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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믿음 / 시 107:1-9, 마 8:5-13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기적이다. 은사를 받는 그릇이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과 은혜라는 선물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가? 바로 믿음이다. 고귀한 믿음, 진실한 믿음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 은사만이 아니다. 모든 교훈이 그렇고, 모든 진리가 그렇고, 모든 대화가 그렇다. 모든 것에 믿음이 기본이 된다. 나에게 믿음이 없으면 제 아무리 중요한 진리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충고도, 교훈도, 그 귀한 지혜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믿음, 그 믿는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때로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보고 ‘왜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왜 믿음이 적으냐?’라고 책망하실 때도 있다. 큰 믿음, 작은 믿음, 곧 큰 그릇과 작은 그릇으로 말할 수 있다. 큰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지만, 작은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 작은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건강한 믿음이 있고 병든 믿음이 있다. 여러 종류의 믿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가리켜 ‘이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요, 믿음의 질을 말하는 것이요, 믿음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만한 믿음, 이렇게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고 극구 칭찬하고 계신다. 참으로 굉장한 말씀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실 것 같은가? 너희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냐, 어느 정도의 믿음이냐라고 주님은 묻고 게신다. 본문에 보면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셨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사람이다. 더구나 로마군인이다. 그런 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깜짝 놀라신다.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고 크게 칭찬하신다. 마 5장-7장까지는 그 유명한 산상수훈이다. 예수님은 산상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이어 행적으로 옮기신다. 8:1-4절은 나병환자를 고친 이야기가, 5-13절인 오늘 본문은 이방 사람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친 이야기가, 그리고 14-17절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세 사람 모두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주님은 긍휼을 베푸셨다. 당시에는 나환자 만큼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없었다. 노예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방 사람 백부장 집의 노예이니 말해 무엇하겠나? 또한 여자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대였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 점을 보면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인종차별 의식을 초월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천한 병자요, 이방 사람이요, 노예인 그들의 신분을 개의치 않으셨다.
먼저 이방사람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오늘 본문에 이어 마 15장에서는 가나안 여자, 곧 수로보니게 여자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신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가라켜 ‘메칼레 피스티스’ ‘네 믿음이 크다’라고 말씀하셨다. ‘네 믿음은 매가톤급이다, 아주 위대하다’라고 칭찬하신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큰 믿음의 소유자들, 곧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자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둘 다 이방인이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이냐, 이방 사람이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위대한 믿음만 있으면, 그 믿음의 그릇만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믿음이라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이방사람도 천국백성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이라 하겠다. 이제 신분은 묻지 마라. 과거도 묻지 마라. 지금 바로 이 사람이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신분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과거생활에 관계없이 지금의 믿음으로 은혜를 받게 된다. 사람 중에는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믿음만큼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같다. 대체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가 무지이다. 모르고 있다. 도대체 깨달을 능력이 없다. 또 하나는 교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사람이건 노예건 상관하지 않는다. 과거도 묻지 않는다. 좌우간 현재의 믿음만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다음으로 노예의 신분을 생각해 보자.
그 당시 노예는 사람도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이렇게 말했다. ‘주인과 노예는 엄염히 구분되어 있다. 생명없는 종이 도구라면 생명있는 종이 노예이다.’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정도 밖에 안된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행적은 얼마나 위대한가? 종을 사람대접 하셨다. 당시로 보자면 사람아닌 종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종을 사람대접 하지 않는 것은 당시의 문화로는 당연하였다. 로마 시대의 농업전문가인 바로의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농사에 사용되는 도구가 세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 하나가 무생물인 일반 도구이다. 다음은 말 못하는 가축이다. 마지막 하나는 말하는 도구 곧 종이다. 이렇듯 노예는 생활을 꾸려가는 수단이요, 농사를 짓는 도구였을 뿐이다. 우리나라 옛 속담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당나귀와 종의 차이는 말을 알아듣느냐, 알아듣지 못하느냐에 있다.’ 옛날의 노예는 이토록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살았다. 사람들은 노예를 사고 팔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여겼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이 노예를 인간으로 대접하고 영접하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오늘날은 인종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고,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의 차별이 없는 사회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직간접으로 기독교의 혜택을 입은 것만은 틀림없다고 보아야 한다.
