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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주는 천 년 전에 멸망한 신라 천 년의 문화가 진하게 남아 있다.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의 천 년이라는 시간이 덧칠돼 있지만 그 유적이 많지 않다. 천 년 신라의 수도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문화유적조차 약화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 경주는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자존심을 지켰고, 그 시대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신라시대 화려했던 불교문화 대신 유교문화의 중흥으로 서원과 향교가 지금까지 남아 조선시대 경주를 웅변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 임진왜란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던 나라 운명을 걸머지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던 의기의 흔적도 남아 있다. 또 인내천 사상을 내세워 백성들의 인권운동을 펼쳤던 동학운동의 본거지도 경주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후기 경주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경주에서 깊은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학자들의 발자취는 양동마을과 경주지역 곳곳에 향교와 서원을 근거지로 기록이 남아 있다. 교촌마을의 최부자집 교훈은 지금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근간으로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신라 천 년의 수도였던 경주가 고려와 조선시대는 하나의 고을로 전락했지만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자존심을 지켜온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흔적을 찾아가는 역사기행을 한다.
❚동쪽의 수도 동경
신라 멸망 이후 경주는 고려시대에 지방도시로 전락했지만 동쪽의 서울을 뜻하는 동경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조선초기에는 경주부로 확정되었지만 영남의 군사적 요충지로 국가 차원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조선시대 발간된 각종 지리지나 역사서에 경주라는 명칭 보다는 ‘동경’, ‘동도’와 같은 지명이 많이 사용됐다. 동경잡기, 동도칠괴 등의 서책과 동경관 같은 건물 이름에서도 경주가 동쪽의 서울로 표기돼 조선시대 경주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동쪽의 서울로 인식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경주는 지금의 경주시 구역과 울산시의 두동면과 두서면, 포항시 죽장과 기북, 기계면, 신광면, 영천시의 북안면 일부를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안강과 내남 등의 넓은 평야에서 많은 양의 곡식이 수확되었다. 동해안에서는 해산물도 풍부한 편이었다. 당시 경주는 지역이 넓고 교통요충지였고, 훌륭한 명현과 많은 문사들이 배출됐다. 경주부의 관아에는 객사 동경관, 동헌 일승각, 집경전, 공방과 토지대장을 소장하고 조세를 부과했던 전결소, 관노방, 군관이 머물렀던 선무별장소 등의 중요 시설이 경주읍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전패와 궐패를 모시는 기능도 함께 했다. 경주읍성 안의 동남쪽에 위치한 객사는 동경관으로 불렸다. 경주부윤이 집무를 하던 집무소 동헌이나 내아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1552년 화재로 큰 피해가 발생해 퇴계 이황이 지은 위안문으로 제를 올릴 정도였다. 1602년에 다시 지었다. 지금은 일제강점기에 부속건물과 본체가 일부 헐리는 수난을 겪었다. 1952년 철거되면서 동경관은 서쪽의 건물인 서헌만 남아 옆으로 옮겨져 경북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현재 대릉원의 북쪽 옛 경주시청 서쪽에 법장사라는 사찰이 있다. 경주 관아의 동헌 일승각이었던 건물이다. 당시 동헌은 향교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엄격했다. 경주부윤이 집무하던 곳이다. 동헌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경주군청 현판을 걸고 경주군청으로 활용됐다. 경주군청 업무가 많아지면서 건물이 협소해 동헌을 헐고 새로 건물을 지어야 될 형편이었다. 이때 경주의 만석꾼 정두용이 아들 정영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동헌 건물을 매입해 건물을 뜯어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워 법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법장사의 대웅전이 동헌 건물이고, 대문은 동헌의 중문이다.
경주 황성공원 궁도장 뒤편에 조선시대 경주를 다스렸던 부윤들의 선정비 10여기가 나란히 서 있다. 경주읍성 안에 있던 비각을 옮겨온 것이다. 선정을 베풀었던 부윤을 위해 세운 선정비 또는 영세불망비다. 경주부윤은 당시 행정과 조세, 사법, 치안, 군사를 총괄하는 지역의 최고 책임자였다. 아울러 문예를 진흥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임무까지 맡았다. 경주부윤은 1413년 경주부로 개편되면서 본격적으로 임명됐다.
❚왜란과 호란
경주는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몽고족, 여진족, 왜병 등의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이런 외세 침략으로 경주지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경주의 역사적 분기점이 되기도 했다. 일본의 주력부대가 북상하면서 경주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경주읍성이 함락됐다. 집경전과 동경관이 불타고 불국사도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경주지역에서는 의병들이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왜군을 막는데 큰 힘이 되었다. 1627년과 1636년에도 연거푸 여진족의 침략을 당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경주지역 사람들은 호국정신으로 무장하게 되었고, 구한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때 의병항쟁으로 계승됐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상륙해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경주로 쳐들어와 경주읍성이 함락되었다. 1592년 6월9일 경상도 인근의 의병들과 관군이 문천에서 대규모 모임을 가지고 짐승을 잡아 서로 피를 마시면서 의기투합해서 회맹록을 작성했다. 이 모임이 문천회맹으로 경주읍성 탈환의 기폭제가 됐다.
