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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37회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했을까?' (1999.07.24.)
37회 :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했을까?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했을까?
방송일: 19990724 조회수 : 6462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제 37 회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했을까>
-방송 1999년 7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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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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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허준, 스승을 해부하다?
(* 안에 들어가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해부를 시작해 몸 안을 살펴보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 칼 선명해지면) 지금으로부터 4백년전, 한여름에도 냉기가 서늘한 얼음골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줬다 제자를 위해 기꺼이 해부용 모델이 됨으로써 제자가
몸안의 오장육부를 살피고 해부술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목숨과 바꾼 큰 가르침이었다
(* 촛불 T.S) 스승의 살신성인... 눈물을 머금은 제자의 해부는 시작되고... 그 제자는
마침내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된다 바로 명의 허준과 그 스승에 관한 전설같은 이야기...
과연, 허준은 진짜로 스승을 해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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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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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도록 읽히고 있는 책은 뭘까요? 지금으로부터 4백년전 간행돼서 지금
까지 읽히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출판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3국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책... 바로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입니다
<동의보감>은 오늘날에도 한방에선 거의 교과서처럼 쓰이는 의학서입니다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거듭해서 간행되고, 또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해서 읽히는 책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그야말로 <스테디셀러>인 것입니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출판 당시부터 동양3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한의학을 전했던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자존심을 아랑곳하지 않고
구해가려고 애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과연 동의보감은 어떤 책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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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동양3국의 베스트셀러, <동의보감>
장쩌민 25 (* 3초후) 95년 11월 14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우리나라를 국빈방문했다
(* 박수 받는 F.S 다음에) 이날 국회 연설에서 장쩌민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간의 오랜 우호관계를 예로 들면서
인사말을 시작했다
(현장음) "우리 양국 인민은 2천여년 전부터 왕래 시작~ 17세기 편집된 동의보감도 우리 양국 문화교류사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국회 5 동의보감 궤 30 뜻밖이었다 장쩌민이 2천년에 걸친 한국과 중국의 우호역사의 예로 든 것중의 하나가
바로 <동의보감> 이었던 것이다
(* 열고 꺼내면) 허준의 동의보감은 1613년 출간됐다 그후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으레껏 동의보감을 챙겨
가곤 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만도 20여차례에 걸쳐 간행됐을 정도로, 동의보감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열하일기 34 박지원의 열하일기엔 당시 동의보감의 인기를 볼수 있는 내용이 실려있다
(* 내용) *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박지원은, 동의보감의 가격이 너무 비싸 책을 사지 못하고 단지 서문만을
베껴 올수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다
(* 펼쳐진 F.S 보이면) 그때 박지원이 베껴온 것이, 1763년 중국에서 처음 간행된 중국판 <동의보감>의 서문 /
(* 내용) (* 자막 나오고)
동의보감을 보급하는 것은 천하의 보배를 나누어 갖는 것이라고 극찬하는 내용이다
상해본 16 그 뒤 최근 상해에서 발간된 상해본이다
동의보감은 이렇게 근래 들어서도 일본, 중국에서 계속해서 발간되고 있다
