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장 메시지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받으려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마침내 주 오셔서 의의 빗줄기 우리 위에 부으시도록’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이 찬양이 저의 마음 속에 울려퍼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부유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큽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유함은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실함이 하늘에 닿고, 우리의 회개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았을 때 하늘문은 열리고 이 땅에 매인 것이 확 풀릴 것입니다.
제1장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7)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향해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들으니 매우 공포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이곳에 오셔서 이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공포스럽지 않나요.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도다” 이 말을 듣고 난 아니예요 라고 확신할 수 있는 분이 몇분이나 될까요. 이 처럼 우리는 규례에서 온전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과연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저는 얼마전 제가 지나가는 고속도로에서 5중추돌 사고가 나서 여기저기 부서진 파편이 널부러져 있는 사고 현장을 조심스럽게 벗어난 적이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영종대교에서 100여중 추돌사고가 나서 사망자가 나온 뉴스도 있었습니다. 이는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아 생긴 사고입니다.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았을 때 우리의 생명은 크게 위협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규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앞에서 말한 사고처럼 우리의 영적생명은 크게 위협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고속도로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고 무질서하게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때는 암흑기와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형식화 되었던 시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십일조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물질과 같은 형식화된 규정으로 한정지어서는 안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을 때 아벨과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물질만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받으십니다. 즉 재물도 중요하지만 재물을 드리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불의한 마음으로 얻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십일조에 주목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일조 뿐만 아니라 그것을 드리는 사람도 중요하게 보십니다.
말라기 3장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삵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하십니다. 이 처럼 불의로 축적한 재물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데 무당이 굿을 해서 번돈을 드린다면 어떠할까요 하나님은 이런 돈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상숭배한 돈을 드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한 돈으로 드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불의하게 직원들의 돈을 착복하고 과부와 고아들로부터 빼앗은 돈으로 십일조를 드린다면 이러한 물질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십일조로 드려지는 돈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돈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중견기업 중 한 기업은 많은 물질을 노동자로 부터 착취하여 벌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기업이라는 명목아래 사회봉사도 많이하고, 십일조도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일조는 정당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라기 말씀에서는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그 물질의 정당성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금액이나 형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형식이나 금액이 아닌 진정성 있는 정당한 물질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불의한 물질로 드리고자 마음먹었다면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려할 때 문득 불의한 재물임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신약에서 예수님은 제사를 드리다가 형제를 송사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갈취하여 십일조를 한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갈취한 돈을 돌려주고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 제사가 형식화되고 마음에 회개가 없이 드리는 제사는 우리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제사를 드리기 전에 중심을 바로해야하며 회개를 통해 심령을 깨끗하게 해야합니다. 그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하나님은 재물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사를 받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고, 더 나아가 그것을 회개하지 않았을 때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시며 통탄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십일조에만 주목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짓는 범죄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깊은 뿌리가 있습니다. 조상의 때부터 누적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하십니다. 돌아오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위치에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짧은 한 마디를 마음 속에 생각하며 내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라는 간절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간 것 같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말라기 3장 2절을 보십시오.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곧 금을 불로 연단하고 잿물로 표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영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과 잿물처럼 깨끗하게 할 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더러워진 영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는 주홍 빛 같이 더럽고 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 피로 씻으면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묵상함으로 우리의 형식화된 제사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악에 빠진 자녀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고자 이땅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할 때 우리는 불신의 죄악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돌아오라는 말은 범죄한 아담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찾으시는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을 애타게 찾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내면이 요동쳐야 합니다. 이 감격적인 음성에 내가 어찌할꼬하는 요동침이 있어야합니다.
저는 요즘 회개하는 것이 있습니다. 심령에 감동이 없이 냉냉한 것이 크게 회개가 됩니다.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이 감동스러운 음성을 듣고도 냉냉하게 받아드리고 있다니 나의 영혼이 이리도 메말랐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중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구, 운전하는 중에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자 찬양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이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 분의 희생으로 나를 건져주셨다는 생각에 감격이 벅차올랐습니다. 우리들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동을 느껴야 합니다. 이 말에 감동이 없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형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다시금 예수님과 첫 만남의 감동이 회복되어야 겠습니다. 회개는 형식이 아니라 중심입니다.
