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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 하오
이 홍사
꿈을 꾸다가 깨었다.
악몽인지 길몽인지 꿈에 관한한 문외한인 나에겐 해몽하기 난해한 꿈이다. 근데 깨어난 기분이 깔끔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좋은 꿈은 아닌 듯싶다.
옆집의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린다. 닭이 홰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여기는 한국의 내 방이 아니라 미얀마 양곤의 내 숙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벽이구나 싶어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을 눌러보니 다섯 시 반이다.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불을 켜지 않고 침대머리 물병이 놓인 탁자를 더듬어 담배를 찾아 불을 붙여 물고 찬찬히 끔을 되짚었다.
꿈이란 언제나 논리적이지 못하다.
방금 꾼 꿈은 어느 뷔페식당이었다. 아마도 누구의 결혼식이나 좋은 행사의 하객으로 참석한 자리 같다. 친구들과 원탁에 먹을거리를 쟁반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 중에서 초장이 벌겋게 발린 참치회가 내 쟁반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꿈이 아니라도 나는 회 중에서 참치를 좋아한다. 다른 회는 별로다. 내 돈으로 회를 사 먹어 본 기억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인간이란 살다보면 싫어하는 음식도 어쩔 수없이 먹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쩌다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손님이나 친구들을 따라 횟집에 가게 된다. 횟집입구에 들어가면서 진열된 활어수족관의 비린내를 맡아버리면 회라고는 한 점도 못 먹고 소주와 밑반찬만 먹다가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누구는 광어회가 좋으니 누구는 우럭회가 맛있느니 하지만 나는 그 회 맛을 모른다. 회에 관한한 내 혀는 무디어 그게 그거 같다. 그러나 참치는 그렇지가 않다. 참치 전문집에 가면 입구에 수족관이 없을뿐더러 참치가 얼었다가 녹는 맛이 아이스크림처럼 혀에 감긴다. 내 혀는 회 맛보다 얼었다가 녹는 아이스 맛에 길들여져 있다. 친한 친구들은 내가 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와의 약속에서 가급적이면 횟집을 피하곤 한다.
꿈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잠시 엇길로 빠졌다. 인간의 사유란 당구공과 같아서 잠깐 힘 조절을 느슨하게 하면 어디에 안착할지 모른다. 꿈을 되짚어보는 짧은 순간마저도 내 사유는 힘 조절이 잘못되었다. 아무튼 초장이 벌겋게 발린 참치를 놓고 친구들과 둘러 앉아 양해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꿈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양해도가 중국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양해도는 죽었다. 나는 입안에 든 참치를 우물거리며 그게 아니라고 양해도는 죽었다고 했다. 맡은 편에 앉은 친구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양해도는 지금 중국에서 사업을 한참 확장하고 있다고 핏대를 세웠다. 환장할 일이다. 양해도가 죽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나는 중국에 있는 양해도의 사업장까지 갔다가 왔는데 이 친구는 손가락질까지 하며 내 말을 싹 무시하는 것이다. 참치를 우물거리며 그게 아니라고 했지만 정확히 누군지 모르는 꿈속의 친구는 자꾸 양해도가 중국에서 사업을 확장한다고 욕설을 썩어 우기는 것이었다. 꿈속의 나도 핏대를 세워 잘 알아보라고 하면서 내 앞에 놓인 초장이 벌겋게 발린 참치 쟁반을 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회 접시가 친구의 얼굴에 명중했다. 순간적으로 통쾌했다. 초장이 벌겋게 발린 상대를 보니 친구가 아니라 두 살 터울의 친형님이다. 초장을 뒤집어 쓴 형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환장할 꿈이네.
그런 말을 하면서 내 목소리에 놀라서 꿈에서 깨었다.