한의원 18 (* 문 열려진 보이면)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동의보감은 지금까지도 동양의 세 나라에서
한의학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그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동의보감 전질 20 동의보감은 전체 스물다섯권이 한질로 돼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 스물다섯권의 쳬계가 놀랍도록 일목요연하다
먼저 <동의보감>은 크게 5개의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전의 의서들에선 발견할수 없는 아주 독창적인 방법
이었다
* 자막 /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 신동원 - 근대성이 목차구성에서 보여~ 질병을 중심이 아닌 몸 중심... 근대적인 모습과 비슷하다
목차 12 전체 25권 중에서 목차가 2권이나 되는
동의보감 / 5개의 큰 분류아래, 다시 부위별로 항과 목을 달고 그 아래 각각의 질병에 따른 처방을 싣고 있다
(예) 외형편의 복항 복통치방 7 * 배가 아픈 환자의 경우 / 일단 외형편, 그리고
다시 복항을 찾으면 된다
한의사 자리 22 이렇게 사전식으로 된 동의보감은, 언제든 손쉽게 질병에 대한 처방법을 찾을수가 있다 /
당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런 실용성 때문이었다 //
이런 편리함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 경희대 교수 - 동의보감은 현재 한방 진료와 약 구성에 절대적.. 과거에 비해 질병
다양 그러나.. 보강 진료중이다
약싸는 사람들 20 4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의학의 골격을 이루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의보감> /
<동의보감>의 독특한 편제는 편찬당시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다투어 발행되며 세계성을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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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이렇게 <동의보감>은 당시의 동양의학 전체를 간편하게 종합해 정리한 의학 백과사전입니다
무엇보다 당시까지 동양의학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을 훨씬 능가하는 획기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
때문에 중국에선 "동의보감은 백성을 보호해주는 신선의 경전이요, 의사들의 비법을 담은 문서"라고 극찬했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들어서는 독일에서도 번역출판 됐고 영역본도 간행됐습니다
그 우수성을 대변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은 당대 최고의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인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허준이 그린 인체돕니다 이 인체도를 살펴보면,
허준은 인체에 대해 당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허준의 <동의보감>엔 상당한 수준의 외과적인 치료술들도 담겨 있습니다
허준은 과연 인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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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허준은 인체를 잘 알고 있었다
신형장부도 14 (* 스튜디오 Z.I하면) 동의보감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신형 장부도> /
인체의 장기와 각각의 특징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인체도는 물론 해부도이다
동의보감 5장육부 12 동의보감을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허준은 몸안의 오장육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장기에 대한 묘사는 거의 정확하며 해부를 하지 않고는 알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다
(* 내용 - 위) 16 * 위는 명치와 배꼽 사이에 있다 인두에서 위까지의 길이가 1자6치이고
늘어나면 길이가 2자6치다 음식물은 3말 5되가 들어갈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 내용 - 쓸개) 10 * 매달린 박같이 생겼다고 묘사한 쓸개에 대한 관찰은, 현대의학에 비추어봐도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 김병운 - 허준은 현대 과학으로도 명확한 내용 싣고 ..
쓸개 담낭이 간에서 담즘 만들어 쓸개에 고였다가 분비된다는 내용은 당시 누구도 말하지 않은 부분
* 비교/장기들 32 동의보감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나무 목각으로 거칠게 찍혔지만 내용은 비교적 섬세하다 /
세세하게 묘사된 장기들의 위치며 숫자, 모양새는 놀랍도록 정교하고 정확한 편이다
(* 비교 보여주고)
* 비교/신형장부도와 현대인체도 11 이렇듯 허준의 <신형장부도>는 현대의 인채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허준이 인체 내부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동원 - 허준은 몸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람보다 컸다~ 이제까지 보다 몸 부위에 대한 해부적인 모습이라든가
신체적인 특성을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강조
동의보감 12 동의보감엔 외과술도 상세히 나와있다 탕약 짓고 침이나 놓을 것 같은 한방 의학서라는 고정관념을
크게 깨뜨리는 부분이다
(* 장두상지법 자막 나오면) 그 한 예로 복부가 파열됐을 때 수술하는 법인 장두상지법 /
* 장두상치법 내용 20 * "뱃가죽 파열로 장이 밖으로 나왔을 때, 삼이나 상백피로 실을 만들어 화예석을 바르고