경주읍성 탈환에는 화포 비격진천뢰와 승자총통, 사전총통, 이총통과 삼총통 등의 화기가 동원됐다.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은 영천지역 출신으로 경주사람이었다. 비격진천뢰는 폭발할 때 우레와 같은 굉음을 내면서 많은 왜군을 살상하는 위력을 발휘해 경주읍성 탈환을 성공하게 했다. 비격진천뢰는 경주사람 이장손이 발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정규군은 최신무기를 앞세운 왜군에 밀리며 조직이 무너졌다. 그러나 지역마다 고향을 지키려는 의병들이 봉기하면서 전쟁이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됐다. 경주지역의 의병도 상당한 활약을 했다. 한 집안에서도 여러 명의 의병장이 배출되기도 했다. 형제나 부자간, 친척들이 함께 거병한 예도 흔했다. 경주 황성공원에는 경주임란의사추모탑이 건립돼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의병들의 거사를 기념하고 있다.
❚경주 사람들
경주는 신라시대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불교의 성지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으로 불교는 산으로 내몰렸다. 경주의 유교는 공자와 맹자의 고향을 뜻하는 ‘추로지향’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유학이 발달했다. 신라 설총과 최치원의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 경주에 관학인 향교가 세워졌다. 16세기 이후에는 사림을 주축으로 사학인 서원이 설립되면서 성리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탄생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서울 사람으로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지만 21세에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출가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31세 때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거쳐를 마련하고 금오신화와 1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조선후기에는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이 전국 각지에 세워졌고 경주에는 남산 용장사지에 영각을 짓고 김시습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매월당 영각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1878년 기림사로 이건됐다.
회재 이언적은 중국 성리학을 두루 섭렵하고 이를 재해석해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했다. 이언적의 이론은 퇴계 이황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면서 영남지방 성리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세계사적으로 격변기였던 19세기 경주는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해 천도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초대교주 최제우와 2대교주 최시형은 모두 경주사람이다. 경주시는 최제우 생가를 복원하고 용담정 주변에 성역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사상과 신앙체계를 제시해 단기간에 교세를 확장한 동학은 1894년 반봉건, 반외세를 표방하며 농민항쟁으로 발전해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봉기하는 사태를 빚었다.
경주의 풍부한 농산물과 해산물로 부호들이 생겨났다. 양동마을의 향촌세력과 교촌의 최부자집이 대표적인 명문가로 입지를 다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앙에서 임명되어 온 경주부윤과 같은 관리들도 토착세력인 향리들과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경주 현곡에서 태어나 내남 이조리로 옮겨 살았던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 때 아우 최계종과 의병을 일으켜 선무원종 이등공신에 녹훈됐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해 부장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절을 보여 조정에서 그의 공덕을 기려 1640년 정려문을 세우고 정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손들이 용산 아래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용산서원으로 개명돼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경주사람들은 동경잡기 등의 역사서를 발간하고 신라시대의 역사와 문물을 승계 발전시켰다. 성덕대왕신종을 이전 설치하고 불국사를 지속적으로 수리하며 관청과 민이 합심해 문화유산을 보전하려는 노력을 했다. 사당을 지어 신라왕들의 위패를 모셨으며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등 위인들의 기념비를 세워 신라의 후예임을 잊지 않고 있다.
❚유교와 불교의 흥망성쇠
조선시대 성리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경주에도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에 대한 제사 이외에도 유교이념의 사회적 보급과 함께 향촌자치의 구실을 했다. 경주에는 16세기 후반부터 서악서원, 옥산서원 등의 서원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조선후기에는 그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정사, 서사, 사우, 사당, 영당 등의 이름으로 지어진 이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더러는 교육보다는 특정 문중의 인물을 배향하고 받드는 기능이 점차 중시되면서 정치집단의 성격을 띠게 됐다.
서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회문제를 야기하자 흥선 대원군은 1868년 전국에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을 없애는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경주에는 40여개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사액받은 옥산서원과 서악서원만 존속하고 모두 철폐됐다. 지금 경주지역 곳곳에 남은 서원은 20세기 초에 복구된 것이다. 경주에 남은 서악의 서악서원과 안강읍의 옥산서원과 구강서원, 내남면의 용산서원, 강동면의 동강서원이 대표적인 서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이념을 지방사회에 보급해 지방민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고을마다 관학인 향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교관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사학인 서원에 밀렸다. 경주 교동에 위치한 향교는 통일신라 국학을 설치한 자리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기초 등은 신라시대 석조물이 남아 있어 오래된 흔적을 더듬어 보게 한다. 경주향교는 고려시대 주학을 거쳐 조선시대 1492년 경주 부윤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임진왜란 때는 대성전이 불에 타면서 공자의 위패를 도덕산 두덕암으로 옮겼다.
1600년에 경주 부윤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해 위패를 모셔왔다. 경주향교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성균관과 같이 앞에 향사를 배치하고 뒤편에 강당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해 맹자 등의 유교 성인 10명을 봉안하고, 동서 양편에 신라의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조선의 이언적 등 18현의 위패를 모셨다. 유생들이 지켜야하는 학칙인 경주학령과 백록동규가 지금도 전한다.
조선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위축됐던 불교계는 임진왜란 때 호국적인 전통을 되살려 왜군에 맞서 대활약을 펼쳤다. 불국사와 기림사, 원원사 등의 승려들이 경주의병들과 공조해 전쟁에 참여했다. 임란이 끝나고 국가로부터 전란 극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불교계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경주에는 조선시대 문화유적들이 서원과 향교, 교촌마을 최부자 고택, 양동마을, 용담정 등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세부적인 역사적 흔적들은 별도의 역사기행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첫댓글 옥산서원
서악서원
용산서원
구강서원
등등 조선시대 유적들도 너무 많이 남아있습니다.
용담정도 조선시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