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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A Taxi Driver
한국영화, 장르:드라마 개봉:2017.08.02
감독:장훈, 각본:엄유나, 제작:더램프(주)
주연:송강호,토마스 크레취만,유해진,류준열,
관객:12,180,384명(2017.09.27.현재)
1. “5.18 광주민주화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민중항쟁”과 “광주시민항쟁”으로 알려진 시민 민주화 운동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으로 인하여 민주화의 요구는 언제나 무시되었다. 군사독재가 낳은 산물은 결국 10월의 어두운 그림자로 향하였다. 1979년 10월4일,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국회의원직 제명을 당하자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부마항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대립의 중심에 10.26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것이다. 10.26사태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조직이 급부상하였다. 그해 12월12일,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발빠르게 정국을 장악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1980년 2월29일, 김대중 선생이 복권되었으나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화 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며 권력야욕을 드러 내었다. 4월19일, 강원도 사북사태의 생존권 문제를 계기로 5월1일, 대학교 학원사태가 발생하고, 5월13일에는 전국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 데모로 확산되었다. 5월15일 서울권 대학생 시위는 서울시가지를 마비시키며 신군부 세력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5월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령 전국확대를 발표함으로서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 지도자들을 권력형 부정축재 및 소요조종 혐의자로 체포하였다.
5월13일, 서울시위에 자극을 받은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14~16일, 격렬한 가두시위를 감행하며 야간에도 횃불시위를 이어 나갔다. 5월18일, 광주지역 복적생과 총학생회 임원들이 검속되고 1시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되며 대학내 계엄군이 상주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진압의 전초전이었다. 쿠데타 권력에 저항하는 국민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선포된 계엄령은 오히려 국민을 자극하는 수단이 되었다. 특히 광주지역에서의 공수부대 중심의 무력진압은 성난 민심을 더욱 자극하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학생시위로 촉발되었으나 점차적으로 시민봉기로 확장되어 가며 무력항쟁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경찰력으로 방어하던 시위대를 군인들이 맞게 됨으로서 광주의 저항은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져가게 된 것이다.
5월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강제휴교령에 반대하며 공수부대요원들과 대치하였다. 시위대가 줄어들지 않고 점차 증가하자 당황한 공수부대 진압요원들이 무차별 진압작전을 펼치는 가운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성난 군인들은 금남로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추정되는 모든 청년과 여성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짓밟는 잔혹한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대학생 시위대들을 꾸짖었지만 시민들 또한 점차 저항의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운동은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뿐 다른 어떤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이 총기류 발사를 통하여 시민들을 위협함으로서 무장봉기로 자극시킨 사태였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고 구타하고, 이에 대항하는 시위대가 파출소와 방송국을 침입하여 총기류를 탈취하고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경찰차량을 포위하는 등 군부세력과 광주시민간에는 적대적 감정이 극에 달하였다.
5월18일 오후4시50분, 광주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는 최초로 총기류를 발포하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후 시위대는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며 20일 오후 6시에는 택시와 버스운전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집결하여 계엄군을 퇴치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계엄군을 외곽으로 후퇴시킨 시위대가 전라남도 도청 경비군경들과 대치한 상태로 밤을 지새고 광주MBC와 노동청과 세무서 등이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전소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남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시민저항군의 손에 장악되기에 이르렀으며, 시민들에게 쫓긴 공수부대는 20일밤 11시경 집단발포를 시작하였다. 이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였고,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이날을 계기로 도시빈민계층과 노동자들이 시위대에 편승하였고,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던 20일을 계기로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21일 오전,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오후 1시경, 시민들은 전남 화순,해남,나주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을 시작하였고,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립은 이제 무력항쟁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산발적으로 일어난 계엄군과 시민군의 총격전에서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21일 밤 계엄군은 광주에서 외곽지역으로 퇴각하였고, 22~27일까지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은 자치활동을 하며 시민의 안전과 질서유지에 힘을 다하였다. 22일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무기회수 문제로 학생과 시민들은 의견이 분분하였고, 갑자기 조직된 조직의 리더십도 강온대립의 칼날위에 우왕좌왕 하였다. 일부 시민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가정으로 복귀하였으나 강경파 학생들은 수습대책위원회를 정면 비난하고 25일밤,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시민단체는 자치와 민주공동체 구현에 관한 새로운 시도를 계획 하였으나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다. 이렇게 시민단체들이 토론을 계속하는 동안 외곽지역으로 후퇴하였던 계엄군은 외곽도로를 완전 차단하고 탱크로 무장한 2만5천여명 계엄군과 함께 무력 진압에 착수하였다. 27일 새벽5시, 도청은 계엄군에 의해 완전 봉쇄되고 시민군 전원이 연행되었다. 아침이 되자 계엄군은 가택수색을 감행하였고, 광주민주화 운동관련자 전원을 상무대로 연행 하는 등 대규모 소탕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대중과 재야 인사들을 내란혐의로 전원 구속하였다. 1995년 7월18일, 서울지방검찰청은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193명이 사망하고 852명이 부상자로 확인하였다고 발표하였지만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1980년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강제 하야함으로서 8월27일,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93년 문민정부 출범후 11월24일,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5.18특별법”을 제정하였다. 12월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반란수괴혐의로 구속되고, 그후 노태우 전 대통령도 감옥 신세가 되었다. 1997년 4월17일, 법원은 12.12사건은 군사반란으로 규정하고, 5.18은 내란목적의 살인행위로 규정하였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은 6.25 전쟁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비극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은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서 1980년대 민중운동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광주민주화 운동은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국민을 상대로 하는 군사반란 획책이라는 점에서 다시는 군부가 정권을 잡을 수 없도록 하는 문민정부의 탄생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 영화 “택시운전사”
언론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청암 송건호를 기념하는 국제언론상 제2회 송건호언론상 시상식이 2003년 서울에서 있었다. 이날 수상자로는 5.18광주민주화 운동을 전 세계로 타전한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역)였다. 그는 5.18 당시 일본주재기자로서 5.18을 취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입국하였지만 군부정권의 언론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피터는 한국의 재야언론인 “이기자”(정진영역)를 통하여 서울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한다.