이러한 음성을 듣고 백성들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며 응답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려면,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어떻게 하여야하는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답은 당연히 해야 하는 물음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없는 물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는 물음 속에는 회개의 범위를 한정 짖고자 하는 마음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즉, 수동적인 물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회개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입니다. 사람이 회개할 마음을 진실히 먹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 회개를 인정하실 것입니다. 회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회개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 회개했습니다. 이제 되었지요 한다고 회개가 성립된 것이 아닙니다. 문둥병자가 문둥병이 나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나았다는 것을 보이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셔서 우리의 회개를 성립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회개를 성립시켜 주신다면 이 처럼 쉬운 것도 없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백성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묻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성도여러분들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고 말씀하신다면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습니까? 생각나지 않는 다면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발견했을 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서 떠나소서”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생각하면됩니다. 내게로 돌아오라는 음성에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라 하였을 때 “어떻게 하여야 돌아갈 수 있나요” 라는 것은 올바른 답변이 아닙니다. “나의 죄인됨을 발견하고 주님이 나에게 오시는 은혜가 내려지도록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구 하나님께 돌아가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제2장, 넘치도록 내리는 복
8절~9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엄한 꾸짖음이 느껴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안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은 것이 도둑질입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여호와의 것을 훔치니, 그들 모두가 저주를 받습니다. 저주를 받은 이유가 여호와의 것을 훔친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저주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저주는 끈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나의 인생이 저주스럽다면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저주의 인생이 아니라 형통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질고를 지었을 때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질고를 격는 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더러 그 소산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실상 은혜입니다. 그 소산을 주신 이가 여호와시니 물질의 전부를 요구하셔도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않고 다만 십분지 일을 드리라고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순간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열에 하나는 내게 주고 나머지는 네가 가지라고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치지 않는 자는, 특별히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죄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다면 큰 부자가 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쓸 때 그 돈은 헤어진 전대처럼 새어나가게 됩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드릴 때 놀라운 일이 임하게 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그 복이 쌓일 곳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 것을 체험해 보면 알겠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 문이 열리면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2주일은 너무나도 생소한 기간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인사발령에 저도 어리둥절 했습니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볼때 한 말씀의 은혜가 너무 큽니다. 여호수아 10:14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신다” 는 한 말씀은 저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에스디에서 설계를 배웠지만 엉망진창인 설계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1억5천짜리 장비를 설계해 놓구 엔지니어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설계를 했지만 엔지니어는 그 오류로 인해 1주일에 한번씩 제주도로 가서 A/S를 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출고된 제품들이 문제가 있어 회사 내에서 저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우신다를 외치며 다시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부서를 해외영업부로 옮겼구, 해외와 국내 카다록 및 광고업무를 지원하였습니다. 