로마의 고급장교인 본문의 백부장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 할만하다. 그는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말씀인 눅 7장에서 ‘사랑하는 종’이라고 자신의 노예를 부르고 있다. 보통 사람도 아닌 군인이다. 한마디로 군인은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다. 로마를 반대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죽이는 방법도 오늘날에 비하여 잔혹하기 그지없다. 지금이야 전투기에서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멀리서 총을 쏘아 죽이지만, 당시는 창으로 찌르고 칼로 목을 베어 죽였다.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잔인하고 살벌한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군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의 백부장은 군인임에도 불고하고 노예를 사랑했다. 그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었다. 얼마나 어진 사람인가? 흔하지 않은 특별한 인격의 소유자라 하겠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요즈음 돈푼깨나 만진다고 시건방진 사람들이 많다. 어쩌다 벼락부자가 된듯한 사람들이 돈 몇푼 가졌다고 세상 사람들이 제 밑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 이는 잘못된 행실이다. 우리가 혹 음식점에 가서 심부름하는 종업원들에게 말조심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 가져와라, 저것 가져와라 하며 큰소리쳐서는 안된다. 이는 잘못된 행실이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부드럽고 온화하게 부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신분이나 지위가 남보다 좀 높다고, 남보다 푼돈이나 더 가졌다고 안하무인인 사람이 많은 때다. 하물며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2천년 전 아닌가? 주인 마음대로 사고 팔고, 심지어 죽일 수 조차 있었던 노예이다. 노예를 죽이는 것에는 살인죄도 적용되지 않았다. 노예에게는 인권은 물론 도덕성 따위도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백부장은 노에를 사랑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노예에게 인간적으로 대한, 인도주의 정신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을 한다. ‘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어가나이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선뜻 나서신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이렇게 나서시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와서 간청한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지 않는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백부장의 간청에 응답하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내 사랑하는 종이 병들었나이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실 수 있었던 것은 ‘내 사랑하는 종’이라는 바로 그 말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다. 사랑에는 꼼짝을 못한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인도주의가 마침내 예수님을 감동시켰다. 참사랑은 누구의 마음도 감동시킨다. 참사랑은 돌같이 굳은 마음조차 감동시킨다. 하물며 ‘내 사랑하는 종’이라는 말을 듣고 사랑의 주님께서 어떻게 가만히 계실 수 있었겠나?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응답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응답이다. 헬라 원문에 보면 ‘당장 가서 고쳐주겠다’라는 뜻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시지 않아도 될 일이다. 계신 곳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거나, 어떻게 하라고 일러도 얼마든지 될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신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를 한다. 복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먼저 사랑을 내어놓아야 한다. 백부장이 종을 사랑한 것처럼, 높은 신분의 사람이 천한 신분의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그 마음이 아니고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
신학교를 다니는 어느 백인 학생이 흑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것도 예쁘게 생긴 여자도 아니엇다. 미국에서 흑백의 인종문제는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는 골칫거리이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으로 해결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미국의 흑백인종 문제이다. 아주 골칫거리이다. 그래서 그 백인 학생은 결혼하는 것밖에는 별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평등하다느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느니 말을 하면서 인도주의를 부르짖어도 다 쓸데 없다. 그런데 이 신학생은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흑인 여자와 결혼한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지방색 문제가 참으로 심각하다. 별다른 방법이 없다. 결혼을 하고 서로 사돈을 맺으면 해결될 것이다. ‘친구 한명, 포항에 산다. 결혼은 경상도 여자, 아들만 둘인데 지난 대선때 학교에서 여론조사를 하는데 김대중은 자기만 손들고 나머지는 다 이회창이었다 함’ 노예를 사랑하는 로마의 고급 장교, 예수님은 그의 사랑을 보시고 마음을 놓으셧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마음을 여신다.
백부장, 그 사람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었나?
