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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제가 개인적으로 국내프로야구 선수중 가장 좋아했었던 한국 최고의 좌완투수였던 삼손 이상훈 선수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개해 드리고 싶은것들이 너무 많아서 상당히 장문이 되었습니다.
정말 파란만장하고 한편에 영화와소설 같은 선수생활을 한 이상훈 선수 지금부터 시작합니다.(글이 상당히 긴점은 양해바랍니다.)
[이상훈 한국프로야구시절 역대기록]
연도 | 소속 | 평균자책점 | 승 | 패 | 세이브 | 이닝 | 피안타 | 탈삼진 | 4사구 | 실점 | 자책점 | ||
1993 | LG | 3.76 | 9 | 9 | 0 | 150 2/3 | 129 | 131 | 78 | 65 | 63 | ||
1994 | LG | 2.47 | 18 | 8 | 0 | 189 2/3 | 140 | 148 | 64 | 58 | 52 | ||
1995 | LG | 2.01 | 20 | 5 | 0 | 228 1/3 | 150 | 142 | 51 | 61 | 51 | ||
1996 | LG | 2.54 | 3 | 3 | 10 | 99 1/3 | 70 | 95 | 42 | 32 | 28 | ||
1997 | LG | 2.11 | 10 | 6 | 37 | 85 1/3 | 56 | 103 | 27 | 23 | 20 | ||
2002 | LG | 1.68 | 7 | 2 | 18 | 85 2/3 | 53 | 92 | 33 | 18 | 16 | ||
2003 | LG | 3.34 | 4 | 4 | 30 | 56 2/3 | 42 | 55 | 21 | 22 | 21 | ||
2004 | SK | 5.14 | 0 | 3 | 3 | 14 | 11 | 15 | 9 | 8 | 8 | ||
통산 | 2.56 | 71 | 40 | 98 | 909 2/3 | 651 | 781 | 325 | 287 | 259 | |||
야생마의 출현
1992년 봄...
고려대 좌완투수 한명이 9시 뉴스에 소개 되었다.
프로야구 선수도 아닌 대학 야구선수가 스포츠 뉴스도 아닌 정규뉴스에 등장 하는 것 은 야구 붐이 일었던 당시에도 이례적인 일이였다.
투수의 이름은 이상훈
대학춘계리그 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14타자 연속 탈삼진 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면서 이상훈은 야구판에 자신의 존재를 화려하게 드러낸 것 이다. "150km/h 를 던지는 왼손투수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온다" 라는 말처럼.
당시 선수지명권을 가지고있는 OB와 LG는 이선수를 잡기위해 별의별짓을 다했다고.
그리고 1992년 늦가을 이상훈은 연고지 우선지명권을 획득한 LG트윈스에 신인 사상 최고의 금액인 2억을 받고 입단을 하게 된다.
93년 9승 9패 방어율3.76 이닝150 2/3 탈삼진131
1년 전만 해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상훈이 아마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한 것은 1992년 4월 대학 춘계리그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14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면서부터였다.
서울고와 고려대를 거친 이상훈은 92년 당시 역대 신인 최고액이던 2억원에 LG 트윈스에 입단 계약금 1억8천8백만원과 연봉 1천2백만원을 합쳐서 총액2억원
프로야구 출범 이후 12년만 에 연봉 2억원 시대를 열었습니다.
데뷔해인 93시즌 전반기에는 좋은 경기내용을 보여 주었지만, 후반기에는 체력저하와 부상이 겹치며 최종성적은 9승에 그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훈에게 신인왕이 돌아갈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1993년 너무나 걸출한 천재들이 데뷔했던 그해...
양준혁과 이종범은 팀을 각각 1위 2위로 만들어 놓은 쾌거를 기록합니다.
신인 투수에게 9승은 적은 승수가 아니지만 프로입문 동기인 양준혁이나 이종범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이상훈은 그 아쉬움을 깨끗이 씻어냅니다.
93년 양준혁 타율0.340 홈런23 타점90 도루4 최우수신인왕
이종범 타율0.280 홈런16 타점53 도루73
93년 플레이오프 (4경기)1승 방어율0.00 이닝14과2/3 탈삼진14 안타6 자책점0
94년 당시 이상훈 선수의 모습 94년 LG트윈스 우승의 순간
94년 18승 8패 방어율2.47 이닝189 2/3 탈삼진148
프로2년차 18승으로 조계현과 공동 다승왕을 차지하며 LG의 두 번째 우승에 기여한다.
