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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육십령-남덕유산-백암봉-빼재
0. 위치 : 경남 거창군 함양군, 전북 장수군 무주군 0. 코스 : 육십령-할미봉-서봉-남덕유산-삿갓봉-무룡산-백암봉-빼재 (상행)
새벽 5시50분에 육십령에서 들머리를 찾았다. 서녘에 삼월열여드레 둥근달이 걸리고 동녘은 붉게 물들며 맑은 햇살이 힘차게 번져나고 있다. 그야말로 밤과 낮이 임무교대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코스는 지난번에 올랐어야하나 산불경방에 뒷전으로 미뤄놓았었다. 상큼한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산을 오른다.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한 아름 햇살을 받아 안는다. 신선한 바람이 살짝 스친다. 잠시 후 바위가 우후죽순처럼 솟은 할미봉을 오른다. 대포바위(남근바위)는 임진왜란 때 북상하던 왜군들이 봉우리에 엄청나게 커다란 대포가 설치된 것을 보고 기겁을 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넘는 길이 무척 가파른데다 험하고 낙석까지 염려되는 다소 위험한 구간이기도 하다. 계곡은 녹음이 우거지고 취나물이며 밤새껏 돋아난 고사리가 주먹을 불끈불끈 쥐고 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남덕유산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서봉에 오른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석간수가 나온다. 언젠가 갈증에 톡톡히 신세를 진 약수이기도 하다. 잠시 조망을 한다. 지난번에 휘돌았던 백운산이며 영취산과 장안산에 그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육안으로 보기엔 흐릿하니 윤곽만 살짝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만 해도 천오백 고지이다 보니 심한 기온차로 7부 능선 위쪽은 아직껏 회색빛 겨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아랫녘은 하루 다르게 나뭇잎이 푸르며 옷자락을 휘날린다. 수없이 피었던 꽃들도 잠잠해지며 정원이나 공원에 영산홍이 마무리를 짓고 있다. 펄럭펄럭 녹음으로 뒤덮이며 숲을 이룬다. 그야말로 숨 가쁘게 세상이 변하는 모습을 실감한다. 청보리 이삭이 까끌까끌한 수염을 휘날린다. 이따금 따가운 햇살은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열게 하고 시원한 바람이 은연중 그리워지는 봄을 넘어 여름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한참 환절기로 다소 어수선하다. 저쪽 나무들의 고운 자태와는 달리 아직도 헐벗은 몸뚱이는 꾸물꾸물 이제 겨우 하나둘 새싹이 움트고 있다. 무르익은 봄에서 적어도 몇 주 이상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지 싶은 모습이다. 계곡이 깊은 만큼 산도 높지만 계절이 느린 걸음으로 찾아오고 있다. 저 아래서 연초록 물이 서서히 젖어 올라오는데 능선은 진달래꽃이 자랑스럽게 피어나고 있다. 펄쩍 건너뛰어도 좋을 성싶은 남덕유산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늘이 없어서 따가운 햇살에 벌써 날벌레들이 귀찮게 한다. 높은 산이라고 꼭 좋고 낮은 산이라고 그냥 부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산에 가면 산속에 푹 빠져버린다. 그냥 산만 보고 있으면 그 산이 그 산으로 지루하기만 하다. 하늘에 별자리를 보듯이 동서남북 사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가 어디쯤 될까.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를 조망한다. 유명한 산이면 더 좋다. 그곳을 기준점으로 방향을 가늠하며 현 위치를 알 수 있다. 산에서는 그 산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어느 정도는 떨어져야 비로소 다른 모습의 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알고 보아야 더 다정다감하게 한 발 다가서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잠시 둘레둘레 둘러본다. 남도 명산들이 거칠 것 없이 들어온다. 그러나 지리산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아쉽다. 저 줄기를 타고 넘으면 남령에서 월봉산으로 다시 우측에 거망산 황석산이요, 좌측에 금원산 기백산이다. 돌아서면 북쪽 끄트머리에는 향적봉(북덕유산)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마치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싶다. 계곡에서 몽실몽실 꽃구름이라도 피어오르는 양 환상적 세계인 신록을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다 그 속에 빠져서 취해 본다.
넘쳐난 여유로움 넉넉함이여 향적봉에서 남덕유산 모두 끌어안은 따슨 가슴 구천동 깊은 물소리에 옷깃 풀어내 한 포기 꽃으로 피어나리. 가뿐한 발길 동행하며 외롭지 말라 조각구름 한 점 따라 나서네. - 남덕유산에서
지난 한겨울에 덕유산 종주에 나섰었다. 곤도라를 타고 설천봉에서 향적봉을 올랐다. 향적봉에서 눈발이 날리나 싶더니 동엽령을 지나 무룡산 가는 길에 함박눈이 쏟아져 배낭에 눈을 짊어지고 갔다. 삿갓재대피소에 다다르니 30분 전에 입산통제 기상특보가 내렸단다. 그래도 어쩌랴 미끄러질 듯 정신이 번쩍번쩍 내딛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은 발자국을 지우고 눈을 모퉁이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하늘에서 풀풀 내려오는 눈은 청순함 그대로다. 나뭇가지며 묵은 풀잎에는 목화송이가 피었다. 훅~, 크게 숨이라도 내쉬면 금세 날아갈 것 같아 조심조심 숨을 멎게 한다. 보기 드문 천상화원 백화였다. 온천지를 하얗게 표백한 별천지 설원이었다. 어느 하나 가슴을 설레게 하지 않는 것이 있었던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요 한 장의 사진이요 마음 속 이상의 세계였다. 그런 풍경 속에 눈꽃 산행이었다.
