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이 첫 작품집을 펴낸 것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1994년 신춘문예로 등단(1993년 시인으로 먼저 등단)한 1년 반쯤 뒤인 1995년 일곱 중단편을 묶어 냈던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이 그것이다. 그의 소설집을 읽다보면 당시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소설들이 뿜어내는 때이른 조락의 정조에 당혹감을 느낄 법하다. 그만큼 그의 소설들은 당시 이른바 ‘신세대 문학’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특징과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전통적이다 못해 복고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면모가 보인다. 그의 첫 창작집이 선사하는 당혹감과 문제의식은 시인 허수경이 같은 나이에 상재한 처녀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가 주었던 것들에 견줄 만하다.
한강의 소설들에서 주요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진한 외로움과 피로의 기색을 띠고 있다. 20대 혹은 30대의 그 인물들은 남들이 평생을 두고 겪을 고통과 상실을 이미 맛보기라도 한 양 삶에 지친 모습을 보인다. 평생 몫의 삶을 다 살아버린 자에게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는 법이다. 그의 소설들에서 희망이 “자신의 인생을 지배해온 질기고 부질없는” 것(‘진달래 능선’) 또는 “가슴마다 무작정 들러붙어 꿈틀거리는 미련, 흡사 피를 빨아먹는 환형동물 같은 그것”(‘어둠의 사육제’) 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희망은 위안물이거나 동지이기는커녕 차라리 적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그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저녁빛’의 주인공 재헌이 신음을 토하듯 내뱉은 “무엇으로든, 나 아닌 것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그 물구나무선 ‘희망’의 정체다.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이처럼 다스릴 수 없는 절망과 피로감을 내비치는 것은 그들의 실존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죽은 자의 망령 때문이다. <여수의 사랑>에 실린 일곱편 모두에서 주인공들은 부모거나 형제, 처자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이 가져다준 상실감에 빠져 있다. 그 죽음은 주인공들의 삶을 의미 있던 것과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크게 양분한다. 그 죽음을 계기로 해서 주인공들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을 살도록 저주받는다.
주인공들로 하여금 일상의 행복과 미래에의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범인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해서 소설 읽기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한강의 소설에서 외로움과 피로를 생성시킨 원인으로서의 죽음은 한낱 핑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소설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야속한 죽음들로 말미암아 살아남은 자가 누리게 되는 절망적인 삶의 실상이 된다. 작가가 글쓰기의 공력을 더 기울이는 부분 역시 죽음이라는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현실 상황이다.
죽음에 사로잡힌 자의 암담한 삶은 정원의 진달래 나무를 캐내 불태운다든가(‘진달래 능선’), 가구라곤 아무것도 없는 휑한 아파트에서 밤낮 불도 켜지 않은 채 은둔하거나(‘어둠의 사육제’), 제 물건과 제 몸에 대한 아무런 집착도 없이 다만 여수로 가는 기차표에만 매달리는(‘여수의 사랑’) 식의 기이한 행태로도 나타나지만, 그 삶의 어두움에 호응하는 서정적인 자연 묘사로도 드러난다. ‘저녁빛’의 마지막 부분이 그 한 예다.
“재인은 검푸른 버드나무숲이 저녁 바람을 휘감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잎사귀마다 누군가의 넋이 걸려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누군가의 넋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흐느끼듯이, 애원하는 듯이, 두 팔을 모아 높이 쳐들고 용서를 비는 듯이 숲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삶의 고통과 슬픔은커녕 그것의 기쁨과 즐거움조차도 양껏 누려보지 못했을 나이의 젊은 작가가 어째서 이토록 도저한 절망과 곤핍에 함몰되어 있는 것일까? 그의 대답은 간결하다.
“어둡고 슬픈 게 좋지 않나요? 전 제 소설을 읽은 사람이 슬펐다는 독후감을 들려줄 때가 제일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