지금도 LG트윈스 팬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그 '新바람 야구'의 절정을 이루었던 94년
유지현-김재현-서용빈으로 이어지는 신인 3인방
한대화-노찬엽-최훈재등의 할때 해주는 노장 한방타선
선발 투수 이상훈-김태원-정상흠-인현배 4명의 10승투수 라인업에 마무리는 김용수
94년 한국시리즈에서 LG트윈스는 역대최강의 전력으로 태평양을 상대로 4연승하며 우승
데뷔2년차에 이상훈은 18승의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며 팀을 우승하는데 일조합니다.
그리고 타자앞에서 150km/h의 공을 뿌리는 이 선수를 사람들은 삼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94년 한국시리즈 (2경기)1승 방어율2.19 이닝12과1/3 탈삼진12 안타12(홈런0) 자책점3
1994년 한국시리즈 LG-태평양 (하이라이트)
체력93 컨트롤95 포심84 S-커브88 슬라이더88 SF볼88
95년 20승 5패 방어율2.01 이닝228 1/3 탈삼진142
95년은 이상훈 선수생활의 최정점이었습니다.
LG가 자랑했던 그 신인 3인방들은 서용빈을 제외하면 유지현은 시즌 중반에 빠져야했고, 김재현은 2년차 징크스에 허덕이고 있었으며,한대화는 더이상 예전같지 않은 그시절...
LG가 연패를 거듭할때도 팬들은 에이스 이상훈의 힘을 믿었습니다.
90년 선동렬 이후 5년만에 20승을 거두며 다승왕을 2연패하고 승률왕까지 차지한 것.
228 2/3이닝(1위)을 던진 이상훈은 12번의 완투(2위)와 3번의 완봉(2위)을 기록했으며, 안타 150개, 볼넷 48개, 사구 3개를 허용하며 피안타율 0.219,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 0.88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일궈냈다.
특히 20승이 모두 선발승이어서 그 가치는 더욱 빛났다.
하지만 정규시즌에서 누적된 피로탓에 포스트시즌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시즌 MVP도 라이벌 OB의 김상호에게 돌아갑니다.
최악의부진 -플레이오프(롯데전)
95년 플레이오프(3경기)1패1세이브 방어율10.38 이닝8과2/3 탈삼진6 안타10(홈런3)자책점10
이듬해 척추분리증으로 고생한 이상훈은 마무리투수 로의 전향을 선언한다.
마무리로 변신한 이상훈
체력64 컨트롤71 포심78 S-커브65 슬라이더66 SF볼68
96년 3승 3패 10세이브 방어율2.54 이닝99 1/3 탈삼진95
96년도 역시 문제는 무리한 투구였습니다.
이미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성 어깨탈구와 손가락 혈행장애라는 고질적 질환으로 인해
96년에는 선수로 뛰는 시간보다 재활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선발과 마무리를 왔다갔다 했지만 부상을 가지고 있는 선수치고는,그래도 이상훈은 여전히 언터쳐블 이였습니다.
이상훈이 무너지면서 그해 가을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점을 본다면,이상훈이 LG에게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것인지 알수가 있습니다.
체력55 컨트롤82 포심82 S-커브87 슬라이더86 SF볼80
97년 10승 6패 37세이브 방어율2.11 이닝85 1/3 탈삼진103
1년을 건너뛰고 다시 돌아온 1997년, 이상훈은 마무리 투수로 변신을 했다.
나오는 시기만 바뀌었을 뿐 이상훈의 위력은 1995년 20승 투수의 위력 그대로였다.
이상훈은 그해 57경기에 등판해 10승 6패 37세이브, 평균자책점 2.11을 기록 구원부문 1위
이상훈이 기록한 47세이브포인트는 당시 프로야구 신기록이었다.
85 3/2이닝을 던지며 103개의 탈삼진을 뽑아냈을 정도로 구위 또한 위력적이었다.