봉합한다" / 요즘같은 시대에도 큰수술에 해당하는 외과 처치법이다
상백피실 6 동의보감에 따르면, 외과적인 봉합을 할 땐 뽕나무 껍질로 만든 상백피실을 쓰며,
초오산 25 큰 수술의 경우엔 <초오산>으로 마취를 시킨다
<초오산>은 진통제 마취제 효과를 낸다 극약에 가까울만큼 독성이 강한 약재인 <초오>와 다른 약재들을 섞어
마취제인 <초오산>을 만드는 것이다 수술을 끝낸 후엔 소금물을 복용시켜 깨어나게 했다
* 김성룡 - 외과수술용 마취제
침 pan 10 당시 한의학에서 쓰던 9침중엔, 단순히 침이 아니라 외과수술에 쓰였던 것들도 들어있다
* 박물관장 - 침엔 9침... 파침, 피침들은 실제로 살을 째는데 쓰였다
임진왜란 22 근대 서양의학이 도입되기까진, 모든 외과수술은 한방에서 담당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등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치료해야 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외과술도 발전했다
결국 허준도 이런 속에서 인체에 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외과술을 익혔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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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이처럼 허준은 당시 인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허준의 뒤엔 대단한 스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구전돼온 허준 설화엔 제자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하도록 내준 허준의 스승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허준은 그런 스승의 시신을 해부해봄으써, 마침내 의학적인 완성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엄격한 유교사회였습니다 그런 우리의 전통의식에 비추어보면 당시로선 사람의 몸을 해부한다는
것은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과연 허준은 당시 우리사회의 윤리의식이나 정서에 상관없이 스승을 해부할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의학적인 대의와 제자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스승의 큰 뜻이라곤 하지만,
제자 된 도리로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할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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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과연 허준은 해부를 했을까?
해부학실 팻말 서구에서 근대적 의미의 해부학이 처음 시도된 것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서양에서도 해부를 한 사람은 악마로 취급했다 /
해부술을 의학적 성과로 쳐 준 것은 아주 근세로 들어서의 일이다
의학입문의 장부도~ 31 동양의 해부학은 먼저 중국에서 시작됐다 가장 일반적인 의학 입문서로,
1575년 쓰여진 <의학입문>에도 인체내부를 그린 장부도가 그려져 있다
중국 최고의 고서인 황제내경에도 해부에 관한 기록이 보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선 10세기 전반에 이미 부분별
장기의 모습을 그린 인체도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성호사설 20 우리나라 최초의 해부기록이 나오는 건 이익의
성호사설 /
* 내용 "시신을 세번 해부한 후에 의술이 정통해 졌다"하는 전유형의 해부기록이 보인다
참판벼슬까지 올랐던 전유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부학자인 셈이다
일본 동경 박물관 외경 4 조선 동인 36 이렇게 당시 조선의 경우 임진왜란을 전후해,
개별적으로 인체 해부에 관한 연구 성과들이 축적됐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하는 조선의 <동인>은 그 시기 조선의 의학수준을 대변한다
해부는 아니지만 인체의 경락과 기, 혈의 흐름을 표시하고 있는데,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일본 동인 33 (70)년 후에 만들어진 일본의 <동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역시 인체 해부와는 무관하다
조선의 것이든, 일본의 것이든 이 <동인>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체 내부에 있는 장기의 모습들을 보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
바로 동양에서 생각하는 인체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경혈도 12 몸을 정과 기, 그리고 신의 결합체로 보는 동양의학 /
기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한 동양의학의 몸을 표현한 것이다
* 박찬국 -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신형은 달라... 상상이 많이 들어가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정기혈까지.. 신형장부도는 형체 말하는 것 아니다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13 당시 동양 사람들이 생각한 인체는 정기신을 담은 그릇 /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 역시 서양해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삼초 11 실제로 허준의 <신형장부도>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관들도 묘사돼 있다
삼초는 3군데의 가상적인 신체기관일 뿐이다
* 김호 - 그 인체에서 허준이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은 정기신...