개인택시기사로서 늘 고단한 삶이 계속되는 “김만섭”(송강호역)은 월세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딸 “은정”(유은미역)이 주인집 아들 “상구”(권순준역)에게 당하는 서러움을 달래주지 못한다. 그는 착한 보통 서민이다. 임산부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도 돈을 받지 못하고, 고3학생을 태워주고 택시비를 다 받지 못해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사람이다. 도심중앙에서 데모를 하는 학생들로 인하여 그는 공치는 날이 많다. 시위대를 바라보며 부모덕에 공부하는 애들이 고생을 해 봐야 한다고 고개를 흔들며 꾸지람을 하지만 학생들의 시위는 격화될뿐 줄어들지 않는다.
오늘도 월세 10만원이 밀려 “주인집 여자”(전혜진역)에게 독촉을 받지만 해결할 기미가 없다. “주인집 남편”(고창석역)과 절친 관계인 김만섭은 그에게 밀린 월세비를 빌려 달라고 요구하는데 때마침 서울에서 광주까지 가는 손님을 받은 택시기사가 10만원을 받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이 그 손님을 대신 태워 광주로 향한다.
김만섭은 개인택시 운전기사다.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보내면서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린 그는 하나밖에 없는 딸의 신발이 헐어도 사 줄 수 없는 그런 소시민이다. 그가 소유한 차는 벌써 폐차를 해야 할 만큼 낡을때로 낡아 있다. 그래도 그에겐 옥이야 금이야 보물 1호다. 서울 도심에서 만난 손님은 뜻밖에도 외국인이었다. 자신을 피터라고 소개한 외국인은 미국인도 아닌 독일인이었다. 한때 사우디 근로자로 일한 경험이 있는 김만섭은 콩글리쉬로서 대충 대화를 이끌어 가며 광주로 향한다.
고속도로로 내 달리는 김만섭은 지금 1980년 5월18일 광주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다. 지식인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다. 사상이나 이념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소시민일 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독일 기자를 태우고 광주로 향하고 있다. 고속도로를 내 달리는 감만섭의 택시는 고물이다. 덜커덩 금방이라도 멈출 것 같은 택시는 어느덧 광주 인근에 도착했다. 이제 손님을 광주에 내리고 돈을 받으면 모든 것은 해피엔딩이다. 밤에 주인에게 월세를 주고 딸을 힘들게 하는 상구를 혼내줄 마음에 기분마져 상쾌하다.
그런데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광주 톨게이트 입구에서 도로를 막고 있는 철조망들에 김만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며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외국인 손님은 광주로 가야만 하고 군인들은 광주 출입금지령을 내리고 김만섭은 고민에 빠졌지만 10만원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되돌아 갈 결심을 접고 외곽지역을 돌아간다. 밤에 혼자 집에 있을 은정이를 생각하며 김만섭은 착잡하기만 하다.시골 한적한 길로 들어선 김만섭은 광주로 들어가는 샛길을 물어보며 안간힘을 써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결국 접경지역의 군인들과 마주한 김만섭과 피터는 군인들과 실랑이를 하는 가운데 비즈니스 목적으로 입국한 외국기업과의 거래를 핑계로 극적으로 광주 진입에 성공한다.
시내 곳곳에는 참담할 정도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거리 곳곳에는 시위대가 돌아 다니고 군인들이 장악한 도시에서는 총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진다. 곳곳에 최류탄이 터지고 시위대는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며 저항을 하고 있다. 그저 손님을 태워주고 밀린 집세를 내고 싶었던 보통사람 김만섭이 바라본 광주의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태우고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이 독일기자라는 것을 알게된 김만섭은 두려움에 떨지만 더 이상 도망갈때도 없다. 설상가상 자신의 차까지 고장이 나서 그는 아무것도 할수 없게 된 것이다. 광주의 상황은 전화도 불통이다. 시외로 나가는 모든 정보가 차단된 것이다.