-형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형님께 전화를 해볼까? 목소리 들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 시간으로 다섯 시 반이면 한국 시간으로 여덟 시다. 전화를 하기에 이른 시간은 아니다. 탁자 위의 램프를 켜고 휴대폰을 들다가 폰에 남은 금액이 국제전화를 걸만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휴대폰을 침대맡에 던져두었다. 지난밤에 전화카드를 사서 충액 하려다가 늦은 시간이라 밤에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그만두었다. 받는 전화는 되니까 맘을 놓고 잤다. 오늘은 전화카드를 사서 충액을 해야 할 것이다. 이만 짯을 충액하여 한국에 전화를 몇 번하면 또 카드를 사야 한다. 용건만 간단히 짧게 통화를 하는데도 늘 그 모양이다. 미얀마의 통신 인프라는 그야말로 엉망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띄운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휴대폰으로 미얀마에서 미얀마에 전화를 걸어도 두세 번 시도해야 통화가 된다. 국내 전화가 그 정도니 국제전화야 말 할 나위도 없다. 미얀마에서 전화에 관한 철칙이 ‘될 때까지 걸어라’ 이다. 그 말을 한국 교민들을 통해 여러 번 들었다.
아무튼, 형님께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지만 친구의 얼굴이 갑자기 형님으로 바뀌었을까? 아무리 꿈이지만 형님께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양해도가 왜 거론되었을까? 중국 땅에서 비명횡사하고 유골함에 담겨서 고향으로 돌아온 양해도가 왜?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왜 양해도가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고 했을까? 그게 무슨 징조일까? 참 이상하고 선명한 꿈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양해도에 관한 사유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양해도의 중국 사업체에 가 본 적이 있다. 정말 우연이었다. 그리고 이 년 쯤 뒤에 양해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유골함에 담겨 어느 날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무슨 일 때문인가 나는 인천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뒤에 그의 유골함을 선산에 매장했다는 소리를 양해도의 옆집에서 자란 불알친구로부터 들었다.
나는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나서 양해도와 같은 부락에서 자랐다. 따지고 보면 양해도와 동갑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동기는 아니다. 양해도와 같은 해에 입학을 했으나 초등학교를 일주일 다니고 학교를 그만두고 이듬해에 들어갔다. 그 때 키가 유난히 작고 왜소한 나는 손에 동상까지 심해서 아버지께서 학교에 이야기를 하고 일 년을 쉬고 이듬해에 다시 입학했다. 그냥 다녔으면 양해도와 동기생이 될 뻔했다. 지금 가면 빈 집이 더 많지만 우리 부락은 시골에서 큰 부락에 속했다. 그 때만해도 백 삼십 호가 넘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도 이천 건아를 자랑하는 큰 학교였고 우리 부락에서 동기생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남녀 합쳐서 스무 네 명이고 양해도와 같이 다닌 친구들은 열여섯 명이니 시골마을치고는 어지간히 큰 부락에 속한다.
어릴 적에 다른 친구들은 이름만 불렀지만 양해도는 꼭 성을 앞에 붙여 양해도라고 불렀다. 전주이가 집성촌인 우리 부락은 백삼십 팔호 중에서 백 삼십호 정도가 전주이가이고 겨우 여덟 집 정도가 타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타성받이’라고 불렸다. 그 중에서 김 씨가 두어 집 되고 박 씨가 두어 집 양 씨는 해도네 집 한 집뿐이다. 하여 다른 아이는 성을 생략하고 이름만 불러도 해도는 꼭 양해도라고 성을 붙여 변별력이 있게 불렀다, 지금 고향 동기들과 계모임을 하고 있는데 친한 친구 열 명이다. 그 계모임의 이름이 이수회李壽會다. 마음 맞는 동기 중에서 이 씨만 열 명이 모여서 계를 꾸려가고 있다. 목숨이 다 할 때까지 같이 가자고 목숨수자를 썼다. 그중에는 항렬이 높아 나에게 아저씨 벌 되는 친구도 있고 할아버지 벌이 되는 친구도 있다. 그런 친구에겐 이름만 부르지 않고 ‘누구 아재’하며 항렬의 호칭을 붙이곤 한다. 나는 항렬이 낮은 편이다. 따지고 보면 기저귀를 찬 고모도 있고 더 심해 우유병을 물고 있는 할머니도 존재한다.
