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품없는 상의 변신 / 이임순
주말이라 손주들이 왔다. 천마차가 든 봉지를 보고 무슨 맛이냐고 물었다. 늦은 시간이라 오늘 낮에 먹기로 했다.
커피 보트에 물을 끓인다. 그 옆에서 다리를 모으고 앉아 책을 읽는다. 손주가 뜬금없이 “할머니, 책상 멋져요.”한다. 잠깐이라 상을 펼치지 않았더니 내 무릎이 책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남편과 둘이 사는 집에 손주 셋이 더 있으니 시끌벅적하다. 조금 전에는 녀석들이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니며 보물찾기라도 하듯 읽다 만 동화책을 찾는다. 아이들을 피하느라 앉은 자리에서 책을 펼쳐 읽은 것이다.
내게는 서너 개의 책상이 있다. 안방에는 옷장 옆에 접이식 상이 있고, 주방에는 식탁이 내가 책을 볼 적이면 책상이 된다. 거실에 주전부리가 들어있는 바구니 곁이며 아이들이 썼던 방에도 다리가 접어진 상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내 간이 책상인 이들은 편한 자리 어디나 방향을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어 좋다.
온전한 책상은 서재 유리창 앞에 자리하고 있다. 앞의 것과 달리 여기는 읽다 민 책이며 볼펜, 메모지 등 잡다한 것이 널리고 중앙에 컴퓨터가 턱 버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상보다 안방이며 거실 등에 있는 간이 상을 즐겨 이용한다. 노트북과 책을 펼치면 책상이 되고 차를 마시면 찻상이 되기도 하며 가끔은 손주의 공부 상도 된다. 무엇보다 용무가 끝나면 없는 듯 자리를 비켜주는 내 애용품이다.
집안 곳곳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각기 다르다. 남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빛을 싫어한다. 밤이면 더 그런다. 안방에는 텔레비젼만 커져 있으면 된다. 그이가 그것과 놀면 나는 책을 본다. 서재의 책상은 자리를 고정해 놓고 지키는 반면 나만의 상은 평소에는 없는 듯 있다 방안 어디든 책이나 노트북이 그 위에 얹히면 제 기능을 한다. 그러다 남편이 잠들 시간이 되면 자리를 옮긴다. 가뭄에 콩 나듯 꿀잠이 들기도 한 데 잠을 자는지 살피는 번거로움보다 마음 편히 거실로 옮긴다.
안방에서는 남편 눈치 보느라 스탠드를 사용하는데 거실에서는 내 마음대로 대낮같이 밝혀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때로는 날이 밝은 줄도 모르고 있다 남편 지청구를 듣기도 한다.
주방의 식탁은 여느 책상과 다르다. 안방이나 거실은 용무가 끝나면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는데 식탁 위에는 읽다 둔 책이며 필기구와 노트북이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밥이 뜸 들기를 기다리면서 보는 잠깐의 여유시간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의 자리다. 너무 빠지는 바람에 가끔은 냄비를 태우기도 하는데 주부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맛을 우려내기도 한다.
버젓한 책상을 두고 왜 변방의 것만 이용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격식을 갖추고 글공부하는 곳은 서재의 책상이다. 일주일에 하루는 여기에 앉아 마리를 짜내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해가며 쓴 글을 고쳐 내 자산을 늘린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남편이 자다 일어나 소변보러 나왔다 불이 커져 있으면 그만 자라고 한다. 내 건강을 염려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면 축복받은 생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재주가 있어도 자기만족을 못 하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싶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잘 쓰든 못쓰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만족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좋다. 그러나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리 치이고 저리 깨지다 보면 힘들 때도 있다. 그런데도 글쓰기를 계속하는 것은 여기서 손을 떼면 다른 일도 중간에 포기하기 마련이라 ‘참을 인(忍)’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 인내력의 한계를 조금씩 더 밀어내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남편은 잠자는 시간에 쓰잘데기 없는 짓 한다고 군담 하며 내 건강을 염려한다. 누가 밤새도록 일을 시키면 하기 싫어 불평하련만 자신을 지키면서 바로 세우는 일이니 이보다 보람 있는 것이 또 있으랴. 이런 아픔과 즐거움이 모여 수필집 다섯 권이 만들어졌으며 또 준비 중이다. 그래서 내가 거처하는 방이면 어디든 보잘것없는 상이 책상 노릇을 톡톡히 한다.
안방과 거실 등에서 쓰는 상은 쓰레기더미에서 주워온 것이다. 먼지가 덕지덕지 낀 것을 깨끗하게 닦아 쓰는데 이들처럼 내 사랑을 독차지하는 물건도 없다.
초등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외갓집에서 며칠씩 지내고 했다. 어쩌면 내 글쓰기의 시초는 외할아버지를 따라 썼던 일기였는지도 모른다. 방바닥에 엎드 글을 쓰는 나에게 외할머니가 밥상을 갖다 주셨다.
밥상이 책상이 된 것은 까마득히 오래전부터다.
첫댓글 서재가 있고, 이곳 저곳에 책상이 있는 이 선생님의 집이 잘 그려졌네요. 그곳에서 손주들이 뛰어다니니 얼마나 귀여울까요?
고맙습니다. 손주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생각을 합니다. 할아버지가 쪽문을 열고 보셨듯이 나도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봅니다.
책이 곁에 있으면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틈을 내서 챙겨 보게 되는데 그런 환경을 만들어
잘 이용하시네요. 집안 여기저기에 책상이 있고 책이 널여 있을 것 같아요.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고맙습니다. 책을 가까이 하려다 보니 여기저기에 상이 책상노릇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