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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부 부설 ‘통일교육원’에서는 사이버통일연수를 실시하고 있다.
2009년도에는 연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연수 성적이 우수한 수료생을 전국에서 40명 선발하였다.
이들에게 통일부에서 전액 비용을 부담하여 ‘판문점’과 ‘제3땅굴’을 다녀오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눈이 아프도록 공부를 하여 영광스럽게도 선발이 되어서 다녀온 일정이다.
☞ 2009년 12월 11(금) ‘판문점’과 ‘제3땅굴’
♣ [탐방코스]
▶ 포항출발 → 서울역 → 임진각 → 도라산 역 → 통일촌 → 판문점 → 제3땅굴 → 도라전망대 → 서울역 → 포항
◆ 「판문점」!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번은 찾아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러나 개인이 방문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는 곳이다.
다행히 기회가 생기는 바람에 마음을 굳게 먹고 도전을 하였다.
전국에서 선발하는 40명 안에 들기 위해서 엄청 많은 노력을 투자하여 드디어 목표를 이루었다.
10일(목) 늦은 저녁시간인 11시 57분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승차를 하였다.
12:00에 포항을 출발하여 경주를 경유하여 동서울터미널로 향하는 심야 리무진 버스다.
출발 무렵에 겨울인데도 비가 오락가락하여 우산을 준비했다.
심야시간이라 출발과 동시에 잠을 청했지만, 잠자리가 바뀐 탓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휴식을 위하여 잠시 들른 ‘선산휴게소’에서도 빗줄기는 출발시보다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동서울터미널」도착이 새벽 4시 30분이다.
그런데 지하철 첫차 운행시각이 5시 35분이다.
집결지인 ‘서울역’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데 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지하철이 첫 운행을 한다.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부근 지리도 익힐 겸 지하철 역사를 한 바퀴 도는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2호선 첫차를 타고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한 후 서울역에 내리다.
촌놈이 모처럼 하는 서울나들이라서 교통편은 출발 전에 미리 인터넷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정보를 입수하여 알아두었다.
포항에서 사용하던 ‘T머니 카드’를 이용하니 서울에서 지하철 탑승 시 동시에 이용할 수가 있어서 아주 편리하였다.
서울역 건너편 집결시각이 8시 40분인데 도착시각이 6시 40분이니 아직도 2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지하철역 주변 지하상가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을 해결하고 시간이 되어서 버스에 탑승하였다.
통일교육원 담당자인 박용석 사무관의 안내로 전국 각지에서 모인 40명의 다양한 사람들과 일행이 되어 서울 북방 김포를 통과하는 ‘자유로’를 이용하여 임진강변을 따라 이동을 하였다.
〈임진각관광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최북단 철도역인 ‘도라산 역’을 관람하였다.
♣ [도라산 역]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에 있는 경의선의 최북단역이다.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철도역으로, 민통선 남방한계선에 자리 잡고 있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 끊어진 경의선을 잇기로 합의하고, 그해 9월 문산-개성 구간 연결공사를 시작하였다.
남북이 각자 해당지역 철로를 먼저 복원한 후 비무장지대 철로 공사를 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도라산 역은 2002년 4월 11일부터 업무를 시작했으며, 임진강역까지 연결하는 4㎞ 구간이 같은 해 4월 완공되었다.
이 역은 서울에서 55.8㎞, 개성에서 14.2㎞,평양에서 256㎞ 떨어져 있으며, 통일을 상징하는 염원이 깃든 곳이다.
서울역에서 〈임진각〉이나 〈도라산〉까지 가는 경의선 기차를 이용할 수 있다.
분단 이후 경의선 구간을 남한은 서울-문산 간 46㎞를, 북한은 개성-신의주 간 411.3㎞를 운행해왔다
도라산은 신라가 패망한 후 고려에 항복한 경순왕이 이 산마루에 올라가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여 "도라(都羅)"라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역은 민통선(민간인 통제 구역)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 [민간인 통제 구역]은?
