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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백암산
* 2021.1.16.
1.
* 울진지역은 진한시대 우중국으로 비정(추정)되는 곳이다. 신라 경덕왕(757년)에 울진군 명칭이 생겼다.
* 울진군은 1963년 군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 [역사] 죽변면 봉평리의 [울진봉평신라비] 는 국보 242호. 524년 (법흥왕 11)에 세움
1988년 4월 발견 고구려 영토에서 신라영토로 편입되면서 세웠다. 왕의 순행과 율령제도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 점령지 백성은 신라의 노인 奴人에 해당되는 바, 이들이 신라에 항쟁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신라는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6부회의를 열어, 대인을 파견하여 다시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민들을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 매금왕(법흥왕)도 각부 신료들과 함께 명령을 발하였으니, 당시 신라왕의 한계를 볼 수가 있다.
* [역사] 울진 삼척 무장공비 120명 침투사건,
1968년 11월, 평창군 10세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절규하다 죽음을 당한 것도 이때이다. 소탕작전으로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다. 우리 쪽 인명 피해는 민간과 군경의 전사자는 18명.
2.
* 울진의 불영계곡은 12km나 되는 깊은 계곡이다.
이 계곡 불영사는 651년 신라 진덕여왕 때 의상이 창건하였고 현재는 여승들의 절이다.
* 망양정(근남면) 과 월송정(평해읍 월송리)은 관동팔경 중에 속한다.
* 명승지 성류굴(근남면 수곡리)은 전장 479m
* 백암온천은 유황 라돈 등 성분이 많은 물 좋은 온천.
* 울진군 북쪽 덕구 온천은 알칼리 온천이다.
3. 백암폭포, 높이 30m 이중 폭포, 수량은 적은 편이다.
4. 이 지역에 잘 생기고 곧고 붉은 소나무를 금강송 또는 춘양목 이라고 한다.
5. 상처난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일제시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전쟁물자가 부족했던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여 인적 물적 수탈을 강행했다. 심지어 소나무의 송진까지도 채취해서 바치라는 할당을 했다. 이 소나무들의 상처는 그 때의 아픈 상처들이다.
6. 다래나무 덩굴
7. 칡덩굴
8. 거대한 칡덩굴
9. 백암폭포 위에서
10. 아름다운 소나무가 유난히 많은 산이다.
11. 백암폭포 위에서
12. 겨울 백암폭포 빙폭
13. 위에서 내려다 본 백암폭포 빙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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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가 지고온 물은 버리라고 하고, 폭포수가 좋다고 받느라 식겁하는 중
20. 팔도 아프겠다.
21. 배고프겠다.
22. 데크계단길에서 나란히 나란히, 결국 5~6시간 걸리는 백암산 정상은 못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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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어디 잘 찍혔나 보자.
27. 무릎보호대 야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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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아~ 야~ 언 폭포지만, 힘찬 기를 불어 넣는 중.
30. 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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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암폭포까지 밖에 못갔지만 연전에 백암산 정상을 가서 찍은 게 있어서 아래에 몇 컷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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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냥묘
* 백암산에 김녕김씨의 묘소 두기가 아래 위로 있는데, 천냥묘라고 표지판은 그럴듯하게 세웠는데, 설명이 없어서 많은 등산객들이 궁금해 한다. (궁금하면 5백원~)
군청 사이트 어디에도 설명은 없다. 그러므로 특별한 전설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쉽게 말하자면 무덤 자리가 명당이어서 거금 천냥을 주고 샀다는 것이다. 관리소 아저씨의 설명이라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인터넷상에 실려 있어서 그대로 써 본다.
* 멀지 않은 옛날, 김녕 김씨 집에 머슴살이를 하던 천씨 성의 사람이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소로 쓸 적당한 장소가 없어 이곳 높은 곳까지 모시고 와서 아무렇게나 묻고 갔는데, 그 후 점점 살림이 번창해갔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인이 유명한 풍수를 데려다가 머슴 부친의 산소를 보였더니 천하명당이라면서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산소를 사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머슴을 설득해서 천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
그리고 자기 할아버지를 그곳 위쪽에 이장시키고 그 아래에는 자기가 묻혔다. 그 후부터 천냥묘라고 불렸고, 그 뒤 후손 중에서 초대 울진군수가 나왔다고 한다.
34. 각진 돌이 계단 길을 만들어 주네.
35. 백암산 정상 표지석. 1004m
백암산은 울진군의 남쪽에 온정면과 영양군 수비면 사이에 있는 1,004m산. 이 표지석 뒤쪽은 헬기장으로 돼있다.
36. 정상 부근의 경치
37. 정상 부근의 경치
38. 정상 부근의 경치
39. 정상 부근의 경치, 초봄인데, 응달에 녹지 않은 눈이 두껍게 쌓여 있다.
40. 백암 엘지생활연수원 로비에 있는 엘지 창업자 구인회 회장 흉상, 위대한 경제선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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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신라시대부터 알려졌구나. 사슴을 쫓던 한 사냥꾼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한다.
* 중생대 백악기 이후 화성암 지역에서 용출된다.
* 천연 53도C 고온 온천수,물을 절대로 데우지않음
* 천연 알칼리성 다돈 성분, 수산화나트륨,불소, 염화칼슘 등 우리 몸에 유익한 성분 함유.
