 것도 처음이지만, 바둑을 만지는 일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바둑판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역사적인 첫 대국은 이렇게 이루어진 셈이다.
바둑 앞에 스스럼없이 대좌했지만, 바둑 두는 방법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 친구역시도 잘 알지 못했다. 사촌 형들이 두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기만 했지, 실제로는 두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완전 초보였으니 당연히 뭐가 뭔지도 몰랐다. 그런 대로 막상 두어 보니 너무 재미가 나는 것이 아닌가. 귀가 무엇이고 변이 무엇인지, 축이라던가 회돌이라는 용어자체를 그 당시 알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두어갈 수가 있었다.
첫 판에서 나는 패배의 쓴잔을 맛보았다. 그래도 제법 선전한 셈이었다. 중앙을 중시해서 세력작전으로 나아가 한복판을 관통시키며 한참 기세를 올렸다. 귀의 실리보다 월등히 커보였으니 당연히 승리는 나의 것처럼 보였다. 귀의 실리가 더 크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상대방조차도 오히려 내 집이 더 많다고 내심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해 봐도 집 수가 부족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상하기만 했다. 겉으로 보기에 판세는 내 것이었으나 상대방이 차지한 귀와 변의 실리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때맞춰 들어왔던 친구 사촌형의 코치를 받고 나서야 귀가 변이나 중앙보다 집을 짓기가 쉽고 집 수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찌 했건, 첫 판부터 친구에게 당하는 쓰라린 패배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다음 판에서는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두어 기분만은 좋았다. 내 생애 첫 번째 승리였던 셈이다. 종합전적은 3대 1이었으나 워낙 초년생인지라 지는 건 당연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밀리는 기세였으나 첫 승리를 거두어 훗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든 것도 크나큰 소득이었다.
그 때부터 재미 붙이며 지내왔던 장기에 대한 애착심을 잃고 말았다. 바둑에 매료된 이후로 시들해져 아예 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또래 계열에서는 제법 엄청난 고수로 위용을 떨쳐 손위 형을 가볍게 누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우스운 일이 되었지만, 수업시간이 끝나 십분 동안의 휴식시간을 틈타 백짓장에 바둑판을 그려놓으며 열심히 바둑을 두었다. 갈수록 솟는 재미에 공부할 생각도 않고, 수업시간까지 허비하며 선생님 몰래 바둑을 두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무궁무진하고도 오묘 불가사의한 바둑의 매력은 너무나도 멋지고 환상적인 것이었다. 다채로운 변화에 매료되어 자신도 모르게 폭 빠져버리고 말았다. 인생의 진리가 다분히 내포되었다는 바둑의 묘미에 갈수록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틈만 나면 친구의 집을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그 다음 번에 만났을 때는 오랜만에 만져보는 탓인지 첫판부터 졸전끝에 그만 상대방에게 0대5로 완패 당했다. 그렇다면 위축될 듯도 싶은데, 오히려 열 받은 것은 자신이었다. 친구간의 승부욕 탓이었지만, 상대의 실력이 한 단계 위로 높이 본 것도, 사촌형의 도움을 받아 친구의 기력이 일취월장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진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언제고 꼭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만일, 그 때 자신의 기력에 실망하여 진작 포기했더라면, 바둑은 그것으로 영영 끝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늘어난 상대방의 기력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른 도화선이 되었다. 서점마다 찾아다니며 유명인의 바둑 책을 사서 틈틈이 연구를 하게 되었고, 그것을 거듭한 결과 나도 그 이상의 실력을 연마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둑에 맛을 들이자 나는 식구들 몰래 급기야 바둑도구 일체를 사들이게 되었다. 바둑에 매달리다 보면, 자연 실력도 늘게 마련이라지만, 친구 녀석에게 일방적으로 완패 당하고서는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집념이 끝내 결실을 보아선지, 차츰 우리는 호각지세를 이루었다.
일진일퇴라지만, 내기를 걸면 그 판의 결승에 가서는 늘 지는 것이었다. 누적된 패배의 쓰라림으로 얼룩진 억울함과 분통이 마음속 깊이 사무쳐 절치부심해했던 것이 오늘의 결과를 이끌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가 더욱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나 탐내든 백을 졸지에 빼앗아 올 수 있었으니, 상수였던 친구 녀석을 하루아침에 당장 발아래로 끌어내리는 사태라 그야말로 ‘통쾌무비’ 그 자체였다.
이제는 완전히 판도가 뒤바뀌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오히려 분통을 터뜨렸다. 이미 승부가 끝난 마당인데도 한사코 10국을 모조리 채워야한다며 안달복달이다. 떼쓰는 그가 매우 안쓰럽기도 했지만, 워낙 자신이 붙은 터라 마지못한 척 응수해 주었다.
