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문답의 짧은 경(M44) Cūla-vedalla Sutta
- 대림스님 옮김 『맛지마니까야』 제2권 315-333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그때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를 만나러 갔다.
가서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2. “스님, ‘존재더미[有身, sakkāya], 존재더미’라고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더미라고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인]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을 존재더미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취착의 [대상인] 물질의 무더기[色取蘊], 취착의 [대상인]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취착의 [대상인] 인식의 무더기[想取蘊], 취착의 [대상인]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取蘊],
취착의 [대상인]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인]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을 존재더미라고 하셨습니다.”
“장하십니다. 스님.”이라고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설명을 환희하고 기뻐하면서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다음 질문을 했다.
3. “스님, ‘존재더미의 일어남, 존재더미의 일어남’이라고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더미의 일어남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이니,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非有愛]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일러 존재더미의 일어남이라 하셨습니다.”
4. “스님, ‘존재더미의 소멸, 존재더미의 소멸’이라고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더미의 소멸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그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일러 존재더미의 소멸이라 하셨습니다.”
5. “스님, ‘존재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존재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고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그것은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일러 존재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 하셨습니다.”
6. “스님, 그러면 취착과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는 같습니까,
아니면 취착과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는 다른 것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 취착은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와 같은 것도 아니고,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와 다른 것도 아닙니다.
도반 위사카여,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열망과 탐욕이 취착입니다.
7.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가 생깁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
①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②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③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관찰하고, ④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①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②느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③자아 안에 느낌이 있다고 관찰하고, ④느낌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①인식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②인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③자아 안에 인식이 있다고 관찰하고, ④인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①심리현상들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②심리현상들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③자아 안에 심리현상들이 있다고 관찰하고, ④심리현상들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①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②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③자아 안에 알음알이가 있다고 관찰하고, ④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1)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해서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가 생깁니다.”
8.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가 생기지 않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친견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어서,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느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느낌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느낌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인식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인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인식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인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심리현상들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심리현상들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심리현상들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심리현상들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알음알이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해서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가 생기지 않습니다.”
(*1) 주석서는 이 가운데 ‘오온을 자아라고 관찰하는 것’은
단견(斷見)과 비존재에 대한 견해(非有見)에 속하고,
나머지 셋은 상견(常見)과 존재에 대한 견해(有見)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20가지 유신견 가운데 5가지는 단견에, 15가지는 상견에 속하게 된다.
주석서는 또한 이 20가지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는
모두 道에 장애가 되고, 천상에 장애가 되며,
첫 번째 도(예류도)에 의해서 모두 제거된다고 덧붙이고 있다.(SA.ⅱ.254~255)
9. “스님 무엇이 성스러운 팔정도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것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10. “스님, 그러면 성스러운 팔정도는 형성된 것(*1)입니까,
아니면 형성된 것이 아닙니까?”
“도반 위사카여, 성스러운 팔정도는 형성된 것입니다.”
(*1) "'형성된(saṅkhata)'이란 의도된, 사유된, 상정된, 적집된, 만들어진, 생긴,
[자신의 삶의 흐름에서] 증득되어야 하는(samāpajjitabba)의 뜻이다."(MA.ⅱ.363)
"이러한 7가지 단어들로 이 성스러운 도(ariya-magga)는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임(paccaya-nibbattita)을 보여주고 있다.(MAT.ⅱ.260)
11. “스님, 성스러운 팔정도에 삼학(三學)이 포함됩니까,
아니면 삼학에 성스러운 팔정도가 포함됩니까?”
“도반 위사카여, 성스러운 팔정도에 삼학(三學)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삼학에 성스러운 팔정도가 포함됩니다.
도반 위사카여,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이 세 가지 법은 계의 무더기[戒蘊]에 포함됩니다.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이 [세 가지] 법은(*2) 삼매의 무더기[定蘊]에 포함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의 이 [두 가지] 법은(*3) 통찰지의 무더기[慧蘊]에 포함됩니다.”
(*2) “‘바른 정진(sammā-vāyāma) 등’ 세 가지 법 중에서 삼매(samādhi)는
자기 성질로는 대상에 하나 된 상태로서 집중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진(vīriya)이 노력하는 역할을 성취하고,
마음챙김(sati)이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역할을 성취할 때 그것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예를 들면 ‘축제를 벌이자.’라고 하면서 세 친구가 정원에 들어갔을 때
한 친구가 꽃이 활짝 핀 짬빠까 나무를 보고 손을 뻗어서 꺾으려 해도 꺾을 수 없자 두 번째 친구가 등을 구부려준다.
그가 그의 등에 올라섰지만 불안정하여 꽃을 꺾을 수 없자 세 번째 친구가 어깨를 대준다.
그는 한 친구의 등에 올라서서 다른 친구의 어깨를 잡고 마음껏 꽃을 꺾어 치장을 하고 축제를 벌이는 것과 같다.
이 비유의 적용은 다음과 같다.
바른 정진 등 함께 생긴 세 가지 법들은 함께 정원으로 들어간 친구와 같다. 대상은 활짝 핀 짬빠까 나무와 같다.
자기의 성질만으로는 대상에 하나된 상태로 집중할 수 없는 삼매는 손을 뻗어보지만 꽃을 꺾을 수 없는 사람과 같다.
정진은 [자기 등에 올라서도록] 등을 구부려준 친구와 같다.
마음챙김은 어깨를 주면서 옆에 서 있는 친구와 같다.
마치 한 사람의 등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의 어깨를 잡고 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만큼 꽃을 꺾을 수 있듯이,
정진이 노력하는 역할을 하고, 마음챙김이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역할을 할 때
그 도움을 받아 삼매는 대상에 하나 된 상태로 집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매는 여기서 같은 종류로 삼매의 무더기에 포함되었고,
정진과 마음챙김은 역할로 포함되었다.”(MA.ⅱ.362)
(*3)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와 ‘바른 사유(sammā-saṅkappa)’에서도
통찰지는 자기의 성질로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라고 대상을 꿰뚫을 수 없다.
일으킨 생각[尋, vitakka]이 대상을 계속해서 떠올려줄 때 가능하다.
마치 금세공인이 동전을 손바닥에 놓고 이모저모 살펴보길 원하지만 눈동자의 표면으로는 그것을 뒤집을 수 없으며
손가락으로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야만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통찰지는 대상을 무상 등으로 꿰뚫을 수 없다.
일으킨 생각은 마음을 대상에 기울이는 특징을 가지고 치고 때리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일으킨 생각의 도움으로 치고 뒤집는 것처럼 주어진 대상을 계속해서 받아서 [무상 등으로] 꿰뚫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바른 견해는 같은 종류로 통찰지의 무더기[慧蘊]에 포함되었고
바른 사유는 역할로 포함되었다.”(MA.ⅱ.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