비무장지대 바깥 남방한계선을 경계로 남쪽 5~20㎞에 있는 민간인통제구역으로, 민간인출입통제선이라고도 부른다.
1953년 휴전 이후 군사분계선으로 기준으로 양쪽이 뒤로 2km씩 물러난 그곳을 DMZ으로 정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은 1954년 2월 미8군 사령관 직권으로 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군사시설을 보호하고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수행할 목적으로 확정된 선이다.
비무장지대는 UN군의 관할 하에 있으나,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에 대한 통제권은 한국군에게 주어져 있다.
따라서 행정권 역시 한국군에게 있다.
민간인이 민통선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군에서 발행하는 민간인 출입허가증이 필요하다.
민통선 내에는 '통일촌'이나 '평양촌' 등과 같은 민간인 마을이 있다.
주민들의 구성은 원주민이 많지만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나 다른 지방에서 온 이주민들도 상당수가 된다.
주민들은 주변의 농지나 비무장지대 안의 토지를 경작하며, 군인들을 상대로 상업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이 보유한 토지는 매매가 불가능하다.
주민들이 민통선 밖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절차를 밟아야 하며, 토지를 반납해야 한다.
다시 이동을 한 우리들은 ‘통일촌’을 방문했다.
이곳에 위치한 [장단 콩 특산물 매장]에서 순두부와 두부김치, 두부찌게 등 주 메뉴가 콩으로 된 음식점에서 푸짐한 중식을 즐기다.
이곳은 마을주민들이 직접 농사를 지은 장단 콩으로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판매를 한다고 한다.
♣ [통일촌]은?
통일촌이 건립되기 전인 1972년에 1사단 장병들이 수냇벌 인근의 땅을 개간하였다.
이 농장의 이름이 '전진농장'이다.
이후 19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께서 적십자 전방사무소를 순찰 할 때,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전략적으로 시범 농촌을 건설하라!”
는 특별지시를 하였다.
이 지시에 의해서 1973년 8월에 통일촌이 건립되었다.
첫 입주자는 제대 장병 가구 40호, 원주민 가구 40호로 제한하였다.
통일촌 건립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키부츠〉 촌을 본 따 낮에는 일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민통선 안에 위치한 〈통일촌〉
주업이 농업으로 벼농사와 콩을 주로 경작한다.
그래서 이지역의 특산물을 장단삼백(쌀, 콩, 인삼)이라고 한다.
다음 방문지는 「판문점」이다.
♣ [판문점]은?
비무장지대에 있으며 회담이 개최되는 건물을 포함한 그 주변 장소를 말한다.
6·25전쟁 중인 1951년 10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휴전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6·25전쟁 당시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발송리 사이에 걸쳐 있다.
최초의 판문점 회담 장소는 도로변에 초가집 4채가 있던 널문〔板門〕이라는 고장이었으며,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휴전회담을 하였다.
판문점이라는 이름은 널문이라는 고장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끝나게 되자 휴전협정조인을 위하여 약 200평의 목조건물(북한은 ‘평화의 전당’이라고 함)을 마을 부근에 세웠는데, 이곳이 두번째의 판문점 회담장소이며, 협정조인 이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 세번째의 장소이다.
최초의 장소인 널문마을과 두번째 장소인 ‘평화의 전당’은 지금의 판문점에서 북쪽으로 약 800m 북한 측 비무장지대에 있다.
지금의 회담장소도 처음에는 천막으로 시작되었으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항구적인 건물로 바뀌게 되고, ‘자유의 집’(1965)과 ‘판문각’(1968)등 콘크리트 건물도 세우게 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 남북대화의 빈도가 잦아지자 ‘평화의 집’(남쪽)과 ‘통일각’(북쪽) 등 남북대화용 건물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곳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본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중립국인 스웨덴·스위스(유엔군 측 지명)와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공산군 측 지명) 등 4개국의 감시위원이 상주하고 있다.
