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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화 역사
한국에서 영화가 최초로 상영된 정확한 시기에는 몇가지 이론(異論)이 있으나 대개 1903년쯤으로 보고있다.
움직이는 사진으로서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영화는 1909년 한미전기회사가 동대문 안에 활동사진관람소를 만들고 전차 승객을 늘리기 위해 초기의 미국영화를 많이 상영하며 해설까지 붙임으로써 본격적인 흥행이 시작되었는데, 1910년을 전후해서는 서울에 상설 극장이 계속 생겨 극장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종로 남쪽인 남촌에 어성좌, 경성좌, 개성좌, 고등연예관, 대정관, 황금연예관 등 주로 일본사람을 상대로 한 상설영화관이 등장하고, 12년 이후 그 북쪽인 북촌에도 단성사, 장안사, 연흥사 등이 문을 열어 본격적인 무성영화를 수입․흥행하게 되었다.
무성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 해설자인 변사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상영된 영화는 수입된 외화뿐으로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없었다.
[1919-1935]-- 한국영화의 초창기
연쇄극의 등장-- <의리적 구투>
1910년 무렵부터 싹튼 신파연극은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로 관객을 잃어가고, 극단들도 파산 직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의 탈출구로 연쇄극(連鎖劇), 즉 키노드라마(kinodrama)가 나타났다.
연쇄극이란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중 무대 위 스크린에 삽입한 것인데, 이것은 영화라기보다 연극에 가까웠다.
1919년 10월 27일에 영화도 상영할 수 있게 개조한 단성사에서 상영한 <의리적 구투> 는 최초의 연쇄활동 사진극 즉, 키노드라마다. 당시 가장 빠르게 선진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신극단체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김도산과 박필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 신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김도산이 각본,감독을 담당하고 단성사의 사주인 박승필이 출자하여 <의리적 구투>를 만든 것이다.
이 작품에 삽입된 약 1000피트의 필름은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최초의 영화이자 흥행을 목적으로 한 최초의 한국영화였다.
또한 한국 최초 기록영화라 할 《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이 동시에 상영된 점에서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의리적 구투》의 흥행 성공에 자극되어 문예단의 《지기(知己, 1920)》, 혁신단의 《학생절의(學生節義, 1920)》 등 작품이 연달아 나와 연쇄극 붐이 일었다. 그 가운데 이기세(李基世)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문예단의 《지기》는 처음으로 한국인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에 의해 촬영되었다.
최초의 한국영화-- <월하의 맹세>
한국에서 비로소 완전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23년 윤백남(尹白南)이 감독한 《월하(月下)의 맹세》였다. 비록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영화였으나 내용은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남자가 착실한 약혼녀의 저축으로 갱생하는 이야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필름 제작이었다.
같은 해 일본인 하야가와〔早川松次郞〕가 만든 《춘향전》은 제작․각본․연출 등 중요한 부분을 일본인이 맡았으나, 한국에서 만들어져 한국배우가 출연하고 한국관객을 대상으로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본격적인 한국영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단성사 제작부의 《장화홍련전(1924)》을 비롯, 부산에서 창립된 최초 영화제작회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해(海)의 비곡(悲曲, 1924)》을 제작․공개하였다.
나운규와 <아리랑>
1920년대 가장 중요한 업적은 민족영화의 대두이다. 26년 나운규(羅雲奎)가 만든 작품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통한을 겨레의 항일정신으로 집약해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후 나운규는 1927년 자신이 직접 나운규 프러덕션을 창립해 시나리오작가․감독․배우 활동을 한게 된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비로소 한국영화를 예술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당시 고작해서 신파물이나 모방적인 번안물을 만들어 내던 때에 나운규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기초로 그 안에 당시 일제에 억눌리고 있었던 민족의 울분을 영화로 대신 승화시킨 것이다.
그 밖에 심훈 《먼동이 틀 때(1927)》, 김유영의 《유랑(1928)》, 이경손의 《숙영낭자전(1928)》, 안종화 《노래하는 시절(1930)》, 윤봉춘의 《도적놈(1930)》, 이구영의 《승방비곡(1931)》, 김상진의 《방아타령(1931)》, 이규환 《임자없는 나룻배(1932)》 등이 이 시기 주요 작품이다.
이 무렵 데뷔하여 활동한 배우로 정기탁, 윤봉춘, 서월영, 이금룡, 이원용, 이경선, 유신방, 김신재, 김연실, 김선영, 문예봉, 황철 등이 있다.