그런데, ‘어라?’ 여유를 부리며 한눈파는 사이에 계속해서 두 판을 지고 만 것이었다. 앞으로 두 판밖에 여유가 남지 않았다. 어차피 한 판만 이기면 백은 무조건 나한테 넘어오게끔 되어 있어 다소 안심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동점이 되려면 연거푸 4판을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질은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발악과도 같이 노골적으로 덤벼드는 것이었다. 끝끝내 친구가 보여주는 끈질긴 집념과 분투는 종전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듯싶었다. 전세가 급진전되면서 뜨끔할 만큼 사력을 다해 덤벼오는 모습에서 판세가 다소 어렵게 돌아갔지만, 엄청난 백병전임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여신은 내 편을 들어줌으로서 그의 희망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 너무 수고 많았어!”
승자의 여유가 만들어내는 첫 인사말이었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던 내가 친구를 되레 신나게 놀려주고 있었다. 그날따라 어깨마저 축 늘어뜨리는 친구의 입에서 비릿한 억지웃음이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돌아서는 친구의 뒷모습이 왠지 측은해 보였다.
‘내가 너무했나?’
일부러 져주고도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승부는 어디까지나 냉정한 것이 아니던가. 다소 미안한 감정도 들었으나 승리의 쾌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긴박감도 있었고 흥분도 되었다. 이후로도 친구는 계속해서 도전해오긴 했으나 이미 실력이 급성장해버린 내게 전혀 상대가 되어주지 못했다.
대국을 시작했다 하면, 승리는 무조건 내 것이었다. 지금껏 당한 분풀이를 한꺼번에 만회하려는 듯 가차 없이 몰아붙였다. 자칫 실수를 저질러 어쩌다 한두 판 진다해도 언제나 저울추는 내 쪽으로 넘어왔다. 이제는 겁을 낼 상대가 아니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종전과 같은 박진감 넘치는 스릴을 더 이상 느껴보지 못했다. 그 정도로 내 실력은 월등해져 있었다.
도전할 때만 해도 창피한 줄 모르고 이기려는 욕심에 마냥 덤벼든 나지만, 상수로 군림하다가 하루아침에 하수로 추락한 친구의 입장은 정말 비참한 것이었다. 모멸감과 패배감에 휩싸여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듯 그 후로는 녀석의 발길이 끊기고 말았다.
학창시절도 그럭저럭 끝이 나고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어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눈이 벌게져라 달라붙던 둘만의 만남은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자연적, 두 사람 사이에도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반상을 마주하며 혈투를 벌여왔던 그날들은 추억의 한 페이지로 영원히 남겨졌다.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 어쩌다 우연히 만나면 옛날처럼 바둑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두어 봐야 한두 판이 고작이겠으나, 한 번 뒤집힌 승부는 영원불변이리라. 이미 승부를 뒤집기엔 세월이 너무 흘렀고, 포기상태가 되어버린 그가 더 이상 두기를 꺼려할 것이다. 천하제일 이창호를 따라잡으려는 숱한 추종기사들처럼, 우리 사이엔 너무나 큰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도저히 게임이 되지 않아 손을 휘휘 내두르는 친구의 얼굴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상수랍시고 거만한 폼으로 어깨를 들썩거리던 모습이라든가 점잖게 담배를 꼬나들고 넌지시 미소를 짓던 폼은 정말 밉살맞았다.
그러던 승자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자 요란 떨던 폼은 어디론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돌아서던 친구의 한심하고도 처량한 모습이 지금도 바로 눈앞에 마주한 것처럼 연상되어 온다.
그 이후로 군에 입대하면서 나는 지금껏 닦아 놓았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가 있었고, 덕분에 최고수의 왕좌를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전에 친구가 보여주었던 특유의 자세 그대로 온갖 폼을 흉내 내며 정상의 쾌감을 향유하며 지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그 친구가 진정한 나의 바둑스승이었지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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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력
□ 호는 정파(情波), 또는 연사(淵史)
□ 월간 문학공간으로 문단 등단 (시인)
□ 제7회 문학공간으로 등단 시부문 신인상 수상
제4회 수필과 비평으로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제12회 문학공간상 시부문 본상 수상
□ 한국문협 및 인천문협 시분과 회원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및 인천지회 회원
□ 한국공간시인협회 및 수필가협회 회원
□ 갯벌문학회 및 서곶벌문학회 회장
□ 제물포수필문학회 및 푸른시문학회 동인
□ 저서 : 시집 ‘그리움이 타는 강’ 수필집 ‘당신뿐이라오’ 등 다수
첫댓글 역시 글쟁이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