인간을 활동하게 하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 허준의 해부는 오늘날 서양해부와 다르다
성호사설 14 조선에서 해부는 금기시 되는 일이었다 (* 내용) * 임진왜란때 해부를 했던 전유형은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시신을 해부해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 얼음골 현장 17 당시 사람들의 인체해부에 대한 정서를 부분적이나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조선에서 허준은 과연 해부를 할수 있었을까 /
게다가 유학적 소양이 높았던 허준이 과연 스승을 해부 했을까
* 털보교수 - 허준이 스승의 시신해부했다는 것은 소설적 이야기 ... 의서들 기초로 보완, 인체도 그렸다 볼수 있다
장부도 16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는 동의보감보다
30여년 앞서서 출간된 중국의 <의학입문>, 그리고 유성룡이 편찬한 <침경요결>의 장부도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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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지금까지 허준이 해부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당시 조선의 유교적인 정서와 상황을 종합해보면 허준이 실제로 스승의 시신을 해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수 있습니다
또 동의보감 앞에 실은 <허준의 인체도>는, 허준이 직접 해부를 해보고 그렸다기 보단 문헌 등을 통해 전해진
당시의 해부학 지식을 인용했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볼수 있습니다
결국, 허준이 스승을 해부했다는 이야기는 명의 허준에 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설화적인 살이 붙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내줬다고 전해지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 그를 추적해보면 허준 이야기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찾을수 있진 않을까요?
허준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그의 스승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좀더 확실해질 것입니다
자, 그러면 허준과 그 스승의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있는 얼음골 일대에서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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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유의태는 허준의 스승이 아니다
산 15 (* PAN하면) 스승 유의태가 허준에게 몸을 내줬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이곳 밀양 얼음골 /
이 일대엔 약초가 많아 허준이 자주 다녀가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절16 이곳 천황사는 옛부터 치병을 기원하는 절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 옛날 이 절의 주지가 허준의 스승
유의태와 친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 일대엔 허준과 그의 스승에 관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진다
* 보살 인터뷰 - 유의태 선생 제자되는 허준이.. 전설에.. 해부하라 해서 안할려고 하다가 스승이 간곡하게 말해서
할수 없이 했다고 전설이 있어
산청 가는길 8 허준의 스승 유의태를 찾아서, 유의태의 활동무대였다고 하는 경상도 산청으로 향했다
신안면 찾아가는 9 과연 허준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유의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
먼저 유씨 가문을 찾아갔다
족보 11 그들이 보여주는 유씨 족보엔 허준의 할아버지 허혼의 이름이 보인다 우연히도 이곳은 허준의
할머니인 진주 유씨의 친정가문이었다
집S.K 20 하지만 취재팀은 유씨 족보에서 허준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유의태의 흔적을 찾을수 없었다
결국, 취재팀은 이 가문 어디에서도 유의태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논 Z.I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과연 있는 것일까
실제 인물이 아니라 전설속에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은 아닐까
(* Z.I하면) 그런데, 같은 경상남도 산청에서 비슷한 이름이 하나 있었다
족보 12 (* z.i 할 때) 이름은 유이태 /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고 소문이 날만큼 이름이 높았다는 산청의 명의
유이태였다
* 할배 - 천자의 병도 낫게 해
족보~ 취재팀 13 유의태와 경상도식 발음조차 비슷한 유이태 /
이 집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10대조 할아버지 유이태가 바로 허준의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다
* 할배 - 허준이가 제자지
묘소로 가는 7 그는 분명 실존했던 인물로 대대로 후손들이 무덤을 돌봐오고 있었다
비석 이태 8 유이태는 본래 거창사람이었다 이곳 산청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고 의원으 무덤~ 비문 뒤25 로
이름을 날렸다고 전해진다
그의 의술은 멀리 조정에까지 알려져 임금이 그를 부를 만큼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의 부름을 받고도 가지 않아 처벌하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전해온다
묘비 명의 8 그만큼 의술의 경지도 높았던 명의 유이태...