1. 그 사람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시겠다고 하는데도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하면서 극구 사양을 한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방인은 유대인의 집에 드나들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로마군인은 얼마든지 유대인의 집을 출입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초대받아서 비교적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마는 유대인이 로마사람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그 이유로 몇가지가 잇다. 첫째로, 율법적으로 금하고 있었다. 둘째로, 풍속으로 금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방인의 집에는 우상이 있기에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백부장의 집에 들어가시면 예수님께서는 비난을 받으셔야 한다. 세리의 집에 들어가신 일로 예수님께서 세리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지 않았나? 그 사실을 백부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저의 집에 들어오시는 날에는 당연히 비난을 받으실 것을 염려하였다. ‘나야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지만 예수님을 위해서는 안됩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마음인가?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하다. 저로서야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렇지만 예수님을 모시고 갈 일이 아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이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여기 ‘내 집’이라는 말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백부장의 집은 일반적으로 보아 훌륭한 집이다. 유대인의 집과는 비교가 안 될, 로마 고급장교의 집이다. 화려하고 훌륭한 집이기도 하지마는 정치적 권위로 보아도 아주 격이 높은 집이다. 반면에 영적으로는 형편없는 집이다. 저의 집이 영적으로 형편없으며 자격이 없다고 겸손해 하는 마음, 그 귀한 마음과 인격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다. 이 사람, 예수님을 영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부족하다.’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사람, 참으로 훌륭한 인격자이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도 그러하다. 팽팽히 맞서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저마다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남편은 ‘내가 시집 못갈 여자 하나 구제했지’라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나보다 아내가 더 낫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아내도 ‘내 남편이 참으로 훌륭하다. 나에게는 과분하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삶이 흑자인생이다. 늘상 상대방이 나만 못하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손해보았다는 기분으로 살아보라. 그 생각 그대로 그의 인생은 적자뿐인 인생이 된다. 이 얼마나 우둔한가? 내가 모자라다, 부족하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도 직분이 많다. 내가 집사건 권사건 장로건 과분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셨다고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내게 왜 직분을 주지 않나?’ ‘내가 왜 자격이 부족한가?’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문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부족하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자격이 없다, 감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그 은혜가 참으로 분에 넘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본문에서 백부장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는 더러운 사람입니다. 내 집은 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도덕한 집입니다.’ 신앙과 겸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믿는 사람일수록 겸손하다. 끊임없이 겸손해 진다. 내가 자격이 없다는 마음만큼 귀중한 마음도 없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8-9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언제나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있다는 말씀이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하는 그 마음은 사실 가장 높은 자격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름없다.
2.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8절을 보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말씀에 최우선을 두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여기 이 자리에서 입으로 말씀만하셔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말씀이 능력이다. 예수님께서 한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말한다. 참으로 훌륭한 믿음이다. 직접 찾아오셔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반드시 저의 집으로 와달라고 한다. 여러분, 말씀 하나로 충분하다. 우리 교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교인 전체가 목사가 심방을 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다. ‘내가 여기서 기도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안됩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라고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심방을 가면 마루에서는 안되고 꼭 안방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심방 때보면 자기는 바빠서 외출하니까 사람이 없어도 예배는 드려주고 가야한다는 분도 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주체가 빠졌는데 어떻게 예배를 드리나? 또한 짐승이 아프다고 짐승에게 안수해 달라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복잡하기 이를데 없다. 일반적으로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구역 식구들이 거의다 모인다. 예배를 마치고 옆집으로 가면 또 그 집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늘 그렇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기왕에 모두 모였으면 함께 예배를 드리면 될 것을 꼭 나의 집에서, 그것도 안방에서 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래서 몇 만명 모이는 서울의 어떤 큰 교회에서는 목사 한 사람이 하루에 심방을 30가정 이상을 한다고 한다. 그러니 그 가정에 가서 무슨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나? 안부 묻고 기도 한번 하고 나오면 끝이다. 무당이 그 집에 가서 점괘 하나 뽑아준 뒤 복빌어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심방은 잘못되었다.
