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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타고 있는 제암리교회-참혹한 학살현장(1919.4.15.) |
1. 들어가는 말
3.1운동은 단순히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대한 감정적인 흥분을 일으켜 폭발한 운동이 아니며, 이 보다 더 깊은 믿음으로 신앙화 된 민족의식을 지닌 운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의 만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수원의 수촌교회와 제암리교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 두 교회는 서로 20리 사이에 있는 인근 교회로써 다같이 1905년에 설립된 교회이며, 스스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자립교회를 세운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교회는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엡웻청년회의 초대 총무인 조원시(G.H. Jones) 선교사의 순회전도로 설립된 남양교회(1897.4.5.)와 역시 청년활동을 초기부터 지도하신 노블(W.A. Noble) 선교사의 활동으로 설립 된 장지리교회(1893.3.2. 현, 오산지방 장천교회)와도 관계있다.
남양교회는 홍승하씨 집에서 시작되었고, 장지리교회는 장지리에 거주하는 박씨(성명미상)가 노블 선교사를 찾아가 자진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데서 시작되었다. 홍승하 목사는 1907년 신학회 4년 급을 졸업하였으며, 1911년 협성신학교 제1회 졸업하였고, 남양교회, 수원종로교회 등 수원지방 교회개척에 크게 공헌하였다.
수촌교회(水村敎會)와 제암리교회(提巖里敎會)는 이러한 배경에서 청년들이 기독교 신앙과 접하여 스스로 설립하고 전도한 교회이다. 3.1운동 당시 수원지방 감리사는 노블(Noble) 목사였고, 남양교회는 동석기(董錫琪) 목사가 담임하면서 이 두 교회를 돌보고 지도하였다. 동석기(董錫琪) 목사는 1916년 목사안수 받은 분으로, 협성신학교를 중퇴하고 YMCA 청년부 간사로 있는 박희도(당시31세)와 절친한 친구로서 이들은 자주 만나 교통하면서 국내 사정과 세계 동향을 의논하며 기도하던 동지였다.
또한 수원 삼일여학교 교사인 김세환도 박희도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미읍(당진) 감리교회 김병제 목사, 공주감리교회 현석찬 목사, 남양교회 동석기 목사, 이천교회 이강우 목사 등을 3.1운동 거사에 적극 참여할 것을 서명 받는 운동에 앞장 선 분들이다. 이분들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려 했으나, 시간이 늦어 33인 민족대표 명단에 올리지 못한 것이다.
2. 수촌감리교회의 민족구국 독립운동
▲ 복원된 옛 교회(1986년)와 현 수촌교회 |
▲ 수촌교회 설립자 김응태 목사 |
수촌교회는 1905년 3월 10일, 김응태(후에 목사됨)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로, 교회에서 장진학교를 세워 경영하면서 기독교신앙과 민족자주독립 사상을 주도하여 왔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이곳 주민들은 계속 만세운동을 모의하던 중 다시 정소성이 고종황제 인산구경 하러 갔다가 3.1만세대열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인근 동네의 청년들을 규합하고 모의하여 왔다.
이 때 이순모, 차병혁, 차인법, 차희석, 김영쇠, 김흥삼, 백순익, 김종학, 안수만, 김봉우, 김응오, 김교철, 김여근, 김응식, 김황운, 김덕근, 윤영선, 윤수산, 장소진, 김흥식, 장제덕, 정준여, 최장섭 등이 적극 호응하였는데 이들도 대부분 수촌사람으로 교인들이었다.
특히 김교철(金敎哲)은 당시 수촌교회 본처전도사로서 제암리교회를 같이 돌보았고, 장지리교회, 제암교회, 사강교회, 남양교회 등을 담임하며 순회전도 한 분이었다.