그가 바로 허준의 스승일까
마진 7 그가 만든 저서도 전해온다 그런데 / 유이태는 허준이 죽고난 뒤 태어났다
* 전문가 인터뷰 - 유의태가 스승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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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허준의 스승은 경상도 산청의 유의태... 그런데 경상도 땅에는 천하명의
유이태가 살고 있었습니다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며 백성들을 진료한 명의 유이태는 중국천자의 병을 낫게했다는
전설을 만들어낸 대단한 의사였습니다
경상도 산청의 유이태는 조선 숙종때 사람입니다 허준보다 100여년 뒤의 사람으로 허준의 스승이 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허준에 관한 이야기는 확실한 것이 없을까요? 그가 언제 태어났고 몇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
는가 하는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제대로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조선최고의 의학자, 의성으로까지 추앙받았던 그에 관한 알고 있는 대부분은 전설이나 소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역사에서 허준이 소외받은 이유가 뭔지, 진정한 그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역사속에서 명의 허준에 관해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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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허준은 누구인가?
허준 무덤찾기 (* 철망 보이면) 역사에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허준...
91년 이전까지만 해도 허준의 무덤이 어디있는지, 실제 존재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 문인석 보이면) 그런데 / 91년 민통선 안에서 발견된 허준의 무덤은 문인석은 쓰러져 뒹굴고,
무덤은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무덤은 파헤쳐져 푹 꺼진 상태였다
(* 나침반 보이면) 누구도 알아볼수 없게 묻혀버린 기억속에서 세상으로 그를 끌어내려는 발굴이 시작됐다
10년동안 허준의 흔적을 찾아 헤맨 한 역사가의 노력 덕분이었다
허준의 실체가 수백년만에 다시 세상으로 그렇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현장음 보여주고)
* 현재 묘비의 글자 짚으며 이양재 "묻혀져 있던 비석 찾아내 양평, 호송, 준...입증"
돌비석~ 21 양평군 허준... 잊혀져 있던 과거 속에서 드러나 이제 새 단장을 하고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이다 그나마 알려져 있는 것들도 정확하지 않다
비문 9 심지어 묘비에 적힌 허준의 출생연도 조차도 의문스럽다 그는 1547년 생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진주박물관 13 허준의 출생연도를 확인할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소장하고 있는 진주박물관 /
임진왜란 관련 자료들속에서 취재팀은 어렵게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그림 이 그림은 1604년 공신들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 허준은 임진왜란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었고 그 공으로 <호송공신>에 칭해졌고 때문에
허준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 허준 z.i할 때) 그림 한쪽 옆엔 공신들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 물론 허준의 이름도 들어있다 /
그런데 허준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7년이나 빠른 기해생으로 나와 있다
* 김호 - 기해생을 확인해보면 1539년.. 출생연도.. 1615년에 사망했다는 것을 봐서 77세에 사망한 것이
역사적 사실
양천 허씨 대종회 외경~ 족보 12 왜 이렇게 허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 걸까?
족보에도 그에 관한 기록은 부실하기만 하다
* 종친회 "서자 아니었으면 다 나오는데.. 예전에 서자 홀대, 간단하게 나와
족보 10 정1품 당상관,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허준 /
그러나 허준은 족보에조차 번듯하지 못한 서자였다
* 종친회 "집안에서 홀대 .. 후예가 많지 않아.. 예전에 서자는 제사 지낼 때 마루에도 못 올라오는 처지...
괄세받으니까 자손도 흔치 않아..."