이제 좀 풀리나 싶었는데 소속회사가 변경되는 중에 저의 급여가 정상적이지 않게 지급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때는 가까운 교회에서 저녁기도모임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급여가 제대로 안나오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달에 100만원 남짓되는 돈에 교통비도 빠듯했는데 그보다도 저는 하나님께 큰 범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10월-11월 100만원을 받고 12월 급여는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만 어렵다는 핑계로 십일조를 뒤로 미루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십일조를 미루자 상황은 더 악화되어 12월 성탄예배 전에는 돈이 완전히 떨어졌구, 성탄예배드리기 바로 전에는 돈이 없어 회사에 2일간 결근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똥냄새나는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되었습니다. 직장을 다시금 잃는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추웠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다보니 믿음으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적으로 성탄예배전날 타협을 하고 12월 급여 100만원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미루었던 십일조 30만원을 그대로 통장으로 이체하였습니다. 카드연체를 푸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지만 말구유 예수님을 더 슬프게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날들을 견디면서 어딘지 모를 마음의 기쁨이 생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돈에서 자유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1월에는 그동안 미지급되었던 돈 500만원을 챙겨주시고, 2월에는 새로운 인사이동을 통해 저를 옥천공장의 총괄실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직원이 짧은 시간 7명으로 늘었구, 1억원짜리 계약을 성사시켜주셨습니다. 나는 당연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드린 것이지만 드릴 당시에 저의 마음을 생각해 보니 갈등이 있었습니다. 우선 15만원만 붙이고 나중에 돈 받으면 붙일까? 그러면 은혜동역자에게 전화옵니다. 돈 붙였어, 한푼도 빼놓지 말고 붙여. 정말 무서운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우선 차비도 필요하니 20만원만 붙이고 돈 여유있으면 십일조 나머지 드릴까 그러나, 온전히 드리고자 마음먹으니 오히려 더 편해진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십일조를 드린 것 보다도 저의 십일조가 하나님께 열납된 듯하여 그것이 더욱 기쁩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말라기 1: 8절에 나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 하나님의 표현이 너무 리얼하고 쏙쏙 들어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죄악을 주님께 회개합니다. 임금에게 최상의 것을 드리듯이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하십니다. 정말 얼마나 확실하면 시험해보면 알것 아니냐 하십니다. 복을 붓지 않나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전할 때만 되면 한가지씩 말씀에 대한 체험을 주시는게 너무나도 신기합니다. 이쯤에서 또 믿음이 얘기를 해야 겠습니다. 자꾸 믿음이 얘기를 해서 똑같은 레파토리라며 지겹다고 하셔서 이번에는 빼야지 마음먹었는데 안할수 없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욕심꾸러기 믿음이를 말하고자 합니다. 믿음이가 지난 토요일 만원이 생겼습니다. 은혜목자가 믿음이에게 엄마한테 만원을 주렴하였더니 엄마 이 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 줄 알아 하며 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큰 돈입니다. 다음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예배 가기전 저금통을 만지작 거리며 고민하고 있는 믿음이를 보았습니다. 믿음이는 천원짜리와 만원짜리를 놓구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천원짜리를 들고 헌금하러 가고자 나가려다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만원짜리를 헌금하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혼자말로 말하는게 들렸습니다. 전에 천원을 헌금했더니 정말 하나님이 만원을 주셨네 그럼 만원을 주면 하면서 혼자 웃으며 교회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생각처럼 만원을 온전히 헌금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믿음이의 마음속에는 만원을 드리면 10만원이 생기겠지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지, 복을 받고자 헌금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믿음이의 그러한 행동이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목적에 감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 감동한 것입니다. 믿음이는 가끔씩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해야지 할때면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믿음이의 순수한 마음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적어도 믿음이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마음을 온전히 갖고 있는 듯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양식을 하나님의 집에 있게 하고 그것으로 시험해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험하면 할수록 놀라운 체험을 하게됩니다. 여기 계신 성도여러분, 한번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을 때 나에게 임한 축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놀라울 것입니다.