《아리랑》이 나온 26년부터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나온 35년까지의 10년 동안은 무성영화의 전성기로, 무려 80여 편의 영화가 나오고 40여개 영화사와 프로덕션이 생겨났다. 그러나 37년 나운규가 36세로 요절하고, 검열과 고등경찰을 통한 인신구속 등 여러 방법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극심해져 예술적․산업적 개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1935~1945] -- 발성영화 등장과 일제암흑기
1935년 경성촬영소가 제작한 이용우(李用雨) 감독, 이필우 촬영․녹음의 《춘향전》은 한국영화 최초의 발성영화이다.
초창기 주요 작품으로 이규환의 《나그네(1937)》, 안석영 《심청(1937)》, 방한준《한강(1938)》
《성황당(1939)》, 홍개명의 《청춘부대(1937)》, 윤봉춘의 《도생록》, 김유영의 《애련송(1939)》, 최인규의 《국경(1939)》 《수업료(1940)》 《집없는 천사(1941)》 등이 있다.
이들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향상시키면서 우리 고유의 것, 우리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아 이른바 자연주의적 미학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악순환과 40년 '조선영화령' 제정․실시로 영화는 일본군국주의 통제 아래 들어가고, 42년 기존 10개 영화사를 통폐함, 조선영화제작회사가 설립되어 전쟁에 협력하는 이른바 합작영화 제작을 강요받게 되었다. 총독부는 조선영화배급사를 설립, 영화 제작과 배급을 통제․장악하고 이른바 국책영화를 만들게 하여 영화를 정책선전 전용물로 삼아 한국영화는 질식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의 작품 경향은 일제 하의 조선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거나 황국 신민으로서 일본에 협력할 것을 선동, 교화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1945~1950] 해방과 전쟁기 영화
해방직후의 영화들
45년 9월 24일 미군정청 보도부는 당시 조선영화건설본부에 뉴스영화 제작과 상영을 허용하였는데, 이 무렵 나온 해방뉴스가 영화활동 재개의 시발점이었다.
46년 광복과 자유의 기쁨을 표현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가 개봉된 뒤 이구영의 《안중근사기 (1946)》, 윤봉춘의 《윤봉길의사(1948)》 등 일련의 광복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해방과 함께 새사회를 건설하자는 계몽적인 영화와 국민 계몽을 목적으로 만든 정책 영화의 제작도 활발했다. 새로운 농촌 건설과 사회 계몽, 아동 교육에 이바지 할 것을 다짐하는 계몽 영화로서 <그들의 행복(1947)>, <해방된 내 고향(1947)>, <사랑의 교실(1948)> 등이 있다.
한편 윤대룡의 <검사와 여선생(1948)>, 최인규의 <죄없는 죄인(1948)>,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 홍성기의 <여성일기(1949)> 등 멜로드라마와 활극 오락영화 그리고 반공 영화 등도 제작되었다.
전쟁기간 중의 영화창작
전쟁기간 중에는 거의 모든 영화인들이 정부기관과 군대에 소속되어 영화제작을 계속 하였다. 전투 현장이나 후방의 상황을 찍은 보도 영화등의 기록 영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소수의 반공 계몽 영화를 찍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전쟁과는 별도로 제작된 한국 극영화으로는 윤봉춘의 《성불사(成佛寺, 1952)》, 신상옥(申相玉) 《악야(惡夜, 1952)》, 전창근 《낙동강(1952)》 등이 있다.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기
1953년 7월 휴전이 이루어지자 한국영화는 일대 중흥기를 맞았다.
영화제작사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어 사극(史劇)영화 붐을 일으켰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그 첫 작품으로 제작되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어 전창근의 《단종애사(1956)》, 윤봉춘의 《논개(1956)》, 등이 대표적이다.
56년 한형모의 《자유부인》은 흥행기록을 세워 멜로드라마 붐을 일으켰다.
홍성기의 <실락원의 별(1957)> <청춘극장(1959)>, 신상옥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동심초(1959)>,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1957)> <구름은 흘러도(1959)> 등 낡은 윤리나 도덕, 기성관념 등이 변화하는 세태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눈에 띄게 코미디 영화가 많아진 것도 이 시기 영화의 특징이다.
1956년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과 홍일명의 <벼락감투(1956)>가 초기 코미디 영화의 대표작이다.
[1960년대] -- 한국영화의 양적 성장기
1950년대 정부의 영화 육성정책에 기반하여 한국영화가 양적,질적으로 대폭 성장한 것에 비해 60년대는 5.16 군사쿠데타로 인한 정부의 규제와 검열로 영화의 예술성이 무시되고 상업성이 강조되었다.