최고의 선발 투수 이상훈은 다시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프로야구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97년 LG트윈스는 3년만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은 이종범의 해태 타이거스가 아홉번째 우승을 차지합니다.
97년 플레이오프 (4경기)2승2패 방어율 4.66 이닝9과2/3 탈삼진10 안타7(홈런2) 자책점5
한국시리즈 (1경기) 1패 방어율13.50 이닝2과2/3 탈삼진 2 안타5(홈런1) 자책점5
이상훈-직구구속과 구질
사실 94-95년 이상훈의 직구는 왼손투수 중에는 가장 빠르고 위력이 있었죠,
구위자체는 왼손투수 뿐만 아니라 최고 투수라는 평까지 나왔을 정도입니다.
직구는 가볍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96년 부상으로 마무리전환이후 이미지가 그렇게 굳어진거 같습니다.
97년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의 결정적인 피홈런으로 굳혀진거 같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만루홈런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종범에게 결승3점홈런을 허용
둘다 직구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직구 최고스피드는 151km/h
커브는 95년 한방송프로그램에서 "올해최고의 커브"선정-이상훈 투수의 가장 대표적인 변화구
SF볼은 95년도 전성기 시절 낙차가 크고 상당히 인상적 이었다고 합니다.
슬라이더 130km 전후로 형성,빠른속도에 각이 좋은 편이라 타자들 카운트 잡기에 사용
해외진출
이상훈의 해외진출은 장편소설을 방불케 합니다.
LG의 좌완투수 이상훈도 온갖 우여곡절 끝에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 합류했다.
LG구단과 보스턴 레드삭스의 사전계약,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공개입찰 등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수모를 겪다 미국진출이 끝내 무산된 이상훈은 야구선수로서'국제미아'가 될 뻔하다가 간신히 주니치에서 새로운 야구인생을 열게 됐다.
미국메이져리그 진출실패
선발로 20승, 마무리로 47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한 이상훈은 1997년 시즌을 마친 후
데뷔 첫 해 계약금을 놓고 이견을 벌이던 구단에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97시즌이 끝난 후
돌연 미국 진출을 선언합니다. LG 역시 개성이 강해 구단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던 그의 해외진출을 허락합니다
1997년
11월 10일- 마무리훈련 불참 메이져리그 진출의사 발표
12월 24일- 보스톤과계약 공식발표 (임대료 250만달러,이상훈 2년연봉 220만달러)
그러나 일은 그렇게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메이저리그사무국(MLB)의 빌 머레이 운영국장은 "보스턴과의 독점적인 임대계약은 다른 팀에게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마찰의 소지가 있다"면서 이상훈의 미국진출이 잠정유보됐다고 밝혔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포스팅 시스템이었습니다.
일본구단들이 이 제도로 많은 수혜를 받는데 이 시스템의 최초의 선구자는 이상훈이었습니다.
1998년
1월 21일- 이상훈 신분조회(MLB는 공개테스트를 거쳐 전구단이 공개입찰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일찍이 없었던 스카우트 방식이었다. 공개테스트라는 것은 한국 최고의 좌완투수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문제였으나 매니저를 자처하는 주변인물들에 이끌려 이상훈은 미국으로 가게 된다.
2월 16일- 미국 LA 도착
2월 20일- 공개테스트
MLB는 "이상훈의 공개훈련을 지켜본 결과 피칭할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님을 확인한 일부 구단의 항의가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여 공개입찰 시기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바꿔 말하면 불합격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3월 1일- LG정상흠 투수코치 파견(이상훈선수의 훈련을 도와,고액으로 어느구단에라도 낙찰을 기대)
3월 26일- 2차 공개테스트
4월 7일- 보스톤 48시간 안에 새로운 제안 제시 (LG거절,MLB 입찰가격 수정허용불가)
4월 9일- 보스톤 이상훈 임대포기 최종적으로 통보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다. 거의 모든 구단이 참관한 공개테스트 결과
이상훈은 최종적으로 보스턴에 낙찰됐는데 KBO에 통보된 낙찰가격은 당초 포인트빈트가 제시했던 2백50만달러에는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60만달러(당시 환율로 8억3천만원)에 불과했다.