담양가는길 12 적서의 차별이 심한 조선사회에서 주로 중인들이 종사하는 기술직이었던 의원은 허준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묘현관 들어가 보여주는 18 허준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한 유학자의 개인 일기 /
선조때 이조참판까지 지냈던 미암 유희춘이 11년간에 걸쳐서 쓴 친필일기다
* 할아버지 " 미암일기에 허준 글이 많이 나온다 "
미암일기 표지 9 1567년부터 쓰여진 이 미암일기엔 허준의 방문기록을 포함해 그나마 허준에 관한 기록들이
숨어있다
(* 내용)18 * 2월 20일 허준이 왔다 1568년 내용이다 /
그리고 허준은 이 한해동안 두달에 한번꼴로 유희춘을 방문한다
담양 유희춘의 집 S.K 22 그리고 유희춘의 일기를 보면 허준은 꽤 자주 유희춘을 방문한다
허준은, 외삼촌인 김시흡의 소개로 유희춘을 알게 됐다 그리고 미암일기에 자주 등장할만큼 유희춘과는 특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취재팀 찾는 5 이 미암일기엔 또하나 중요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 내용)17 * 유희춘은 1569년,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곧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간다 결국 허준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의과를 거쳐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내의원 S.K 45 허준은 젊은 시절부터 이미 전라도 지역의 심약, 즉 약을 수집해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역할을 할
정도로 의원으로써의 이름을 얻고 있었다 또 서울의 양반들 사이에서도 의술이 뛰어나다는 칭송이 자자하던
차였다
내의원에 들어가게 된 허준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와도 같았다 /
그것은 조선시대 왕실의료기관이었던 내의원은 당시 새로운 의학과 최고의 의술을 모두 접할수 있는 앞선 곳이
었기 때문이다
(* 돌절구 앞 내의원 F.S 보이면) 그리고 내의원에 들어간 허준은 당대 최고의 의관이었던 양예수를 만난다
역사적으
<의림촬요> 6 로 보면 허준의 진짜 스승이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 박찬국 - 의학의 흐름보면 양에수는 당시 명의~ 의학에 관해선 양예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궁중 내의원에서의 이런 만남들과 의학적 수련으로 허준의 의술은 깊어가고, 허준은 서서히 전면으로 등장한다
선조의 편지 14 평소 딸들에 대한 애정이 컸던 선조가 천연두를 앓던 정안옹주에게 보내는 한글편지 /
(* 내용)12 * 10여일에 걸친 편지에 허준의 이름이 여러차례 거명되고 있다 대부분 허준의 처방이니 그대로
따르라는 내용으로, 허준에 대한 선조의 신뢰는 특별했다
임금 15 선조를 모시고 피난을 다녀온 후로 허준은 실질적으로 선조의 어의가 된다
특히 허준이 광해군의 천연두를 치료하자 선조는 허준에게 당상관으로 벼슬을 올려준다
임금께 간언하는 사람들 20 그러자 사간원은 장장 3개월 동안에 걸쳐 허준의 벼슬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집요하게
올린다 / 중인 신분의 의원에 불과한 허준에게 감히 당상관이란 높은 벼슬을 줄수 없다는 반발이었다
광해군 일기 7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허준에 관한 탄핵문제가 거세게 불거진다 * 내용 13 *
선조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강한 약을 함부로 써서 왕을 죽게 했으니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귀양 그림 영상구성 30 사간원과 대사헌 관리들의 상소는 끈질기게 계속됐고
결국 광해군은 허준을 파직 시키고 귀양을 보낸다 /
하지만 광해군의 배려로 멀리 가지 않고 도성밖으로 귀양간 허준은 그후 2년여동안 귀양살이와 복귀를 되풀이
한다
그 와중에도 허준은 10여년이 넘게 편찬에 매달려온 의학서를 마침내 완성했다 바로 동의보감이었다
동의보감 14 허준은 의서를 편찬한 후 <동의보감>라 이름 지었다
중국의 <북의>나 <남의>에 버금가는 결과물이라는 당당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허준은 우리 한의학의 뿌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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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허준의 <동의보감>은 1598년부터 장장 14년 동안에 걸쳐 완성 됐습니다
