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포도청과 천주교 순교사
1. 포도청의 역사
1) 설치와 변모
성종 때 좌·우 포도장을 임명한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정식으로 좌·우 포 도청(일명 좌·우변)을 설치한 것은 중종 때(16세기 초)로, 이후 350여 년 동안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 되었다.
2) 좌·우포도청의 위치
○ 좌포도청 : 파자교(把字橋) 동북쪽(현 종로구 묘동 56번지, 옛 단성사 자리, 현 귀금속상가 위치)→1894년에 신설된 '경무청'이 들어섬(1907년 경시청으 로 개칭되었다가 1910년에 폐지됨)
○ 우포도청 : 혜정교(惠政橋) 남쪽(현 종로 1가 89번지, 광화문우체국과 일민 미술관 즉 옛 동아일보사 사이)
3) 설치 목적 및 업무
포도와 순라(치안), 임금 거동시의 호위, 유언비어 유포, 천주교 전파, 무기명 비방 사건, 위조 엽전 제조, 도박 행위, 밀주 제조 등 색출
4) 행정 체제 및 직제
① 행정 업무 : 형조 담당. 인원 관리 및 녹봉 급여 : 병조 담당
② 관할 구역
· 좌포도청 : 한성부의 동부 · 중부 · 남부와 경기좌도
· 우포도청 : 한성부의 서부 · 북부와 경기우도
③ 직제
· 포도대장 : 종2품 무관, 좌 · 우변 각 1인, 오위의 총관 혹은 오군영의 대 장, 한성 판윤 등을 겸직
· 종사관 : 종6품, 좌 · 우변 각 3인
· 군관(즉 포교) : 무관 겸직, 좌 · 우변 각 3명, 필요에 따라 증원 혹은 감원
· 부장(즉 포교) : 좌 · 우변 각 10명, 필요에 따라 증원 혹은 감원
· 서원(書員) : 좌 · 우변 각 4인
· 사령 : 좌 · 우변 각 2인
· 군사(즉 포졸) : 좌 · 우변 각 50명, 19세기에는 각각 64명(70여 명까지 증 원된 적도 있음)
*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1830~1884) : 제6대 조선교구장.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861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후 중국 요동 땅에서 조선에 재입국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1869년 4월 27일 제6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어 다음해 6월 5일 로마에서 주교 서품식을 갖고 요동으로 귀환하였다.
1877년 9월 23일 황해도를 통해 조선에 재입국하였으나, 4개월도 안된 1878년 1월 18일에 체포되어 포도청 옥에 갇혀 있다가 6월 24일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일본을 거쳐 프랑스로 귀국한 뒤 1884년 고향 반느에서 선종하였다.
그가 저술한 <서울에서의 포도청 옥중기>는 당시의 포도청사를 연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된다.
2. 교회사와 포도청
서울의 좌 · 우 포도청이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하게 된 것은 1795년(을묘년)의 북산사건(北山事件) 때부터였다. 이 사건은 북산(즉 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거처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좌포도청(좌포도대장 : 조규진)에서는 주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포교와 포졸들을 계동으로 급파했으나 지도층 신자들의 기지로 체포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신부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에서 혹독한 매질로 순교에 이르도록 했으니, 이것이 을묘박해(乙卯迫害)이다.
을묘박해로부터 6년이 지난 1801년에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였다. 박해령이 내려지자 조정에서는 양 포도청에 명하여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지도층 신자들은 형조와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남은 신자들 대부분은 좌·우 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문모(야고보) 신부도 자수한 뒤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군문효수 판결을 받았으며, '하느님의 종' 심아기(바르바라)와 김이우(바르나바)는 포도청의 매질 아래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이로써 포도청은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순교터요 신앙 증거터가 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좌·우 포도청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거나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피신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동안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나자 진이 빠져 신자들을 체포하는 일을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중 1833년에는 충청도 홍주 출신 황석지(베드로)가 아현의 조카집에서 체포되어 좌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옥에서 병사로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다시 한번 많은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성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나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성 정하상(바오로),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은 포도청의 모진 형벌을 이겨내야만 하였다. 특히 성 정국보(프로타시아), 성 장성집(요셉),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등은 포도청의 매질 아래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고, 13세의 어린 성인 유대철(베드로), 성 민극가(스테파노), 성 정화경(안드레아) 등은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이 바르바라와 같이 포도청의 형벌과 열악한 옥중 생활로 병사한 이들도 있었다.
이후 좌·우 포도청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터요 신앙 증거터가 되었다. 1841년에는『기해일기』를 저술한 최영수(필립보)가 우포도청에서 매를 맞다가 순교하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성 현석문(가롤로)이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였고, 성 남경문(베드로)과 성 임치백(요셉)은 좌포도청에서, 성 한이형(라우렌시오)과 성녀 우술임(수산나) 등은 우포도청에서 각각 형벌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는 성 베르뇌(장경일 시메온) 주교, 성 다블뤼(안돈이 안토니오) 주교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물론 성 황석두(루카) 회장, 성 장주기(요셉) 회장 등이 포도청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였다. 또한 1868년에서 1871년 사이에는 이유일(안토니오), 한용호(베네딕토), 최사관(예로니모) 등 수많은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포도청에서의 순교사는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73년에 흥선대원군이 하야하면서 공식적인 박해가 끝난 뒤에도 포도청의 순교사는 계속되었다. 1878년에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이복명 펠리스) 주교가, 1879년 드게트(최동진 빅토르) 신부가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던 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 이병교(레오), 김덕빈(바오로), 이용헌(이시도르) 등은 1879년(기묘년)에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니,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었다.
