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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지검장과 나무꾼 외 2편
보릿길 (박 정 애)
전매청 근무
2006년 수필과 비평사 등단
대구문협회원
카톨릭 문우회회원
대경상록 아카데미 수필반 회원
제주지검장 과 나무꾼
제주지검장이 성추행으로 연일 TV를 달군다. 너무 놀랄 일이다.
남편은 처음엔 저놈 정신 나간 놈이제 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그 집 가족을 걱정한다. 부모님이 살아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아이들과 부인이 겪을 정신적 고통을 걱정한다. 최고의 권좌에서 법을 다스리면서 국민에게 안정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살펴주는 추앙을 받는 자리가 아니던가? 뉴스를 보면서 한 세대를 뛰어넘어 내 손주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걱정이 된다.
옛 기억이 떠오른다. 1958년쯤이라 생각이 된다.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봄소풍을 가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대구에 볼일 보러 가셨기에 집에 계시질 않았다. 연로하신 할머니와 소풍 준비는 요즘과 다르게 집에서 장만해 가던 시절이다. 김밥을 만들고 계란을 찌고 제사 때 쓰려고 다락 깊숙히 갈무리해둔 곶감도 소풍날은 아버지께서 흔쾌히 내어주셨고 거기다 사탕 한 봉지를 사 가면 최고의 준비가 완성된다. 그걸 다하기에는 아버지 도움도 있었지만 할머니와 준비 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동네 한 장소에서 모여서 함께 가기로 한 친구들은 기다려주질 않고 떠나고 없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12k를 걸어서 가야 하는 장소다. 그것도 산을 몇 봉우리 넘어가는 길이다. 몇 번 가보았던 장소라 혼자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산속에 진달래를 비롯해 온갖 꽃이 한창 피는 5월초 봄날로 기억된다. 꽃과 풀과 산새들의 울음소리와 대화를 나누며 산길을 혼자 걸어가니 한없이 지루했다. 산 중턱마다 군데군데 나무하러 나온 나무꾼 아저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저씨예, 우리 친구들 지나갔습니까?” “그래, 니는 와 인자 가노? 아~까아 갔다.” 라며 한참씩 걷다보면 낯선 아저씨들을 중간 중간 만날 수 있어 무서움과 적적함을 덜어주었다. “야야 조심해 가거래이.” 라며 아저씨들마다 혼자가는 나를 조심하라고 걱정을 하셨다.
20리도 넘는 산에 새벽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군불도 지피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는 가난한 나무꾼들이었다. 농촌에서 보기 드문 여학생 그들은 여학생을 부러워도 하고 또 어느 집 누구네 자녀라고 아는 사람도 드러는 보였다. 배고프고 학문으로는 무식했던 나무꾼 그 나무꾼들이 지금 이 시간에 제주 지검장과 비교가 된다. 생판 낯선 나에게 조심해 가거라는 그 따뜻한 말소리가 60여 년이 다가 오는 지금 생각하면 산골짜기에서 혼자 걸어가는 나를 얼마든지 욕보일 수 있는 여건에 있었다.
지식이 넘쳐나는 사회다. 하나아니면 둘만 낳아 일류 대학 졸업시켜 최상의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며,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족집게 과외수업까지 시킨다. 그것도 모자라 ‘기러기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엄마와 외국에까지 나가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린다. 내 아이를 최고로 만들고 싶은 욕심은 너나 할것 없이 한 마음이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그래 주기를 빌었다.
좀 더 문명이 발달된 나라에가서 배우려고 유학을 갔던 우리 시대의 유학생들, 근근이 비행기표를 끊을 돈만 장만해 타국에 도착하자마자 학비를 벌기위해 가발공장, 식당 흐드렛일 손에 닿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했다는 눈물겨운 유학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들에 고생의 대가로 우리들은 부자나라의 국민이 되었다.
보통 5~6남매 좀 더 많으면 7~8남매를 키웠던 우리 부모들 세대다. 항상 배가 고팠던 시절,끼니를 걱정하며 허기진 배를 멀건 죽으로 배를 채우며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고 대가족이 함께 살며 살아가는 과정이 교육으로 받아 들이던 그 시절, 솔직하게 글을 모르는 나무꾼도 많았다. 해가 뜨면 낮이고 해가 지면 밤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순응하면서 산 그들은 정부도 지도자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자연재해라도 당하면 인간이 잘못해 하늘이 노했다고 자책을 하면서 산 사람들이다.