이들은 3월31일 발안 장날에 봉기할 때 태극기와 수촌리 깃발을 들고 참여하였으며, 4월2일 밤을 기하여 군민들이 모두 궐기하고, 4월3일 기독교, 천도교, 유교와 합세하여 만세시위 군중들이 수천 명에 이르렀고, 면장 김현목을 앞세우고, 양정면사무소 장안면사무소에 돌입하여 서류를 불태우고 화수리에 있는 주재소로 행진하였고, 그 도중에 군중이 더 증가하여, 약 2,500여 명이 되었다. 왜경은 무차별 발포하였고, 이에 피살되는 것을 보고 흥분한 군중은 투석하며 응전하여 도망가는 왜경 가와바타(川端豊太郞)을 죽이는 등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3. 제암리 감리교회의 민족구국 독립운동
▲ 수원 제암리교회(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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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교회는 1905년 8월 5일, 안종후 씨가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하고 세례 받은 후 귀향하여 설립하고 본처 전도사로 활약한 교회이다. 안종후 전도사는 서울의 박희도와 이승훈 등과 긴밀한 연락을 갖는 중 국내 독립운동 계획을 알게 되었고, 독립선언서를 받아 귀향하여, 1919년3월23일경 밤 안종린 집에 기독교 대표 20명과 천도교 대표 9명이 모여, 3월31일에 일제히 봉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시 기독교 대표는 안종린, 안종화, 안종락, 안종환, 안종후, 안종찬, 안경순, 안무순, 안진순, 안필순, 안명순, 안관순, 조경칠, 강태성과 그 부인 김씨, 홍원식과 그 부인 김씨, 안정옥으로 제암리 주민들이었다. 또한 천도교 대표는 김정현, 김덕용, 김흥열, 김세열, 김상열, 김주남, 김주엽, 김흥복, 김성열, 홍순진이였다.
이 들은 먼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만세삼창을 하고 헌병 분견소와 주재소로 가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는 당시 제암리교회 전도사 강태성의 부인 김씨와 홍원식의 부인 김씨가 중심이 되어 여선교회원들이 모여 그리기로 하였다. 이들은 목표가 결정된 이상 최후까지 투쟁하기로 결의하고, 1919년3월1일 제암리교회 앞마당에 모여태극기를 나눠받고, 안종린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삼창 후 발안 장터를 향해 계속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나갔다.
달려 온 주재소장 사사카(佐板)는 왜경 4명과 함께 달려와 무차별 사격하였고, 이 때 안종후는 총을 맞고 넘어졌다. 군중도 이를 보고 흥분하여 총탄이 떨어져 도망가는 왜경을 1명을 타살하였다.
이 상황이 상부에 보고되어 헌병대장 야리타 도시오(有田後夫)는 헌병을 이끌고 현지로 와서 주모자를 색출키 위해 검색과 야간통행자의 활동을 조사하였다. 이때 안종후(권사)와 강태성(전도사), 김세열, 홍원식 등을 헌병이 만나자 검색할 때, 시위 참여자들은 합세하여 헌병 2명을 타살하였다.
4. 수촌교회와 제암리교회에 대한 일제의 보복
1919년 4월 5일 왜헌 장교 중위를 앞세우고 이른 새벽에 수촌리 마을에 달려들어 이들은 먼저 수촌교회에 불을 지르고, 민가 42호 중 38호를 전소시키고 뛰어나오는 주민을 총으로 사살하였다. 수촌감리교회 김영옥 장로님은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지금도 이곳 땅을 파면 “붉은 흙덩이”들이 나오는데 주민들은 “왜 흙덩이”라 부르며, 왜군들이 불 지르고 무차별 사상하던 일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검으로 찌르고 무차별 살상과 방화로 보복한 후 처인범, 김홍삼, 김덕삼, 백순익, 김종학, 김병우, 김응오, 김교철, 김여근, 김응식, 김황운, 김덕근, 정순영, 이순모 등 14인을 주모자로 잡아가 경성지방 법원에서 재판하였다.