당시 일본에선 허준의 출현으로 반도의 의학이 중국의 의학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칭송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와같이 동의보감은 당시 중국에 의존하고 있던 조선의학의 독립선언이었고
한국의학의 첫 자리매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동의보감은 전문 의학서입니다 의원들 외에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선 필독서로 꼽히기도 했지만,
일반 대중들이 보는 의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허준은 당시 왕실의 의사였고, 일찍부터 어의로 발탁됨으로써 일반 민중들과 접촉할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허준은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 높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또, 당시의 어느 기록에도 제대로 나와있지 않은 허준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일반 민중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전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살을 붙여가면서까지 허준 신화를 만들어졌던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단서는 바로 <동의보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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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조선 의학의 독립선언 <동의보감>
내의원 12 임진왜란에 기근과 역병까지 겹쳐 국가적인 대비책이 절실했던 1596년, 선조는 허준 등 내의원
의원들에게 의서편찬을 명령했다
<자막> 서문 - "중국 의서는 너무 번잡하기만 할 뿐 참고하기 어렵다 / 옛날부터 전해오는 처방 가운데 번잡
하고 실용성이 적은 것은 버리고 진짜 보물 됨직한 처방만 골라 의학의 경전을 정리하라"
황제내경 등~ 동의보감 21 허준은 우리나라 의서는 물론 중국의 의서들까지 포함해 500여권의 의서들중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적절한 처방만을 골라냈다
그것을 간추려 담은 것이 동의보감 25권으로, 거기엔 중요한 고전의서들이 총 망라돼 있다
인용부분 T.D 15 처방의 끝엔 반드시 출전을 밝혔고 허준은 자신의 경험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 모든 취사선택은
허준의 의학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의학의 정수만을 가려 뽑은 것이 바로 <동의보감>인 것이다
* 손교수 - 실용적 의서로선 대표적... 양은 좀 많지만 의사들에겐 절대로 필요한 실용의서였다
목판본 15 <동의보감>이 완성되자, 광해군은 그 보급에 나섰다 형편이 어려웠던 때라 훈련도감 활자로 급히
찍어냈고, 그후 목판으로도 거듭 출판됐다
한의원 11 광해군은 계속 출간을 격려했고 출판 당시 지방 사회에도 널리 보급됐던 것으로 보인다 /
특히 중앙의 의료혜택에 한계를 느낀 약국계안 12 지방의 약국계에선 대단히 환영을 받았다
1648년에 마련된 강릉의 약국계 규정에도 동의보감에 관한 내용이 발견된다
* 교수 - 약국계는 계측마련.. 동의보감은 절대로 타인에게 대출하지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소중하게 생각했었다는 점을 알수 있다
` 황달은 전염된다 내용 T.S 12 편제의 실용성외에도 동의보감엔 특기할만한 것들이 적지않다
급성간염이 전염된다는 것은 최근에 밝혀진 일 /
그러나 허준은 이미 동의보감에서 이같은 사실을 적고 있다
* (내용 짚으며) 김병운 - 전염성이 있는 황달은 급성간염.. 사람이 급작스레 죽기도 한다고 언급 /
과학적 의료행위 대단하다
` 소갈의 소변이 달다 내용 T.S 10 소변이 달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인용표시가 없는 걸로 봐서 허준은
직접 소변의 맛을 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 털보교수 - 대개 중국의서 발췌한게 동의보감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 있는데 우리 민족 체질에 맞는 처방들만
골라쓴 실증적인 것이다 실증의학이다
* 박찬국 - 중국의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삼국시대.. 비로서 한국의학이라고 말할수 있는 의학 성립됐다
그전에는 중국의학 수입에 노력, 동의보감 완성으로 한국의학 정립된 것
