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20
류인혜
* 포로 로마노
괴테는 1786년 11월 1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기행』 161쪽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마침내 나는 이 세계의 수도에 도달했다.!” 로마를 세계의 수도라고 표현한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조감도를 현관 마루에다 걸어놓았다고 한다. 매일 드나들면서 보아온 로마의 지도이다. 그의 일상 속에 들어있던 로마는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었을 것이다. 또 여러 형태로 접한 로마에 관한 사전 지식은 그 도시에 도착한 그에게 어떤 종류의 친숙함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 생각과 감정을 지배한 로마는 성경에서 만난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었다.
파리를 떠난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 북쪽의 밀라노에 도착하여 아래로 내려가며 베네치아와 피렌체를 구경했다. 다시 가방을 정리하여 이탈리아 지도 장화 중간쯤의 로마 근교에 짐을 부려놓고, 장화 발목 부분인 폼페이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와 나폴리를 구경한 다음 짐을 부려놓은 호텔로 돌아왔다. 듬성듬성 건너뛰기를 하듯 이탈리아의 도시 몇 곳을 지나온 것이다.
이제 로마 시내로 들어간다. 비가 내리고 출근 시간이라서 로마로 들어가는 길이 막혔다. 예정보다 2시간이나 늦었다. 지나가면서 보니 바티칸으로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서 있는 줄이 아주 길다. 가이드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하다. 다른 것을 먼저 보고 오후에 들리기로 했다. 여행의 변수는 어디에서나 당연히 생긴다.
비 내리는 로마를 보는 정취도 괜찮다. 예정에 없던 ‘포로 로마노’는 기가 막힌 유적지다. 주변이 온통 회색빛 돌들이다. 하늘을 향해 우뚝 섰던 우람한 건물들이 부서져서 조각으로 누워 있다. 그런 건물의 잔해를 보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이번 여행의 모든 정취가 포로 로마노에서 보낸 짧은 시간 속으로 압축이 된다. 도저히 잊히지 않을 광경을 물끄러미 본다. 영화의 장면 같은, 로마가 왕성하던 시기의 유적들 앞에서 말없이 서 있다.
가이드의 많은 설명 중에 이름을 알고 있는 시저의 이야기는 남아있다. 그는 자신의 치적도 남기고 싶어서 건물을 지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고, 로마의 정치를 이끌어 가던 공회당은 1900년에 복원했다. 가이드를 따라가는 일행과 멀어지자 사진밖에 없다며 임 선생이 카메라를 들이대어 우산을 쓰고 몇 장 찍었다. 내 사진기에 필름이 없는 것을 통탄할 수밖에 없다.
성당 옆에도 개선문이 있다. 지금도 시청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저 멀리 높이 있었는데 2000년 전의 기반 위에 세워진 건물이 현대에도 사용된다고 가이드가 강조했다. 에밀리아 공회 터도 역시 주춧돌만 남아있다.
로마가 재건될 때 많은 사람이 돌이 많은 이곳에서 건축 자재를 가져갔다. 유적들의 훼손이 더 심해진 까닭이다. 신전 터에는 원주 기둥이 남아있는데 밑의 사각 밭침은 우리나라 전탑 모양이다. 벽돌로 쌓아 올린 모양이다. 돌을 딛으며 걷는데, 갑자기 레스피기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가 생각이 났다.
빗물에 젖어 드는 포로 로마노의 유적을 본다. 로마인,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내 눈으로 직접보고 있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은 길을 잘 닦아 놓았기 때문이지만 그 길로 인하여 외부의 침략도 많이 받았다.
일본 사람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내용을 따라가기 힘이 들었는데 눈으로 보니 이해가 된다. 가이드는 그녀가 쓴 내용에 틀린 것이 많다고 한다. 현지에 대한 해박함이 의아했는데 이탈리아 사람과 결혼하여 피렌체에서 살았단다. 돌아와서 나나미의 약력을 다시 읽어보았다. 로마 유학파다.
‘신성한 길’을 걸어서 나갔다. 로마의 사람들은 그 길을 걷는 자신들을 신성하게 여겼다. 로마의 탄생 설화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늑대가 젖을 먹여서 키웠다. 그 조각상은 박물관에서도 가끔 보였다.
숲길을 천천히 걸어 나가니 더 큰 개선문이 있고 그 너머 멀리 콜로세움도 보인다. 포로 로마노에서 보이는 개선문만 네 개이다. 황제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개선문을 세웠나 보았다. 무수한 전쟁으로 인하여 로마의 시민들이 뭉쳤고 그들의 영웅이 나타났다. 개선문 옆에서 네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데 종소리가 울렸다. 12시 정오가 되었나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주 종소리를 듣게 되어 가슴이 뛴다.
기원전 60년에 네로는 로마 시내를 바라보다가 연못을 만들 생각을 했다. 도시를 불태우고 연못을 만들었는데, 기독교인들에게 그 죄를 넘겼다. 박해를 피해서 기독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카타콤이 생겨났다. 카타콤은 아피아 가도 근처에 있다고 다른 기행문에서 읽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포로 로마노의 입구라고 말하는 곳의 반대편으로 들어왔다.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그때 세계도 멸망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제국의 상징인 콜로세움은 서기 75년에서 80년 사이에 세워졌다. 당시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콜로세움에는 관광객들이 올라가 있다. 바티칸으로 빨리 가야 하기에 눈으로만 보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길을 돌아서 또 하나의 개선문,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버스를 탔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2년에 마크센티우스 황제를 패배시킨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서, 후에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되었다. 벽면을 장식한 부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묘사하고 있다. 그 개선문은 다른 개선문의 좋은 점을 가져와서 만들었기에 규모가 크고 멋지다. 왕의 치적과는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것은 많이 모방했다고 한다.
옛날 마차 경기장이었다는 넓은 곳에는 풀이 무성하다.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그 아슬아슬 멋진 경기 장면이 생각났다. 그곳으로 들어가서 힘껏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무엇으로 먹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현지식이라면 빵과 스파게티를 먼저 먹고 튀김이나 채소, 혹은 돼지고기 정도를 먹었을 것이다. 파리와 이곳에서는 돼지고기를 많이 사용하는지 아니면 값이 싸서 그것을 먹이는지 모르겠다.
이탈리아에는 초지가 넓어서 짐승을 많이 키울 수 있었는데 겨울에는 먹이가 부족하여 잡아 저장했다. 대부분 염장 처리를 했는데 그 저장방법에서 고기에 냄새를 지우려는 방법으로 향신료가 발달했다. 후추의 매운맛은 가장 좋은 향신료가 되어, 그것을 수입한 상인은 큰 부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