타성받이인 양해도에게는 그런 항렬이 동네에는 없다. 양해도는 나보다 한 학년 위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니 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가까운 도시의 상고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알아주는 컨테이너 제조 회사의 총무부에 취업했다는 사실도 친구들에게 들어서 알았다. 그를 만난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상고로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나서 어느 명절날 큰집에 차례를 지내러 가다가 골목에서 한번인가 마주쳤다. 그는 회사원답게 말쑥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인간이란 자주 만나야 할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워낙 오랜만에 만나니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냥 간단하게 안부만 물었다. 그 때가 아마도 군에서 제대한 직후였지 싶다. 그 후로는 만난 기억이 없다.
그 양해도를 재작년에 중국에서 만났다. 양해도와 약속을 하고 중국을 간 게 아니었다. 재작년 일 월이라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술친구 K박사가 술자리에서 중국비자를 받으라고 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중국에 갈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했다. 언제 가느냐고 되물으니 언제 갈지는 모르지만 무조건 중국비자를 받아 놓으라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차일피일 미루다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때 나는 몽골을 들락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몽골 일은 일 년에 육 개월은 쉬어야한다. 다른 업종은 몰라도 내가 하는 도로공사 작업은 사 월에 시작해서 시월 말까지 하기가 어렵다. 일찍 시작되는 혹독한 추위 때문이다. 시월 중순이 넘으면 땅이 얼기 때문에 성토한 노면에 물을 뿌리고 다짐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겨울이면 들락거리지 않고 한국에 눌러앉아 내 본업인 중기임대업에 관여한다. 내가 몽골을 들락거릴 적에는 동생이 모든 일을 알아서 하고 내 수족 같은 기사들 네 명이서 스스로 알아서 하니 자리를 비워도 무방하다. 뿐만 아니라 몽골에도 본부장이 모든 일을 알아서 했다. 그저 이 쪽 저 쪽 다니며 둘러보고 체크만 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일 년 중에서도 일 이 월이면 관급공사는 동절기 공사 중단으로 일이 더 없으니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더 많다. 그렇게 술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술자리를 마치고 당구장에서 큐를 들고 생각난 듯이 K박사가 중국에 가는 것이 다음 주로 확정이 되었다고 하며 비자는 받아두었냐고 물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다음날 부랴부랴 급행비자를 받았다. 누구를 만나러 가느냐는 물음에는 ‘가보면 안다’는 대답으로 일관하며 내 궁금증을 잔뜩 부풀렸다. K박사는 그 때만해도 시청 학예연구관으로 정부미를 먹고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을 포함하여도 사흘 정도 휴가를 내야하는 실정이었다. 지금이야 자기 일을 하고 싶어 조기 명퇴를 했지만 그 때는 사정이 달랐다. 사흘을 휴가를 낼 정도면 중요한 지인을 만난다 싶어 급하게 비자를 받아 무작정 배낭을 꾸려 따라 나섰다. 새벽 두 시 버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목적도 모르고 어디를 가는지 모르고 오밤중에 떠나는 여행은 평생 처음이었다. 말을 아끼던 K박사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홍콩으로 간다고 일러주었다. 중국은 여러 번 갔지만 홍콩은 처음이었다. 누구를 만나느냐는 질문에 첫사랑이자 초등학교 동기를 만나러 간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농담 같았지만 그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진지했으므로 믿고 입을 닫고 버스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항공권을 내가 끊은 게 아니기에 중국의 어디를 가는지 몰랐었다.