차인범, 이순모는 징역 10년, 정순영 징역 5년, 김홍삼, 백순익, 김여근, 김교철, 김은식 김덕근 등 징역 3년, 김종학, 김응오는 징역 2년6개월 등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루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 반경에는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왜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後夫)가 인솔한 군경 30여 명 1개 중대가 제암리로 밀어닥쳐 주민들에게 훈시할 말이 있다고 속이고 주민들을 제암리교회로 모이게 하였다. 이들은 밖에서 창마다 큰 못을 박고 밖으로 도망 나오지 못하게 한 후 군대가 포위한 가운데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밖으로 탈출한 김정헌, 노경태, 안경순 등을 칼을 휘둘러 난자하게 죽이고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칼에 찔린 중에도 노경태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으나, 나머지 분들은 모두 죽었고, 이러한 일을 알고 달려 온 부인들에게도 총을 쏘아 즉사케 하였다. 당시 강태성 전도사의 부인 김씨도 달여와 통곡하였는데 이를 본 왜군은 목을쳐 죽였고, 시체위에 짚단을 덮어 불질렀다. 이때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은 안종후 권사와 강태성 전도사, 안진순 속장 외 안정옥, 안종린, 안종락, 안종화, 안종환, 안국순, 안봉순, 안경순, 안필순, 안명순, 안만순, 안상용, 조결칠, 홍원식, 홍진순, 김정현, 김덕용, 홍원식의 부인 김씨와 정태성의 부인 김씨 등 23명이며, 그 후 전 부락 30여호를 전소시켰고, 제암리 부근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일가인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6명을 결박하여 뒷산으로 끌고 가 총살시킨 후 짚단을 덮고 불을 질렀다.
이러한 보복현장을 4월18일, 스코필드 박사(Dr Schofield)가 직접 와서 조사하여 보고, 수촌교회를 시작으로와 제암리교회를 방문하였다. 당시 스코필드 박사의 “수촌리(水村里)에서 잔학행위(殘虐行爲)에 관한 보고”를 시작부분은 다음과 같다.
“수촌리는 아름다운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대학살(大虐殺)이 벌어졌던 제암리(提岩里)로부터 7킬로 쯤 떨어져 있다. 나는 1919년4월18일 오후4시에 수촌리 골짜기, 즉 수촌리 마을의 어귀에 들어섰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부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 마을은 불타버렸어요. 교회당도 파괴되고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많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동네 들어가서 한 번 살펴 보세요..., 나는 그 목적으로 수촌마을에 왔음을 밝히고...”(이장락 역음, 스코필드 교열: “우리의 벗 스코필드”, 정음사1962. pp82ff 참조)
스코필드 박사(Dr Schofield)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은밀히 현장사진 몇을 찍어 발표하였으며, 서울 주재 선교사 대표들도 와서 사실을 확인하여 보았고, 당시 수원지방 감리사 노블 목사는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매일신문에도 보도 되었고, 미국 상원에도 보고되어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되었으며,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키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손정도 목사의 “중국 예수교회보에 보내는 글”이란 호소문에도 이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 사건은 일제의 교묘한 위장 선전술을 폭로시키는 계기가 된 민족사건으로도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당시 조선연회에서 수원지방 감리사인 노블 선교사의 보고를 보면(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 제12회 1919년), “교회사업이 3월1일까지 진보하였으나, 3월1일부터 조선독립운동이 시작된 뒤로 교회를 심방한 뒤에는 순사의 조사가 더욱 심하므로, 9월1일까지 교회시찰하기가 곤란하였습니다.”고 하면서, “남양구역 7개 교회가 파괴되었고, 인근의 가옥 329채가 전소 파괴되었으며, 1600여 명이 거처할 곳이 없게 되었으며, 참사자의 수는 분명히 알기 어렵지만 믿을만한 보고에 의하면 82인이고, 제암리와 수촌지경의 신자 334인 중 173인 은 피살 또는 수감 혹은 도피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노블 감리사는 그러나 이러한 참사와 고난 속에도 믿는 마음이 더욱 독실하여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말하기를 “죽음은 어느 때든지 올 것임으로 나를 위해 죽으신 주 예수께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하는데 불신자들은 항상 권하기를 예배당에 가지마라, 왜경이 올까 두렵다“ 하므로, 이것이 어렵습니다.”고 보고하였다. 이는 당시 투철한 순교자적 기독교신앙인으로 역사와 민족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성숙한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5. 맺는말