1961년 5․16 이후 정부는 영화기업 육성책으로 '영화법'을 공포, 난립한 영화제작사를 정리하여 71개에 이르는 영화사가 16개로 통폐합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까지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하던 영화인들이 제작현장에서 추방되고, 제작쿼터․스크린쿼터 등 배급과 흥행을 규제한 일련의 조처가 취해졌다.
청춘영화의 제작
해방과 전쟁 그리고 4.19를 주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대의식으로 자리잡은 젊은 세대의식이 5.16쿠데타의 억압에 의해 시대의식을 자유롭게 분출하지 못하고, 멜로 드라마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그들만의 스타일을 추구하여,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묘사하면서 60년대 양적성장의 주류를 이루었다. 김수용의 <청춘교실>을 시작으로 김기덕의 <맨발의 청춘(1964)>, 박종호의 <학사주점(1964)>, 유현목의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1965)>, 김수용의 <여자 19세(1964)> 등이 대표적이다.
멜로드라마의 유행
50년대 멜로드라마가 유행에 민감하고, 종래의 낡은 관념의 타파 등 사회의 자유의식을 시대의식으로 표현한 것에 비하여 60년대는 정권의 규제로 사회적 차원이 아닌 가족적 차원에서 세대차에 따른 갈등 등 및 후반에는 신파조적인 멜로드라마로 변질되었다. 신상옥의 <로맨스 빠빠(1960)>, 박상천의 <가족회의(1962)> <또순이(1963)>, 김수용의 <굴비(1963)> <월급봉투(1964)>, 유현목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있다(1961)> 등과 산파조의 드라마로 당시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던 정소영의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이 대표적이다.
문예영화의 붐
소설을 영상화한 영화는 60년대 후반 정부의 우수영화 보상제도에 따라 외화 수입 쿼터를 얻기 위한 제작 경향이다.
전후 생활고에 짖눌린 소시민의 비참함을 묘사해 한때 상영금지를 당하기도 한 유현목의 <오발탄(1961)>, 줄거리 위주에서 내면심리 묘사로 주목을 받은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김수용의 <갯마을(1964)>, 그리고 묘사위주의 인상적인 영상미를 펼친 이만희의 <만추(1966)> 등이 대표적이며, 이 경향은 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1970년대] -- 한국영화의 침체기
이 시기의 한국영화는 각종 규제 및 정권의 유신홍보 도구화로 인한 소재의 제한 및 상상력의 위축으로 예술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TV의 전국적 보급확대 및 우수영화 육성을 위한 제도가 외화 수입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면서 상업적 측면에서까지 국산영화의 토대를 굳히지 못하고 침체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영화진흥공사'를 설립해 영화제작을 유신이념으로 설정하고, 검열제도를 2중, 3중의 굴레 속에서 강화했다. 영화는 유신이념을 구현해야 했고, 박정권하에서 독과점 형태로 성장한 영화기업들은 스크린 쿼터제로 인해 희소가치가 생겨 흥행을 보장받은 외화를 수입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문예영화와 호스티스물 그리고 10대영화
유신정권하에서 검열이 강화되어, 사회적 시대의식을 구현한 작품들은 만들어질 수 없었고, 소설을 영화화한 문예영화 및 성을 상품화하고, 삶에 대한 냉소를 표현한 호스티스물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1971년 유현목의 <분례기(방영웅 원작)>, 1972년 하길종의 <화분(이효석 원작)>, 최하원의 <무녀도(김동리 원작)>, 1974년 김수용의 <토지(박경리 원작)>,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최인호 원작>, 1975년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원작>, 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황석영 원작)>,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 1977년 김기영의 <이어도(이청준 원작)>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1980~1989) -- 칼라TV의 등장이후의 한국영화
1970년대 유신하에서 억압과 통제의 암흑기를 겪으면서 침체된 한국영화는 1980년 대 신군부정권하에서 영화제작의 정책적 통제가 해제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0년 칼라TV의 보급으로 전반적인 영화계의 불황은 피할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영화업계의 상업화 요구가 더욱 활발해졌고, 동시에 사회전반의 민주화 요구속에 민중의 사실적 묘사를 통한 사회참여영화도 만들어졌다. 후반 강수연의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시작으로 한국영화의 세계 진출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그 수준을 높여가게 되었다. 대표적인 경향으로 유신하에서 표현되지 못한 억압에 대한 저항들을 모티브로 한 리얼리즘 영화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의 영화들은 일부의 중견 감독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80년대에 데뷔한 신인감독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당시의 민중운동과도 일정 부분 맥이 닿아있다. 하지만 그들의 영화는 주로 가난한 서민이나 억압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인간 생활의 모순과 비참함을 표현했지만 사회불평등,억압 등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교적이며, 친자본주의적으로 묘사하여 대중적이고 사회체제적인 접근에는 한계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유현목의 <사람의 아들(1980)>, 정진우의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1982)>등이 있다.유현목의 <사람의 아들>은 한 이단적인 신학적인 사회참여의 고뇌를 모티브로 사실적인 영상미학을 통해 리얼리즘 영화의 모범이 되었고,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는 가난 때문에 낙도에 팔려가 매춘을 하는 한 가난한 도시처녀의 사랑을 통해 소외된 계층의 사회현실을 비판하였다.