인천공항에서 중국 위엔화로 환전을 하고 홍콩으로 가는 새벽비행기를 타고서야 나는 홍콩으로 가는 게 확실하다고 믿었다. 여름옷을 준비하라고 할 적에는 긴가 민가 했는데 홍콩에서 사박 오일동안 주는 밥을 먹고 K박사를 따라다니면 그만이다. 더 복잡한 일정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홍콩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사십대 후반의 수더분한 아줌마였다. 어디를 보아도 예쁜 구석은 찾을 수 없는 수더분하고 평범한 중년의 한국아줌마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K박사와 야! 자! 하는 것으로 미루어 친구인 모양이다. K박사가 그 자리에서 나를 소개 시켜주었다. 초등학교 동기생이라고. 그녀는 나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K박사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알고 있다니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졌고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미루어 K박사와 동기생이 틀림없다고 인정했다. 첫날은 그녀를 따라 홍콩과 마카오를 둘러보았다. 주마간산 훑어보고 밤이 되자 중산으로 이동했다. 중국의 위인 송중상의 이름을 딴 남중국의 작은 도시였다. 홍콩 공항에 마중을 나온 K박사 친구 순련 씨는 차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아는 동생이라고 마흔쯤 되는 사내를 불러서 그의 차를 타고 거의 두 시간을 달려 중산에 도착했다. 아마도 사전에 약속이 되었던 모양이다. 순련 씨는 아무리 보아도 자유부인이다. 사별을 했는지 이혼을 했는지 모르지만 혼자 사는 게 분명하다. 그런 건 처음 만났을 때 풍기는 냄새로 알 수 가 있다. 그렇지만 대놓고 물을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이 아니다.
중산에 들어가자 오성급 호텔을 예약해 놓았다. 게스트하우스가 체질인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호텔이었다. 아침 식사가 제공되는 그 호텔에서 나흘간 묵었다. 순련 씨가 통이 크게도 방값이 꽤 비쌀 것 같은 그 호텔을 나흘간 예약해 두었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에 들어갔다. 모든 밥값과 경비는 순련 씨의 몫이었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 순련 씨는 방이 맘에 드느냐고 물었고 그 다음 말이 가관이었다.
-홀아비 둘이 자기 뭣하면 가시나 둘을 불러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K박사가 했다.
-한 방에서 두 쌍이 자냐?
-방 하나 더 계약하면 되지. 정말 불러줄까?
그런 루트를 아는지 모르지만 바로 불러줄 기세였다.
-아니 됐어. 해 본 소리야.
-남자들은 외국에 가면 꼭 하고 들어간다던데, 너? 체면 차리는 거냐?
-영양가 없는 소리.
-영양가는 없어도 군침 도는 소리잖아. 넌 몰라도 이 선생님은 좋아하게 생기셨는데........
느닷없이 나를 지목했다.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게 보였나요? 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에이 거짓말. 이 선생님 밝히게 생기셨어요. 근데 고향은 어디예요?
-구미입니다.
-구미 어디요?
구미에서도 식당을 운영했다니 구미에 관해서 손금 보듯 하는 모양이었다.
-해평입니다.
-해평? 그럼 양해도 씨를 아시나요?
저어기 놀랐다. 순련 씨 입에서 양해도란 이름이 거침없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양해도를 어떻게 아세요?
내가 되물었다. 양해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고개를 갸웃할 틈도 없이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양해도가 여기 있어요. 친구처럼 지내요. 아니, 가족처럼 지내요.
-양해도가요?
순련 씨는 호텔 방의 탁자 앞에 앉아 양해도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중산에 살다가 일주일 전에 오십 킬로 쯤 떨어진 도시로 이사를 갔으며 그가 경영하는 공장은 중산에 있다고 했다. 하여 매일 중산에 온다고 했다.
-양해도는 옛날에 컨테이너 공장에 다녔는데....... 그 때 보고 못 보았는데.......
-맞아요. 전 그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컨테이너 공장에서 퇴사하고 농공단지의 정밀 공장 공장장으로 갔지요. 그 때도 저는 그 농공단지에서 매점이 딸린 식당을 했구요.
-그렇다면 이십년 지기가 넘겠네요.
-그렇죠.
-근데 중국도 같이 들어왔나요?
-네. 같이 들어와서 처음에는 식당을 동업했지요.