판문점구역은 유엔군과 공산군의 공동관리구역으로 지구상에 그 유례가 없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1976년 8월 18일 북한경비병에 의한 도끼살인만행을 계기로 쌍방경비병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분리시켜, 공동관리업무 가운데 경비업무는 분할경비를 하게 되었다.
판문점이라지만 이미 동해안을 통해서 ‘통일전망대’를 경험했었고, 또 지난번에 금강산을 다녀왔기에 별다른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판문점 인근에는 우리 측 ‘대성동’ 마을과 북측의 선전마을인 ‘기정동’ 마을이 있다.
대성동 마을에 위치한 대형 태극기의 높이도 상당한데 마주 보이는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는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한단다.
서로가 높이 경쟁을 하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끝이 없이 이어지는 경쟁을 끝내려고 우리 측에서 더 이상 높이는 것을 중단하는 바람에 지금은 북측 인공기가 세계 최고의 높이가 되었다는 웃지 못 할 현실이 되고 말았다.
양쪽에서 깃대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비만도 어마어마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분단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였다.
♣ [대성동 마을]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길 150에 위치한다.
남한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DMZ)내에 위치한 대성동 마을은 공동경비구역(JSA)내에 위치한 특수한 마을이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1곳씩 마을은 둔다’
는 규정에 따라 그해 8월 3일 북한 기정동마을과 함께 조성되었다.
휴전 당시에 그 마을에 주소지를 둔 사람의 직계만 거주할 수 있었다.
시집온 며느리는 주민이 될 수 있지만, 결혼한 딸은 떠나야하는 등 거주권 심사가 까다로워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민의 수는 큰 변화가 없다.
남쪽의 대성동마을은 일명 '자유의 마을' 이라고 불린다.
남자들은 군대를 가지 않으며, 세금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시집을 와서 대성동 마을에서 살 수 있지만 남자들은 이 곳 대성동 출신 마을 처녀와 결혼을 해도 이곳에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병역 면제를 받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이 마을을 방문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친척이나 직계 가족들만이 유엔사의 허락을 받아 출입할 수 있다.
서해안 임진강변을 따라 펼쳐진 [자유의 다리]와 북측 [판문각]을 비롯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의 현장인 미루나무 사건 등을 JSA병사로 부터 안내받으며 판문점을 둘러보았다.
〈도끼 살인 사건〉은 당시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던 나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전쟁 직전의 위기 상황이 되는 바람에 최전방에서는 식사 시에도 철모를 쓰고 소총을 옆에 두고 식사를 하였으며 제대는 물론이고 외출이나 외박이 전면 금지 되었다.
8월에 사건이 벌어졌는데, 나는 불과 4개월 후면 제대를 할 시점이었기에 엄청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군 30여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미군 및 국군 병력 절대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판문점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8·18 도끼 만행 등으로도 불린다.
문제의 미루나무는 공동경비구역에 있던 25년생 15m 높이의 나무로서 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기 위한 시계확보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보니파스 대위를 위시하여 미군 7명과 국군 장교 1명을 포함한 한국군 4명 등 11명은 시야를 가린 미루나무의 전지작업을 하는 남한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다.
그때 북한군 박철 중위를 비롯한 15명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미루나무의 위치가 유엔군 측의 관할에 속했기에 보수작업을 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보니파스 대위는 경비중대장 직권으로 작업을 계속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자 인근 초소의 인민군 20여명은 박철 중위의 지원 요청을 받고 트럭을 이용하여 도착하였다.
박철 중위의 작업 중지 재요구를 보니파스 대위가 거부하자 박철의 공격명령에 따라 인민군들은 트럭에 실어 가지고 온 곡괭이, 몽둥이와 함께 노동자들이 작업에 쓰려고 가져왔던 도끼 등을 빼앗아 휘두르며 기습하였다.
이들은 유엔군 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하여 경비중대장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이송 중에 사망하였으며, 미군 4명, 국군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유엔군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워싱턴 특별 대책반이 소집되었으며 포드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 내었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내에 인민군이 설치한 불법 방벽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기본으로 F-4, F-111, B-52 폭격기, 미드웨이 항공모함 등을 동원하는 대규모 무력시위 계획을 수립하였고,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3이 발령되었다.