지금은 사회로부터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도 못 믿을 사회다. 언제 누구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누구도 믿지 못할 사회에 살아가야 할 우리들의 자식보다 손주들의 살 세상이 더 걱정이다. 초등학교 4년생인 손녀가 할머니 우리 동네 성범죄자가 몇 명이라고 선생님께서 이야기해줬다는 씁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폰에 너무 빠져 종일 게임만 하는 손녀가 못마땅해 제 에미를 나무랐더니 요즈음은 아이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엄마가 알아야 하기에 사주지 않을 수가 없다는 며느리의 말을 듣고 보니 참 험한 세상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구나 라는 걱정이 된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지금 나는 소풍갈 때에 그 나무꾼들이 생각이 난다. 그때는 어렵고 힘든 시절이였지만 조상대대로 오랜세월을 동네 어른분들과 어우러져 함께 살았던게 생활이고 몸에베인 교육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동네를 사야된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어린 여학생의 먼 길을 걱정하면서 ‘조심해서 가거래이’ 조심하라는 말은 험한 산길을 다치지 않게끔 잘 걸어가라는 말로 들렸고 그 아저씨도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으리라 믿어진다.
폭 염
박 정 애
‘여름 손님은 범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있다. 연이어지는 폭염에 아들 내외가 애들 다 데리고 불쑥 왔다. 아들이 남들이 다 가는 피서를 가잖다.
저희는 물론이고 처가 모임에서도 이미 다녀온 듯, 그래서 제 부모가 안쓰러운지 당일치기라도 다녀오자고 내외가 함께 조른다. 남편이 “아이고 너들끼리 다녀오너라.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최고의 피서다.”라고 하며 점심을 먹이고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을 선풍기에 의존한 게 우리 내외의 피서였다.
임자를 잘못 만나 온 종일 돌아야 하는 우리 집 선풍기였고, 쉴새 없이 켜져있는 게 TV였다. 폭염만큼이나 열기에 찼던 올림픽 중계도 피서에 한몫을 했다. 평소 못 느꼈던 애국심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특히 여자배구, 남자축구 등 단체종목 아슬아슬한 경기 때는 마치 내가 선수인양 경기에 함몰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일제 강점기, 선조들의 울분을 새삼 통감하게 된다. 일장기를 월계수로 가리고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그 심정,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히루부미의 심장을 향해 총탄을, 이준 열사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장에서의 할복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구국 선열들의 흔적, 나라 잃은 울분 속에서 그때 올림픽은 우리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독립군 후손들이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고려인으로, 지금도 부모님의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조국을 떠나 낯선 땅 이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면서까지 자기 일생과 가족까지 희생시키기까지 하면서 이루어낸 독립된 대한민국, 그들의 선조들 덕분에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 고마움이 미안함으로 다가온다.
친일파와 독립군과의 차이, 친일파의 자식들은 부를 누리며 유학도가고 공부도 많이 했기에 해방 후 요직에 임용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독립운동가들의 대부분 자손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생활로 지금도 나라 안팎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선 일제가 강제로 실시한 호령을 거부한 바람에 호적도 국적도 없이 여순감옥에서 돌아가셨다는 글을 읽었다. 그 후손들 역시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어렵게 살았고 신채호 선생님 호적도 1986년 아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등재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고 말한 어느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TV조선에서 기자와의 대화였다. 가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바친 조상 부모님이 그들에게는 자랑스럽지 않다는 표현이라고 들렸다. 독립운동가들이 대략 60만 명쯤 된다고 했다. 그중 30만 명 가까이는 이름도 없이 순국을 했다는 글을 얼핏 본 적이 있다.
평소에 크게 느껴보지 못했던 애국심이 혼신을 다해 노력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온몸도 가만 있질 않는다. 메달이 결정되고 애국가가 울러퍼질 때 단상에 올라선 선수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애국가를 부를 때 내 눈에도 눈물이 핑글 돌았다. 국가를 대표해 메달을 나라에 바치겠다는 그 일념의 투혼, 내 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겠다는 독립투사들의 그 맘과 무엇이 다르랴! 끼를 받은 장한 아들과 딸들이 자랑스럽고 든든했다.
푹푹찌듯한 8월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달이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 지축을 울릴듯한 함성이 삼천리 방방곡곡을 뜨겁게 뜨겁게 달구었다는 그해 8월의 기쁨, 온 국민은 그 날을 잊지 않는다. 해방둥이인 나는 온 국민의 축복속에서 태어났다. 70년을 훌쩍 지나 할머니가 되었어도, 아니 내가 가고 없어도 영원히 기억할 역사가 인정해주는 대한민국의 해방둥이다.
독립투사들이 일구어준 해방의 열기를 잘 가꾸어온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려워하는 경제대국 10위권을 넘나드는 나라가 되었다. 우리의 희망, 우리의 자랑인 대한의 아들과 딸들은 이 더운 여름날 올림픽 순위 8위라는 선물을 조국에 안겨주었다. 무엇이 이보다 더 값진 피서로 올해 같은 폭염을 이겨내게 할 수 있었을까?