그밖에 몇개 구단이 응찰했고 각구단의 제시금액이 얼마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상훈의 보스턴 이적거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과연 포인트빈트와 구단행정을 총괄하는 돈 두켓 단장 사이에 어떤 조율이 있었는지도 분명치가 않았다.
단지 돈 때문에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상훈은 " 25만 달러에 계약해 달라.
LG가 20만 달러를 가져가라 난 5만 달러만 받겠다 " 라며 의지를 나타냈지만 LG는 이상훈을 30만 달러만 받고 넘길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전년도 11월에 현대가 쌍방울 포수 박경완을 트레이드해갈 때도 트레이드머니는 9억원이었다.
아무리 달러환율이 올랐다 치더라도 60만달러라는 돈은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상훈의 가치가 박경완보다 못하다는 것은 LG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황당하기는 이상훈도 마찬가지였다. 임대료를 겨우 60만달러로 책정한 것이 이상훈 개인에게는 더 후하게 대우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일단 성사되고나면 더 형편없이 후려칠 것인지 정확히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헷갈리면서도 포인트빈트에게 사기당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들은 메이저리그 진출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일본프로야구진출
LG구단은 착잡한 심정에 빠져 자매결연 관계에 있는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방향을 전환, 차선책을 모색했습니다. 모양새가 형편없이 구겨진 이상훈은 도로 국내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는 처지였습니다.
선동열과 이종범에게 이미 자기네 유니폼을 입힌 주니치의 이토 오사무(伊藤修) 구단대표는 보스턴이 임대포기 의사를 밝힌 이틀 뒤(11일)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으로 건너와 LG 최종준 단장과 협상을 가졌다. 협상의 결말은 일단 2년간 이상훈을 주니치가 임대하고, 만기가 되어 이상훈이 다시 일본에서 뛰게 될 경우 완전트레이드 형식으로 LG와 일본구단이 교섭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구단간 임대료는 2억엔, 이상훈에 대한 대우는 계약금 5천만엔에 연봉 8천만엔. 이상훈은 처음에는 자신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협상내용이라며 반발하다가 그 결정을 받아들여 4월 25일 나고야돔에서 입단식을 갖고 주니치 유니폼을 입게됩니다.
일본프로야구(주니치)1998년~99년
1998년
(11경기)1승 방어율4.68
이상훈은 LG둥지를 떠나기 위해 참으로 먼길을 우회하면서 온갖 수모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렇게 주니치에 안착했다. 그러나 이상훈은 1996년 선동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야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1, 2군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11게임에서 1승을 올리는 데 그칩니다.
당시 주니치에는 선동열(나고야의태양) 이종범(바람의아들) 이상훈(삼손) 한국3인방이 활동하게됨.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하던 이상훈 (당시 이름 "삼손 리")
1999년
(28경기)6승 5패 3세이브 방어율2.83
동계훈련을 착실하게 준비하며 일본프로야구 2년차 이상훈 선수는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주로 중간 계투로 활약하면 주니치를 선동열,이종범과 11년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에 한몫을 합니다.
메이저리그로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이상훈은 99년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메이저리그 재도전을 선언한다.
당시 재계약을 원했던 주니치는 " 꿈만 생각하지 말고 현실도 생각해 보라 " 며 만류를 했지만 이상훈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성적도 '비교적' 그의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올렸습니다.
(45경기) 7승 5패 23세이브 방어율 3.34 이닝126과2/3 탈삼진98 52실점(47자책점)
꿈의 미국 메이져 리그 진출
1999년
10월 센트럴리그 우승과 함께 미국진출 재시도 선언.
12월 보스턴과 옵션 포함 3년 계약 (총액 855만달러).
난 우리 팀 공격이 끝난 후 라이트 뒤에 있는 불펜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내 몸이 피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피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피곤함. 하지만 난 나 자신에게 얘기했다.
"상훈아, 핑계대지마. 그리고 정신차려.
꼭 오늘은 저기에 있는 마운드에 올라가서 던져야해.
저기에 올라가서 던지기 위해 다 버리고 왔잖아.
홈런을 맞아도 괜찮고, 뭘 해도 괜찮아. 너 자신에게만 부끄럽지 않으면"이라고...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2000년
(보스톤)메이져 (9경기) 승패없음 방어율3.09 11과2/3이닝 4자책(2홈런) 5볼넷 6탈삼진
(포투켓)트리플A(45경기)5승 2패 방어율2.03 71이닝 16자책(5홈런) 24볼넷 73탈삼진
메이저리그 첫해인 2000년 6월에 이틀 확장 로스터가 적용되는 9월부터 한달 정도 메이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게됩니다.