3. 포도청의 순교자와 증거자
서울의 첫 순교터요 마지막 순교터
1795년의 을묘박해 때 '하느님의 종'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이 장살로 순교한 이래 1879년에 일어난 마지막의 기묘박해로 이병교(레오), 김덕빈(바오로), 이용헌(이시도로) 등이 아사로 순교하기까지 수많은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천상의 화관을 얻었다. 이처럼 서울의 좌·우 포도청은 서울의 첫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요,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었다.
이들 중에는 최경환(프란치스코) · 유대철(베드로) 등 22명의 성인과 윤유일 · 김이우(바르나바) 등 5명의 '하느님의 종'이 들어 있다. 대부분 장사·병사·교수형으로 순교한 분들이다. 포도청은 끝까지 신앙의 끈을 놓지 않은 이들의 고통과 애환, 그리고 영광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중요한 순교터이다.
최대의 신앙 증거터 포도청
1801년의 신유박해 때 '하느님의 종' 최창현(요한) 회장 등이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이래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포도청은 한국 천주교 최대의 신앙 증거터가 되었다. 그 안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성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 성 정하상(바오로)과 동료 순교자들, '하느님의 종' 주문모(야고보) 신부 등이 포함되어 있다.
4. 순교자들이 남긴 이야기
죽음의 곤장 아래서 십자가의 영광을 증언하다
1795년(을묘년) 5월의 '북산사건' 으로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 신부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등 3명이 체포되어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천주학쟁이들을 비밀리에 때려 죽여 입막음을 하라' 고 명했고, 그들은 이러한 명에 따라 혹독한 매질 아래 목숨을 바쳐야만 하였다. 순교 직전에 우리의 용감한 순교자들은 이렇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저 십자 형틀에 묶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가 대신 죄를 지고 가셨으니, 어찌 자식이 되어서 저 큰 부모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천만 번 죽을지언정 그분을 모독할 수는 없습니다."
아! 매질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면서도 십자가의 영광을 부인하지 않은 거룩한 순교자.
위대하다는 말로 어찌 그 용덕을 대신할 수 있으랴!
순명이라는 단어로 어찌 그 신앙의 순수함을 설명할 수 있으랴!
신앙을 증거하려면 시뻘건 숯덩이를 삼켜라!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소년 유대철(베드로) 성인.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맏아들. 집안의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의 뒤를 따른 하느님의 종.
증거자들의 꿋꿋한 용기를 보면서 순교 원의가 불타오른 소년 유대철은 스스로 포도청을 찾았다. 이어지는 혹독한 형벌. 너덜거리는 살점들.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 그러나 박해자들은 결코 은총의 힘을 얻은 어린 소년을 다스릴 수 없었다. 포졸이 구리 대통으로 허벅지 살점을 떼에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단호하였다. "어떠한 형벌로 다스린다 해도 천주교를 믿는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포졸이 시뻘건 숯덩이를 집게로 꺼내 성인의 입에 갖다 대며 말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끝까지 믿는다면 입을 벌려라."
"그래요. 그 숯덩이를 제 입에 넣어보세요. 제 마음이 변할 줄 아세요."
작은 천사의 용기는 흉악한 박해자들의 손길을 뛰어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이 어린 천사를 형장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포도청의 옥에서 교살하고 말았으니, 때는 1839년 10월 31일(음력 9월 25일)이었다.
춤추는 곤장, 난무하는 남형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법 이외의 형 즉 남형(濫刑)이 자주 적용되곤 하였다.
곤장은 기본이었고, 도적들에게 사용하던 치도곤, 주장질, 팔 다리를 부러트리는 주리질(주뢰질)도 행해졌다. 톱질로 살점을 떼어내고, 장대에 거꾸로 잡아맨 뒤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학춤도 자행되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리질과 주장질에 이어 치도곤 110대, 주장과 태장 합 340대를 맞고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형리들조차 놀라 소리쳤다. "저놈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목적이다." 그렇게 성인은 옥중에서 장독으로 순교하였다.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성인 주교, 모방(나 베드로) 성인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성인 신부도 포도청의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정하상(바오로) 성인도 포도청의 혹독한 형벌 아래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장 시메온) 주교와 다블뤼(안 안토니오) 주교가 포도청의 형벌을 극복해야만 하였다. 황석두(루카) 성인은 포도대장의 추상과 같은 문초에도 아랑곳없이 외쳤다.
"천주는 큰 임금이요 큰 아비입니다. 포청의 칼과 톱이 무섭다고는 하나 어찌 불충·불효하겠읍니까?"
박해자들은 손쉬운 교수형으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곤 하였다. 한 명의 포졸이 순교자의 목을 맨 올가미 줄 끝을 구멍으로 내보내고 방문을 나오면, 다른 포졸들이 달려들어 닻을 끌어올리듯 줄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묵직한 나무토막에 묶어 숨을 끊어버렸다.
1879년의 기묘박해 때는 한 톨의 낱알도 아까운 듯 순교자들을 굶겨죽이기까지 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뒤 중국으로 추방된 드게트(최 빅토르) 신부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순교자들은 굶주림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는지? 나는 기겁하여 물러섰습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고, 비참과 기아, 그리고 무서운 문둥병 같은 것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 산송장들이요, 진짜 해골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인 성 김대건 신부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여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고 우르실라를 특별히 자네에게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그분을 위해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혹독한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님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과연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포도청 옥에 갇혀 스승 신부님들께 올린 옥중 서한의 일부이다. 이로부터 한 달 반 뒤인 1846년 9월 16일에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로 끌려나가 군문효수형을 받아야만 하였다.
포도청은 김대건 신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다. 그 후미지고 더러운 골방에서 그는 끝까지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자신의 손을 잡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인 것이 그에게는 더없는 은총이었다.
"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길이 보존하고 그 순교사의 의미를
후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중요한 순교터요 신앙 증거터!!
▶종로 성당 발행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