임권택 또한 <만다라(1981)>,<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 <길소뜸(1985)>< 씨받이(1986)> <티켓(1986)> 등을 통해 현실의 냉철한 인식을 임권만의 독특한 영상으로 표현했으며, <만다라>,<길소뜸>,<씨받이(1986)>,<아제아제바라아제(1989) 등이 국제영화제에서 이를 인정받으면서 한국 영화의 세계진출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장호는 <별들의 고향(1974)>,<바람 불어 좋은 날(1980)>,<어둠의 자식들(1981)>,<바보들의 행진>,<과부춤(1983)><어우동(1985)>,<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등을 통해 사회를 고발하면서도 다양한 영상미학을 통해 이를 호소력있게 표현하여 대중적 공감대를 얻었다.
1990년대-- 허리우드 영화 직배와 한국영화의 산업화
UIP직배와 허리우드 영화의 지배
88년에 직배영화가 허용된 이래 <위험한 정사>를 시작으로 허리우드 직배영화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꾸준히 진행된 직배사들의 한국진출은 93년 월트 디즈니사를 끝으로 5대 직배사(UIP- CIC, 20세기 폭스 코리아, 워너브러더스, 칼럼비아트라이스타 영화(주)한국, 월트디즈니컴패니 코리아) 체제로 정비된다.
결국 미국영화의 국내 점유율도 높아져 98년 총 영화관객 중 미국영화의 관객이 72.4%를 차지했으며 개봉편수에서도 미국영화가 총 개봉 영화 중 59.6%를 차지했다. 메이저 직배사의 개봉편수와 관객 점유율은 23.7%와 52.9%를 기록했다.
영화의 산업화 현상
▶ 대기업과 금융자본의 영화사업 진출
90년대 들어 국내 대기업들이 영화사업에 속속 진출했으며 이후 금융권도 영화사업에 진출하기 시작 한국 영화의 산업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에 진출한 대기업은 95년에는 10여개(삼성, 대우, SKC, 현대, 제일제당, 해태, 두산 등)에 달했다. 그러나 IMF 경제난으로 많은 대기업들이 발을 뺐고 대신 일신창투, 미래창투, 삼부파이낸스 등 금융자본이 영화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신 대기업들은 배급과 상영의 상업성을 인식, 극장운영사업에 진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멀티플렉스 형태의 영화관들이 속속 등장했고 기존의 단관 극장들도 복합관으로 탈바꿈했다.
▶ 감독시대에서 제작사의 시대로
영화 산업화의 또다른 양상은 '제작사'의 두드러진 활약이다. 한국영화의 80년대가 감독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제작자의 시대인 것이다.
김의석 감독, 익영영화 제작의 <결혼 이야기>(92)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기획-시나리오-연출- 후반작업-홍보 등에 걸친 영화의 전과정에서 뛰어난 팀워크를 보여주며 흥행을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기획자의 시대가 전격적으로 열리고 곧이어 제작자의 시대로 나아간다.
영화의 출생부터 소비까지 그 중심부에 제작자가 자리하게 되고 영화의 제작 못지 않게 기획과 홍보, 배급 등이 매우 중요해졌다. 시네마서비스, 우노필름, 신씨네, 명필름 등의 제작사들은 막강한 배급망, 철저한 도전성, 합리적 제작방식, 마케팅 등을 특징으로 갖추고 잇따른 흥행작을 내며 한국 영화에 새로운 흐름을 형성해가게 된다.
거대자본의 영화산업 진출로 인한 영화의 산업화는 한국영화의 소재나 내용의 다양화, 신인감독의 대거 진출을 이루었나 영화의 사회성, 진지함의 결여라는 결과도 가져왔다.