이상에서 우리는 수촌교회와 제암리교회의 독립만세운동, 민족구원의 역사 참여를 살펴 보았다. 실제로 이 두 교회뿐만 아니라 전국 교회의 교역자와 신도들은 참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참혹한 수난을 당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숙한 기독교신앙으로 이겨 나갔다. 3.1운동 이후에도 계속하여 각 곳에 비밀 결사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상해임시정부와 무장독립군으로도 펼쳐 나갔다. 또한 한국기독교는 국내교회들과 해외 단체들이 연계하여, 독립군을 돕고 투옥된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운동에도 은밀하게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점은 대한애국부인회 사건, 철원 애국단 산건, 대동결사단 사건 등으로 일제에 의해 검거되어 알려졌지만, 이외에도 비밀결사 의병투쟁이 계속되었다. 알렌 클라크는 3.1운동의 결과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1) 기독교인과 다른 동포들 사이의 구별을 철폐시켜 애국과 조국을 위해 고난을 기꺼이 받을 준비가 된 점.
2) 옥에 갇혔던 성도들이 더 큰 영적 체험을 하여 신앙이 돈독하여진 점.
3) 교육에 대한 관심이 더욱 널리 보급된 점을 들면서, “한국민족은 자존심을 다시 찾고 일단 일이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충성을 다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Allen D. Clark: History of the Korean Church. CKSK,1961)
필자는 이제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하며, “선교132년을 맞는 한국 감리교회의 방향”을 찾아보려 한다.
첫째, 한국 감리교회 설립은 선교부의 도움으로만 설립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복음을 받아 자신들의 힘으로 초가집에서부터 선교사나 교역자 없이도 본처 지도자(전도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즉, 선교 받아 피동적으로 교회를 설립한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한국인 스스로가 설립 운영해 나갔다는 점이다. 이 점이 만족의식의 성장과 역사 참여의식이 투철한 요인이 된 점이다.
둘째,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민족의 염원과 만나, 교회를 개방하여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민족의 지도자들이 배출 되었고, 흡수하고, 후원하여 민족구국운동에 참여한 점이다.
셋째, 선교사들은 1905년 이후 미국정부의 입장을 따라 정치에 대하여 중립적 태도와 더 나가서 친일 편향적 입장을 가졌지만, 한국인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역사와 민족문제에 직면하고 참여하였고, 이로써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하여 나갔으며, 교파 종파를 초월 연합하여 대동단결해 나갔다는 점이다.
네째,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운동에서 하나의 통로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그 지역과 환경에서 굴하지 않고 주도자로 적극 참여하고 협력하여, 민족운동(民族運動)을 민중운동(民衆運動)으로 추진해 나갔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와 감리교회는 어떠한가? 내 교회주의, 내 교파주의에 사로 잡혀 있지 않는가? 한국교회는 오늘날 정치와 종교의 영역을 분리시켜, 기득권과 권력에 의지하여 편향된 모습으로 안일한 안주를 바라고 있지 않는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삶의 현실에서 역사참여를 통해 고난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민족에 당면한 자유민주화와 남북통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며 참여하고 있는가? 한 민족 속에 복음화를 이루는 길은 무엇이며 어떠한 삶을 추구하는지를 숙고하고 정책을 수립하여 참여해야 할 것이다. 수촌교회와 제암리교회의 3.1독립운동과 처참한 사건은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ch)
▲ 오늘의 제암리 감리교회와 삼일운동 순국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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