밤이 깊었지만 순련 씨는 갈 생각을 않고 양해도에 대해서 풀어 놓았다. 첫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정밀공장 공장장으로 있다가 IMF에 공장이 날아가고 순련 씨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 중산에서 식당을 동업했다고 했다. 지금은 순련 씨 혼자 꾸려가고 있는 아리랑이라는 한국 식당이라고 했다. 외국에 있는 한국 레스토랑이 그러하듯이 아리랑도 한정식 집이지만 자장면에서부터 회까지 취급하는 종합 식당이라고 했다. 순련 씨는 주방을 담당하고 양해도는 홀을 담당했다고 했다. 홀을 담당하다가 자주 오는 한국 손님의 권유로 식당에서 빠지면서 자동차 부품 생산 공장을 차렸다고 했다. 그 손님은 한국의 굴지 자동차 회사의 해외담당 생산이사라고 했다. 처음에는 종업원 일곱 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중산 공단에 공장을 짓고 직원이 백오십 명이 넘는다고 했다. 해외시장이 커지면서 양해도의 공장도 따라 컸다고 했다.
-양해도에게 전화를 해볼까요? 고향친구 왔다고.
-지금 이 시간에요?
-어라? 벌써 열두 시가 넘었네. 전화는 내일하고, 나도 가야겠다. 피곤하지?
침대에 비딱하게 누운 K박사에게 물었다. K박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괜찮다고 대답했다.
-너 와서 반갑다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주책을 떨었구나. 간다. 내일 아침은 일 층 로비에 가면 식당이 있어 뷔페야. 아침 먹고 나면 내가 올게.
아침 먹는 것까지 챙겨주고 순련 씨는 갔다. K박사는 그제야 일어나서 배낭에서 주섬주섬 술병과 안줏거리를 꺼냈다. 둘은 옷을 벗고 팬티와 메리야스를 걸친 채 술 세병을 가뿐하게 비우고 잤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일찌감치 일어나서 일층 로비로 가서 식사를 했지만 K박사는 아침을 걸렀다. 아침을 먹고 오니 그때까지 메리야스 바람으로 자고 있었다. K박사는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다. 아침에 커피나 주스 한 잔으로 오전을 버틴다. 그러나 열두 시가 넘어서면 배가 고프다고 진땀을 흘리며 못견뎌한다. 그 날 아침에도 호텔에 비치된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때웠다. 그 날은 송준상 기념관에 갔었다. 나는 순전히 K박사를 위해 배낭에서 손가방으로 사탕을 한 줌 옮겨 넣었다. K박사의 식사습관을 너무도 잘 알기에 점심을 언제 먹을지 모르는 낯 선 땅에서는 사탕을 챙기는 것이 필수다. 갈 적에는 순련 씨의 후배라는 젊은 친구의 차를 이용했다. 전 날 저녁에 신세진 차가 아니라 다른 차였다. 송중상 기념관에서 K박사는 물에 풀어놓은 물고기 같았다. 전공은 민속학이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순련 씨보다 K박사가 송중상의 일대기에 대해 설명을 해주며 이것저것 추측으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곳에는 중국 사람들도 발 디딜 틈이 없이 몰려들었다. K박사의 설명을 들으며 한 바퀴 돌고 나오니 우리가 이용했던 차는 가고 없었다. 거기서 택시를 이용해 호텔 부근의 순련 씨 식당으로 가는데 K박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허기를 못 견뎌 했다. 나는 택시 안에서 사탕을 K박사에게 내밀었다. K박사가 허겁지겁 사탕을 먹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리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순련 씨 식당은 커고 깨끗했다. 종업원을 어림잡아보아도 서른 명이 넘을 정도로 큰 식당이었다. 순련 씨가 안내한 방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아마도 아침에 매니저에게 시켜 놓은 모양인데 그 식당에서는 팔지 않는 특별 메뉴, 진수성찬이었다.
점심을 먹다말고 순련 씨는 양해도 이야기를 꺼냈다.
-아, 양해도에게 전화 해보아야지.
순련 씨가 양해도에게 전화를 걸어 고향친구가 왔다하고는 나를 바꾸어 주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할 말이 궁했다.
