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에서 만난 갓쓴 어르신. 산청 덕산에 사시는 선비시다.
<21세기문학>(2012. 겨울호)에 김현우 소설가가 수필 "멋있는 모자 쓰기>를 발표하였다.
수필
멋있는 모자 쓰기
김현우
아침저녁 산책을 한다. 어제는 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봉천사란 절까지 오르기도 했고 오늘은 냇가를 끼고 들길을 걸으며 도라지, 콩, 감자, 옥수수, 호박이 자라는 풍경을 감상하기도 한다. 내일은 산을 끼고 도는 갈메산 둘레길을 걸어보리라. 도시의 교외 밭들은 올망졸망 자그마한 뙈기로 제멋대로 생긴 구불구불한 밭둑을 따라 연이어 있다. 농사도 농촌처럼 수입을 보기위한 영농이 아니다. 너무나 작고 좁은 땅이라 경운기도 필요 없고 삽과 괭이로 땅을 파고 뒤집고 손으로 풀을 매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매일 소일삼아 밭에 나와서 얼쩡거리기 보통인 노인들이다. 손바닥만 한 땅에 상치, 고추, 가지. 배추, 무 등등 수 십 가지도 넘는 채소를 심고 그걸 낙으로 삼아 하루를 보내기 대부분이다.
그런 풍경들을 보면서 산책을 하노라면 따가운 햇볕을 가리기 위한 모자 쓰기가 필수적이다.
모자는 산을 오르는 등산객이나 햇볕을 받으며 일하는 농군이나 뙤약볕 공사판의 일꾼에게는 꼭 필요하고 그들의 모자는 실용적인 필수품이다. 공사판 인부에게는 헬멧 같은 둥글고 딱딱한 안전모가 있어야 하듯이 비록 전문 등산인은 아니지만 등산이나 산책을 하는데 모자가 있어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몇 해 전에 시를 쓰는 한 분이 나에게 검정색 베레모를 선물했다.
“이거 써 봐요. 나이가 들면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게 어울려. 이거 외국 다녀온 Y형이 선물한 것인데 그도 머리통이 크고 나도 머리통이 커서 그런지 모자가 작아서 쓸 수가 없어.”
선물하는 모자는 검정 가죽으로 만든 것인데 부드럽고 모양도 예뻤다. K시인은 억지로 내 머리에 모자를 꾹꾹 눌러서 씌워 놓고서 이리 삐딱 저리 삐딱 견주어보며 한참 부산을 떨었다.
“딱 맞아! 이제 주인을 만났구먼. 내가 남의 선물을 물려주는 것이라 생각 말고 쓰고 다녀!. 이런 걸 쓰고 다녀야 문인답지.”
억지춘향에 떨떠름했지만 그 분의 열띤 성의를 굳이 마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예전 사대부는 필수적으로 외출할 때는 의관을 갖추었지. 의관이 뭐야? 두루마기에 갓을 쓰거나 사모를 쓰고 나가야 양반 대접을 받지 않았어?”
“허어! 난 양반도 아니고 사모관대 감투 차림을 할 벼슬아치도 아닌데 뭐!”
베레모를 쓰고 K시인과 헤어졌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걸 벗어서 옷장 구석에 모셔 놓았다. 쓰고 다닐 마음이면 옷걸이에 걸어 두었으련만. 며칠 지나서 K시인의 성의를 생각해서 베레모를 꺼내 머리에 얹고 거울 앞에 서 보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고 우스꽝스러워서 그만 벗어버리고 말았다. K시인은 그 후 만날 때마다 모자를 쓰고 다니라고 독촉을 했지만 우물쭈물 대답을 못했다. 그 모자는 한동안 옷장 속에 있었는데 최근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옷장 속에 처박혀 구겨지고 곰팡이가 피니까 아내가 슬며시 내다 버린 듯 했다.
1950년대 갓쓴 어르신 담뱃대가 좀 길다.
예전 우리 아버지 세대는 갓을 쓰고 다녔다. 지체 높은 양반님 네들은 크고 넓은 양태 갓을 쓰지만 보통 집 남자들은 양태가 별로 넓지 않은 작은 갓이었다. 젊은이나 지체 낮은 사람들은 초립이나 삿갓을 사용했다. 마치 설대가 아주 기다란 골통대를 든 나이 많은 부잣집 노인과 짧고 작은 곰방대를 들어야 하는 머슴과 구분되었듯 모자에도 신분의 차이가 났다. 말총으로 만든 갓은 값도 비싸고 관리하고 보관하기에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쓰고 나갔다 오면 반드시 고운 걸레로 먼지를 털거나 솔질을 하고서 갓집에 넣어 안방 다락이나 선반에 얹어놓거나 갓걸이에 고이 걸어두었다. 행세나 하는 집 사람이 길흉사나 문중 모임에 출입할 때면 반드시 의관정제(衣冠整齊)해야 예의바른 옷차림이라 했다. 상투 틀고 망건 쓰기는 기본이고, 까만 윤기가 빛나는 둥근 갓양태나 하얀 수염 아래로 늘어진 갓끈은 흰 두루마기와 잘 어울려 그런 차림은 비록 학문이 높은 선비는 아닐망정 품위 있는 동리 어른으로 대접받기에 충분했다. 집에서는 맨머리 상투로 있으면 안 되고 탕건을 쓰거나 삐죽삐죽한 관을 쓰고 지냈다.