이상훈은 미국에서 실패했는가???
냉정하게 본다면, 이상훈선수의 미국도전은 실패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메이져와 마이너시절 기록을 본다면 과연 실패로만 볼수있을까요?
보스톤도 충분히 좌완스페셜리스트로 충분히 활용가치가 있어서 데려온 선수인데 많은 경기에도 투입시키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성적이 아주 나쁜것도 아니였구요. 이유는 여러가지로 해석됩니다만,
특히 이상훈이 트리플A 포투켓 레드삭스에서 기록한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0.157 이었다.
왼손투수는 왼손타자에 강하다는 게 야구 상식이다. 그러나 이상훈의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0.284
'왼손타자를 잡지 못하는 왼손투수'라는 딱지 때문에 이상훈은 버림받았다.
중간계투치고는 홈런을 많이 허용했다는점,현지 적응실패와 감독과의 불화등 그리고 그 당시 보스톤은 우승이 절박한 팀이라 보스톤은 기회보다는 결과를 원하고 있었던 팀이었습니다. 보스톤 한국메이져리거들에게 무덤이라고 할수있죠.
2001년
3월 트리플A 포터킷으로 권리 양도.
9월 포터킷 이상훈 방출 결정.
2002년
1월 트리플A 새크라멘토와 계약.
3월 31일 미국야구 포기 선언
4월 8일 LG복귀 선언
이상훈, 돌아오다!
이상훈은 16일 오후 5시15분 LG 유성민 단장과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흰색 셔츠를 빼고는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구두와 양말, 그리고 길게 자란 머리까지, 온통 검은 색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이상훈은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플래카드를 들고 기다린 팬들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4년 동안의 객지 생활에서 쌓인 피로를 잊었다.
2000년 1월 보스턴 입단이 확정되기 전 귀국한 뒤 2년4개월 만에 느낀 국내팬들의 사랑이었다.
이상훈은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내가 설 마지막 무대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기분으로 뛰겠다"며 각오를 밝혔다.
[이상훈걸어온길] LG-주니치-보스턴-LG귀환
97년 9월 미국 진출을 선언한 이상훈은 98년 3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을 대상으로 한 공개 워크아웃을 통해 미국행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보스턴이 고작 이적료 60만달러(약 7억8,000만원) 제시하자 LG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이상훈의 해외 진출 방향은 일본쪽으로 급선회했다.
같은 해 4월 2년 임대조건으로 총액 33억원에 주니치 유니폼을 입은 이상훈은 98년 1승(무패)에 그쳤으나 99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6승5패, 방어율 2.87이라는 성적을 남기고 다시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웠다.
2000년 1월 총액 855만달러(약 109억원)에 보스턴에 입단
이상훈은 메이저리그에서 9경기에 나와 승패없이 11⅔이닝 동안 4실점 방어율 3.09를 기록했다.
이상훈은 지난 1월 오클랜드 산하 트리플A 새크라멘토 리버캐츠와 계약했으나
지난 8일 국내 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체력46 컨트롤82 포심75 S-커브72 슬라이더62
02년 7승 2패 18세이브 방어율1.68 이닝85 2/3 탈삼진92
02년 다시 한국으로 복귀한 이상훈 선수.
그위 복귀전은 여전했고 반시즌을 뛰며 1점대의 방어율이라는 괴력을 보여줍니다.