-양해도냐? 나 종필이야. 밤골에 사는 이 종필.
-큰 종필이냐? 작은 종필이냐?
전주이가 모종을 부어놓은 우리 부락에는 또래 중에서 ‘종’ 자 항렬이 많다. ‘종’ 자 뒤에 웬만한 글씨를 붙이면 그 이름을 가진 자가 우리 부락에 있다. 하여 종필이와 종식이는 둘씩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키가 작아 작은 종필이로 통했다. 큰 종필이는 지금 오히려 나보다 키가 작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작은 종필이로 통한다.
-작은 종필이다.
-아! 닌하오.
엉겁결에 중국말로 인사를 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놀라기는 양해도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거기다 내가 순련 씨랑 같이 있는 것에 대해서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양해도가 원어민 발음으로 했던 인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종필이 자네가 중산에는 웬일이냐?
-친구 따라 강남에 왔어. 여기가 강남인가?
-강남? 그렇지. 근데 언제 가냐?
-사흘 후에 들어간다.
-그래? 그럼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 되겠고, 내일 저녁 시간이 어떠냐? 저녁에 술이라도 한잔해야지. 이 멀리까지 왔는데.
-잠깐만! 순련 씨 바꿔 줄게.
스케줄을 내가 잡으면 안 되기에 순련 씨에게 전화를 넘겼다. 둘이서 한 동안 통화를 하면서 약속을 하는 것 같았다.
-내일 저녁 다섯 시에 태우러 오겠다네요.
전화를 끊은 순련 씨가 음식이 차려진 식탁너머로 내게 던진 말이다. 그 사이 종업원들이 회를 두 쟁반이나 가져다 놓았고 K박사는 내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자기 잔도 채웠다. 아무래도 순련 씨 잔은 내가 채워야할 일이다. 나는 순련 씨 잔에 한국산 소주를 따르고 셋이 건배를 했다. 아리랑은 중국에서는 꽤나 고급 식당 측에 드는 모양이다. 똑 같은 유니폼을 입은 처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우리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한 처녀가 입구에서 지키고 있었다.
-가시나 저거 이뿌재?
소주를 한잔 걸친 순련 씨가 방 입구에 지키고 선 처녀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처녀를 보니 상당한 미모를 지녔다.
-응. 괜찮은데........ 오늘 저녁에 붙여주나?
K박사가 농을 했다.
-꿈 깨! 저 가시나 며느리 삼을 작정이다. 하는 짓도 이뻐!
-그러냐? 너그 아들이 올해 몇 살이고?
-군에서 재대하고 복학했어. 스물다섯이야.
-며느리 감으로 찍어둔 거야?
-하는 짓을 봐서.......
목까지 오는 생머리의 처녀는 자기 얘기하는 줄을 꿈에도 모르고 우리 식탁에 뭐 부족한 게 없나 지켜보고 있었다. 순련 씨가 그 말을 할 때까지는 그녀의 존재를 몰랐는데 듣고 나니 반주를 곁들여 점심을 먹는 내내 그 처녀의 존재가 상당히 거북스럽고 힐끔힐끔 훔쳐보게 되었다. 숟가락을 가장 먼저 놓은 사람이 K박사였다. 생전 처음 보는 진수성찬 앞에서 손을 든 것이다. 그게 아쉬워 왜 그러냐고 묻자 사탕을 너무 먹었더니 속이 아리다는 것이다. K박사 식사 습관은 항상 그 모양이다. K박사가 수저를 놓자 서있던 처녀가 K박사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조신하게 물을 따루어 주었다. 행동거지가 참 고운 처녀였고 순련 씨가 며느리 감으로 찍을 만한 처녀였다.
그날 오후는 호텔에서 쉬는 걸로 하고 저녁에 야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포만감에 젖어 호텔 침대에 누워 있으니 앳된 처녀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순련 씨가 며느리 감을 운운할 정도였으니 오죽 할까.
