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하게 그러나 무심하게 / 이훈
난 요즘 내 정원이 더 이상 “보기에 아름답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 식물들이 나의 시각적 대상이기를 멈추면 나의 책이나 노트북, 손때 묻은 작은 지갑처럼 나와 함께 살면서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것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 ‘소중한 타자’들은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돌봐야 하지만 동시에 소유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나는 내 정원에서 이상하게 자라고 있는 수국, 긴기아난, 철쭉들을 바라본다. 이 소중한 식물 타자들에게 좀 더 민감해지고 헌신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 내가 좀 더 가드닝에 솜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어떻게 하든 그들도 이 공간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살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심하고 민감하게, 내 식물들과 오래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이희경, <무심하고 민감하게, 나와 식물 이야기>,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3090300015)
아끼는 마음은 곧잘 괴롭히는 짓으로 바뀐다. 사랑이 욕심이나 학대의 다른 이름이기가 쉬운 것이다. 우리 손녀는 내일로 태어난 지 3년이 된다. 그런데 그 엄마는 3월부터 동네 미술학원에 1주일에 한 번 보냈다. 어린이집에서 지내다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거기로 가는 거라 아이에게는 성가신 일일 수도 있다. 이 꼬마의 입에서 '피곤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아마도 엄마를 말버릇을 흉내 내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에게 보내온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물감을 손에다 묻히고 여기저기 색칠하고 그러는 거 같았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냥 노는 거랑 구별이 안 됐다. 그런데 지지난주부터 아이가 안 간다고 해서 그냥 집에서 지냈다. 집이 편해서일 테지만 학원에서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맞는 점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나는 ‘제발 아이를 괴롭히지 말자’면서 아동 학대인 거 아느냐고 물었다. 결국 학원을 끊었다. 다행이다. 손녀가, 하기 싫으면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만물에는 근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걸 무시하면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어리다고 부모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패는 곡식 이삭 뽑기”라는 속담대로 일찍 거두려고 욕심을 부리면 결국 일을 망치고 만다. 과정을 제대로 거쳐야 순조롭게 세상이 돌아간다.
그러므로 아기든 나무든 잘 키우려면 그 성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려면 내 마음을 활짝 열고 그들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민감해야 한다. 물론 이러자면 힘이 많이 든다. 공부해서 정보도 찾고 더불어 지내면서 몸으로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저 오는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아끼는 것으로는 모자라 슬슬 내 욕심이 일어나서 대상의 객관적인 성질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대상은 물론이고 나도 함께 괴로워진다. 욕심을 부리게 되어 에너지를 낭비한 나머지 정작 할 일에는 힘을 못 쓰고 상대는 상대는 상대대로 마음에 없는 일을 하게 되니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 결과가 좋을 리가 없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두고두고 나쁜 영향을 미친다.
결국 민감하게 바라보면서도 무심하게 구는 것이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지혜일 듯싶다. 이런 이치를 받아들여야 우리 나무와 아기가 제대로 자란다. 그런데 세상은 반대로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올해는 벚꽃이 다른 때보다 아주 일찍 피었다고 한다. 예년에는 요즘이 절정인데 벌써 지고 말았다. 인간의 욕심이 우리 터전인 이 지구의 기후 질서를 무너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아프다고 하소연하는데도 우리 인간은 듣지 못하거나 그런 척 시치미를 떼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기후 악당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기후 위기 대책이 우리 국격에 걸맞지 못할뿐더러 몇 마리 안 남은 산양이 사는 곳에 케이블카를 놓으려고 드는 걸 보면 저 오명이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도 일찍 피는 꽃 신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음껏 밖에서 뛰어놀아야 하는데 세 살짜리가 학원에 가고 영어를 배운다. 밖에 나가서 놀자는 말만 들어도 웃으면서 나서는 아이에게 할 짓이 아니다.
사랑에 무심이나 적당한 무관심이 깃들지 않으면 둘 다 주체로 서지 못한다. 우리는 노예로 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