본문에 보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요즘은 한 구역 식구가 한 가정에 모여 예배드리고 각 가정의 형편이나 기도 제목을 말한 후 구역식구들과 합심기도하고 심방을 마치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다. 꼭 그 가정에 가서 예배드리지 않아도, 어디에서든지 말씀만 들으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이다. 또한 예배시간마다 교회에 나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충분하다. 다른 교회 교인들을 보면 이런 사람도 있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으려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부흥회마다 이리저리 쫓아다닌다.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대개 조금씩은 병든 심령이라고 보면 된다. 새벽기도회에 나오고, 수요 저녁에배에 나오고, 구역예배에 나오고, 주일예배와 오후예배에 빠짐없이 나오면 되는 것 아닌가? 말씀만으로,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 만져주시지 않아도 된다. 안수하지 않아도 된다. 말씀만으로 된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말씀에 있다고 믿는 그 믿음, 말씀의 생명력을 믿는 그 믿음이다. 그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렸다.
3. 순종의 능력이 있었다.
들어보고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데려오라 하시면 업어서라도 데려오겠다는 생각이다. 이 얼마나 귀한 마음인가?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버지, 말씀만 하세요. 학교에 가라면 가고, 공부하라면 공부하고, 놀라고 하면 그때에 놀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참으로 착한 아이이다. 요즘은 부모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일단 ‘알았다니까요’ 해놓고는 제 마음대로 하기가 일쑤이다. 더는 말을 못하게 한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살 것이든 죽을 것이든 말씀이면 족하다고 하는 믿음만큼 귀한 것이 없다. 순종을 미리 약속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백지수표이다. 우리는 때로 ‘말씀만 하옵소서. 그대로 따르겠나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말씀이 있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떤소리를 한다. ‘말씀만 하옵소서’ 했으면 무슨 말이 떨어지건, 살라고 하건 죽으라고 하건 그대로 따라야 한다. 순종하기로 한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본문의 백부장은 순종이 약속뿐만 아니라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자신의 힘만으로 모자라면 수하에 있는 사람까지 동원하겠다고 한다. 들것에라도 실어 오라시면 수하의 사람을 시켜서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다 발휘하여 순종하리라 한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나?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신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이 말씀을 받은 백부장 또한 얼마나 기뻤겠나? 미안한 말쓰이지만 저는 목사로서 우리나라 교인들이. 아니 우리 갈보리교회 교인들만이라도 다 이런 믿음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자녀들이 다 이러하면 얼마나 좋겠나? 무엇이든 하라시는대로 다 하겠다. 말씀만으로도 병이 나을 줄 압니다마는 데려오시라면 데려오겠다. 기다리라시면 기다리겠다. 모셔가야 한다면 모시겠다. 이럴 떼에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신다. 말씀만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 순종하겠다는 마음이다.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성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 밑에서부터 돌을 하나씩 들고 올라가라 하신다. 제자들이 돌을 하나씩 든다. 들어보니 꽤나 무겁다. 베드로만이 큼직한 돌을 들고 낑깅거리며 올라간다. ‘예수님께서 의자대신 깔고 앉으시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우직하게 들러매고 오른다. 다른 제자들은 자꾸만 돌을 바꾸었다. 좀 올라가다가는 작은 돌로 바꾸기를 여러번 하다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주먹보다 작아져 있었다. 산에 다 오른 후 무슨 일이 일어났겠나? 예수님께서 각자 가지고 올라온 그 돌을 떡으로 바꾸어 주셨다. 무겁다고 더 작은 것으로 바꾼 제자는 이제 먹을 것이 없다. 반면에 베드로처럼 큰 돌을 가지고 힘들게 올라온 제자는 여러 사람과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나의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고쳐서는 안된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나의 지위, 나의 능력을 다하여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이 귀한 믿음을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신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고는 마침내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이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병이 낫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믿음대로, 곧 믿는만큼 되겠다고 하셨다. 믿지 않았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오늘의 우리도 그렇다. 말씀을 100% 믿으면 100%의 은혜가 있고, 50%만 믿으면 50%의 은혜가 있다. 물론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말씀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위대한 믿음. 큰 믿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겠다. 그런 후에야 그 위에 은사를 더하신다. 우리 갈보리교회 모든 성도들은 백부장처럼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1998-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