호텔에 들어오자 K박사는 술기운에 곯아떨어졌다. 나도 잠깐 잔 것 같은데 순련 씨가 야시장 구경을 가자고 찾아와서 일어나 야시장 구경을 갔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열대지방의 재래 식당이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순련 씨는 양해도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다. 나는 순련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기억마저도 희미한 양해도를 애써 떠올리며 질퍽거리는 시장바닥을 돌아다녔다.
다음날 저녁 여덟 시가 되자 약속대로 양해도가 차를 가지고 호텔로 왔다. 여덟시지만 우리나라의 오후 다섯 시 같이 해가 설핏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남중국이지만 베이징 시간으로 맞춰놨으니 초저녁이었다. 중상은 아침 열 시에 출근한다는 곳이다. 양해도는 우리나라의 최고급 대형승용차를 직수입해서 타고 다니고 있었다. 순련 씨에게 들은 말이지만 중상에는 한 대 밖에 없는 차라고 했다. 고급 승용차를 호텔 로비 앞에 세워두고 우리를 기다렸다. 기별을 듣고 반바지 차림으로 내려가니 양해도 역시 반바지 차림으로 운전석 앞에 서서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닌 하오!를 외쳤다. 열대지방에서 검게 그을린 건장한 모습이었다. 반가웠다.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이국땅에서 만나서 그런지 더없이 반가웠다. 악수를 하고 K박사를 소개하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양해도의 아내가 타고 있었다. 양해도의 아내는 처음 본 것이다. 차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하면서 인사를 했다. 굉장히 소심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녀 같은 여자였다.
식당은 양해도가 예약을 해 두었다고 했다. 지나간 이야기를 하며 거의 50킬로를 달려 식당에 이르렀다. 도로는 왕복 육 차선으로 잘 정비 되어 있어서 맘껏 달릴 수가 있었다. 마주 오는 차도 드물고 꼭 아우토반 같았다. 양해도는 차 성능 시험이라도 하듯이 그 쭉 뻗은 길을 전 속력으로 달려 금세 식당에 도착했다. 전 속력으로 달려도 차는 고급이라 조용하고 착 가라앉아 안정감이 있었다.
식당은 50킬로를 달려와 찾을 만큼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예약한 방으로 안내되어 양해도가 지배인이라는 작자를 불러 주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주눅이 들 정도로 중국말이 유창했다. 양해도가 주문한 것은 산해진미였다.
회전탁자에 둥글게 둘러앉아 생전 처음 접하는 음식을 먹으며 양해도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사업이야기였다. 양해도는 이야기 하는 쪽이고 우리는 듣는 입장이었다. 해외 사업에 관한한 양해도는 자신만만해보였다. 양해도가 이야기하는 금액의 단위에 우리는 또 주눅이 들었다. 술은 고량주를 마셔가며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이들에 관한한 별로 내세울게 없었지만 양해도는 달랐다. 아이 남매가 베이징에서 알아주는 대학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다고 했다.
양해도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이 살다 보면 인생이 바뀔 귀인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압도했다. 경쟁사가 한군데 있긴 하지만 양해도는 자신을 따라 올 수 없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서 나오다가 양해도는 공장이 부근에 있는데 한 번 둘러보지 않겠냐고 제의했다. 나는 주춤거리고 있는데 K박사와 순련 씨가 가보자고 했다.
-자네 술 먹었는데 괜찮겠어?
-여기가 한국이냐?
-밤에 공장에 가서 뭐해?
-지금 백 오십 명 정도가 야근하고 있어.