“구재식”(류준열역)은 운동권 학생이 아닌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런 학생이 지금 시위대와 함께 광주를 지키고 있다. 광주의 택시기사들도 시위대를 지원하고 있다. “황태술”(유해진역)은 택시회사 고참으로 택시기사들의 리더격이다. 우연하게 만난 구재식은 김만섭의 택시에 동승해 피터의 취재를 지원하고 있다. 광주 도심에서 피터는 광주일보 “최기자”(박혁권역)를 만나게 된다. 최기자는 광주의 소식을 외부로 전할 방법을 모색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광주의 현실을 기사로 내 보내려 작심하지만 계엄사령부에 걸려 심문과 구타를 당한다.
한편 계엄사령부는 김만섭과 피터를 추적하고 있다. 독일 기자가 선교사로 위장하여 서울에 들어와 서울택시를 타고 광주로 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사복조장”(최귀화역)은 피터를 추적하며 그가 찍은 사진과 영상을 압수하려 하지만 좀처럼 행방을 알수 없다. 시위가 펼쳐지는 도심에서 군인들이 강제진압하며 총을 쏘는 장면을 바라본 피터는 충격적인 영상을 카메라에 그대로 담아 내고 있다. 시위대 주변에서 피터와 김만섭을 찾던 사복조장과 그 일행이 피터를 발견하고 추적한다. 도주로 확보에 실패한 김만섭과 피터는 구재식의 재치로 구사일생하지만 그는 끝내 시신으로 되돌아 온다. 그 과정에서 김만섭도 위기에 봉착하며 사복조장에게 폭력을 당하며 빨갱이로 몰리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 이번에는 피터가 자신을 구해주며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끼여 들게된 김만섭은 딸이 밤새 혼자서 지낸 것을 염려하여 통화를 한다. 딸과의 약속을 어긴 김만섭의 마음은 착잡하고, 그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서울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시장통 한켠에서 예쁜 신발을 발견한 김만섭은 은정이를 생각하며 신발 하나를 구입했다. 그렇게 서울로 향하던 김만섭이 점심을 먹기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광주의 정보가 잘못 기재된 신문을 바라보며 더 큰 충격과 고민에 빠져든다. 결국 김만섭은 서울로 향하던 택시를 돌려 피터에게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구재식의 시신을 목도한 김만섭은 극심한 쇼크에 빠지고 피터를 끝까지 출국시켜야 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모든 취재가 끝난 김만섭과 피터가 광주를 빠져 나가려 할때에 도심외곽은 철저히 봉쇄 되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비포장검문소 중사”(엄태구역)는 서울택시 번호판을 보고도 묵인하며 탈출을 도왔다. 그러나 사복조장과 그 일행이 그들을 다시 추적하기 시작하고 이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광주택시들이 시외곽으로 몰려왔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피터의 탈출에는 이념의 비극이 숨어있다. 결국 자신의 소임을 다한 김만섭의 행동에 감동한 피터는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단지 “김사복”이라는 가명을 적어 주었다. 일본 귀국에 성공한 피터는 광주의 상황을 전세계에 타전했다. 6.25이후 최대의 비극은 이렇게 국내가 아닌 해외에 민낯을 드러내며 군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피터가 송건호 시상식 수상자로 한국에 왔을 때 그를 찾으려고 백방을 찾아 다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김사복”. 김만섭은 여전히 택시 운전사다. 작은 선행을 베풀며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갔다. 피터가 한국에 왔을때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수 없다. 그러나 김사복이 아니었다면 피터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일이지만 이것은 국민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역사속에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광주의 비극은 이렇게 또다시 역사밖으로 여행을 떠난다.
영화는 끝이 났다. “조용필”의 “단발머리”로 시작된 택시운전사는 피터의 생전 인터뷰로서 막을 내린다.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픽션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하여 충격을 받는다. 광주밖의 국민들은 잘 알지 못한다. 경험하지 않았고 목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군인들에 의해 자국의 국민이 총에 맞아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군인을 탓하거나 폄하할 목적이 아니다. 단지 과거에 존재했던 분명한 사실에 대한 접근이고 태도다.
그리스도인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싶을까? 한사람의 보통사람, 정치에 관심도 없고, 이념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왜 이러한 사건에 들어가고 왜 이 사람이 군인으로부터 쫓겨야 하고 구타를 당해야 했을까? 그것은 그가 가진 보통의 신념이다. 택시비를 받고 손님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태워주는 것은 김만섭의 의무와 역할이다. 피터는 기자로서 외부로부터 고립된 광주의 현실을 그대로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김만섭과 피터가 가진 기본개념에 대한 공통분모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의무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의 소임인 것이다. 김만섭이 손님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인도한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소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피터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모든 것이 차단된 광주의 민낯을 세계에 타전하듯이, 그리스도인도 모든 진리로부터 차단된 마음의 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