지난해 말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굶주림의 시간을 보내고 십일조 생활을 회복하니 하나님은 정말 넘치도록 저에게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2월부터 새롭게 주어진 직장에서의 위치에 저는 너무 놀라버렸습니다. 저는 경외목자에게 전화를 걸어 신분이 바뀐 것 같다며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갑자기 저의 밑에 직원들이 늘었구, 자금을 보다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분들의 레벨도 바뀌었으면 시간을 정해놓구 만나야 했습니다. 저는 바로 전주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하늘문이 열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윗이 하늘문이 열리는 체험을 했을 때 쫒기던 다윗이 일국의 왕이 되었으며, 요셉은 죄수의 몸에서 한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 보증의 사슬에 묶여 죄수처럼 끌려다녔었는데 지난 해 보증이 풀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경영실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말씀 공부를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자랑해야하는가 물었을 때 목자님께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신 일은 자랑하라고 하셨는데 한 가지 체험을 이 자리를 통해 자랑하고자 합니다. 얼마전에 요한목자님이 66권 강해서를 마치기 전에 요회목자님과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요한목자님은 66권강해서를 마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시면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때 뭔가 확신이 든게 있었는데 하나님의 일은 하늘문이 열리면 일어나는 일이므로 하루 전까지 아무런 미동이 없다가도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구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솔직히 이 말은 이성적 판단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에 감동을 받으셨는지 정말 66권 강해서 마치는날 은혜로 그 날 새벽기도에 참석케 도와주셨고, 그 이후 하늘문을 여시는 체험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부유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자는 하늘문이 열려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 바라야 할 기도는 이 땅에 부유함이 아니라 하늘문이 열리고 복이 풍성히 내리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전할 때마다 솔직히 너무 부끄러워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생각의 폭이 좁고 유머도 모르는 자가 무슨 말씀을 전하나 고민스럽습니다. 그러나, 입술을 주장하시는 주님이 그때마다 최고의 체험을 허락해주시니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지난 2주 동안 하나님이 내려주신 넘치는 복을 몸소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천하를 모두 소유한 분이십니다. 회사를 주신분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저희 회사의 이름을 엠이엔지로 정하였습니다. 저희 회사는 채용에서부터 특이한 면접을 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믿고자 하십니까? 이러한 면접관의 물음에 대부분 면접자들은 자의반 타의반 고백을 하게되는데 이 신앙고백위에 회사를 세우고자 합니다. 회사의 구호도 겸손하자, 솔선하자, 멀티되자 입니다. 계속된 계약으로 인해 주문량이 늘어 설명절 후 부터는 토요일 연장근무도 진행해야할 상황입니다. 어제는 급하게 공장을 돌리기 위해 공구를 사러 직원들을 대전에 보내는 등 완제품 출시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오직 기도 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창고를 채웠을 때 어떤 복을 주시는가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메뚜기를 금합니다. 메뚜기는 우리의 곡식을 갉아먹습니다. 하나님은 해로운 벌레가 땅의 소산물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십니다. 애써 곡식을 가꾸었는데 벌레가 갉아먹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 상실감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창고를 채우고자 할때 우리의 곡식도 채우십니다. 십일조를 멀리하니 갑자기 교통법규위반 범칙금이나오고 병원에 다녀야 하고, 차량이 고장나서 수리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공간 속에 영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육이 아닌 영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생활을 온전히 할 때 우리에게도 많은 물질을 채우실 것입니다.
둘째, 포도밭의 열매가 채 익기 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포도는 익기까지 충분히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무르익기까지 보살피실 것입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드렸을 때 우리의 삶은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맺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나의 인생을 열매맺는 인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매가 없는 것으로 고민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가 열매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충분한 양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하나 맺히기가 어려운 것이지 하나가 맺히면 어느새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열매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열매가 하나 생기면 어느새 열매가 많아진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열매가 장성하기까지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열매가 가득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말합니다. 스스로 복되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주변 분들이 부러워하며 복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완악한 이들은 오히려 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으나, 부정적인 말로 훼방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무슨 말로 대적하였나이까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말합니다. 또한 교만한 자가 복이 있구, 악을 행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러할까요 정말 악인이 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소망이 이땅에 있다면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충분히 경험하고 하나님나라 내 본향을 향해야 합니다. 악인이 잘사는 것 같지만 이 세상의 삶은 근심, 걱정, 염려가 떠날 날이 없는 삶입니다. 결코 하나님 없이는 행복함을 지속할 수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중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기념책에 기록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병을 낫게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기뻐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자연스레 따르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을 인해 기뻐해야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합니다.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자들을 아끼듯이 아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구별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하늘 복이 무엇인가 묵상해보았습니다. 하늘 복은 하나님이 여시는 거지만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해 보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늘문이 확짝 열리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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