낙엽의 장함을 모르고 떠난 오빠
보릿길 (박 정 애)
2층인 우리 집 아파트에 오색으로 물던 단풍나무가 늦가을 햇살과 함께 거실 창문에 삐쭉 얼굴을 내밀면서 나를 불러낸다. 1,700세대가 넘는 아파트 둘레길을 두 바퀴 돌면 나의 하루 걷기 운동량의 코스다.
나의 걸음으로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데는 거의 20분 가까이 소요된다. 길 건너 산이 있지만 혼자일 때는 마음 편하게 아파트를 돌면서 갖가지 나무들과 대화를 나눈다. 천천히 걷다가 수종의 패를 달아놓은 나무들의 원산지도 읽어볼 수 있는 여유로움도 가져본다.
둘레 길가에 몇 그루 서 있는 플라타너스가 그 장엄함을 잃은 채 잿빛 낙엽이 되어 힘없이 딩군다. 갑자기 예사롭지 않는 이름이 궁금하여 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원산지가 유럽남부와 아시아남부이고 발칸반도와 히말라야에서 많이 자생한다고 적혀있다. 오존과 아황산가스의 흡수력이 다른 나무에 비해 뛰어나 조경수와 가로수의 사랑을 받는다고 자세히 적혀있다.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당당히 자리를 차지해 토종 인양 뽐을 낸다.
위엄과 그 역할을 자랑하면서 그 큰 덩치를 감춰주던 넒은 잎은 늦가을 바람을 못 이기고 속절없이 떨어진다. 옆에 서 있던 침엽수 소나무에게 활엽수 플라타너스는 기가 죽는다. 가을 끝자락에 서 있는 소나무는 더욱 푸르름을 자랑한다. 가늘고 뾰족한 솔잎이 모아져 쌩쌩 불어오는 겨울 바람의 얼굴을 찔러대니 눈보라는 비켜 가고 소나무는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면서 온몸을 보호해 준다.
누군가가 울타리 넘어 두어 평 쯤 둔덕에 골을 만들어 대파, 배추, 들깨를 심어 두었다. 날마다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얼마전 들깨가 잎을 떨구더니 사라지고 없다. 끈으로 허리가 묶여진 배추며 무도 겨울을 위한 가을걷이에 곧 사라질 운명이다. 며칠 전 내린 무서리에 겉잎들이 누르스럼하게 변해졌다. 그 모습이 내 눈에는 얼어 죽기 전에 나를 데려가 달라는 애절한 호소로 들린다.
이런 사철들이 모아져 내 나이는 70회가 넘었다. 한창 일할 인생의 여름철인 40대 때 2대 독자였던 오빠는 갔다. 70대의 내가 맞는 이런 황혼의 맛을 오빠는 보지 못한 채 사 남매의
아버지로서 소임을 못하고 한 가정의 대들보가 무너졌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나이가 넘어 산소를 찾아 고향에 갔다가 고모인 나를 찾아왔다. 짧은 인생이라고 하지만 나는 오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조카들 얼굴에서 오빠가 갈 때의 모습이 비쳐진다.
인생의 사철을 맛볼 수 있음은 신이 주신 선물을 값지고 황홀하게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치송하고 그 속에서 난 손주들의 재롱의 빠져 자식을 키울때 보다 또 다른 행복도 느낀다. 그래도 욕심은 어디가 끝인지 더 채울 것을 찾는 어리석음을 나는 부끄럼없이 행하고 있다는 걸 가끔식 느낀다. 일찍 형제를 먼저 보내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쓰라림이 어떠한지를 알 것이다. 어머니가 가신 후 9개월 만에 오빠를 떠나 보낼 때 어머니의 그리움은 머리에서 싹 사라졌다.
단풍이 무엇인지 낙엽이 어떤과정을 거쳐 떨어지는지도 모르는 채 올망졸망한 새끼들이 아빠의 정을 한창그리워 할 때, 오빠는 벌레 먹은 병든 푸른 잎 수의를 입은 채 떠났다. 단풍의 아름다움도 낙엽의 쓸쓸함도 맛보지 못한 채 조상 부모님이 계신 먼 곳으로 간지가 올해로 30년이 꽉 찼다. 피붙이의 그리움, 남달리 우애가 깊었던 우리 삼남매, 병이 짙어 병원에서 그때만 해도 병원장례가 없어 집에서 운명하라고 퇴원을 강요할 때 내가 죽네사네 울부짖는 바람에 오빠 내외가 우리 집에서 한 달 넘게 계시다가 마지막 운명을 본가에서 했다.
새삼 낙엽이 오빠의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사철이 30년을 더 지났고 낙엽도 30년 떨어졌다. 오늘 운동을 하면서 소임을 다하고 때가 되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쓸쓸함보다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떠나는 인생길 완주자로 보여진다. 나의 인생도 장하다고 위로하고 싶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맞이하는 긴 겨울은 새봄에 태어날 옥동자를 기다리는 잉부의 희망에 찬 고통이라고 나혼자 아지못할 미래에 대해 또 다른 꿈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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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