그 후 유엔군은 공격준비태세인 데프콘 2로 격상하여 발령하였다.
미국 본토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한반도로 긴급 파견되었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 이륙한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해군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의 중무장한 호위함 5척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한국 해역 인근에 배치되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김종헌 소령을 지휘관으로 하여 64인의 특전사 대원들로 구성된 결사대가 편성되어 보복작전이 실시되었다.
화기가 없이 곤봉으로 무장을 한 태권도 유단자들 투입을 예상 하였으나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을 트럭에 숨기고 카투사로 위장한 64명의 특전사 요원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폴 버니언 작전에 투입되어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
북한군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엔 과감히 사살하여 보복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이에 대응하지 않아서 더 이상의 무력사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작전이 종결된 후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하여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하였다.
미국은 북한의 유감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처음에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 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였다.
그 후 북한은 1년 반 동안이나 준전시상태를 풀지 않았고, 남한도 북한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등 사건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사건 당사자인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 남한과 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이사건 후 판문점 내의 공동경비구역에서도 경계가 설정되었으며, 경계 밖 상대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되었으며, 단으로 경계를 표시하였다.
-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 작업모습 -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교롭게도 [신종인플렌자]의 영향 탓에 남북이 회담장으로 자주 이용하고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회의장’을 직접 둘러볼 기회를 아쉽게도 갖지 못하다.
통일부와 현대 측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용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은 [신자유의 집] 건물에서 사진 촬영만 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북측 [판문각]에서 근무하는 북한초병들을 100m 전방에서 육안으로 직접 볼 수가 있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인간인데 참으로 체제가 무엇인지…….
다음 코스는 남침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제3땅굴]을 견학하다.
♣ [제3땅굴]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에 소재한 땅굴이다.
신분증 미소지자는 출입이 불가능하므로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이곳은 1974년 9월 5일 귀순한 북한의 김부성씨가 땅굴공사 첩보를 가져왔다.
이를 근거로 1975년부터 문산 지역에 대한 시추작업을 하였으나 땅굴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다가 1978년 6월 10일 시추공 중 1개가 폭발함으로서 역갱도 굴착 공사를 실시하였다.
1978년 10월 17일에 드디어 적갱도에 관통하여 판문점 남방 4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땅굴은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에 달하고, 1시간당 3만 명의 병력이동이 가능한 규모이다.
그 위치가 서울에서 불과 52km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규모면에서는 제 2땅굴과 비슷하나 서울로 침투하는데 있어서는 제1.2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 통일촌 민가에서 3.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서울에서 승용차로 45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이번 일정의 마지막은 해발 155m에 위치한 [도라전망대]이다.
♣ [도라전망대]는?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다.
1986년 사업비 약 3억 원을 들여 국방부가 설치한 통일안보관광지이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987년 1월부터이다.
이곳에서는 개성공단과 개성시 변두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며, 그밖에 송악산·금암골(협동농장)·장단역·북한선전마을 기정동·김일성 동상 등이 바라다 보인다.
전망대 바로 옆에는 제3땅굴이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 본 북녘 땅 -
이곳은 6.25 당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본 개성공단과 개성시가지, 그리고 개성시가지 뒤편에 위치한 [송악산]등은 언젠가는 꼭 우리 민족이 자유롭게 왕래를 해야 할 곳이다.
우리 측 초소와 북측 초소 등 DMZ에 위치한 의미 있는 여러 장소를 상세하게 살펴본 후에 귀가 길에 오르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오후 6시에 출발하는 리무진(일반 리무진 막차는 7시 출발, 심야는 11시와 12시 출발)으로 집에 돌아오니 밤 10시 50분경이었다.
언젠가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판문점]!
사이버 연수 덕분에 무료 관광을 아주 의미 있게 잘 하고 돌아온 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