* 만성피부염, 자궁내막염, 부인병, 중풍, 동맥경화, 천식 등에 탁월함.
46. 이산해(1539~1609)가 왔었구나!
* 본관 한산, 호 아계, 고려말 목은 이색의 7대손, 이지함(토정비결)의 조카
* 우의정, 영의정, 아성부원군 등 거물 정치인
* 동인, 북인(영수), 대북파, 광해군 때 잘 나갔던 인물
* 결국 평해 유배. 유배시 시문을 많이 남김. 서화 초서 산수묵도 대가 , 아계집 남김
* 온천수로 시병을 치료한다?
시문학에 침잠해 있는 것은 좋은 것인데, 병으로 본 것이 재미있다. 결국 온천하고 맑은 정신 가다듬어, 더욱 맑은 시를 썼을 터이다.
47. 서거정(1420~1488)이 여기 왔었구나!
* 본관 대구. 호 사가정, 서울 7호선에 사가정역, 중랑구에 사가정공원
* 세종~성종 6대임금 모심. 대학자 관료, 원만한 인격, 편찬사업에 많이 참여.
*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오행총괄,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국가 사업에 참여
* 개인 저서 ; 역대연표, 동인시화, 필원잡기, 태평한화골계전. 사가집 등과 많은 시를 남김.
< 정목탕 >
여섯자라 기운차게 산을 들어 올리고
아홉 용이 우물지켜 수원이 신령스럽네.
온천물 따뜻하여 봄날처럼 훈훈하고
귀신이 수호하는 듯 티끌 기운 없구나.
한웅큼 물로도 묵은 병이 낫고
겨드랑이 날개 돋아 신선이 된다하네.
시와 술로 고질이 든 이내 몸
한번 가서 시원스럽게 씻어 버리려네.
* 6자라가 백암산을 들어 올리고 있고, 9룡이 온천수를 지하에서 지킨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48. 정상 5시간, 폭포 2시간 소요
49. 어둠속의 나목. 그 너머로 노루, 고라니, 멧돼지들의 움직임을 마음으로 본다.
50. 얘, 노루야? 고라니야? 온천 역사를 보니 사슴과 관련이 있네, 사슴인가 보다. 뿔은 아직 안났구나. 배고프겠다.
울진군 출신 인물 남사고 이야기
울진군에 왔으면, <남사고>라는 인물을 기억할 만하다.
울진 태생 풍수지리학자 남사고 유적지 [남사고 생가터]가 근남면에 있다.
* 南師古 ; 고향은 울진,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조선중기 학자 도사. 본관은 영양, 호는 격암格菴.
선조 때 천문교수를 지낸 것 외는 뚜렷한 경력이 없다. 풍수지리설의 많은 일화를 남겼다. 남사고 비결, <격암유록> 등을 남겼다고 한다.
◈ [ 남사고의 예언 ]
* 명종 말기에 선조 때 있을 분당당쟁을 예언했고,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침범하리라고 했는데, 나중에 왜장 가토(가등청정)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 풍수지리에 능했으나 자기 아버지 무덤을 쓸 때에 지나친 욕심에 눈이 멀어서 아홉 번 이장하고 열 번 무덤을 써서 구천십장 九遷十葬을 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한다. 무리한 짓을 한 탓에 자손도 없다고 한다.
◈ [ 어우야담(유몽인)] 에 남사고 이야기]
* 남사고가 강릉에 있을 때 고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금년에는 반드시 큰 병란이 있어, 이곳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삼가 피하도록 하십시오."
고을 사람들은 평소 남사고가 신통한 예언력이 있음을 잘 아는지라 간성과 양양 사이로 피난하였다. 그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온 고을이 적막해졌다. 남사고가 돌아와 말했다.
"나의 점술이 조잡하다고 하겠구나. 전염병을 두고 병란이라 하다니......"
* 강릉 고을의 선비 최운부가 과거에 급제한 뒤, 장차 부모를 위해 경사스러운 잔치를 열려고 하자 남사고가 고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반드시 가서 잔치를 구경하도록 하게나. 이 고을에서 30년 동안 이 같은 경사가 없을 것이네." 훗날 '이숙'이라는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니 꼭 31년만이었다.
* 남사고가 일찍이 서울에 온 적이 있었는데, 참판 정기원이 어린 나이로 어른을 따라가 남사고를 보았다. 훗날 정기원이 다시 찾아갔을 때, 집 안에서부터 큰 소리로 "정수재가 왔는가?" 하면서 남사고가 허둥지둥 달려 나와 맞이했다. 정기원이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제가 올 줄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그대가 올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네."
남사고가 벽을 가리켰는데, '모월 모일에 정 아무개가 온다' 라고 쓰여 있었다.
* 가정 정묘년(1567)에 남사고가 남산 잠두봉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오랫동안 놀라 탄식하고는 말했다.
"어찌하여 왕기가 다해 가는 고!"
잠시 후에 또 말했다. "왕기가 사직동으로 옮겨 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헌대왕(명종)이 승하하셨는데, 적통의 후사가 없어 소경대왕(선조)을 사직동의 잠저 潛邸(왕이 되기 전에 살던 사가)에서 모셔와 받들었다.
* 남사고가 보니 정축년(1577)에 치우기(병란의 전조가 되는 별)가 출현했는데, 그 길이가 하늘과 나란할 정도였다. 이를 보고 임진왜란(1592)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