조화다 참으로 조화 속이었다. 온통 눈밭에 마른 풀이며 나무들이 꽂혀있었다. 어디 그뿐이냐, 그 큰 나무들이며 바위까지 정교하게 배치하여 놓은 꽃꽂이 작품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요정 같은 마른 낙엽 하나가 사르륵 굴러갔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신기한 몸짓이었다. 그 위로 성큼성큼 발도장을 찍다가 살짝 뒤돌아본다. 선녀 옷자락 같은 천에 삐뚤빼뚤 멋대로 어지럽힌 상처가 내 뒷모습이던가? 이제 계절이 바뀌고 그 길을 반대방향에서 가고 있다. 더위 탓인가 그때의 많은 눈이며 모질었던 바람까지 그리움을 몰고 온다. 앙상했던 숲은 생기가 넘쳐난다. 연초록이 초록으로 다시 진초록으로 탈바꿈하며 출렁이는 순수의 물결로 정겨운 눈빛이요 반갑다는 손짓에 애교스러운 몸짓이기도 하다. 봄은 신록의 계절 여름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바탕 현란한 초록의 잔치다. 무딘 가슴에 초록물이 번진다.
그냥 내키는 대로 저들을 보라. 웅크렸던 저 속에 패기가 용솟음치며 생동감이 나부끼고 있다. 꿈의 나래를 펼치며 흥건한 기쁨에 젖은 환희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사월을 넘어 오월을 딛고 하루가 다르게 도약하고 있다. 생명의 빛 초록의 깃발을 보란 듯이 펄럭이며 뭉클뭉클하도록 춤판을 펼친다. 그대로 한 편의 그림이요 음악이고 시이며 수필이다. 넘친 풋풋함에 행복 하노라고 외치고 싶은 날이다. 백두대간 길은 좀은 단순하고도 외로운 길이다. 목표점을 향해 그저 앞만 보고 묵묵히 가야 한다. 그만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자신과의 싸움으로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열심히 능선을 오른다. 누군가 다듬어 놓은 길목에 고마움을 남긴다. 곁눈질로 꽃도 보고 이따금 하늘에 구름도 바라보며 작은 새 울음에도 감미로움을 느낀다. 스쳐가는 바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언제 물 한 컵이 이토록 절실했을까. 언제 시원한 맥주 한 컵이 이토록 간절했을까. 언제 바람 한 줌이 이토록 그리웠을까. 언제 과일 한 조각이 이토록 맛났을까.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함께 비척비척 가는 사람이 그렇게 미덥고 다정할 수가 있을까. 산에서는 복잡한 것보다는 홀가분한 마음 빈 주머니가 더 멋져 보인다. 처음 만나도 금세 반가운 사람으로 다가선다. 소박한 마음으로 좋은 체험을 한다. 오늘 같은 봄날에 산길을 가는 것은, 백두대간을 가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텅 빈 듯싶던 산자락이 서서히 채워지며 윤기가 넘쳐 활기를 되찾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저들을 보라. 어느 하난들 신기하고 대견스럽지 않느냐?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더니 이를 두고 일컬음인가. 숲은 이제 한 해의 시작으로 힘차게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 시작이 얼마나 황홀하며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느냐.
저 합창소리가 들려오는가. 아니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있는가? 저들과 함께 산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보는 거다. 비록 잠시나마 자연 속에 하나의 개체로 그들과 마음을 나누고 호흡을 같이 해보는 거다. 이보다 더 진지함에 보람이 있는가. 그러나 갈 길이 멀다. 걷고 걷다 지치면 쉬듯이 마음도 방목을 한다. 몸은 다소 무거워도 마음은 가뿐하니 편안해짐은 자연이 주는 크나큰 선물이 아니더냐. 월성재를 넘고 삿갓봉을 넘어 삿갓골재대피소에 닿는다. 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무룡산을 타고 오른다. 여름이면 온통 원추리꽃이 곱게 수놓는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새순이 옥수수포기처럼 무럭무럭 커나고 있다. 더운 날씨에 계단을 타고 할딱할딱 올라서니 이제 동엽령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허리춤에 닿는 산죽이 지천으로 깔렸다. 너무 오밀조밀하여 바람마저 들어오지 못해 열기로 후끈거린다.
동엽령을 지나 백암봉(송계사삼거리)이다. 여기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대간은 오른쪽 능선으로 지봉을 넘고 대봉을 넘어 빼재까지 가야한다. 그러나 일부는 반란을 꿈꿨다. 수업 몇 시간쯤 빼먹고 아니 조퇴를 하고 이탈을 택했다. 그냥 덕유평전으로 직진을 하여 중봉에 올랐다. 중봉의 바람은 거세다. 이 바람이 평전에 꽃밭을 가꾸고 천년 주목을 키우며 구상나무를 담금질하여 강하게 키워낼 것이다.
*. 2007년 05월 05일 11시간 30분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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