당시 연봉은 국내스포츠 사상 최고금액인 4억7천만원계약(종전,최고기록-이종범 4억3천만원)
LG는 이상훈이 국내선수중 유일하게 한국-일본-미국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했고,
최근 저조한 팀성적과 침체된 팀분위기를 바꿀수 있을것으로 기대해 최고 최고대우 계약을 체결 (계약기간은 1년,이상훈은 5월 중순 투입예정) 시즌 중반부터 친정팀인 LG에서 뛰게된 이상훈은 예전의 넘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팬들을 야구장에 불러모은다. 등판할 때가 되면 스타킹을 무릎까지 끌어올린 채 마운드를 향해 질주하는 이상훈의 모습은 팬들에게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4월 8일 LG복귀 선언
4월 25일 LG입단 계약(연봉 4억 7천만)
5월 17일 이상훈 97년 이후 5시즌 만에 1군 등록 및 복귀 인사
5월 18일 시즌 첫 등판 (기아전(잠실) 최고구속151km)-21게임 무패행진
7월 24일 부산 롯데전 3연속 구원승
9월 24일 잠실 한화전 2이닝 무실점 호투 18세이브(25SP)
10월 4일, 6일 아시안게임 대만 /일본전 출전 (2이닝 무실점 기록)
아쉬운 2002년 한국시리즈
90년 94년 공교롭게 월드컵을 할때 LG는 우승하는다는 속설을 이어질까?
2002년 다시 한번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LG트윈스와 첫 우승을 노리는 삼성라이온즈 결국 이 승부는 이상훈이 일본으로 가기 전인 97년 한국시리즈처럼 연투를 견디지 못한 이상훈이 무너지면서 끝나고 맙니다...
마지막 6차전에서 이미 구위와 체력이 바닥난 이상훈이 3점차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9회말 이승엽에게 동점홈런을 맞고, 이어 등판한 최원호가 마해영에게 결승홈런을 허용 한국시리즈를 마감하고 삼성라이온즈는 극적으로 첫우승을 하게 됩니다.
02년 준플레이오프(2경기) 2세이브 방어율0.00 이닝3 탈삼진4 안타 0 자책점0
플레이오프(3경기) 1세이브 방어율10.38 이닝9과1/3 탈삼진6 안타 6(홈런1) 자책점1
한국시리즈 (4경기)1세이브 방어율9.95 이닝6과1/3 탈삼진9 안타10(홈런2) 자책점7
체력45 컨트롤82 포심82 S-커브72 슬라이더75
03년 4승 4패 30세이브 방어율3.34 이닝56 2/3 탈삼진55
이상훈은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고액인 6억원에 연봉 재계약했다.
지난해(4억7,000만원)보다 무려 1억3,000만원(27.7%)이 오른 금액이다.
국내 프로스포츠에 연봉 6억원 시대가 열었다.
야구인생 최대의 오점으로 남는 투구내용
2003년 초반 마무리 투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이상훈 선수
6월 8일 두산전에서 8회초 마무리로 등판하여 1과2/3이닝 6안타 7실점한 것을 기점으로 그이후 세이브 실패가 잦아지면서 더이상 예전의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LG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이상훈선수의 마지막모습이 될줄이야...
반강제적으로 SK로 이적된 이상훈...
2004년 드디어 이순철 감독체제로 들어섭니다.
LG트윈스는 대대적인 팀을 개편하게 됩니다.
자율적인 야구가 문제라며,선수들에게 규율있는 플레이를 하겠다는 이순철 감독
그러나 이순철 감독은 이상훈을 길들일만한 그릇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훈은 기자들과 만나 “오래 전부터 팀에서 고름 취급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
트레이드는 단순히 기타 문제로 불거진 것이 아니고 구단에서 계획한 것”이라며 엘지구단에 강한 불만을 털어놨다.
드디어 2003~2004 오픈시즌에 일이 터져버립니다.
평소에도 기타를 즐겨치는 이상훈과 이순철은 신경전을 버리게 됩니다.
LG는 LG의 모든 영광을 안겨다 준 이상훈을 트레이드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이순철감독이 들어서면서 94년도 신바람 야구의 핵이였던 유지현-서용빈-김재현
어느 하나 제대로 대접을 받지는 못했는걸 생각한다면,김재현 파동,FA미아 유지현
구단과의 관계가 껄끄럽다며 2002년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킨 김성근 감독 해임,
선동렬을 감독으로 모시기 위해 이광환 감독의 "2선후퇴론
모두 지금의 LG트윈스를 만들었던 프랜차이즈 선수와 감독이다.
이런 어운태 전이사장의 생각없는 행동은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LG트윈스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 하겠지요.저 역시 그이후로 LG트윈스 경기를 안봅니다.
월래 프로는 그런가 봅니다.서로 이해관계가 맞는다면,팬들의 바램정도는 무시하는...