신인 감독의 대거 등장
90년대 영화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영화적 세례를 충분히 받고 영화 연출 분야에 뛰어들고 있는 세대의 출연이다. 94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대기업의 영화산업 참여는 기존 젊은 관객들의 취향에 맞는 새로운 감독들을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힘입어 새로운 연출감각과 주제 소화 능력을 갖춘 신인감독들이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졌다.
1992년 신인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는 처음으로 대기업이 영화제작에 투자하기 시작했다는 점, 한국영화에서 기획의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점, 섹스 코미디라는 과감한 선전문구와 더불어 성인 관객을 끌어모음으로써 한국영화에 '로맨틱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의 도입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 등.. 한국 영화의 다양화에 앞장서는 구실이 되었다.
80년대 데뷔한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1994)>의 성공으로 블랙 코미디 장르의 개척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사업가로 성공하는데, <마누라 죽이기><미스터 맘마><투캅스2> 등으로 계속적인 흥행을 이룬 뒤 제작자로 나서 성공을 거듭한다.
독립영화, 독립프로덕션영화, 저예산 영화
1990년대에는 주로 운동권에서 '영화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지던 독립영화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며 성장했고 또 대기업이나 충무로 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프로덕션영화, 감독 중심의 저예산 영화들도 꾸준히 만들어졌다.
90년 <파업전야> 는 80년대 대학가 등에서만 만들어지던 독립 단편영화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90년의 시대적 상황으로 정치적 성향을 띤 영화의 제작편수는 줄어든 대신 여러 단편영화제들을 통해 다양한 단편영화들이 대중에게 선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양적,질적으로 급성장하게 됐다.
93년에는 박광수 필름, 기획시대, 장우석 프로덕션 등 젊은 감독과 제작자들이 충무로 제작 시스템에서 벗어나 감독이 중심이 되는 자유로운 제작 체계를 확립해 나갔다. 이로써 한국의 영화계는 충무로 토착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영화와 대기업에서 제작되는 영화, 독립프로덕션의 영화 그리고 독립영화들이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제작방식의 분화를 거치기 시작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용균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역시 독특한 시각을 가진 초현실주의적인 예술적 작품으로 그의 감독 이력을 빛나게 했다.
홍상수 감독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1996)>으로 데뷔, 신인 감독의 영화 치고는 이례적으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으며 이후 <강원도의 힘>을 제작하면서 일상을 통한 현대인의 미묘한 심리를 파고드는 작가주의 영화를 이어가고 있다.
신인 이창동 감독은 저예산 영화 <초록 물고기>로 90년대에 드문 리얼리즘 작품을 선보였으며 김기덕 감독도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 대문> 등 개성있는 저예산 영화를 제작했다.
국제영화제 개최
90년대 들어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들이 생겨나 영상문화의 폭을 넓히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지방자치제의 도입으로 인한 문화의 분산화 덕택에 전국적으로 국제영화제가 개최된다.
1996년 개막한 부산 국제 영화제는 아시아 중심의 예술영화를 선보이며 영화관객들에게 다양한 영화의 사고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97년에 개막된 부천 판타스틱 국제 영화제 역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외에도 서울 국제 독립 영화제, 여성 영화제, 인권영화제 등 특징적 주제의 영화제가 속속 개막되어 알찬 영화 문화의 시간을 경험케 하였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90년대 후반들어 한국영화는 흥행면에서 눈에 띄는 성장을 이어왔다. 또 흥행여부를 떠나 작품성 있는 영화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97년 개봉된 <접속>은 통신 상에서의 사랑이라는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정교하고 깔끔한 작품을 내놓아 젊은 세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전국적으로 1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해 신세대의 취향을 잡아낸 감각으로 기획마인드가 얼만큼 중요한지 다시한번 증명했다.
1998년엔 IMF시대를 맞아 영화계가 큰 위기에 처했으나, 신인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등 관객들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젊고 참신한 기획 마인드로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99년엔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한국영화 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했다.
<쉬리>외에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유령> 등의 흥행에 성공, 99년 극장가 흥행에서 한국 영화가 차지한 비율은 무려 36.1% 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85년이후 최고치로 98년도의 22.5%에 비해 현격히 증가한 수치이다.
특히 90년대 후반들어 신인감독들이 대거 등장하며 흥행작을 만들어냈는데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관객들의 취향을 적극 고려한 기획에 신인감독의 시대에 맞는 감각으로 승부를 건다. 하지만 관객의 취향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단기적 승부에만 집착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한편 작품성있는 영화들이 국제영화제에 진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등 장편과 99년 칸영화제 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송일곤 감독의 <소풍>등 한국 단편영화들도 해외에서 호평을 얻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