이상하게도 양해도의 아내도 음주운전을 말리지 않았다. 대로를 십 분 가량 달려 작은 공단에 이르러 골목으로 들어가서 어느 공장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공장장 정도 되는 현지인이 양해도의 차가 들어서자 쏜살같이 마당으로 나와 우리를 안내했다. 공장에 들어서자 종업원 백오십 명 정도가 일을 하고 있었다. 양해도는 우리를 데리고 공장을 다니며 이건 어떤 공정이고 이건 자동차 어디에 들어가는 제품이라고 설명을 했다. 순련 씨도 공장에는 처음 와보는 모양이었다. 신기한 것을 보는듯한 눈으로 양해도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내가 몽골에서 하는 일은 명함도 내밀자 못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공장 구경을 마치고 양해도가 우리를 호텔까지 대려다 주었다. 양해도의 아내가 언제 준비했는지 고량주 두 병 식당에서 마련한 안줏거리가 담긴 쇼핑백을 우리에게 내밀며 밤에 한잔하고 자라고 했다. 그 술을 받아들고 호텔의 우리 방으로 가며 음주운전에 과속할 친구가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하여간 K박사를 따라 남중국에 와서 꿈에도 생각지 못한 고향 친구를 만나고 접대를 잘 받았다. 우리는 이틀 동안 순련 씨의 접대를 받으며 놀다가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 여행 경비라고는 왕복 항공료가 전부였다. 그것도 K박사가 먼저 내고 보름 쯤 있다가 술자리에서 받지 않으려는 그에게 억지로 갚았다.
양해도를 만난 이후로 이따금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양해도가 그렇게 씩씩하게 잘 살고 있더라고 그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우리가 중산에 다녀와서 양해도를 일상에서 잊어갈 무렵 그의 소식을 들었다.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부음이었다. 나는 그의 부음을 문자 메시지로 받았다. 문자 메시지를 일는 순간 양해도의 닌 하오라는 음성이 귀에 울렸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건장하던 양해도의 부음을 받고 사인이 뭘까 궁금했다. 양해도와 같이 학교를 다녔던 친구에게 나중에 들었지만 교통사고라고 했다. 나는 음주에 과속일 거라고 직감했다. 그의 운전 습관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했다.
양해도에 대해서 얘기하던 그날은 계모임 자리였다. 친구가 조합원으로 있는 한우 직판장이었다. 식당은 복잡하지만 우리는 친구 덕에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앉아 직판 한우의 육질을 평가하다가 양해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누구도 그냥 해도라고 하지 않고 꼭 양해도라고 했다. 양해도의 이름이 나올 적마다 내 귀에는 닌 하오라는 양해도의 인사가 들렸다. 난는 입을 다물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요는 양해도의 교통사고에 의혹이 많다는 점이다. 양해도가 사고를 당한 곳은 육 차선 도로라고 했다. 중앙선을 넘어와 양해도의 차와 정면충돌하고 부서진 차 위에 올라앉은 트레일러는 양해도와 경쟁사 소속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했다. 중산에 갔을 때 양해가 분명히 말했다. 경쟁사가 한 군데 있긴 하지만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고. 그 말을 떠올리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다. 외국에서 너무 잘 나가면 언젠가는 미운털이 박힌 오리가 된다고. 특히나 중국은 더 심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양해도가 너무 잘 나갔다. 그 잘나가던 사업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의혹이 너무나 많은 교통사고였다. 새벽에 양해도에 관한 꿈을 꾸고 침대에 걸터앉아 나도 모르게 피운 담배가 세 대나 된다. 양해도가 죽고 나서 그의 중국 사업체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듣지 못했다. 양해도를 생각하니 또 귀에서 닌 하오라는 양해도의 인사가 울린다. 나는 한 손으로 귀를 후비며 한 손으로 담배를 끄고 씻을 준비를 했다. 여기는 중국의 중산이 아니라 미얀마의 양곤이다.
양해도를 이야기하는 것 까진 괜찮은데 꿈에 왜 초장을 뒤집어 쓴 형님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형님께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아침 먹고 카드를 사서 형님께 전화를 넣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타올을 목에 걸치고 일어서는데 나와 동침하는 형광등 옆의 도마뱀이 꺽! 꺽! 꺽! 꺽! 하고 듣기 좋게 네 번 울었다. 아침에 저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 날 운수가 좋다는 미얀마인들의 믿음이 있다. 악몽이 아니라 길몽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천정에 거꾸로 붙어있는 도마뱀을 한 번 보고는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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