그런 냉혹한 세계인가 봅니다...신생팀인 SK는 스타가 필요했고, LG는 이순철 감독이 원하는 선수들로 어윤태 사장은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이상훈은 꾀나 매력적인 선수였을 것입니다.
SK의 최종규단장은 한때 LG의 이사장을 역임한분,
그렇게 이상훈은 SK로 트레이드 되어버렸습니다.
이상훈선수 SK입단식시즌첫세이브(LG전)
체력44 컨트롤66 포심73 S-커브63 슬라이더69
04년(18경기) 0승 3패 1홀드 3세이브 방어율5.14 이닝14 탈삼진15
지난해에도 연봉 6억원을 받았던 이상훈선수에게 SK는 동기부여 차원에서 삭감없이
지난해 연봉과 동일한 액수로 계약하였다.(6억원에 연봉 제계약)
이상훈을 보면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팀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선수
팀에서 내보낸다고 쫓겨 SK로 반강제적으로 트레이드가 된 이상훈은 야생마의 모습이 아니였습니다.
4. 4 - 시즌 첫 세이브 (LG전 개막전(인천)1과 2/3이닝 1탈삼진 1볼넷 무실점)(최고구속148km)
4. 6 - 최악의 부진 (한화전(대전) 9회말 6-3 리드상황 2/3이닝 끝내기홈런 포함 4실점 시즌첫패)
4.29 -시즌 3패 (LG전(잠실) 10경기 3패 1세이브 방어율7.71)
5.13 -시즌 2세이브 (39일 만에 세이브 2세이브 3패 방어율6.17)
5.25 - 조범현 감독과의 면담에서 "마음도 추스를 겸 2군에 가보라"는 지시를 받아들여 2군 행을 결정
(이상훈 선수가 2군에 내려간것은 97년 7월이후 처음있는일)
5.29 - 구단측에 은퇴의사를 전달하고 2군 훈련 불참
6. 2 - 구단측과의 최종면담에서도 은퇴의사를 번복 하지 않았다.
It`s time to say good-bye
구위는 예전같지 않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이상훈 선수
이상훈의 은퇴에 대해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다.
그가 "18.44m를 던지지 못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 팬들도 있고, 대스타가 팀이 어려운 시점에서 너무 무책임하게 떠나는 게 아니냐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어쩌면 가장 "이상훈 다운" 것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이상훈은 그저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현역생활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아직 대스타로서의 여운이 남아있을 때 떠나기를 원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자존심이 없었다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3억6천만원의 잔여연봉을 포기하는 결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쪽팔려요. 프로라는 거는..남이 하지 못하는걸 하는게 정말 최고의 프로이고, 남들이 잘때 운동연습 하는게 진짜 프로거든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책임질 줄 알아야 되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된다라는 게 진정한 프로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내가 마음에서, 연봉 한달에 6천 만원씩 받아가면서 이깟 마음 자세로 던진다는 게 내 자신에게 쪽팔려요"
이상훈 선수가 은퇴할 당시 남긴말...
그리고 2년 4개월 이 지나고 잠실에 이상훈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의 오른속에는 글러브가 아닌 기타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WHAT]이라는 락커로 변신한 그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난 꿈을 이루기 위해 어쩌면 모든걸 다 버렸다. 알고있다.
바보같이 보일수 있다는 걸 하지만 이런 소리는 여기 올때 많이 들었다. 미쳤단 소리까지...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되어있다.
난 그저 내손으로 나의 배를 노를 저어서 가고 싶을 뿐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언젠가는 폭풍을 만나 쓰러질수도 있겠지만,
힘이 든다는 이유로 육지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보스톤에서 방출되던날 이상훈이 홈페이지에 남긴글
그의 인생은 전부 도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려운 형편에 야구를 택한 것도 그렇고,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꿈을 위해 큰무대에 도전한 정신,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가는 과감함까지..... 이런 것만으로도 그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 이상 할 것이 없고 해줄 것도 없기에 야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고 밝히는 이상훈
제가 가장 좋아 하는 선수로써.. 앞으로 코치님으로 엘지에서 다시 한번 뵐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출처 : 마구마구공식 갤러리
작성자 : 삼손 노(sams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