갈근 - 칡뿌리 9 동의보감의 탕액편을 보면 650여가지의 약재 이름이 한글로 나란히 적혀 있다
약초밭 26 또 동의보감에서 처방하는 주요약재의 90% 정도가 향약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얻을수 있는 약재들인 것이다
허준은 그동안 써오던 중국약재에서 과감히 벗어났다 이전까지 당약이란 이름으로 비싼 중국산 약재를 썼지만,
동의보감 이후엔 우리 약으로 대체, 쉽고 싸게 이용할수 있게 한 것이다
당약재 표기 16 당시 조선에서 쓰는 약재들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당약이었다 동의보감에선 중국에서
수입해온 약재일 경우 반드시 당약이라고 표시를 달았다
당약재들 14 당시 당약의 경우 약값은 무척 비쌌다
때문에 일반 민중들은 약 한첩 제대로 먹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목숨이 달려 있어도 여간해선 약을 사먹을수
없었다
만기요람 13 <만기요람>을 보면 당약중에 하나인 완청은, 3.7그램의 가격이 당시 쌀 10말에 버금가는 가격
이었다 같은 중량의 금값보다도 더 비쌌을 정도로 중국약들은 고가였다
약재들 15 전쟁후엔 약값이 10배이상 뛰기도 했고, 심지어 당약중엔 향약의 270배까지 비싼 것도 있었다
결국 당시 일반 서민들에겐 당약은 <그림의 떡>이었다
* 김호 - 당시 당약재의 가격이 매우 비싸.. 복합처방은 백성들 어려워 / 값싼 약재로도 효과높일수 있는 방식
추구 / 양반들도 약먹기 위해 계를 드는 상황
PAN 단방 19 이런 형편을 잘 아는 허준은 동의보감에 과감하게 단방처방을 넣었다
말 그대로 한가지 약재를 써서 치료하는 처방이다
고급약재 수십가지를 섞어 짓는 약에 비하면 자연히 약의 효능이란 측면에선 떨어질 단방 Z.O 8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방엔 바로 민중들을 생각하는 허준의 정신이 가장 잘 담겨있다
한의원 안 28 여러 가지 약재들을 섞어 고급 처방을 쓸수 없는 대다수 일반 민중들에겐 무엇보다 희소식이었다
계를 들어가면서까지 몸보신을 위한 약을 먹을수 있는 소수보다는 목숨이 달려있어도 약 한번 쓸수 없는
민중들을 위한 배려였다
* 류봉하 - 동의보감이 만들어진 자체가 임란이 끝나고 기아 & 질병에 허덕이던 때...
단방, 일반민중들 치료에 아주 많이 도움 됐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한의원 외경 25 허준은 <동의보감>을 통해 약과 현실에서 소외된 일반 백성들,
아파도 약 한번 먹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던 대부분의 민중들에게 기회를 줬다
또 우리 것을 찾은 허준으로 인해 이름없는 우리산 우리들의 약재들도 비로소 이름을 얻고 의미를 얻게 된 것이
었다
집례 16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알았던 의사 허준의 마음씀이었다
<자막> "궁벽한 농사꾼들이 요절 하거나 비명으로 죽는 일을 면하게 하고 우리 산천에서 나는 약재들을 상세히
분류하여 지식이 모자라는 어리석은 백성들도 의료에 대한 지식을 쉽게 체득하게"
언해본 의서 20 당시 의서는 특권층의 것이었다 결코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중들의 것이 아니었다
허준은 그런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중들을 위해 많은 한글 언해본 의서들을 간행했다
비로서,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의서를 접할수 있게 됐다
허준 동상 17 오로지 의술의 한길, 그 곧은 삶을 통해 허준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다
1615년 77세를 일기로 허준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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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 이렇게 약과 의원이 양반이나 사대부 등 특권층의 전유물과도 같았던 시절,
허준의 <동의보감>엔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일반 민중들을 배려하는 허준의 의학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허준의 이런 의학적 성과는 훗날 <제중신편> 이나 이제마의 <사상의학> 등 많은 의학서의 토대가 됐습니다
허준은 결코 소외된 일반 민중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 당시 동양의학을 망라하는 최고의 의학적 성과를 이뤘지만
늘 <민중을 위한 약>을 잊지 않았습니다 허준의 의학정신...
그 바탕은 바로 민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조선의 의사 허준을 더욱 높이사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