상투가 사라지자 망건이나 탕건, 갓이나 관도 유건도 사라지면서 나타난 것이 중절모였다. 중절모자를 쓰고 다녀야 신사로 대접받는 세상으로 변하면서 말총으로 갓을 만들던 갓쟁이들은 일시에 실직했을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갓쟁이를 괄시하며 천대를 하던 양반들도 사라지고 말았으니 거침없는 문물의 변화물결에 사라진 것이 참 많겠다.
그러나 요즘 농촌 장날 장 구경을 하러 나가보면 유건이라 불리는 검정 모자가 난전에 나와 있다. 아무리 갓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묘사(廟祠) 같은 집안문중의 행사 때 두루마기를 입고 유건을 쓰는 게 풍습으로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절모가 일반화되면서 나타난 것이 헌팅모자이다. 모자가 날렵하고 챙이 작고 납작한 모양의 이 모자는 사냥꾼이 쓰는 것이라 했지만 일정시대에 왜놈 형사나 형사 정보원 앞잡이들이 흔히 쓰고 다녔다. 그래서 요즘도 그걸 쓰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한 번 더 쳐다보기 마련이다. 꼭 사기꾼이거나 모리배 협잡꾼 같은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덩치가 우람하고 잘 생긴 남자가 그 모자를 쓰면 훨씬 잘 생겨 보이는 것은 또 웬일인가?
농촌 일꾼들이 머리에 무영수건을 질끈 동여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밀짚모자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결 햇빛을 가리기에 편리해 졌다. 밀짚모자는 호맥밀짚이나 보릿짚 대궁을 사용했기에 맥고모자라 불리기도 했다. 밀짚을 먼저 자르고 쪼개 납작하게 만들고 댕기머리를 땋을 때처럼 세 가닥을 서로 엮여서 긴 줄을 만들었다. 호맥 밀짚은 길고 굵어 만들기가 손쉽지만 사람이 일일이 땋아야 하기 때문에 195~60년대 농가 아녀자의 부업으로 각광받았다. 밀짚으로 만들면 밀짚모자, 보릿짚으로 만들면 보릿대모자로 불리었는데 이제는 국산은 어느 곳에도 없고 모두 베트남 제나 중국제가 상점에 널려 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남아있는 학생모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는 그런 모자를 쓰고 다니는 학생들이 없지만. 교복은 그냥 존속되건만 교모(校帽)는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두터운 검정 베로 만든 학생모는 1학년 입학 때 사 쓰면 졸업할 때까지 3년간을 쓰고 다녔으므로 때도 묻고 땀에 절어 냄새도 났다. 모자챙 위에 달고 다녔던 한문으로 된 <中>, <高>자의 모표(帽標)는 학교의 자랑이고 자부심이며 긍지였다. 그래서 학모를 쓰고 다녔던 시절이 즐겁고 그리운 추억으로 가득 찬 세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자챙이 길고 둥근 운동모는 학교운동회 때 꼭 쓰는 모자이기도 했다. 운동모가 지금은 하얗고 노랗고 빨강 파랑…… 색깔도 다양화해 졌고 행사에 참석하면 으레 하나씩 얻어 쓰기 마련이었다. 운동모자는 이제 일반화되어 운동회 외에도 여행을 갈 때 일행을 알아볼 수 쉽게 하기 위한 용도로 수십 명의 관광객에게 통일된 색의 똑같은 모양의 모자를 씌워 주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 아니다. 범죄자들이 등장하면 꼭 운동모가 그 사람들의 머리위에 얹어져 얼굴 감추기 용으로 사용되어 기가 막힌다. 곧 ‘범죄자=운동모 쓴 자’ 같은 등식이 성립되어 운동모를 쓰고 나가기가 꺼려질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어떤 대기업 주최 걷기대회에 참가를 했더니 종이로 엮어 만들었다는 하얀색 중절모자 형의 운동모자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 둥근 형의 등산모자가 유행을 탔다.
요즘은 중절모자가 늙은이들의 전유물이 된 듯하다. 모양이나 색상도 다양해져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의 중절모라면 거개 검정색을 단연 으뜸으로 쳤는데 지금은 회색, 흰색, 카키색에 알록달록 무늬도 예쁘게 디자인되어 상점에 나와 있다. 내 마음에 드는 색, 모양을 찾아 쓰고 나서면 한결 나이가 젊어 보일 듯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망설이는 건 중절모를 쓰면 그만 나이가 팍 들어 폭삭 늙어버린 노인의 모양새가 될까 두려워 선뜻 모자를 사지 못한다.
첫댓글 컴으로는 수필이나 소설은 읽기가 좀 힘듭니다.
눈이 굉장히 피곤하네요..ㅎㅎ
그래서 종이책이 아직은 좋은가 봅니다.^^
고전이네요...그래도 이런 흔적들이 후세에 큰 가르침 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